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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유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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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신이 총선 전체 9위하는 이야기

 

 

나는 괜찮아. 그도 그럴게, 하트는 아이돌인걸. 그 말을 수십 번이고 되뇌며 여기까지 왔다. 연습생 시절부터 일 년, 이 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한두 살 나이만 먹어가고. 데뷔가 결정되고도 제대로 CD 한 장 못 내봤지만. 그래도 하트는 아이돌이니까. 모두가 동경하는, 반짝이는 아이돌이니까-. 자기 최면처럼 수 없이 뇌까리며 끈질기게 버텨냈다.

 

살짝 얼린 맥주 캔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찌릿하게 시리다. 기분 같아선 한 그릇 가득한 오꼬노미야끼나 후라이드 치킨이라던지, 온갖 종류의 튀김을 안주로 삼고 싶다. 대신 땅콩 몇 개를 까서 입 안에 털어 넣는다. 나름 체중관리라는 사명이 있다. 마트에서 파격 세일을 할 때 산 땅콩은 밍밍하고 식감도 텁텁했다. 아마 질도 맛도 좋지 않아서 재고가 쌓이고 쌓인 것을, 파격 세일을 해서라도 처리해버리려던 거겠지. 하트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곤 이정도 뿐이야. 싸구려 맥주와 맛없는 땅콩 안주. 이마저도 순간일 뿐이지만. 

 

하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 척박하고 살벌한 아이돌 세계에서. 나는 왠지버텨냈다는 말이 어울린다. 스스로는 제법 귀여운 외모라고 여기지만- 어리지도 않고. 공을 들여 만들어낸 컨셉도 그다지 먹히지 않는 것 같고. 그럼에도 지금까지 버텨낸 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아이돌이 정말 좋아서-였다.

 

그렇게 몇 년을 버텼더라? 짧고도 긴 세월이다. 강산이 변하기엔 절반이 부족하지만,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어버리는 시간. 하트는 그동안 뭘 이뤘을까? 유일한 기회라고 할 수 있는 총선은, 번번이 실패였다. 늘 순위권 밖. 200에 가까운 숫자는 매번 배열만 달라질 뿐, 세 자리라는 점은 변하질 않았다. 하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꿈은 이루었지만, 그 다음이 더 괴로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빛나지 못하는 아이돌이라면, 아이돌로서 의미가 있는 걸까?

 

어느새 맥주 한 캔을 다 비웠다. 땅콩 껍질 부스러기를 휴지통에 아무렇게나 버렸다. 먹자마자 바로 잘 수는 없으니, 일단 샤워라도 할까. 제대로 클렌징을 하고 얼굴에 팩도 하고…. 스트레칭도 해야 겠다. 불면은 피부미용의 최대 악이다.

 

의미가 없더라도, 하트는 버텨야 해. 그게 과거의 나와 한 약속이니까.

 

장마철 눅눅한 습기가 밴 시트 위로 아무렇게나 몸을 뉘었다. 후드득 먼지 쌓인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와 함께 잠이 쏟아졌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기를. 의미 없는 주문처럼 마음속에 소원을 되새기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

 

미리 메이크업을 하고 오길 잘했다. 역시나, 행사장 대기실은 너무 좁고 변변치 않았다. 마을 변두리에 신장 개업하는 작은 쇼핑몰에 그럴듯한 시설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에요?”

 

상점 주인들과 그들의 지인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무슨 아이돌이야. 아무래도 개업 때 연예인을 부르면 조금이라도 이목을 받지 않을까 싶어 불렀지.”

 

누군지도 모르고 부른 거예요?”

 

그도 그럴게, 365프로에 가장 싼 아이돌을 데려다 달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저 아이가 왔어. 이름이 뭐지- 사토. 성이 사토였는데.”

 

우습게도, 나를 고용한 사람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구지?’ ‘아이돌인가’ ‘전혀 모르겠어’ ‘저런 애가 미시로에 있었다니’. 눈앞에 사람을 두고, 마치 우리 안의 동물을 보는 것 같은 말과 시선들. 온몸에 부스러기가 쏟아진 것처럼 간지러웠다. 괜찮아, 이런 대우는 익숙하다. 있는 힘껏 마이크를 쥐었다. 괜찮아, 그래도 노래할 수 있으니까. 스테이지가 있으니까.

 

그날 나는 노래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목청껏 노래를 했다. 조금 유행이 지난 남의 히트곡을 누구보다 열심히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낯선 눈길로 나를 보았다. ‘누구야?’ ‘슈가하트가 뭐지’ ‘아이돌이라고?’ ‘전혀 모르겠네’. 악의가 없는, 하지만 너무나도 괴로운 말과 시선들을 받아내며. 슈가하트는 스테이지를 마쳤다. 고마워, 고마워요. 눈물 대신 발랄한 무대인사를 건넨다.

 

땀을 닦고 간이 무대에서 내려올 때, 인파 속에서 낯익은 소녀가 보였다. 살짝 웨이브가 진 긴 머리에 초록색 눈망울의 소녀.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빛나지 못하는 아이돌이라면,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자신 있게, , 물론- 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대신 두 눈을 꽉 감았다. 나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 왜냐면 너에게 지금의 내 모습 따위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걸.

 

 

**

어린 시절 내 꿈은 놀이동산의 색색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신짱은 노래하는 목소리가 어여쁘구나. 춤도 잘 추네. 어디서든 기죽지 않고 페이스를 이어 나가는 끈기가 있어.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잡지와 TV, 라디오 등 온갖 미디어를 장식하는 아이돌을 보며 성장했다. 반짝반짝,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빛나는 아이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아이돌이 된다면, 매일매일 놀이동산에 가는 것처럼 모두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거야. 그럴 자격도, 재능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여겼다. 미시로 프로덕션 오디션에 떡하니 합격했을 때 까지만 해도.

 

스무 살. 아이돌로서는 제법 늦은 출발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와시마 미즈키, 키타나리 사나에…. 뒤늦게 떠오른 아이돌들의 이름을 줄줄 읊으며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단언했다. 내 무대를 보는 모두를 매일매일 놀이동산에 가는 기분처럼, 즐겁게 해줄 거야. 그 말을 하자 프로듀서는 싱긋 웃었다. 사토 신씨라면 할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굳게 믿고 나아갔다.

 

프로듀서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왜냐면 그 프로듀서는, 숱한 무명 아이돌을 양지로 끌어올린 능력자였으니까. 잘못이라면 아이돌인 나에게 있었을 테다. 아이돌이라는 명함만 달고, 제대로 된 성과 하나 못 올리는 바보 같은 슈가하트. 인생이 롤러코스터라면, 내 삶은 줄곧 아래로만 치닫고 있었다. 곧 올라가지 않을까? 매일매일 기도했지만.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매일매일 똑같거나, 혹은 더 나빠지거나였다.

 

내 첫 프로듀서는 2년 반 만에 곁을 떠났다. 그도 정말 오래버텼다’. 나와 함께 지하에서 양지로 올라가자고, 두 손 맞붙잡고 수십 번을 맹세했었다. 그 맹세는 싸구려 유리잔처럼 바닥에 닿자마자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난 그가 잘못했다고 여긴 적은 없다. 이후로 프로듀서는 여러 번 바뀌었다. 못 나가는 아이돌을 끌어올려 제대로 된 실적을 쌓겠다고 호기를 부렸던 신입프로듀서도 있었고, 어중간하게 일을 하다 내 곁으로 내쳐진 프로듀서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실패했다. 이윽고 제 입으로 날 맡겠다는 프로듀서는 없어졌다. 명실 공히 미시로의 골칫덩이가 된 것이다.

 

하트, 많이도 내려왔네. 이러다 지하 끝까지 가버릴지도.”

 

속에 담아둔 말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로 튀어나왔다.

 

발끝만 보며 걸으면 넘어져요, 신짱.”

 

나의 시선 끝에 익숙한 발끝이 들어왔다. 새까만 구두를 신은 작은 발.

 

나나 선배.”

 

신짱, 일 다녀온 거에요?”

 

, 선배도?”

 

그랬죠. 오늘은 라디오 토크쇼였는데, 뭔가 잔뜩 곤란한 질문들만 받아버려서- 정말이지 진이 쭈욱 빠지네요, 후하.”

 

방긋 웃어 보이는 나나 선배의 입가에 살짝 경련이 일어났다.

 

나랑 같이 파르페 먹으러 갈래요? 일을 마쳤더니 당분이 부족해서 말예요.”

 

, 이번 달 생활비 빠듯한데요….”

 

물론, 우사밍이 낼 거랍니다. 일에 찌든 우사밍과 놀아주는 답례예요.” 

 

나나선배의 손에 이끌려 아기자기한 스위츠 가게로 들어섰다. 몇몇은우사밍을 알아보고 이름을 외치거나,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슈가하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했다구요. 정말이지, 너무하지 않나요?”

 

앙증맞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하지만 내용은 썩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 그렇네요.”

 

신짱. 내 말 듣고 있어요?”

 

, 물론이죠, 선배.”

 

그럼 내가 무슨 말 했는지 다시 말해볼래요?”

 

-그러니까. 에헷, 최근 체중이 불었단 얘기였나-?”

 

, 그렇죠. 나름 관리를 하는대도 자꾸 몸무게가 늘어…, 가 아니잖아요! 나나는 아까 다녀온 라디오쇼 얘기를 하고 있었다구요-.”

 

볼을 잔뜩 부풀리며 토라진 포즈를 취한다. 어쩜, 모든 행동과 말투가 전부 사랑스러울까. 정말로우사밍별에서 온우사밍처럼.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래요, 곤란했겠네요. 저는, 라디오 일도 그다지 해본 적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배의 얼굴이 굳었다. , 방금은 조금 비꼬는 어조였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무례한 언행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나나선배.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신짱은 그게 문제에요.”

 

, 그러니까, 비꼬려는 뜻은 아니였구-”

 

! 나나선배가 제법 세게 탁자를 쳤다.

 

신짱은 말이죠, 그게 문제에요! 남들과 비교하는 점!”

 

….”

 

내 앞의 아이돌은, 전혀 다른 부분을 파고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우사밍슈가하트를 비교했죠? 그건 안 돼요. 왜냐면, ‘우사밍슈가하트는 전혀 다른걸요-.”

 

사뭇 진지하게, 속삭인다.

 

같은 아이돌이지만, ‘우사밍은 우사밍별에서 왔고, ‘슈가하트는 지구의 마법소녀잖아요?”

 

“…그런 포인트?”

 

내 말은 같은 아이돌이어도다른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거에요. 우사밍은 라디오나 쇼에 나가서, 성우 아이돌로서 자신이 줄 수 있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주고- 슈가하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서 또다른 기쁨을 주면 되는 거에요.”

 

그건, 마치.

 

마치 놀이동산에 갔을 때-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랑, 회전목마를 탔을 때랑, 둘 다 즐겁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즐거움이지요? 그런 거에요, 신짱.”

 

선배.”

 

예전에 신짱이 말했었죠, 아이돌이 된다는 건 모두를 놀이동산에 가는 것처럼 기쁘게 해주는 거라고. 한 놀이동산 안에도, 여러 가지 기쁨이 있어- 그게 수많은 아이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인 거에요.”

 

그 말은 너무나 깊숙이 내 안을 파고들어, 잊고 있었던 기억에 파문을 일으킨다.

어린 소녀는 어느 날 아이돌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아이돌을 보았다. 그 경험은 너무나 다채롭고 신비로워 그녀의 안에 보석처럼 박혔다. 어떤 풍경보다, 어떤 사건보다 풍요로웠다.

