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W기반 회지 웹공개] 불꽃춤(Fiery Dance)- 5. 세실리아 글/포켓몬 회지 웹공개-불꽃춤(2015)2018. 7. 24. 15:04
5. 세실리아
며칠 지나지 않아 소녀가 다크 스톤을 입수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침내 소녀가 챔피언 로드로 향하게 되자, 성은 상당히 분주해졌다. 다크 트리니티에게 다크 스톤을 빼앗도록 시키면 될 것을, 굳이 N님은 소녀와 일대일로 결판을 짓기를 원했다. 어줍은 정의심과 비껴간 올곧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어차피 N님은 내세우기 좋은 깃발일 뿐, 플라즈마단의 열쇠는 개치스님이 쥐고 있었다. N님을 키운 것도, 해방이라는 환상을 덧씌운 것도, 플라즈마단을 조직한 것도 개치스님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를 거둬준 로트님은 휘장만 찬란한 플라즈마단의 썩어 문드러진 속살을 모르는 천진한 사람이라는 것도…플라즈마단에서 오랜 기간 있었던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참 밖을 떠돌던 세실리아가 돌연 성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깜깜한 그늘이 깔린 방 안에서 그녀는 단복을 벗고 말끔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낯빛은 어두웠지만 몸새가 정갈했다.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미련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새하얀 시트 위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앉은 그녀는 감감한 그늘 속에서도 찬연했다.
또렷한 눈망울의 그녀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 날에 대해 이야기 해줄게.”
나에게는 전해야겠다고, 그렇게 덧붙이며 세실리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꽤나 먼 옛날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어둔 밤, 나는 숲으로 도망쳤어.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였지.
나는 미아처럼 고아였어. 다른 점이라면, 나는 고아원에서 자라지 않고 먼 친척의 손에서 자랐다는 거야.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가까운 친척도 이웃도 남아있질 않았는데…그러다 어찌어찌 연락이 닿은 먼 친척이 있는 빌리지 브릿지로 가게 된 거지.
먼 친척은 악기를 만드는 것이 업이었던 중년 사내였어. 서글서글한 외모에 아담한 체격을 가진 그는 어릴 적 포켓몬을 데리고 여행도 했더래. 그는 외모만치나 마음도 너그러워, 그다지 연락도 없었던 먼 친척의 아이를 맡아서 키울 결심을 세운 거야. 나를 업어온 그는 작업장에서 한나절 내내 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어,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었지. 때때로 유년시절의 경험을 살려 어린 조카에게 포켓몬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어. 그밖에 수많은 맛난 음식과 재미난 장난감들, 즐거운 악기들을 그는 내게 선물했단다.
그가 건네준 것 중에 내 마음에 유독 들었던 것은 작은 하늘색 하모니카였어. 앙증맞은 꼬지보리가 새겨진 하모니카는 내 작은 입술이 닿으면 잘랑잘랑 살가운 울음을 냈지. 나는 사내에게서 배운 곡조를 하모니카로 읊으며, 가느다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춤을 추곤 했더랬지. 그러면 사내는 방글방글 함박웃음을 흘리며 쿵닥쿵닥 손발로 박수를 쳐줬어.
비록 일찍 부모를 여의였지만 난 행복했어. 행복이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내게로 돌아온 것 같았달까. 사내는 자신이 가진 감성과 지식을 전부, 내게 내어주었어. 마치 제 딸인 것 마냥, 어르고 아끼기를 마다하질 않았지. 나도 그를 아비처럼 따랐고. 그 옆에서 언젠가 크면 구름시티로 가서 춤과 노래를 배워보고 싶다는 꿈도 키웠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전부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데 인간의 생이란 예기치 못한 파도에 송두리째 뒤집히곤 하잖니?
어느 밤, 그가 술에 잔뜩 절어 귀가했어. 거실에서 악보를 읽고 있던 난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대번 알았지. …평소의 사람 좋은 웃음기는 사라지고, 썩은 생선처럼 눈빛이 흐릿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내가 몸을 움츠리자,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내 어깨를 왁살스레 잡아챘어. 그리고, 그리고는… 눈이 뒤집힌 황소처럼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 머리, 팔, 어깨, 다리…. 우악스런 손길이 점점 내 몸을 감치자, 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책으로 그의 머리를 세게 쳤고…그가 잠시 머리를 붙잡고 멈춰선 사이, 재빨리 몸을 굽히고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어. 날 찾는 사내의 목소리가 천둥번개처럼 쩌렁쩌렁 뒤를 쫓아왔어. 그럴수록 맨발로 마구 달음박질쳤어.
