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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실리아


며칠 지나지 않아 소녀가 다크 스톤을 입수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침내 소녀가 챔피언 로드로 향하게 되자, 성은 상당히 분주해졌다. 다크 트리니티에게 다크 스톤을 빼앗도록 시키면 될 것을, 굳이 N님은 소녀와 일대일로 결판을 짓기를 원했다. 어줍은 정의심과 비껴간 올곧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어차피 N님은 내세우기 좋은 깃발일 뿐, 플라즈마단의 열쇠는 개치스님이 쥐고 있었다. N님을 키운 것도, 해방이라는 환상을 덧씌운 것도, 플라즈마단을 조직한 것도 개치스님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를 거둬준 로트님은 휘장만 찬란한 플라즈마단의 썩어 문드러진 속살을 모르는 천진한 사람이라는 것도…플라즈마단에서 오랜 기간 있었던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참 밖을 떠돌던 세실리아가 돌연 성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깜깜한 그늘이 깔린 방 안에서 그녀는 단복을 벗고 말끔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낯빛은 어두웠지만 몸새가 정갈했다.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미련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새하얀 시트 위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앉은 그녀는 감감한 그늘 속에서도 찬연했다. 

 또렷한 눈망울의 그녀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 날에 대해 이야기 해줄게.”


 나에게는 전해야겠다고, 그렇게 덧붙이며 세실리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꽤나 먼 옛날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어둔 밤, 나는 숲으로 도망쳤어.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였지.

 나는 미아처럼 고아였어. 다른 점이라면, 나는 고아원에서 자라지 않고 먼 친척의 손에서 자랐다는 거야.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가까운 친척도 이웃도 남아있질 않았는데…그러다 어찌어찌 연락이 닿은 먼 친척이 있는 빌리지 브릿지로 가게 된 거지. 

 먼 친척은 악기를 만드는 것이 업이었던 중년 사내였어. 서글서글한 외모에 아담한 체격을 가진 그는 어릴 적 포켓몬을 데리고 여행도 했더래. 그는 외모만치나 마음도 너그러워, 그다지 연락도 없었던 먼 친척의 아이를 맡아서 키울 결심을 세운 거야. 나를 업어온 그는 작업장에서 한나절 내내 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어,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었지. 때때로 유년시절의 경험을 살려 어린 조카에게 포켓몬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어. 그밖에 수많은 맛난 음식과 재미난 장난감들, 즐거운 악기들을 그는 내게 선물했단다. 

 그가 건네준 것 중에 내 마음에 유독 들었던 것은 작은 하늘색 하모니카였어. 앙증맞은 꼬지보리가 새겨진 하모니카는 내 작은 입술이 닿으면 잘랑잘랑 살가운 울음을 냈지. 나는 사내에게서 배운 곡조를 하모니카로 읊으며, 가느다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춤을 추곤 했더랬지. 그러면 사내는 방글방글 함박웃음을 흘리며 쿵닥쿵닥 손발로 박수를 쳐줬어.

 비록 일찍 부모를 여의였지만 난 행복했어. 행복이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내게로 돌아온 것 같았달까. 사내는 자신이 가진 감성과 지식을 전부, 내게 내어주었어. 마치 제 딸인 것 마냥, 어르고 아끼기를 마다하질 않았지. 나도 그를 아비처럼 따랐고. 그 옆에서 언젠가 크면 구름시티로 가서 춤과 노래를 배워보고 싶다는 꿈도 키웠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전부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데 인간의 생이란 예기치 못한 파도에 송두리째 뒤집히곤 하잖니?

 어느 밤, 그가 술에 잔뜩 절어 귀가했어. 거실에서 악보를 읽고 있던 난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대번 알았지. …평소의 사람 좋은 웃음기는 사라지고, 썩은 생선처럼 눈빛이 흐릿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내가 몸을 움츠리자,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내 어깨를 왁살스레 잡아챘어. 그리고, 그리고는… 눈이 뒤집힌 황소처럼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 머리, 팔, 어깨, 다리…. 우악스런 손길이 점점 내 몸을 감치자, 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책으로 그의 머리를 세게 쳤고…그가 잠시 머리를 붙잡고 멈춰선 사이, 재빨리 몸을 굽히고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어. 날 찾는 사내의 목소리가 천둥번개처럼 쩌렁쩌렁 뒤를 쫓아왔어. 그럴수록 맨발로 마구 달음박질쳤어.