 

 

 

 

 

마음 속 고민이 지하 끝까지 파고들더라도, 하트는 포기할 수가 없어. 포기하는 게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니까. 이제 와서 전부 놓아버린다면- 분명 하트는 후회할 거야. 조금이라도 더 해 볼 걸. 몇 년만 더 노력해 볼 걸. 하트는 하트 자신을 너무 잘 아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버텨보자’. 늘 하루는 고민과 고통의 연속이니. 그 굴레 속에서도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을 입고, ‘슈가하트!’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바보처럼 행복해지니까-.

 

겨우 마음을 다 잡고 잘 준비를 하려는데,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렸다. 야심한 시각에 누구일까 하고 구형 폴더를 열어봤더니, 나나 선배였다.

 

몇 주 전, 술에 잔뜩 취해 야밤에 전화를 걸어선 마구 술주정을 했더랬다. 사실, 술주정을 빙자한 한탄이며 자조였겠지만. 나나선배도, 우사밍이 아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 얼마 없었다. 나는 예외라고나 할까. 예전에 함께 유닛활동도 했었고, 컨셉도 비슷해 고민거리도 겹쳤다. 서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라는 표현이 알맞을지도. 나는 바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나나선배, 무슨 일이에요?”

 

[아아아아아 신신짱!!]

 

에에~ 또 술 마신 거에요? 나나선배도 나만큼이나아니, 흠흠. 여튼 엄청 주당이라니까

 

[그그그게 아니야 신짱!!! 사무실 홈페이지 학인해 봤어요?]

 

아뇨?”

 

[오오늘 자정에 총선 결과가 발표된다고 했었잖아! 그게 방금 떴는데, 신짱-]

 

“…, 나나선배가 신데렐라 걸이라도 된 거에요…?”

 

[아아아니 그런 거보다 더 큰일이라고! 엄청나 신짱!!]

 

자신이 신데렐라 걸이 되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니. 그런 일이 이 세상에 있으려나? 나나선배의 전례 없던 호들갑에 재빨리 노트북을 켰다. 전원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 홈페이지에 금방 접속할 수 있었다.

 

선배, 설마 장난치는 건 아니죠-? 아무래도 술 마신 거 같은데….”

 

[으으, 너는 정말- 나나는 완전 맨정신이에요. 빨리 총선 결과 확인해 보세요!]

 

, . 얼마나 당황한 건지 존댓말과 반말이 마구 섞이고 있다. 어차피 나는 또 순위권 구경도 못해볼 거라고 여겨, 총선 진행 자체에 관심을 안 두고 있었다.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들어오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 헷갈렸다. 어디 보자, 총선 결과결과는….

 

화면에 제일 처음 뜬 것은 제 5회 신데렐라 걸, 시마무라 우즈키. 귀엽고 상냥한 아이이니,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다음은 꾸준히 단단한 지지층을 자랑하는, 아이돌 계의 전설인 타카가키 카에데. 이어서 4, 5, 6…. 총선 권위 안에서 익숙한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도 보였다.

 

어라?”

 

그리고 9위에 자리한, 너무나도 익숙한- 한 아이돌. 나이에 안 맞게 양갈래로 머리를 묶고, 천사 날개를 달고, 있는 힘껏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아이돌. 382,744의 득표수를 기록해 패션 3위까지 거머쥔 그 아이돌의 사진 아래에 적힌 이름은.

 

사토 신.

 

“……?”

 

나였다.

그 아이돌은, 자기 자신을 슈가하트라고 부르며 자칭 마법소녀 컨셉을 들이밀고.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는 말투를 어색하지 않게 마구 내뱉으며. 포즈는 대담하게, 윙크는 자신 있게, 팬서비스는 언제나 넘치다 싶을 정도로 해주는 아이돌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솔로곡 하나 없고, 인지도는 열 살은 더 어린 아이들보다 한참 뒤떨어지지만. 포기하는 게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 어려웠던- 그런 아이돌이었다.

 

[…, 봤어요? 신짱. 신짱 정말 대단해….]

 

, 선배는 또 7위네요. 하하, 득표수 봐봐- 선배는 정말 대단해.”

 

[얘는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신짱. 듣고 있어요? 신짱이 해냈어요!]

 

, 하하….”

 

눈물이. 수년을 묵은 눈물이 환희와 함께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신짱….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요. 노력한 게 보상 받는 거에요. 팬들도, 대중들도 모두 신짱을 이제야 알아봐주는 거라구요.]

 

고마워요, 나나선배. 차마 말하지 못하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내 울음소리 위로, 수화기 안쪽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자장가를 부르듯 읊기 시작한다.

 

[신짱, CD 데뷔는 확정이에요. 이렇게 득표수가 높으니 분명 어마어마한 작곡가랑 작사가가 붙을 걸요? 그리고 단체곡도 불러야해요. 인지도도 쑥쑥 올라갈 테니, 분명 TV나 라디오 여기저기서 콜이 올 거라구요. 어쩌면 황금시간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리고 우리 소속사 콘서트에서도 동료들이랑 다 같이 노래 부를 수도 있고….]

 

“…하트, 앞으로도아이돌 계속, 해도 되는 거죠?”

 

[물론-. 하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나 많아요, 신짱.]

 

다행이다. 포기하지 않아서-. 수십 분 전, 머릿속을 얼키설키 헝클어 놓았던 실타래 같은 고민들이 순식간에 하얗게 사라져버렸다. 전부, 전부 너무나 바보 같은 고민들이었다. 정답은 이상하리만치 간단했는데 말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아서, 포기할 줄을 몰라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슈가하트는, 하트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스테이지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TV에 나와 시시콜콜한 개인기도 보여주고, 다른 아이돌들과 함께 무대를 꾸미기도 하고, 여기저기 행사에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기도 하고.

 

하트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서있을 곳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
Posted by 새벽(dawn)

[레알세/월로윤슬] (등산가 월로)

히스이에서부터 따라온 등산가 아저씨가 너무 귀찮게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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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홀연히 나타나 빛나의 곁을 뻔뻔하게 지키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퍽 시일이 지난 화제였다. 빛나보다 몇 뼘이나 더 큰 사내의 모자를 벗겨보니 난천과 얼굴이 판박이었다는 사실도, 처음에는 천지가 요동할 정도의 대사건이었으나 이제는 별다른 뉴스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난천의 친척도 뭣도 아니었고, 자세히 알아보니 그녀의 먼 조상이 같을 뿐이었다. 유전자의 우연인지 위대함인지 모를 현상에 다들 입을 떠억 벌렸지만, 정작 그 사이에 낀 빛나는 무덤덤하였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며, 빛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토란떡을 먹었다. 빛나의 어머니는 그녀가 토란떡을 그리 좋아하는 지는 처음 알았다. 어쩌면 딸내미의 식성이 노인처럼 변해버린 게 더 큰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사내가 매일매일 틈도 주지 않고 빛나 옆에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아무래도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정작 빛나는 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난천 씨와 얼굴이 같으니까 어쩐지 안심 돼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미리 정해 둔 것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두 사람을 목격한 지인들은 하나같이 둘이 몇 시간이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잘도 떠든다고 묘사했다. 근 몇 개월 사이 빛나의 언행은 눈에 띄게 예스럽다고 해야 할지 조숙해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게 변모했는데, 또 그 사내도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유독 묘했다. 부모도 소꿉친구도 원인을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콕 집어 비난할 만한 소동도 없어 그저 오리무중인 사안이었다.

 

 

 

월로씨, 지겨워…….”

 

이른 아침, 대문을 열자마자 기둥처럼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빛나가 말했다. 그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조금 서운한 걸요.”

거짓말. 웃고 있잖아요.”

 

말과는 다르게 입술 사이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이런, 좀 봐주시죠. 몇 백 년만에 윤슬 씨를 보니 반가워서 그만.”

그러니까, 다시 만난 지 벌써 반 년이 넘었잖아요? 그만 반가워해도 될 것 같은데.”

제 오랜 세월 외로움을 아시긴 합니까? 조금 봐 주시죠.”

 

능글거리는 말투로 월로가 빛나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오늘은 어디를 가시죠?”

, 오후에 협회에, 볼 일이 좀 있어서. 그냥 시덥 잖은 미팅이랄지….”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을까?”

아침 일찍 안 나오면, 월로 씨가 제 방 창문을 수 백 번씩 두드리잖아요. 토게키스한테 그런 쓸데없는 일을 시키지 말아주세요….”

아침은 드셨습니까?”

우유 한 잔 마셨어요.”

저런, 한창 클 나이에 양이 부족하네요. 다이어트 중이 아니라면, 같이 식사나 하러 가시죠.”

 

빛나는 이럴 줄 알았어라며 툴툴 댄다. 어차피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왔어도, 월로는 자신이 아침을 안 먹었다며 아무 식당이나 끌고 간다. 또 식당에 가서 몇 시간 동안 떠들겠지….

 

-라는 빛나의 예상은 한 치의 빗나감도 없었다. 사실, 예상이라기보다는 통계에 가까웠다. 월로는 지난 반 년 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빛나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그녀의 소꿉친구가 사실을 알면 기함 할 노릇이었다.

 

배불러….”

고작 채소 몇 개 먹고 배부르다니, 윤슬 씨는 더 클 생각이 없나 보군요.”

성장기는 이미 지났다구요.”

많이 먹어야 저처럼 자란답니다.”

그렇게 커지고 싶진 않아요….”

 

빛나가 테이블 위로 엎드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또 월로가 핀잔을 준다.

 

어쩐지, 무기력하지 않습니까? 히스이를 다녀와서 번아웃이라도 온 거 아닙니까?”

저기…. 일단, 히스이를 다녀온 지는 꽤 지났구요. 그리고 월로 씨가 번아웃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좀 어색하고…. 뭣보다, 제가 지친 건 월로 씨 때문인데….”

? 제가 매일 이렇게 찾아와서, 식사까지 챙겨드리는데.”

아뇨 아뇨. 그 전에도 엄마가 삼시세끼 챙겨줘서, 누구보다 식사는 든든했거든요. 그보다는 월로 씨랑 매일 투머치 토크를 하는 거에 매우 진이 빠져서….”

하긴. 어머님의 요리솜씨는 매우 좋죠.”

 

포크를 입에 물고, 월로가 딴 소리를 한다. 뭐랄지, 그 모습을 보는 윤슬 속이 편치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있잖아요. 월로 씨…. 히스이에 있을 때에 비해서, 뭐랄까….”

 

빛나는 턱을 괴고 월로의 두 눈을 응시한다. 어쩐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다.

 

말 많은 할아버지 같아졌네요.”

 

 

2.

충격.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그 말을 듣고 월로는 한동안이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 많다할아버지어느 표현에 더 충격을 받았는지는 스스로도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빛나는 협회 미팅을 가야 한다며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시험 배틀, 이런저런 미팅. 이튿날은 말도 없이 하나지방으로 출장. 다시 만난 건 나흘이 지나서였다.

 

며칠만에 빛나를 본 월로의 첫마디는

 

그러는 당신도 좀 애늙은이 같아졌네요.”

 

였다. 빛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며칠 동안 그 말을 생각하고 있던 거에요? 치졸해….”

치졸하다니. 말도 없이 출장을 다녀왔으면서 심하시네요.”

말 했으면 하나까지 따라왔을 거 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일인데, 그건 좀.”

 

전혀 타격감이 없는 듯, 빛나는 비니 위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확실히 애늙은이 같긴 합니다. 그 나이에, 무슨 일이 그렇게 많습니까? 누가보면 당신이 리그 위원장인 줄 알겠습니다.”

