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쥰히카(용식빛나)] Unrelished 글/포켓몬2018. 6. 8. 00:53
쥰히카_Unrelished
아마도 너는 봄하늘 아래 피어나는 무구한 꽃을 사랑했던 것 같다. 고작 추측인 까닭은, 너를 알고 지낸 십 년이 넘는 세월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고사리 만한 손으로 흙장난을 하던 시절부터 옆에 있었지만. 네가 노란색 가방을 매고 신오우를 횡단하며 신화와 전설의 모험과 맞닥뜨렸을 때도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 다음에도, 그로부터 많은 해가 지난 다음에도, 나는 줄곧 네 가장 친근한 벗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던 너를 기억하기에, 추측할 뿐이다.
그래도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날이면, 창가에 앉아 고즈넉하게 밖을 바라보며 코코아로 몸을 데우곤 했으니까. 평소보다 가라앉은 머리카락에 조금 담담해 보이는 눈동자. 말없이 살며시 턱을 괴고 있으면 맞은 편에 내가 앉곤 했다. 앉아도 괜찮냐고, 그런 상투적인 예의가 없어도, 너는 언제나 그 자리를 허락해 줬다. 그 사실이 늘 기뻤지만 나 역시 말은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왜냐면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어린애 다운 미숙한 추측으로,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너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악하게도, 수 년 전까지 내가 너의 가장 훌륭한 이해자라고 자부했다. 나름 탄탄한 근거들도 있었다. 왜냐면 나는 네 고향친구이자, 소꿉친구이자, 라이벌 트레이너이자, 제일 오래 알고 지낸 벗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연과 호승지심과 세월이라는 낡고 허튼 무언가가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준다고 믿었다. 여행으로 너를 이끈 건 막무가내인 나였기에, 어쩌면 나는 너에게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너의 운명을 결정 지은 건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섣부른 망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너는 훨씬 전부터, 스스로를 빛으로 채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바보같던 나는 깨달음이 늘 한 걸음 늦었다.
열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수없이 많은 낯선 존재들에게 너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처음은 분명, 첫번째 포켓몬이었던 팽도리. 그 녀석은 너의 가장 아이 답고 순수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네 허리춤을 채운 다른 포켓몬들은 점점 더 많은 애정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모험길에서 만나게 된 별 같은 인연들. 나나카마도 박사님, 스모모나 아카네들, 겐, 시로나, 또는 고요우 같은 사천왕들. 그들은 만나자마자, 네 천진한 매력에 흠뻑 빠져버려 금세 친구가 되기로 맹세하였으며 또. 나로서는 선사할 수 없는, 숨막히고 치열한 배틀의 스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건 말 그대로 별과 같은 경지라, 조금 기대를 받은 신인 트레이너따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아카기와 같은 긴가단은 다른 의미로 네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생애 첫 분노와 적개심은 늘 차분했던 네 머리를 불 같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긴가단과 관련된 사건들은 늘 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든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차오를 수 있게, 넌 강해져야만 했다. 때로는 이기지 못한 울분을 못 참고 얼굴이 새빨개지고, 때로는 지키지 못한 슬픔에 젖어 눈물을 마구 쏟아내면서- 강해져야, 이길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간 강렬한 기억들은 전부,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자. 전부, 내가 짓게 할 수 없었던 표정들.
그리고 너는 신오우 가장 꼭대기에 올라 누구보다 빛나는 첫번째가 되었다. 최연소 챔피언, 신오우의 영웅, 전설을 다루는 수호자-. 무엇이든 너를 칭하는 멋진 수식어였고, 무엇이든 네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다만 나만이.
다만 나만이 너와 흙장난을 하던 시절에- 너의 손을 억지로 이끌어 예지호수로 데려갔던 시절에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번쩍이는 빛을 타고 너는 사라졌고, 나는 도태됐다. 그렇기에 이제는 추측 밖에 남지 않았다. 너에 대한 추측. 분명 수 년 전에는 자신감에 가득 찬 확신이었을 그 수많은 가설들. 모두 불확실한 맹점이 되어 공허한 머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추측 밖에 할 수 없게 된 날부터, 나는 결코 즐거울 수 없었다. 네가 봄꽃을 좋아하는 걸 아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꽃다발을 선심 쓰듯 선물하곤 했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네 맞은 편에 앉을 수 있게 된 이들도 무수히 많았다. 더이상은 특권은 없었고, 특등석도 사라졌다. 이제 나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네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미리 연락해 두지 않으면, 먼저 허락을 받아두지 않으면. 네 곁에는 늘 다른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자연스레 너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
그저 내가 첫 번째였을 뿐이다. 누구나 너를 만나면 맑게 개인 하늘을 보고 경탄하듯, 사랑에 빠지게 될 텐데. 다만 내가 그 아름다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첫번째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아아, 그제야 깨닫고 나면. 나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으면서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는 것이다. 마치 불경죄를 지은 신도처럼. 조용히 지옥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어째서 삶은 이토록 부지불식간에, 모든 행복을 상실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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