 얼마나 내달렸을까, 난 이름 모를 풀숲에 다다랐지. 헉헉 차오르는 숨을 여미지도 못하고 근처 나무에 아무렇게나 기댔는데, 어느새 발밑까지 거무죽죽한 어둠이 깔려있었어. 종알종알 귀뚤뚜기만이 시끄럽게 울어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어. 연못에서 잉어킹이 뻐끔하고 입술을 벌리고 튀어 오르자, 그제야 정신이 난 거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고…. 이제는 더 이상 마음도 몸도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러자 투명한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어. 이젠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이 없다…. 세상은 여리고 어린 소녀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해. 다정함을 주고 또 버림을 주다니. 난 고작 열 살이었는걸. 시야를 가린 촉촉한 눈물을 닦아내자 까무룩한 어둠 밖에 보이질 않고, 속은 더 아득하고 처연해, 끝도 없고 색도 없는 구멍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짙은 검정뿐인 시야에,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스며들었어.

 눈물을 흘린 탓에 헛것을 본 걸까? 그런데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어른거리는 거야. 헛것이 아니었던 거지. 

 그것은 포켓몬이었어. 부슬부슬 하얀 털과 불꽃너울 같은 주홍색 날개를 두른 포켓몬. 검은 얼굴 한가운데 박힌 날이 선 눈은 전기돌처럼 시퍼렇게 빛이 났지만, 어쩐지 상냥한 눈빛을 가진 포켓몬. 난 처음 보는 포켓몬이었어. 이렇게 크고 화려한 포켓몬은 본 적이 없었거든. 더군다나 선녀처럼 하늘거리는 빛을 감고 있다니…. 그 포켓몬은 예전에 너에게 말했던, 그래. 불카모스였어.

 포켓몬은 춤을 추기 시작했어. 먹색으로 물든 밤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몸이 달처럼 떠올라 작은 별빛을 이끌었고. 깃털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다가 불새처럼 강직하게 날아올랐지. 그러다 이내 빙그르르, 나긋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촛불처럼 타오르는 날개를 펄럭였어. 불카모스의 보드라운 몸짓은 내 눈앞에서, 그러니까 나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어.

 호젓한 하늘 아래 일렁이는 춤에 넋을 잃고 말았어. 이토록 아름다운 춤사위라니, TV의 포켓몬 뮤지컬에서도 본 바가 없었으니까. 내 두 눈의 눈물은 어느새 마르고, 초롱초롱한 별빛이 박혀 있었지. 그래. 그 춤을 볼 때만큼은 내 본래의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무구하고 티 없는 그것들을….

 바스락. 하고 등 뒤에서 나무가 밟히는 소리가 났어.

 포켓몬은 춤을 멈추고, 난 뒤를 돌아보았어. 그 자리에는 초목과 같이 소년이 서 있었단다. 무던해 보이지만 경직된 얼굴의 소년…. 그는 하얀 몸을 이끌고 사뿐히 걸어오며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넸어. 

 그 모습을 시야에 담고, 그 목소리를 두 귀로 확인하자 내 심장이 거인에게 밟힌 듯 쿵쿵 내려앉았어. 큼지막한 발자국이 가슴에 찍히고 멍이 들고, 멍이 든 자리에는 미열이 나고 투닥대는 화음이 울렸고….

 응, 그래. 이건 내가 N님을 만난 날의 이야기야.


****


이야기를 마치고 세실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가 겪었던 일들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가 묻지 못해 알지 못했던, 묵혀두었던 그녀의 설움과 맞닥뜨리자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그녀에게 섭섭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세실리아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이젠 그 먼 친척의 소재조차 모른다고. 중요한 것은 현재라고….

“그래도 나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소녀의 얼굴을 보고 온 날, 계단 위에서 눈물을 쏟던 세실리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성으로 돌아오고, 오래된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고, 응어리진 것을 모두 풀어내면…그녀는 평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세실리아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덤덤했다.

“나아졌다라…. 그저 인정했을 뿐이야. N님에게 해방이 온다면…그걸 누군가 줄 수만 있다면. 그 주체가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그걸로, 괜찮은 거야?”

 나는 그녀가 나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녀가 나아지기 위해서 아직 남은 것들이 많았다. 