사실, 챔피언이니까 위원장이랑 동급이긴 해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같은 상석에 앉거든요.”

지금 자랑하는 겁니까?”

그냥 설명하는 건데요.”

 

빛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말없이 두고 갔다고 투정부리는 셈이다.

 

어제는 난천 씨 얼굴 봐서 좋았는데…. 같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좀….”

누가 할아버지라는 겁니까. 어쨌든 같은 얼굴이잖습니까. 전에는 [같은 얼굴이라 안심]된다면서요.”

그게 실은…. 그런 줄 알았는데, 왠지 월로 씨 얼굴을 보면 좀 트라우마가 생각나요. 월로 씨가 저한테 저지른 일이 있어서.”

 

그 말에 약점이라도 찔린 듯 월로는 티나게 헛기침을 한다.

 

그게 대체 몇 백 년전의 일인데, 일일이 기억하고 계십니까.”

월로 씨한테는 몇 백 년 전의 일이지만, 저한테는 얼마 전의 사건인데요.”

 

그렇다. 월로는 긴 세월을 끊김없이 지내왔으나, 빛나는 시공의 균열을 통해 순식간에 히스이와 신오를 오간 셈이다. , 히스이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에게 있어 불과 일 년 전의 일들이었다.

 

쇼크엄청난 쇼크.”

거짓말 한 건 죄송합니다만.”

괴상한 헤어에 이상한 의상…. 완전 쇼크.”

그 쪽입니까?!”

 

월로의 목소리가 커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본다. 지인들이 말하는 둘이 몇 시간이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잘도 떠든다는 장면들이었다.

 

그런 괴상망측한 차림을 보여준 바람에, 가끔 난천 씨를 봐도 생각난다구요. 얼마나 실례인지 알아요? 엊그제 미팅할 때도, 난천 씨를 보고 떠올라서 그만웃음이….”

미팅 가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겁니까?”

“…나진 않았지만요. 어쨌든 저한테 많이 잘못한 건 알고 계시죠?”

 

그러자 월로가 고개를 푹 숙인다. 푹 숙여 봤자, 빛나가 한참 작지만.

 

정말이지, 얼마나 울었는데….”

“………울었습니까?”

 

갑자기 고개를 들고 묻는다. 또 눈동자가 초롱 거린다. , 빛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울었냐고요? 왜 답이 없습니까?”

아 좀…. 말이 너무 많아. 딱히 운 건 아니고요….”

방금 [얼마나 울었는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울만큼 괴로웠다던가 하는그런 뜻이니까요?”

 

알 수 없는 의문형의 문장. 월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울었군요. 엄청 많이.”

저기. 제가 운 게 왜 월로 씨가 흐뭇해 할 일이죠? 보통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사과는 이미 많이 했고. 어쨌든 아까 당신이 한 말처럼. 당신에게는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니, 아아주 기억이 생생하겠군요.”

 

사실, 동영상을 찍어 놓은 듯 생생하다. 월로의 배신을 알고, 그를 무찌르고, 축복마을로 돌아와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아무도 모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조사대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거울 옆에 쭈그려 앉아 하염없이 훌쩍였다. 원망, 분노, 회한. 어떤 말로도 수식되지 않는 감정들이 산산이 깨져 맨발에 밟혔다. 심장에 피가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아직도 어제 일 같지만…. 월로의 노련한 얼굴을 보면, 머릿속 핏기가 싹 가시곤 했다. 절대 말해주지 말아야지, 했는데.

 

사과는 아무리 해도 부족해요.”

, 그건 계속하겠습니다. 여튼 많이 울었다는 거죠. 윤슬 씨는 눈물이 많네요. 어라? 아닌가, 나 한정인가….”

그런 말투, 열 받으니까 쓰지 마세요.”

 

커피를 홀짝이며 킬킬 거리는 월로가 얄밉기 그지 없었다. 왜 울려 놓고 흐뭇해 하는 건지. 빛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어쨌거나, 제가 나쁘게 대하지 않는 건 다 난천 씨 덕분인 줄 아세요. 히스이에서 난천씨랑 닮은 사람을 만나서, 안심 되고 긴장이 풀어졌던 건 사실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난천이란 사람이 저를 닮은 거 아닙니까? 아니면 코기토 씨를요.”

하여튼저는 난천 씨를 엄청 좋아하니까. 닮은 사람도 좋아할 수 밖에 없죠.”

 

그러자 커피잔을 황급하게 내려놓으며 월로가 고개를 들이민다.

 

? 저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까? 방금?”

“…그 전 이야기는 안 들었죠? 전 난천씨를 좋아하는 거라니까요?”

원래 모든 이야기는 결론이 중요한 겁니다. . 저를 아주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그러고보니.”

 

히죽히죽, 귀가 시뻘개져서 키득 거리는 월로가 정말 악당처럼 보였다.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빛나는 화제를 돌렸다.

 

금경 대장을 처음 봤을 때도 엄청 놀랐어요. 태홍이랑 정말 비슷해서.”

태홍이라면, 몇 년 전에 신오를 들썩였던 갤럭시단인가 뭔가의 보스 말이군요.”

 

입가의 웃음은 가시질 않지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긴 한 모양이다.

 

, 그 시정잡배들은 윤슬 씨가 다 처단하지 않았습니까?”

표현이 조금…. 그치만, 금경 대장은 정말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금경 대장을 떠올리면, 태홍도 조금 용서가 되는 거 같기도….”

당신 사고방식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겁니까? 그런 식으로 악당을 쉽게 용서해주면 안됩니다.”

본인 얘기를 하는 건 아니죠?”

 

도둑이 제 발 저린 건지, 월로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따지면 히스이에서 만난 사람들과 얼굴이 비슷한 인간에겐 전부 호감이 생기겠군요.”

. 어느정도 사실이긴 해요~. 광휘도 영빈 선배를 만나고 난 뒤 뭔가 더 친숙하고. 전진 씨도 그렇고…. 마박사 님은 좀 싫어졌을지도….”

 

왠일인지 빛나의 이야기에 토를 달지 않고 월로가 잠자코 듣는다.

 

왜냐면 히스이는 이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다들 다시 못 만난다는 얘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쓸쓸해져서…. 비슷한 사람에게 감정을 투영하면 좀 나아지는 거 같기도 하고….”

 

좀 심각한 얘기였나? 빛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이어나가다 월로의 눈치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사뭇 날카로워졌던 눈매가 금세 평소의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까? 수 백 년이 지난 후 재회라니. 감동을 느끼셔도 됩니다.”

그치만저는 월로 씨보단 금경 대장이나 영빈 선배가 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칼 같이 월로가 말을 자른다.

 

그러니까 저한테 난천인지 뭔지 하는 여자를 투영할 필요는 없단 얘깁니다. 월로의 오리지날은 여기. 바로 당신 앞에 있으니까요.”

흐음….”

 

전부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빛나는 쿠키를 한 조각 집어먹었다.

 

난천 씨를 투영 안 하면, 월로 씨에 대해선 온갖 악감정 밖에 없는데….”

“…….”

그래도 노력해볼게요. 왜냐면, 월로 씨가 있으니까- 히스이에 대한 기억이 거짓이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어서 좋거든요.”

 

이번 대답은 마음에 들었는지, 월로가 느긋하게 씨익 웃었다. 만족의 미소였다.

 

근데 그래서, 월로 씨는 왜 그렇게 오래 사는 거에요? 수명은 앞으로 얼마나 남았어요?”

그게 궁금하십니까? …당신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거뜬하니까, 걱정 마세요.”

헤에그 때까지도 안 늙으면 좀 징그러울지도….”

 

사실 지금도 좀 징그러울지도? 하는 생각은 쿠키와 함께 삼켰다. 월로는 순식간에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이토록 선명하게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이라니, 수 백 년은 허투루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배부르네요.”

주스랑 쿠키 하나 먹고요?”

어제 저녁에 난천 씨가 밥을 엄청 많이 먹였거든요…. 그러고보니, 계속해서 먹이는 건 둘이 똑같네요.”

빼빼 마른 당신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월로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계산을 하려는지 지갑을 꺼낸다.

 

그래서 다음 일정은 뭐죠?”

“…집에 가서 낮잠 자고 싶은데.”

저런. 한창 자랄 나이에 그런 무기력한 생활은 좋지 않습니다. 저와 봉신유적이라도 가시죠. 좀 걷기도 할 겸.”

그냥 본인이 가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리고 유적 재미없어요. 할아버지 같애.”

“……….”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상호교류광장이나 사파리존이 유행인데전혀 모르시는구나역시….”

 

다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아니, 지명인지 다른 이름인지 잘 모르겠다. 가게를 나서며 월로가 읊조린다.

 

그럼 그 상호어딘지나 가시죠.”

그럴까요? 사실 새로 잡은 이어롤을 데리고 가 보고 싶었어요.”

 

빛나는 배시시 웃으며 앞으로 뛰어나간다. 고작 주스 한 잔과 쿠키 한 조각을 먹었는데 기운이라도 차린 거 같다.

 

가요! 등산가 월로 씨.”

.”

 

앞장 선 빛나를 따라 월로가 느즈막하게 걸어 나갔다. 키가 두 뼘도 차이가 더 나고, 외모도 복식도 닮은 점이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정오에 높게 떠오른 태양에 진 그림자가 하염없이 길어져, 어쩐지 그림자 만큼은 키가 엇비슷해 보였다.

 

:
Posted by 새벽(dawn)
2023. 1. 30. 13:27

[레알세/월로윤슬] 파란 글/포켓몬2023. 1. 30. 13:27

 

 

 

 

 

 파란 (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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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슬픔 속에 잠긴 그대여.

 

#

 

언제부터인가 나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사실, ‘언제라는 말부터 불완전하다. 태생부터 완벽을 몰랐다. 더구나 다정하고 솔직한 당신 옆에 설 때면, 불온함이 가시질 않았다. 더러 누군가가 보기에, 당신은 심성이 제멋대로인 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누구나 알게 된다, 그 곁에 몇 분이라도 머물러 보면.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올곧으며, 수더분한 언행은 슬픔을 위장하기 위함이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된다. 모르더라도 알아야 한다. 슬픔 속에 머무는 그림자는 영영 깨닫지 못할, 밤하늘 너머에서 쏟아지는 별무더기의 바람들. 영원히 그런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살고 싶었다. 은하 보다 빛나는 존재에 눈이 멀어 세상을 되짚지 못하는 채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푸른 심해를 유영하는 거대한 그림자는 햇살을 받으러 나올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저 한 길만 향해 묵묵히 노를 젓는다. 다음에 만나면, 못했던 그 말을 해야지. 마음 한 구석에 내동댕이 쳐진 묵은 결심은 해가 지나도 썩지 않고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리고만 있을까? 아무도 나에게, 기다리라 한 적 없고 인내하라 한 일이 없다. 파도를 헤치는 새까만 그림자는 햇살이 비치는 풍광을 몰랐다. 수많은 물고기 떼와 해초, 해류를 타고 흘러오는 낯선 이의 속삭임만 들릴 뿐이었다.

 

나를 기다려 줬으면 했다.

어디에 있어도 슬픔에 젖지 않도록 나를 기다려 줬으면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줄 거라고 믿었다.

 

 

##

 

그리고 거짓말처럼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 소녀는 죽었어요.”

 

반 년 만에 찾은 축복마을에서 들은 첫마디. 더이상 은행상회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월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녹색 모자를 억지로 짓이겨 눌렀다.