얼마나 내달렸을까, 난 이름 모를 풀숲에 다다랐지. 헉헉 차오르는 숨을 여미지도 못하고 근처 나무에 아무렇게나 기댔는데, 어느새 발밑까지 거무죽죽한 어둠이 깔려있었어. 종알종알 귀뚤뚜기만이 시끄럽게 울어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어. 연못에서 잉어킹이 뻐끔하고 입술을 벌리고 튀어 오르자, 그제야 정신이 난 거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고…. 이제는 더 이상 마음도 몸도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러자 투명한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어. 이젠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이 없다…. 세상은 여리고 어린 소녀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해. 다정함을 주고 또 버림을 주다니. 난 고작 열 살이었는걸. 시야를 가린 촉촉한 눈물을 닦아내자 까무룩한 어둠 밖에 보이질 않고, 속은 더 아득하고 처연해, 끝도 없고 색도 없는 구멍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짙은 검정뿐인 시야에,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스며들었어.
눈물을 흘린 탓에 헛것을 본 걸까? 그런데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어른거리는 거야. 헛것이 아니었던 거지.
그것은 포켓몬이었어. 부슬부슬 하얀 털과 불꽃너울 같은 주홍색 날개를 두른 포켓몬. 검은 얼굴 한가운데 박힌 날이 선 눈은 전기돌처럼 시퍼렇게 빛이 났지만, 어쩐지 상냥한 눈빛을 가진 포켓몬. 난 처음 보는 포켓몬이었어. 이렇게 크고 화려한 포켓몬은 본 적이 없었거든. 더군다나 선녀처럼 하늘거리는 빛을 감고 있다니…. 그 포켓몬은 예전에 너에게 말했던, 그래. 불카모스였어.
포켓몬은 춤을 추기 시작했어. 먹색으로 물든 밤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몸이 달처럼 떠올라 작은 별빛을 이끌었고. 깃털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다가 불새처럼 강직하게 날아올랐지. 그러다 이내 빙그르르, 나긋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촛불처럼 타오르는 날개를 펄럭였어. 불카모스의 보드라운 몸짓은 내 눈앞에서, 그러니까 나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어.
호젓한 하늘 아래 일렁이는 춤에 넋을 잃고 말았어. 이토록 아름다운 춤사위라니, TV의 포켓몬 뮤지컬에서도 본 바가 없었으니까. 내 두 눈의 눈물은 어느새 마르고, 초롱초롱한 별빛이 박혀 있었지. 그래. 그 춤을 볼 때만큼은 내 본래의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무구하고 티 없는 그것들을….
바스락. 하고 등 뒤에서 나무가 밟히는 소리가 났어.
포켓몬은 춤을 멈추고, 난 뒤를 돌아보았어. 그 자리에는 초목과 같이 소년이 서 있었단다. 무던해 보이지만 경직된 얼굴의 소년…. 그는 하얀 몸을 이끌고 사뿐히 걸어오며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넸어.
그 모습을 시야에 담고, 그 목소리를 두 귀로 확인하자 내 심장이 거인에게 밟힌 듯 쿵쿵 내려앉았어. 큼지막한 발자국이 가슴에 찍히고 멍이 들고, 멍이 든 자리에는 미열이 나고 투닥대는 화음이 울렸고….
응, 그래. 이건 내가 N님을 만난 날의 이야기야.
****
이야기를 마치고 세실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가 겪었던 일들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가 묻지 못해 알지 못했던, 묵혀두었던 그녀의 설움과 맞닥뜨리자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그녀에게 섭섭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세실리아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이젠 그 먼 친척의 소재조차 모른다고. 중요한 것은 현재라고….
“그래도 나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소녀의 얼굴을 보고 온 날, 계단 위에서 눈물을 쏟던 세실리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성으로 돌아오고, 오래된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고, 응어리진 것을 모두 풀어내면…그녀는 평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세실리아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덤덤했다.
“나아졌다라…. 그저 인정했을 뿐이야. N님에게 해방이 온다면…그걸 누군가 줄 수만 있다면. 그 주체가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그걸로, 괜찮은 거야?”
나는 그녀가 나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녀가 나아지기 위해서 아직 남은 것들이 많았다.
“으응.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아. 고마워, 미아.”
세실리아는 창 너머의 머나먼 하늘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는 N님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 날의 꿈결 같던 불꽃춤을 떠올리는 걸까.
어느새 하늘에서 푸른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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