“으응.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아. 고마워, 미아.”

 세실리아는 창 너머의 머나먼 하늘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는 N님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 날의 꿈결 같던 불꽃춤을 떠올리는 걸까. 

 어느새 하늘에서 푸른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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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4. 영웅의 그림자


두 영웅이 있었다. 

 두 영웅은 같은 시각,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두 영웅은 위대한 드래곤 포켓몬과 힘을 합쳐 하나를 건국했다. 

 하나에서 둘로 나뉜 형제의 몸처럼, 두 사람의 의견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형은 진실을 원했고 동생은 이상을 쫒았다. 형제의 마음이 갈라지듯 드래곤 포켓몬도 몸을 둘로 나누었다. 

 진실을 찾아 새로운 선의 세계로 이끄는 하얀 용과 이상을 찾아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이끄는 검은 용. 

 두 마리의 용은 각각 형과 동생의 편이 되어 전쟁을 시작했다. 하얀 용이 내뿜는 거친 화염의 불길이 산천초목을 불태웠다. 검은 용이 내리친 푸른 번개의 칼날이 창천과 대지를 갈랐다. 

 두 형제가 세운 나라가 두 형제로 인해 멸해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화해를 청하려 했다. 그러나 형제의 아들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온 누리는 격정과 불안에 휘말렸다….

 결국 두 드래곤 포켓몬은 번개와 불꽃으로 하나를 순식간에 멸망시키고 사라졌다.


하나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 이야기다. 한낱 구닥다리 옛말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라이트 스톤과 다크 스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우리- 플라즈마단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모두들 진실을 추구하고 선의 세계를 이룩할 하얀 용이야말로 N님에게 어울린다고 믿고 있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전설이 진짜라면, 전설 속 포켓몬은 이미 한 번 세상을 쇠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존재다. 그런 존재가 두 번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 두 마리의 용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어지럽고 타락한 지금의 세계를 본다면…. 그렇다면 같은 결정을 내릴 지도 모른다. 이토록 추하고 더러워진 세상이라면 차라리 부수는 게 낫다고, 그렇게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


용나선탑에 투박한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N님은 연녹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겉모습은 마치 새와 같이 부드럽고 유연한, 하얀 용. 레지라무는 N님 앞에 나긋하게 고개를 숙였다. 용은 마치 왕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처럼 경건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얀 용은 N님을 자신의 영웅으로 택했다.

 세실리아는 내 생각만큼 들떠있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하듯 서 있었으나, 입가에는 약간의 웃음기도 없었다.

 귓가에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워커가 땅에 부딪히는 익숙한 소리. 나는 시선을 돌렸다.

 소녀가 차오르는 숨을 겨우 참아내고 N님의 앞에 서 있었다. 세실리아의 얼굴이 돌연 사색이 되었다. 반면 N님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 그의 눈에 도대체 무엇이 보였기에, 저 소녀가 얼마나 특별하기에, 그렇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약속을 건네는 것일까.

 자신이 한발 늦은 것을 깨달은 소녀는 이를 악 물고 외쳤다. 그녀가 꿈꾸는 이상을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분명 행복할 거라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새로운 희망은 찾아올 거라고. 그렇기에 그를 막아낼 것이라고. 

 그리고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소녀를 바로 보지 않고 등을 졌다. 소녀는 목소리마저 세실리아와 비슷했지만 소녀의 언동은 세실리아와 닮은 바가 하나도 없었다. 소녀의 얼굴은 세실리아와 빼다 박았지만, N님은 세실리아가 아닌 소녀만을 눈과 귀에 담았다.

 하얀 용이 푸르르 새빨간 화염을 뱉었다. N님은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소녀는 담담하게 그의 뒷모습을 구시했다. 그녀의 눈에서 타오르는 결의는 사뭇 무겁고 단연했다. 그리고 나는 세실리아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오래된 전설처럼 퇴색한 계단…. 세실리아의 몸은 마른 솜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솜을 이고 걷는 나귀처럼 묵묵히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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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8. 6. 8. 00:53

[쥰히카(용식빛나)] Unrelished 글/포켓몬2018. 6. 8. 00:53

쥰히카_Unrelished

 

아마도 너는 봄하늘 아래 피어나는 무구한 꽃을 사랑했던 것 같다. 고작 추측인 까닭은, 너를 알고 지낸 십 년이 넘는 세월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고사리 만한 손으로 흙장난을 하던 시절부터 옆에 있었지만. 네가 노란색 가방을 매고 신오우를 횡단하며 신화와 전설의 모험과 맞닥뜨렸을 때도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 다음에도, 그로부터 많은 해가 지난 다음에도, 나는 줄곧 네 가장 친근한 벗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던 너를 기억하기에, 추측할 뿐이다.