 

죽었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이야기네요. 후우그 어린 아이가, 그런 고생을 했는데 너무나 허무하게….”

 

월로는 축복마을에 오랜만에 들러, 그 사이 새로 상긴 가게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고르다 주인장에게 물었다. 반 년 전 히스이를 구한 소녀는 여전히 은하단에 있느냐고. 그러자 돌아온 답이었다.

 

벼랑에서 떨어졌어요. 워글을 부릴 수 있다 들었는데, 왜 타지 않았는지….”

“…….”

그 아이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뤘죠. 이방인이지만, 히스이의 은인이니까. 그 쪽도 아이에게 빚이 있는 건가요?”

 

히스의 모두가 소녀에게 빚을 진 이였다. 월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농장 너머 언덕 위에 무덤이 있어요. 술이라도…. 아니, 아이니까, 꽃이라도바치면 기뻐하겠죠.”

 

그리고 주인장은 먼 곳을 응시한다. 술을 모르는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소녀. 시작은 이방인이었지만, 결국엔 누구보다 히스이에서 덕을 많이 쌓고, 천진하고 용감한 성품 덕에 소중한 인연을 쌓아 올린 아이.

 

월로는 두통이 이는 걸 느꼈다. 값은…. 그 사이에 히스이 물가가 조금 올랐다. 가게가 한 두 군데 더 생겼다. 사진관에는 월로와 토게피가 아닌 처음 보는 금강단원과 독케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가게를 나설 때, 주인장이 조금 서글픈 눈으로 재차 성묘를 당부했다.

 

#

 

언덕 위에는 정말로 무덤이 있었다. 회색 돌을 정갈하게 깎은 작은 비석에 소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몇 년도에 태어나고, 몇 년도에 사망했는지. 그렇지만 사실 그녀는 그 날짜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난 날짜 만이 정확했다. 조촐한 들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월로는 무표정하게, 꽃가게에서 사 온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는다. 소녀가 묻혀 있다기엔, 터가 너무 좁은 것 같다. 물론 소녀는 월로 보다 한참은 자그마했지만. 또래 중에서도 몸집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조그마한 땅에 들어가기엔, 그녀가 좀 더….

 

당신이 왜 여기에?”

 

익숙한 목소리가 뒷머리를 잡는다. 동그란 눈을 잔뜩 흘겨 뜨고 있는 소년이 어느새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분명, 소녀와 같은 은하단원이었다.

 

“…제가 여기에 오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온화하게 반겨주는 기색이 아니기에, 월로도 날 선 말투로 받아 친다. 소년은 화가 잔뜩 오른 얼굴이다.

 

아주 많죠.”

 

그는 품 안에 토란떡과 노란 국화를 한아름 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소녀와 소년과 박사가 노을이 지는 날 다 같이 토란떡을 먹으며 잔뜩 웃거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걸 자주 봤었다. 저녁마다 은행상회에 앉아있으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었다.

 

“…죽은 지도 몰랐던 주제에.”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소년은 터벅터벅 걸어와 무덤 앞에 토란떡과 노란 국화를 흐트러지지 않게 올려 놓는다. 그리고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인상을 쓴다.

 

그거 알아요? 그 애는….”

“…….”

개나리색을 좋아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그 애의 머리핀도 개나리색이었다. 하얀 국화 한송이가 노란 국화 한다발에 밀려 잔디 위로 떨어졌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군요, 당신은.”

저는….”

말하지 마시죠. 정말 화를 낼 거 같으니까.”

 

그리고 소년은 소녀의 무덤 앞에서, 한참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기도하는 손에 얼굴이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흐느끼는 것 같았다. 월로는 덩그러니 서서 그저 지켜봤다. 그는 기도를 올릴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월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지난 반 년간, 때때로 소녀를 떠올렸으나 축복마을에 돌아간 적도 편지를 부친 적도 없었다.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백은이나 은행상회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 소식 정도는 묻는 게 나았을까? 그치만 월로는 그들과도 그 정도로 막역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마을에 잠시 들러, 멀리서 안부라도 확인 했어야 했을까. 그치만 월로는 단 한 번도 소녀의 안녕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녀는 아르세우스에게 인정 받을 정도로 포켓몬과 친숙했고, 포켓몬 술사보다 포켓몬을 더 잘 다뤘고, 결국 그를 이겨냈고, 아르세우스가 부탁한대로 히스이의 모든 땅을 밟고 모든 포켓몬과 만났기에…. 어쩌면 월로는 그녀가 수 개월이고 수 년이고 그를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나 웃고 있었고, 상냥하고 용기가 넘쳤으며, 그 숱한 사건이 있음에도 월로를 힐난하지 않았기에….

 

그러면, 그러면…. ! 소년이 두 손을 강하게 맞부딪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대로 떠나려는 소년에게 월로가 말을 건넨다.

 

“…그녀가 남긴 말은?”

…….”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있을 리가 없잖아요. 즉사였다고요.”

장례는….”

잘 치뤘어요. 금경님이 상주였고, 우리 전부 다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잔뜩 와서많이들 슬퍼했어요.”

 

우리안에 월로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가 없어도, 소녀는 편안히 이승을 떠났을 것이다. 월로는 목까지 채운 녹색 외투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은하단 건물 안에, 그 애의 사진을 걸어 뒀어요. 그 애는 히스이의 영웅이니까. 걔처럼 뛰어난 은하단원은 앞으로도 없겠죠. 십 년 뒤에도 이십 년 뒤에도, 모든 은하단원들이 그 애를 기억할 거에요.”

 

기도를 올렸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눈물 자국이 선연하다.

 

그런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 애는 이제….”

 

소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월로는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개나리색…. 그래, 당신은 개나리색을 좋아했구나. 사진도 은하단에 남아 있었구나. 그 밖에는 어떤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더이상 알 방도가 없었다.

 

 

 

 

#

 

은하단 건물에 숨어든 건 그날 밤의 일이다. 물론 계획된 침입은 아니었다. 월로는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 플레이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본질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아르세우스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역할이 다해서 신의 버림을 받았나? 혹은 그녀가 임무를 완수해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었나? 월로는 정답을 알고 싶었다.

 

경비는 의외로 허술했다. 은하단의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건지, 손쉽게 창문의 걸쇠를 따고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소녀의 사진은 박사가 머물던 방에 걸려 있었다. 언제적 찍은 건지, 태연하게 마그케인을 끌어 안고 웃고 있었다.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천연한 미소였다. 월로는 고개를 돌렸다.

 

월로는 플레이트의 중요성을 상기하며, 조사대 대장의 책상을 뒤졌다. 책상 서랍 하나에만 열쇠 구멍이 달려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구비해 온 철사를 이용해 서랍을 열었다. 어린 시절 이곳 저곳을 구르며 배운 기술이 쓸모는 제법 있었다. 서랍 안에는, 놀랍지도 않게, 플레이트가 차곡이 쌓여 있었다. 마치 읽지 않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둔 것처럼. 너무 손쉽고 빠르게 월로는 플레이트 전부 차지할 수 있었다. 기쁨의 미소는 흐르지 않았다.

 

 

#

천관산에 올랐다. 며칠 만인 것 같기도 하고, 몇 백 년 만의 등산인 것 같기도 했다. 플레이트는 제법 무게가 나갔지만, 월로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았다. 월로는 새삼 그 많은 짐을 지고 산을 타고 하늘을 날았던 소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은 체구에 제법 완력이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대담하고 용감했다. 그녀는 모험가나 영웅이 지녀야 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자질을 전부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문득 은하단 소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 애는 이제….

 

정상에 도착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월로는 서랍에서 꺼낸 모습 그대로, 플레이트를 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정적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아르세우스. 속으로 불렀다. 숱한 세월 동안, 아무리 마음 속으로 되뇌어도 답이 없던 창조주가 반응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벌떡 솟대처럼 일어났다.

 

아르세우스.”

 

목소리가 작다. 더 크게- 고함을 지른다.

 

아르세우스!”

 

메아리가 친다. 땅바닥에 부딪힌 그의 외침이 되돌아 온다. 떠도는 목소리와 함께, 잠잠한 천관산 너머 우물진 그림자가 찬찬히 지하에서 떠오른다. 거대한 고래 같던 그림자가 모이고 흩어지며, 오밀조밀한 동그라미가 퍼졌다 다가오기를 반복한다. 가까워질수록 월로는 알 수 있었다. 비록 검은 그늘에 불과하지만, 아르세우스의 형체라는 것을.

 

아르세우스! 어째서…. 어째서.”

 

그림자가 이내 월로의 발 밑까지 가까워졌다. 그는 세차게 숨을 참았다 뱉는다.

 

어째서 그녀가 죽은 겁니까? 그녀는 당신의 사도가 아니었습니까?”

 

감감한 그림자가 잠잠히 떠돈다. 이윽고 익숙하지만 무거운 음성이 그의 머리를 관통하듯 두들긴다.

 

[너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녀가 없는 세상이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그러고보니, 이 천관산 꼭대기에서 그녀와 마지막 결전을 펼칠 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소녀는 없다고…. 월로는 까마득해졌다. 사실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 소원을 빌었다고? 자신이?

 

내 소원은더이상 그런 게 아니야….”

 

고개를 떨구고, 낯빛에 절망이 감돈다. 갑자기 믿을 수 없어졌다. 아르세우스도, 자신도. 도대체 어떤 낙원을 소망하고, 어떤 기도를 이뤄줬다는 말인가? 아르세우스는 단 한 번도 월로에게 응답한 적이 없는데.

 

이윽고 검은 그림자가 담담히 덧붙인다. 방금 전은 질 나쁜 농이었다는 듯이.

 

[다시 말하지. 이건 오만한 인간에 대한 벌이다. 선한 영웅을 배척하였으니 히스이의 인간들은 그녀를 잃는 벌을 받아야 한다. 너 또한 악한 마음을 품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월로는 신의 사고 방식 따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영웅인 그녀는, 벌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찬란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소녀가 아닌가. 월로는 반문했다. 신은 가볍게 응수한다.

 

[그 아이에겐 벌이 아니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으니.]

 

“…원래의, 세상.”

 

맞다. 월로는 떠올랐다. 본래 그녀는 히스이 출신이 아니다. 어느 날 시공의 균열에서 떨어진 이방인이다. 제법 친밀해진 다음,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자신은 히스이보다 훨씬 발달했고, 포켓몬과 사람이 친구처럼 지내며, 그렇지만 여전히 천관산이 하늘 높이 솟은 곳에서 왔다고…. 분명, 그 지방 이름이.

 

자신의 고향과 같은 이름인 신오…. 히스이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신의 이름. 어째서 이런 간단한 사실도 잊고 마는 걸까? 삽시간에 월로는 아주 먼 세월이 지나면, 그녀 마저도 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다면세월이 지나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 애는 널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걸 깨달아야 한다, 신오인.]

 

월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피가 고인다.

 

그렇다면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100년이 될 지 200년이 될 지 모르는 기다림을 겪겠다고? 그건 아집이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신오인. 너를 애정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삶에 더는 허물이 없어야 한다. 그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것이고, 너는 그 안에 존재하지 못한다.]

 

가장 위대한 신이 고한다. 영원한 이별만이 있을 거라고. 두 번 다시 상냥한 만남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월로는 믿지 않는다. 본디 그는 불경한 신자였기에.

 

---기다릴 수 있어. 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까.

 

 

 

 

#

그림자로 현현한 아르세우스는 더이상 대꾸 없이, 점점이 사라졌다. 어느새 저녁 노을이 아득한 환상처럼 내려 앉았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월로는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던 플레이트를,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 가방에 넣었다.

 

플레이트 사이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편지 봉투였다.

원령플레이트 바닥에 붙어 있었던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월로의 동공이 커진다. 작고 오밀조밀한 글씨.

 

윤슬이 월로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새하얀 편지봉투를 열었다. 한 장 짜리 편지지에 짧은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 언젠가 이 플레이트가 당신에게로 돌아간다면, 그 땐 당신을 막을 수 없겠네요. 어쩌면 저는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걸 원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한번쯤 당신이,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정말이지 간결한 편지였다. 언젠가? ‘언제라는 말부터 불완전하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고작 플레이트 몇 개를 모으는 일이, 내 많은 생의 전부였지만. 그건 사실 보잘 것 없는 목적이었다. 긴 세월 플레이트를 찾아 헤맸었어도, 모든 일이 끝난 후 가벼이 내 손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라. 목적과 결과는 순식간에 뒤바뀌고 만다. 왜냐면 나는 태생부터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에게 빚을 달아 놓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소원이라는 말부터가 불완전하다. 나는 고작 몇 달 전의 비원도 금새 까먹고 말았다. 처음부터 잘못된 소원을 빌었으니, 그 따위 소망이 이루어진다 하여 행복해질 리 없었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알았어야 한다. 그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어째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의 마음은 모르는가?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말은….

 

월로는 편지를 짓이기듯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천관산을 내려왔다. 어쩐지 내리막길이 오르막길보다 괴롭고 길게 느껴졌다. 하산 도중에 끊임없이, 은하단 건물로 돌아가서 그 사진을 다시 보고 싶어 졌다. 그러나 이내 보고싶지 않아졌다. 그런 건 찰나의 기억일 뿐이다. 사진 속 포켓몬이, 그녀의 품 안에 쏙 들어가는마그케인이던 시절은 불과 몇 주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녀는 언제나 열다섯이다. 월로는 자신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셈을 한 지도 오래얼마나 더 많은 셈을 해야 열다섯이 넘은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월로는 축복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외곽의 산길로 접어 들었다. 정처 없는 발걸음이었다.

 

#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난생처음으로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단 한번도 당신은 뒤쳐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길을 잃은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지도도 전부 잃어버려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걸지도 몰라.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않는게 아니라 찾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방법을 모르는 것으로 해 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구름은 여행을 떠나듯 멀리 흘러갔다.

 

어디선가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못 다한 말을 해야지. 언제나 당신을 만나러 갈 때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말이야. 사실 나는 줄곧, 당신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했을 때에도. 마른 모래가 바람에 날려 희뿌연 먼지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때에도. 고동 속에 파란이 불었어. 가슴에 파문이 일었어. 심지에 불이 켜지지 못한 결심은 냉동된 채로 심장 어딘가에 잠겨져 있어. 그래도. 당신을 다시 만나면못다한 말을 해야지.

 

먼 하늘에 그리움이 고여 짙고 파란 웅덩이로 변했다.

 

더는 당신은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뱉어 버리면

인연은 여행을 떠나듯 파란 속으로 흘러 사라졌다.

 

 

 

---안녕, 슬픔 속에 잠긴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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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온 X 트레이너- Love Portion

 

자아, 모르모트 군.”

 

허스키하고 나긋한 특유의 목소리. 그 호칭으로 불리는 건 꽤나 오랜만이라, 트레이너는 두 눈을 깜빡이며 타키온을 본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정체 물병의 핑크색 물약.

 

근일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 본, 신약이라네. 어때, 친히 실험체가 되어주지 않겠나?”

 

긴 소매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 “후후하고 낮게 웃는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지만, 어쩐지 트레이너는 이 마저도 제법 귀엽다고 여겼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그런데 우마무스메를 위한 약이라면, 인간인 내가 먹으면 실험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아니. 이건 우마무스메를 위한 약물이 아니라네. 으음, 적확한 설명을 하자면, 자네가 먹어야지만 정밀한 분석을 할 수 있겠지.”

 

 타키온은 빙글빙글 삼각 플라스크를 돌린다. 안광이 없는 눈동자가 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자네, 그 때 내가 말했던 실험을 기억하는가?”

실험? 무슨 실험?”

 

사실, 타키온이 행한 실험은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이 많아 그녀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트레이너는 알지 못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감정에 대한 실험 말일세.”

아아, 맞아! 그렇지. 그런 실험을 한다고 그 날 잔뜩 데이트를 했었지. 엄청 재밌고 좋았고, 타키온이 귀여웠지.”

“…….”

 

스스럼 없는 트레이너의 표현에, 타키온이 말을 잇지 못한다. 어쩐지 귓볼이 새빨갛다. 분명 그 때만 해도 눈치 없는 대답만 하면서 분위기도 잡을 줄 모르는 녀석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능글능글, 빨간불도 없이 저렇게 훅 들어오곤 한다. 흐음-. 한 번 헛기침을 하고, 타키온이 입을 열었다.

 

기억 난다니 다행이군. 이 신약은 그 실험의 연장이라네. 그러니 인간인 자네가 시음한다면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나? , 모르모트군.”

 

타키온이 액체를 트레이너 눈앞에 들이민다. 이러니 어쩐지 시야가 온통 핑크빛이다.

 

마셔보게. 큭큭.”

으음….”

 

 몇 년전이었다면, 타키온의 기세에 밀려 단숨에 들이켰겠지만, 지금의 트레이너는 어째….

 

그래서 이게 무슨 약이라고?”

 

 어째 순순하지가 않다.

 

그 때 실험의 연장이라고, 주구장창 몇 분 동안 읊어주지 않았던가? 모르모트군. 자네의 우수함은 어디로 갔나? , 어서….”

그 말은 그러니까, 이걸 마시면 어떤 [감정]이 생긴다는 거지?”

 

 그리고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큭큭. 그래. 모르모트 노릇도 수 년을 하다 보니, 척하면 척이로군.”

타키온--. 설명이 부족해. 그래서 어떤 [감정]이 생기는 건데? 설마 타키온을 싫어하게 되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러면 무척이나 곤란하다구.”

곤란하다? 곤란하다라….”

 

 게다가 거절의 의사도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곤란한 건 타키온 쪽이다. 왜 몇 년 전처럼 휘둘려주지 않는 것인지. 긴 소매로 다시 입가를 가린다.

 

당연히 곤란하지! 타키온은 내 최고의 우마무스메니까, 타키온을 미워하게 된다거나 그런 건정말 끔찍한 걸.”

자네 답지 않게 맹랑한 발언이었다만. 애석하게도 그런 효과는 없다네. 애초에, [혐오][증오]의 감정은 그다지 관심 연구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그럼? 그럼 어떤 건데?”

 

 하아. 타키온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쩐지 불편한 표정으로 설명을 잇는다.

 

기억을 한다면서, 왜 중요한 부분은 두어번 설명하게 만드는 겐가. 그때도 말했다시피, 열정이나 정열에서 발생하는 힘이다. 박수 소리에 무거워진 두 다리가 나아가고, 응원하는 목소리에 또 한 걸음 더 디딜 수 있게 되는 불가사의한 동력원 말일세.”

“……그렇다면, 역시 나를 실험대상으로 쓰는 건 의미가 없겠는걸? 왜냐하면….”

 

 타키온은 침을 꼴딱 삼켰다. 또 무슨 맹랑한 발언을 하려고?

 

왜냐하면 난 이미 타키온에게 홀딱 빠져서 매일매일 정열이 넘치는 상태라, 더이상 상승할 힘이 없는걸?”

“………….”

 

 말을 잃었다. 대체, 대체 이 녀석은….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아- 타키온이 보고싶어! 라고 생각해서 엄청 일찍 학원으로 나왔거든. 아침에 빈 교실에서 연습 일정도 순식간에 다 써내려 갔어. 그리고 타키온을 만났는데, 오랜만에 가운을 입고 실험도구를 만지는 걸 보니 또 그게 너무 귀여워서…. 타키온이 부탁한다면 신약은 하루에 수십 번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

그치만 그렇게 먹어도 타키온의 연구에 도움이 안된다면, 나는 트레이너로서 실격이잖아? 타키온은 최고의 우마무스메인데, 트레이너인 내가 도움이 안 된다면 큰일이잖아? 그것만큼 또 속상한 일은 없다구. 저기, 타키온….”

“……….”

타키온, 듣고 있어?”

 

 물론 듣고 있다.

 

얼굴이 왜 그렇게 새빨개졌어? 혹시 열이 나는 건 아니지? 몸이 안 좋아? 연습 일정을 수정할까?”

“……모르모트 군….”

 

재잘재잘 잘도 떠들더니, 타키온의 부름에 강아지처럼 바로 자리에 앉는다.

 

! 타키온.”

자네는정말이지 흥미로운 실험체로군. 우수하다고 해야할지, .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해야 할지, 정의 내리기가 어렵군.”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 모르모트군….”

 

 트레이너를 부르는 타키온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리고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다. 약은 아직 테스트도 못해봤는데, 벌써 효과가 나타난 것 같다.

 

신약은 됐네. 자네 성향은 호오(好惡)가 보여 실험체로 쓰려고 했는데…. 무용한 생각이었던 듯 하네.”

~ 내가 타키온을 많이 좋아하긴 하지.”

 

 3자가 들으면 난해하기 그지 없는 타키온의 언사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제멋대로 대답해버리는 트레이너가 싫지는 않다. 그렇지만 굉장히 낯간지럽다.

 

“……실험은 중단일세. 오늘은 자네가 아침부터 심혈을 기울여 짜 온 일정대로 연습을 하도록 하지.”

와아! 고마워.”

자네는 말일세….”

 

타키온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말한다. 어쩐지 체념한 말투다.

 

최악의 모르모트일세.”

그렇구나….”

 

악담을 듣고도, 트레이너는 해실해실 웃음을 흘린다.

 

최악이라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가?”

. 그렇게 감정이 가득 담긴 표현을 타키온에게 들으니, 타키온 실험은 이미 성공한 거 같아서.”

“……하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타키온의 손을 잡는다. 예상치 못했는지 타키온의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펴진다.

 

“……일일이 나열하면 입만 아프겠네. 일단 가지.”

!”

 

 이렇게 되면 이제 누가 모르모트인 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실험은 실패다. 타키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트레이너의 손을 힘껏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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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하지만 너무 얕게 묻어서 금방 드러나곤 한다. 무심히 길을 걸을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하늘을 보며 서 있을 때, 조금만 발을 굴러도 흙 속에서 튀어나오고 만다. 그 때마다 나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흙을 도로 덮었다. 깊숙이 묻지 않은 까닭은 그럴 수 없었던 탓이다. 나는 유약하다. 한 번의 버림에 모든 것을 잃을 정도로 유약하다. 이런 나를 지탱해주는 건 첫사랑이 바로 발밑에 있다는 안도감뿐이다. 
 체육관을 떠났다.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다. 문하생들은 토끼눈을 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미 계획한 일이었다. 포켓몬이 아팠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포켓몬들이 어느새 병을 앓고 있었다. 포켓몬 의사는 무리한 배틀에 피로가 축적된 탓이라고 했다. 과한 연습과 배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던 휴식 시간. 근근이 버텨오다 마침내 그들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적신호를 킨 것이다. 의사의 진단을 듣고 나서야 나는 포켓몬들을 살펴보았다. 아쿠스타의 표피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누오의 피부는 까칠했고, 골덕의 손발톱은 망가져 있었으며, 라프라스는 뿔과 귀가 상해있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구보다 물 포켓몬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악덕 고용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쓸었다. 포켓몬들은 저들이 미안하다는 듯 낑낑 울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날, 나는 그날 바로 결심했다.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체육관을 떠났다.
  짐의 간판을 떼던 날을 기억한다. 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부임할 때는 제법 호기로웠던 모양이지만, 해가 지날수록 낯간지러워진 문구다. 그만큼 정이 많이 들기도 했다. 잡지에서 소개될 때도, TV에서 인터뷰를 나왔을 때도, 우연히 나를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도…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하고 그 말부터 나왔으니까. 오래된 간판은 내 손으로 내렸다. 문하생과 주민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퇴야. 자신에게 벌을 주듯 말했다. 난 이제 은퇴야, 모두 잘 있어요. 그건 벌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루네시티로 향했다. 호우엔은 바다가 넓고 공기가 청정하다. 그 중에서도 바다로 둘러싸인 루네시티는 물타입 포켓몬에게 안성맞춤이다. 알고 지내던, 같은 물타입을 다루는 미쿠리씨의 소개로 새로운 섬에 정착할 수 있었다. 미쿠리씨는 내가 낯선 호우엔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사실 모두가 걱정했다. 에리카는 자신의 가까이에 와서 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벌이었다. 그러니, 좀 더 먼 곳으로 가야했다. 벌의 의미도 모르는 남자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했다. 
 그래서 루네를 택했다. 해변에 차오르는 푸른 물살에 살이 닿았을 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토록 낯선 땅과 바다, 그 안에 나만이 덩그러니 존재한다. 이제는 좀 더 깊게 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순간을, 지하 깊숙이 던져 넣을 것이다.
 상냥한 주민들은 이방인을 반겨주었다. 미쿠리가 미리 언질을 준 것인지, 주민들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짐리더였다는 것, 머나먼 칸토에서 왔다는 것, 물타입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며 열거하는 정보들은, 현재의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는 이제 짐리더도 아니며, 칸토에 살지도 않고,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완성해 주었던 모든 미사여구들이  분히 사라져갔다. 내가 걸어온 길은 해변가였다. 모래알 위의 잔상은 찰나의 파도에도 지워진다. 내가 소유했다고 믿었던 것들도… 해변의 발자국처럼 무연한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새 침대 위에 누웠다. 세제 냄새가 싸하게 코를 자극했다. 바로 천장을 응시한다. 천장은 하얗다. 네가 있던 산도 그랬다. 새하얀 눈이 끊임없이 허공을 메웠다. 너는 늘 그 산에 있었지만, 난 단 한 번도 너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네가 없을 때만 내가 산을 올랐기 때문이다. 어둑한 환상에 다리가 시려왔다.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이제 더 깊숙이 묻을 것이다. 아니면 곧 닥칠 장마에 전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차고 시린 물살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눈꺼풀 사이로 쓴 잠이 가라앉았다.


2. 

“아아, 졌잖아.”
 소년은 검은 머리를 벅벅 긁는다. 고개를 세우고 한마디를 던져준다.
“당연하지. 불타입인 파이리로 물타입 짐리더인 나에게 도전하다니, 언어도단이야.”
“하아-역시 기합만으로는 안 되는 거였나.” 
 짧은 투덜거림. 
 소년은 신참 트레이너였다. 불과 일주일 전에 포켓몬을 받고 고향을 떠나 모험길에 올랐다. 불과 일주일 만에, 타케시에게서 뱃지를 얻고 달맞이 동굴을 건너온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는 신참이었다. 배틀을 시작한지, 포켓몬을 다룬지 불과 일주일이다. 재능이 여물기에는 한창 모자란 시간이었다. 
“기합으로 상성을 이겼단 이야긴 들어본 적 없는 걸. 후우, 배틀 상식도 없구나.”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배틀을 시작했을 무렵, 천재라고 불리던 시절. 내가 차세대 챔피언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나조차도, 기초지식도 없어 시행착오를 겪기 일쑤였다.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재능에 덧씌웠던가. 소년을 보니 절로 옛시절이 떠올랐다. 선배로서, 짐리더로서, 제대로 조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짐에 도전할 거면, 풀이나 전기타입 포켓몬을 데려오는 게 좋아.”
“그렇구나.”
“뭐, 데려온다고 해도-레벨 차이가 심해서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파이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할 테니까.”
 듣는 태도가 엉망이었다. 다른 곳을 보는 채로, 대충 고개만 끄덕인다. 어린 여자애가 짐리더라서 무시하는 건 아닐까. 그리 생각되니 화가 갑자기 솟았다.
“너 말인데, 짐리더가 하는 말이라면 좀 더 제대로 듣는 편이….”
“파이리가 아니라 리자드면 괜찮을까?”
“뭐?”
“리자드가 되면 훨씬 세지잖아. 그러면 너에게 이길 수 있을까.”
 어이가 없어 숨이 턱 막혔다. 
“잠깐. 내가 한 얘기는 들은 거니? 불타입은 상성이 나빠서 안 된대두.”
“다 들었어. 풀이나 전기 타입이어도 레벨 차가 심하면 소용도 없다며. 그러면 새로운 포켓몬을 잡는 것보단, 파이리를 강하게 만드는 게 낫겠네.”
“뭐….”
“나는 파이리가 좋으니까.”
 그리고 소년은 유유히 짐을 나섰다. 내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파이리가 좋으니, 파이리로 이기겠다. 파이리는 아마 그의 첫 번째 포켓몬인 것 같았다. 첫 번째 아이에게 유독 정이 많이 가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건 좋다. 그래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분을 식혔다. 저런 태도라면, 다시 도전해도 분명 내가 이길 것이다. 나는 재능을 과신해 오만해진 트레이너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 녀석들은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혀 싹이 잘리고 만다. 안타깝지만, 그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빤히 보였다. 


타케시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 어절부터 그 소년의 이야기를 한다. 
“그 녀석, 카스미네 체육관에 왔었지?”
“응. 어제 왔다 갔어.”
“그래, 범상치 않은 아이야. 재능이 있더군.”
 눈살을 찌푸렸다. 
“배틀은 내가 이겼어.”
“네게 이기기엔 아직 조금 모자랄 테지. 그런데 그 녀석, 하루하루 엄청나게 발전하더군. 무서울 정도로.”
 그런 말투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모험을 시작한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된 트레이너에게 저런 대우는 과하다. 
“재능은 둘째고…태도가 영 아니던 걸. 내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
“하하, 네 이야기뿐만이 아니야. 원래 그런 식이라고.”
“그럼 웃을 일이 아니잖니.”
“재밌는 건, 사실은 전부 듣고 있다는 거지. 이야기를 제대로 걸러서 듣고 자양분으로 삼는다…그리고 성장한다, 그게 녀석의 방식인 거 같더군.”
 하나도 재미없었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이야기가 전부 그 아이에 대한 것들뿐이다. 입을 삐죽 내밀자, 타케시는 그제야 말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다시 올 거라며, 그 때를 기대해보라고 덧붙였다.
 대답 대신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거뭇거뭇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오늘은 도전자고 뭐고 없을 성 싶었다. 게다가 비가 내린다면, 파이리를 바깥에서 훈련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운이고 환경이고 그 애한테 따라주는 게 없었다. 내가 그리 말하자, 타케시는 빙긋 웃었다. 그러지 말고 기다려 봐, 넌 판단이 늘 빠르더군…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지. 
 먹구름 사이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2.

새 침대에서 케케묵은 환상을 보았다. 납덩이를 끌어안고 물속에 잠기듯 기분이 무겁다. 오래된 시절의 꿈은 좋지 않다. 꿈의 가지 끝에 설핏 걸렸던 그 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심한 눈동자. 꾹 다문 입. 까칠한 눈썹. 살짝 그을린 피부. 아주 오래 전, 그는 그런 얼굴일 때가 있었다. 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TV를 키자 예쁘장한 앵커가 어린 트레이너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어린 트레이너가 얼마나 강했던 건지, 앵커가 칭찬일색이다. 까무잡잡한 소년은 부끄러운지 낯을 붉힌다. 아이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여겼다. 지금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의 재능은 그럴 듯하지만, 우수하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재능을 남들보다 일찍 꽃피우는 타입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속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얀 모자를 쓴 저 아이가, 미래의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재능을 일찍 꽃피우는 것이 아닌, 남들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재능을 발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TV를 끄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하드에서 발견한 무려 2015년도에 써둔 레카스 중편소설의 앞부분입니다. 행사에 내기 위해 썼던 것 같은데, 뒷부분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까워서 일단 올려보는 글.

:
Posted by 새벽(dawn)
2021. 1. 13. 21:47

[쥰히카/용식빛나] 라벤더 글/포켓몬2021. 1. 13. 21:47

 

<라벤더 (Lavender)>

 

그치만 난 사랑이 뭔지 몰라.

옅은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남청색 머리칼, 손목 위 시계를 바라보는 동그랗고 투명한 눈동자. 상냥한 어조에 웃을 때마다 볼에 떠오르는 홍조. 어릴 적부터 봐왔기에,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펭도리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하게 웃는 얼굴도. 새벽부터 일어나 정원의 꽃에 물을 주는 모습도. 멀리서 나를 부를 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버릇도. 늘 지켜본 모습, 변하지 않는 일상.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주위 또래들이 떠들기 시작한 첫사랑 이야기 따위는 관심 없었다.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고 사귀는 일에 일말의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가끔 코우키가 나와 히카리의 사이에 대해 의문점을 표해도, 딱 잘라 말했다. 우린 소꿉친구야. 그 녀석이랑 나는 평생 친구라고.

 같은 말을 히카리 앞에서 한 날, 그 애는 멋쩍게 웃었다. 뭐야. 우린 친구야. 평생 친구지? 하고 되물으면, 그 애는 대답은 않고 뒷짐만 졌다. 불만이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 히카리의 나쁜 버릇이었다. 거듭 채근해도 커다란 두 눈만 깜빡 거릴 뿐이었다. 그러면서 죽어도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이름도 모를 놈팽이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대화로부터 몇 주 뒤였다. 히카리의 첫 남자친구라는 놈은, 짐리더도 사천왕도 아닌 정말 평범한 녀석이었다. 엘리트 트레이너 딱지를 달고 있긴 했지만, 글쎄. 실력이 특출 난 편은 아니었다. 히카리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키만 멀대처럼 크고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멍청한 인상이었다. 이래저래 뜯어봐도 히카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축복해 주었다. 다들 눈이 삔 게 분명하다.

 

 히카리와 단 둘이 되었을 때 그 애가 연애질을 시작하고는 도무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난 물었다. 왜 그런 녀석이랑 사귀는 거야? 시간이 아깝지 않아? 나라면 덜 떨어진 놈과 만날 시간에, 차라리 배틀 하며 실력이나 쌓겠어. 그러자 히카리가 저번처럼 볼을 긁으며 멋쩍게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날 좋아해주니까….

 대답을 듣자마자 열불이 났다.

 

-? 그럼 넌 널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은 거야?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그 사람은 굉장히 다정해.

-그러면 너는, 널 좋아해주고 다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런 단순한 사항으로 결정해버려도 되는 건가?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항상 서로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히카리는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그 자식을 고른 걸까?

 

-그럼 너는 그냥 예쁨 받는 게 좋은 거네.

-맞아.

-실망이야. 네가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

-그치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망설이다, 이내 히카리가 조금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그치만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는 걸. 나를 정말로 소중하게,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네가 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걸. 쥰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잖아.

 

거기서 왜 내 얘기가 나오는 거야? 어쩐지 히카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쥰은 언제나 제멋대로에, 나를 남자애처럼 대하듯 거칠게 다루고, 막 아무 소리나 하고...

-그건 우리가 친구니까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해주는 그 사람이 좋아. 쥰은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겠지만.

 

더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면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히카리는 그 이후로 더이상, 비슷한 화제를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그 녀석과 영화를 보러 가고, 놀이동산에 가고, 까페에 가고, 심지어 배틀 연구도 그 녀석이랑 했다. 나와 만날 일은 점점 적어졌다.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왜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을까?  

 히카리는 항상 여자애였다. 거울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옷을 고르느라 제 시간에 나오지를 못했을 때도. 새로 산 비니를 쓰고 해맑게 어울리냐고 물어오던 날도. 새빨간 머플러를 고쳐 매며 이거, 쥰이랑 같은 거야하고 말할 적에도. 여자애였다. 한여름 원피스를 입을 때 보이는 새하얀 어깨도. 나보다 몇 치수는 작은 분홍색 부츠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도. 히카리는 언제나 여자애였다. 다만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여긴 적 없을 뿐. 왜냐면 아주 오래 전부터 히카리는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평생 같은 모습일 테니까. 사랑스럽다는 느낌마저 낯간지럽다. 우리는 정원에 피어난 라벤더를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꽃이 필 적 마다 향기롭다고 감탄하지 않는다. 굳이 입으로 꺼내 부산 떨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네가 후타바타운의 평범한 여자아이든, 신오우의 마스터이든. 우리가 함께 예지호수에 있었단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네가 긴가단에게 패해도, 신오우를 구한 영웅이 되어도. 너와 같이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는 추억이 더 소중했다. 그렇지만 네가 다른 누구의 여자가 되는 건, 혹은 되지 않는 건. 그로 인해 더이상 예전의 모습들을 만날 수 없다면. 전부 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애의 말이 맞다. 난 사랑이 뭔지 모른다. 어째서 그 애를 상냥하게 대해줘야 하는 모른다. 아니, 어떻게 상냥하게 다뤄야할 지 모른다. 영화관에 같이 가고 함께 포켓몬을 돌보는게 왜 특별한데이트가 되는지 납득 가지 않는다. 그런 건 히카리와 어린 시절부터 늘 같이 해오던 일상이다. 그렇지만 히카리는 특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똑같이 특별하다고 여겨줄 사람을 찾은 것이다. 라벤더를 볼 때마다 사랑스럽게 잎새를 만지고 향기롭다고 감탄해 줄 사람을 선택했다. 그것이 그 애의 선택이라면, 나는 아무런 변명도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슬퍼? 어느 날 코우키가 물었다. 슬플 리가 없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히카리와 나는 줄곧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애가 이라고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러니까 슬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외로워? 라고 묻는다면. 분명 고독해졌다. 계절이 지나 라벤더 꽃이 피어도, 더이상 가까이서 볼 수 없으니까. 분명 꽃이 피든, 피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을 텐데. 후회 돼? 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치만,

 

 나는 사랑이 뭔지 몰라.

 

 

 

 

:
Posted by 새벽(dawn)
2020. 10. 30. 09:19

[아카히카/태홍빛나] Last Act 글/포켓몬2020. 10. 30. 09:19

<Last Act>

 

 

 

 만남으로부터 일년 그다지  세월도 아니었다관계는 애매모호했다친구라기엔 연배가 달랐고연인이라기엔 거리감이 멀었으며동료라기엔 어떤 모험도 함께  적이 없었다라이벌이라기엔 경쟁한 적이 없고적대자라 하기엔 일련의 사건은 오래 전에 종식 되었다그렇다고 남남이라기엔 이미 산더미 만큼 많은 감정과 찌꺼기가  사람 사이에 쌓여 있었다.

 

햇살이 유독 밝은 여름날예지호수에  히카리는 먼저 운을 떼기를 어려워했다새처럼 조잘조잘 떠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지만 오늘만큼은 유독 입이 무겁다아카기도 무어라 말을 시작해야할지 몰랐다좌중을 휘어잡는 달변가도 생애  이별에 담담히 연설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먼저 입을  것은 히카리였다.

 

나는…”

 

아카기는 조그만 입술에  신경을 기울인다.

 

나는…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

 

목적어가 없는 문장아카기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한다.

 

너와 네가….”

한번쯤은 ‘우리가’ 라고 해주면  되는 거야?”

 

히카리가 바로 면박을 준다지난 일년  동안 줄곧 참아왔던 말이다  일찍 하는  좋았을까이런 생각을 이제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라고 말하기에는.. 아무 것도 시작한 것이 없었다.”

 

냉정하네.”

 

 사람은 참으로 뭐라 정의 내리기 모호한 사이였다벗이라기엔 정이 부족하고애인이라기엔 사귄 적이 없으며지인이라기엔 서로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남남이라기엔

 

정말로 아무 것도 시작된  없다고 생각해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끝나는 건데?”

 

목구멍까지 끓어오른 감정을 겨우 죽이며히카리가 덤덤한  말한다목소리가 떨린다.

 

시작이 없는데 어떻게 끝이 있어?”

 

“…예를 들어마라톤의 시작 선에 서있고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도경기는 언젠가 끝나는 법이다.”

 

기가  표정으로 히카리가 아카기를 올려다본다아니쏘아본다.

 

정말이지 근사한 은유네!”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 결국 끝난다는 얘기다.”

 

그정도는 나도 이해한다고 두번 설명하지 않아도 정도로  빠진 어린 애는 아니니까..."

 

설명을 거듭하는  어쩌면 직업병인지도 몰랐다긴가단의 부하들은  재차 강조를 해줘야했으니까그래서인지 눈앞의 소녀는 한번 말하면 귀신같이 알아듣는똘똘한 아이라는  금새 잊곤 했다.

 

그치만 시작 선에 섰다는 무언가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는 거잖아.”

 

그것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지.”

 

 놈의 생각생각…”

 

히카리는 분홍색 부츠로  밑의 자갈들을 가볍게 걷어찼다회색빛 돌가루가 아카기의 부츠 위로 스멀스멀 내려앉는다칙칙한 그의 부츠와 대비되어 히카리의 부츠는 유독 어린애 장난감처럼 유치해보였다이제 분홍색은 졸업할 때가 되었나?

 

그럼 소감을 말해줘시작 선에 섰지만 걸음도 달리지 않은 채로 경기가 끝나버린 심정 말이야.”

 

아카기는 대답하지 않는다.

 

후회 ?”

 

아카기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님 다행이다 싶어쓸데없이 기운 빼지 않아서어차피 끝까지 달리지도 못했을 텐데….”

 

끝은 있나?”

 

문득 되묻듯이 아카기가 답했다히카리는 더욱 얼이 빠졌다.

 

세상에 끝이 없는  어딨어….”

 

있다면 그건...말을 이으려던 히카리가 아카기의 표정을 발견하고 멈춘다.

아카기는 바로 보지 못하겠다는  고개를 돌리며  하늘을 응시한다구름   없는  하늘시를 읊듯아니 혼잣말을 하듯그의 속마음이 비친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구름   없는  하늘이 공허한 눈동자에 비친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말을 듣자마자 히카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아아그런 거였어진짜 바보 같네하고 여느 때처럼 핀잔을 주지도 못하고커다란 눈동자에서 뚝하고 눈물이 흘렀다.

 

네가 이럴  같아서…”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울음소리를 밀어내고 간신히 할말을 꺼낸다.

 

나는그런  믿지 않아…”

 

그래.”

 

끝나지 않는 소설 같은 망상이나 하는… 당신이나… 생각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그럴 필요 없었어.”

 

그래.”

 

그럴필요 없었다고.”

 

그냥 말하면 됐잖아. 솔직하게 두려워서 시작하지 못했다고그러면 내가 당신의 그런 두려움을 툭툭 털어버리고대신 힘껏 어깨를 안아줬을 텐데실속 없는 상상은 그만하고  앞의 있는  손을 잡으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정말로 끝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되는 거다.”

 

정말이지 바보같은 사내는 끝까지 단호하게 말한다꿈결 같은 이야기가그런 영화 같은 스토리가 정말 일어났을 거라고 단언한다. 사이에 영원한 사랑이 있었을 거라고... 시작조차 해보지 않은 사내가 단언한다

 

그래서 마지막이다.”

 

끔찍한.... 인사네.”

 

멍청하고 끔찍하고 로맨틱해이런 이별은 앞으로 평생 없을 거라고 히카리는 생각했다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다

여전히 눈물이 앞을 가려 아카기의 형체만이 어슴푸레 보였다.

 

안녕.”

 

“…..”

 

 있어라히카리.”

 

이제는 신오우에 오지 않을 거야영영 다시 보지 못하는 거야어른이 되어도 만날  없어수많은 말들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어쩐지 울음이 먼저 나와 꺼낼 수가 없었다뒤돌아가는 모습이라도 눈에 담고 싶었지만먼지가 일어난  시야가 하얗게 변해 아카기의 색조차 희미했다.

 

 …”

 

결국 너무나도 짤막한 이별의 언사를 마지막으로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채로 침침한 세계와 깜깜한 마음에 갇힌 채로 히카리는 아카기와 이별을 했다이제는 정말 마지막으로어차피 시작한  없으니 마지막일리도 없었지만굳이 포장하자면 영원히 시작하지 않은 채로 끝이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명확히 남이 되었다.

 

아카기가 말한 영원이 이런 형태였다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시시하다고히카리는 생각했지만기약이 없었으므로 반문도  수가 없었다이제 그가 없어서 아무 말도 얹을  없었다대답 없는 이름만 불러대면서히카리는 어쩌면 아카기가 말한 영원이 이런 걸지도 모른다고영원히 메아리만 치고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라면기다려도 찾아오지 않는 거라면 끔직도 하다고. 출발선 앞에서 영영 울리지 않을 총성 소리를 기다리며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
Posted by 새벽(dawn)
2020. 7. 15. 16:32

[아카히카/태홍빛나] 마음 글/포켓몬2020. 7. 15. 16:32

 

<마음>

 

 

 

 

 

생각에 잠긴 당신을 좋아했어.

 

말을 걸면, 살짝 고개를 기울이곤 초간 생각에 잠기는 옆얼굴이 좋았다. 익숙지 않을 때는 무슨 말실수라도 해서 답을 바로 해주지 않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적합한 답변을 떠올리기 위해 잠시 고민하는 순간이라는 알게 , 초간의 침묵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왠지, 나와의 대화를 조금은 특별하게 여겨주는 같았으니까.

 

습관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이어진다는 알고부터 나와 대화할 때는 초가 걸리는지 혹은 초가 걸리는지 어림짐작하기 시작했다. 대답하는 걸리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혹은 ,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때로 침묵은 찰나 같기도 영겁 같기도 했으니까.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파리한 손가락이 좋았어.

 

마치 화살표처럼 정확하게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바닥 만한 노트 위의 작은 글자도, 세계 지도 위의 후타바 타운도, 어두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도. 손가락을 이정표 삼아 바른 길을 찾아갈 있었다. 이따금 파란 스웨터에 가려져 있던 손목도 목덜미에 걸쳐있는 와이셔츠 깃도 당신 답게 반듯해서 좋았다.

 

이따금 나와 같은 어조로 말해주는 당신이 좋았어.

 

나이는 나보다 열댓살은 많고 누구보다 이지적이지만. 이따금 또래의 남자아이 같은 말투를 하곤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주 오래 전부터 사귀어 친구처럼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때로 입술에서 내뱉는 농담이 너무나 아이 같아서, 그러면서도 너무나 재미 있어서, 우리 둘을 떼어 놓는 길고 세월조차 거짓말처럼 느껴지곤 했다. 전부 거짓말처럼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눈이 좋았어.

 

전부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적거나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가끔씩 말없이 얼굴을 응시하던 눈빛이 좋았다. 마주치지 않아도 눈동자가 또렷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는 알았다. 전부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무심코 피식 웃어버리는 순간이 좋았어.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아무런 징조도 전후도 없이 문득 웃음을 흘리는 경우가 있었다. 어째서 웃는지, 유독 냉철하고 차가운 당신이 어째서 나와 마주보고 이야기하다 무심코 웃음을 흘려버리는지, 어린 나는 없었다. 제멋대로 행복한 예측을 해보다가도, 어쩜 사소한 찰나조차 자신의 망상으로 삼아버리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자책하다가도 당신의 그런 웃음을 떠올리면 나도 따라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당신 앞에선 웃을 수가 없었어.

 

마음을 따르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당신과 마주 순간에도 그리고 안녕하고 즐거운 헤어짐의 인사를 나눈 후에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야 했다. 그렇지만 내키는 대로 미소를 지을 없었다. 조금이라도 흘려버리면. 마음이 흘러 나오면 들킬 테니까. 들키면 어떡하지? 혹시 이미 들켜버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신과 나는

 

참고 버티기엔 아직 어른스럽지 못했고, 그렇다고 떼를 쓰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다. 아마 당신은 나보다 곱절은 시간을 걸어왔기에. 아마 이런 사소한 대화나 만남에 어떤 자유로운 설렘도 새로운 기대감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당신에 비하면 여전히 너무나 어렸고 그리고 당신은

 

그래서 당신 앞에서 웃을 수가 없었어.

 

마음을 따르자면, 하루 종일 해바라기처럼 웃고 싶었다. 마음을 따르자면, 철없이 좋아한다 말하고 덥석 손을 움켜잡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따르자니, 좋아하는 당신의 모습을 순간에 잃을까 겁이 났다.

 

그래서 언제나 당신 앞에서 절반 만큼만 웃었어. 마음을 싹둑 잘라서 내보여도 이미 너무 크게 보였으니까.

 

그래서 언제나 동강 마음만큼만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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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8. 10. 4. 12:08

[아카히카/태홍빛나] 노도2 글/포켓몬2018. 10. 4. 12:08

아카히카_ 노도2

 

 

그늘진 마음 달랠 수 없을 때엔 바람이 저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새벽녘, 그를 닮은 조용한 햇살이 천천히 창가에 다가오기 시작하면 무릎에 볼을 얹고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녀는 다독인다. 이제는 소녀가 아니기에, 그 시절보다는 차분하게 되짚어 본다.

 

줄곧 당신을 보고 있었다. 만난 횟수를 헤아려 보자면, 손에 꼽을 정도지만.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비정한 운명을 보물처럼 안고 기뻐하기도 했다. 봉신유적에서도 그랬다. 어쩐지 당신이 했던 말은 사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차갑게 가라앉은 옆얼굴에 시선이 팔려서. 나보다 키가 두 뼘은 더 큰 당신. 언제쯤 그 어깨 쯤까지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바라는 세상 같은 건.

 

허망한 두 눈에 빠져, 그 두 눈이 바라보는 세상 같은 건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을 향해 손짓하면 손가락 끝만 바라보는 사람처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왠지. 당신이 바라는 모든 일들을 망쳐버릴 생각만 했다. 신오우를 구해야겠다는 대의나 악을 처단한다는 정의감에서 온 대승적 감정이 아니라. 그저, 어쩌면. 당신이 갈망했던 이상향을 전부 이룰 수 없던 꿈으로 만들어 버리면. 당신의 꿈보다 더 크게 내가 자리잡을 것 같다는 치기 어린 심정이 앞섰다. 아직 당신의 반토막 밖에 안 되는 내가. 당신이라는 어른에게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불확실한 계획으로

 

엉성하게 다져진 마음은 몰아치는 노도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당신이, 혹은 나의 마음이. 아니, 당신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나를 바라는 눈동자는 언제나 부질 없이 불투명했다. 온갖 이물질로 가득 차서, 걸러낼 수도 없는 욕망 덩어리. 그렇기에 거꾸로 내가. 차고 무딘 심성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

 

줄곧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먼 하늘 구름에 가려진 별 만을 뒤적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당신을 떠올렸다.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왜냐면,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어떤 기분인지 어떤 감정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아이가 모래성을 쌓으면 일부러 무너뜨리는 아이처럼, 당신이 힘들게 쌓아 올린 성을 부숴버렸다. 그제야 당신은 나를 바라보았던가?

 

이따금씩 불온한 마음에 불안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회색빛으로 침잠한 눈동자에 마침내 내가 비췄을 때, 거센 불안보다 세차게 고동이 뛰었다. 그제야 실감했다. 나는 살아서 저 두 눈에 담기고 싶었다고. 그것이 분노이건, 원망이건, 혹은 슬픔이건 간에. 어린 나는 복잡한 감정들을 구분할 줄을 몰랐으니까. 그저 당신 안에 나라는 존재가 커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조금 어른이 된 후,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았을 때. 나는 후회했던가? 그보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지난 날을 되돌린다해도, 어린 나는 같은 짓을 반복테니까. 또 당신의 꿈을 부수고, 모든 걸 헤집어버릴 테니까. 후회는 의미가 없었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괴로웠다. 사실 내가 정말 원했던 미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걸 깨닫는 게 버거웠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안락한 미래를 잡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어른이 되기 위한 무한한 인내. 망쳐버린 과거를 당신에게 돌려주기 위한 양보심. 더이상, 그 무엇도 빼앗지 않으려는 노력들.

 

태생부터 불온한 생명인지, 혹은 배려란 모르는 이기적 유전자인지. 나는 그 무수한 노력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행할 수 없었다. 영영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응석받이처럼. 늘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훔쳐내려는 해적처럼. 당신의 마음을 약탈하려 했다. 마주보고 서서 조곤조곤 심장을 다독여 진심을 끌어낼 생각은 않고. 언제나 앗아버리고 싶었다. 빼앗아서, 두 손에 움켜지면 당신이 더는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심장을 잡아채면 당신은 늘 그 공허한 두 눈에 나를 채워줬으니까.

 

결국 두려운 건 스스로의 본심이었다. 모두가 신오우를 구한 영웅이라고, 어린 챔피언이라고 치켜세워줬지만. 사실 내 장기는 파괴 뿐이었다. 누군가가 쌓아 올린 노력을 망가뜨리는 재주 뿐이었다. 단지 운이 좋아서, 부순 물건이 악의 온상이었을 따름이다. 사실, 그것 또한 잘 전시된 다른 이의 산물이었는데. 나로서는 다다를 수 없던, 뜨거운 열망이 탄생시킨 꿈의 결정체였을 텐데.

 

깨닫고 나면, 행복할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을 망칠 뿐인 나를 소중히 여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신을 다시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했다. 남은 방도는 그 뿐이었으므로. 당신이 어디로 가고 싶어하든,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그 길이 내가 가장 혐오하는, 자신이 있는 장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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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6. 각성


꿈을 꾸었다. 세실리아와 손을 잡고 숲을 거닐었다. 그녀의 손은 햇살을 머금은 솜털처럼 보드랍고 따사로웠다. 전에 없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나를 이끌었다. 세실리아의 하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커다란 불카모스가 춤을 추었다. 넘실넘실 바다를 유영하듯, 하늘하늘 구름 속을 헤치듯 춤을 추었다. 그 때마다 청명한 홍색 불꽃이 불카모스의 주위에서 반짝거렸다. 나와 세실리아는 웃으며 함께 불꽃춤을 보았다. 

 아아, 그건 분명 꿈이었다. 세실리아는 내 손을 잡아준 적 없고, 나를 보며 웃어준 적도 없다. 우리는 분명 둘 뿐인 친구였음에도. 나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아준 적이 없고, 세실리아를 보며 웃어준 적도 없다. 그녀는 나의 하나 뿐인 친구였음에도.

 그렇게 스스로 깨달아버린 나는, 부서진 꿈속에서 헐떡이며 깨어났다.


소녀가 성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결국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칠현인은 소녀가 사천왕을 이기고 챔피언의 방까지 올 수 없을 거라며 코웃음을 쳤었다. 자만심이 화를 부른 셈이다. N님이 아무리 우겼어도, 개치스님의 선에서 처리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철두철미한 개치스님마저도 소녀를 왕을 위한 시나리오의 일개 조연 정도로만 여겼다. 하나 지방의 마지막 희망으로 보이던 소녀가 N님 앞에서 처참히 무너진다, 그런 결말로 이야기를 꾸며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때론 야망에 눈이 뒤집혀 현실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확실하게 소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씨가 숲 전체를 활활 태워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소녀와 세실리아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리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휘청 복도를 걸었다. 방에 가서 몸이라도 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야….”

 다정하고 온화한 음색. 로트님이었다. 

“어디 아픈 게냐?”

“아닙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나는 그를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소녀와 N님의 이야기가 끝난다면, 플라즈마단도 어떤 식이든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 미래에도 내가 과연 로트님과 함께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주름진 눈으로 가년스런 딸을 달래듯 나를 보아도….

“저번부터 그렇고,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걱정 되는 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N님은 잘 해내실 테니까.”

“네에….”

“어떻게 되든 말이다…. 네가 있으면 잘 될 것 같구나. 여태껏 그래왔듯이 말이야….”

 그리 말하며 그는 내 손을 부여잡았다. 잔잔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대신 나도 모르게 낯선 단어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잘 된다는 게 어떤 거죠?”

 그것은 얼어붙은 세상처럼 날이 선 차가움.

“포켓몬의 해방이 잘 되는 일인 건가요?”

“미아야. 무슨 말을….”

“플라즈마단이 바라는 선의 세계라는 것이,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과 포켓몬을 떼어놓는 건가요? 그렇게 해놓고, 이 성을 지을 때처럼 계속 포켓몬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게 올바른 미래인 건가요?”

 로트님의 온화한 얼굴이 경직되어 간다. 

“정말 레지람이 N님을 영웅이라서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레지람은 한 번 하나를 멸망시켰는데 두 번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아요. 어쩌면 그 하얀 용은 파멸의 파트너로 N을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N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르지 않기로 했다. 단 한 번도 N을 세계를 구원할 선지자라고 여긴 적이 없다. 

“N의 마음에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죠? N의 마음이 해방되지 않았는데 그가 어찌 해방을 논할 수 있죠? 전부 거짓투성이야, 전부.”

 힘겹게 로트님의 손을 뿌리쳤다. 로트님은 경악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품에서 자란 것이 무리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돌연변이 새끼라는 것을. 개치스의 얄팍한 술수도 파악하지 못하는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그의 주름이 한층 깊어지고, 시선은 어지럽게 흩어진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에 후회는 없었다. 로트님을 실망시켰어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은 예전보다 더 명확한 박자로 울리고 있었다. 

 결국 로트님은 나에게 당분간 근신 처분을 내렸다. 나는 독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소녀와 N의 이야기가 끝난다면, 플라즈마단도 어떤 식이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세실리아도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맞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예전의 나인채로 머물 수 없었다. 해방도 꿈도 이상도 그 무엇도 없는 이곳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로 머물 수 없었다. 쿵쿵, 심장이 세찬 말발굽 소리처럼 전신을 울렸다.


 소녀가 성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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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