 

그래도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날이면, 창가에 앉아 고즈넉하게 밖을 바라보며 코코아로 몸을 데우곤 했으니까. 평소보다 가라앉은 머리카락에 조금 담담해 보이는 눈동자. 말없이 살며시 턱을 괴고 있으면 맞은 편에 내가 앉곤 했다. 앉아도 괜찮냐고, 그런 상투적인 예의가 없어도, 너는 언제나 그 자리를 허락해 줬다. 그 사실이 늘 기뻤지만 나 역시 말은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왜냐면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어린애 다운 미숙한 추측으로,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너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악하게도, 수 년 전까지 내가 너의 가장 훌륭한 이해자라고 자부했다. 나름 탄탄한 근거들도 있었다. 왜냐면 나는 네 고향친구이자, 소꿉친구이자, 라이벌 트레이너이자, 제일 오래 알고 지낸 벗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연과 호승지심과 세월이라는 낡고 허튼 무언가가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준다고 믿었다. 여행으로 너를 이끈 건 막무가내인 나였기에, 어쩌면 나는 너에게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너의 운명을 결정 지은 건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섣부른 망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너는 훨씬 전부터, 스스로를 빛으로 채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바보같던 나는 깨달음이 늘 한 걸음 늦었다.

 

열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수없이 많은 낯선 존재들에게 너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처음은 분명, 첫번째 포켓몬이었던 팽도리. 그 녀석은 너의 가장 아이 답고 순수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네 허리춤을 채운 다른 포켓몬들은 점점 더 많은 애정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모험길에서 만나게 된 별 같은 인연들. 나나카마도 박사님, 스모모나 아카네들, , 시로나, 또는 고요우 같은 사천왕들. 그들은 만나자마자, 네 천진한 매력에 흠뻑 빠져버려 금세 친구가 되기로 맹세하였으며 또. 나로서는 선사할 수 없는, 숨막히고 치열한 배틀의 스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건 말 그대로 별과 같은 경지라, 조금 기대를 받은 신인 트레이너따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아카기와 같은 긴가단은 다른 의미로 네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생애 첫 분노와 적개심은 늘 차분했던 네 머리를 불 같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긴가단과 관련된 사건들은 늘 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든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차오를 수 있게, 넌 강해져야만 했다. 때로는 이기지 못한 울분을 못 참고 얼굴이 새빨개지고, 때로는 지키지 못한 슬픔에 젖어 눈물을 마구 쏟아내면서- 강해져야, 이길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간 강렬한 기억들은 전부,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자. 전부, 내가 짓게 할 수 없었던 표정들.

 

그리고 너는 신오우 가장 꼭대기에 올라 누구보다 빛나는 첫번째가 되었다. 최연소 챔피언, 신오우의 영웅, 전설을 다루는 수호자-. 무엇이든 너를 칭하는 멋진 수식어였고, 무엇이든 네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다만 나만이.

 

다만 나만이 너와 흙장난을 하던 시절에- 너의 손을 억지로 이끌어 예지호수로 데려갔던 시절에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번쩍이는 빛을 타고 너는 사라졌고, 나는 도태됐다. 그렇기에 이제는 추측 밖에 남지 않았다. 너에 대한 추측. 분명 수 년 전에는 자신감에 가득 찬 확신이었을 그 수많은 가설들. 모두 불확실한 맹점이 되어 공허한 머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추측 밖에 할 수 없게 된 날부터, 나는 결코 즐거울 수 없었다. 네가 봄꽃을 좋아하는 걸 아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꽃다발을 선심 쓰듯 선물하곤 했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네 맞은 편에 앉을 수 있게 된 이들도 무수히 많았다. 더이상은 특권은 없었고, 특등석도 사라졌다. 이제 나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네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미리 연락해 두지 않으면, 먼저 허락을 받아두지 않으면. 네 곁에는 늘 다른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자연스레 너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

 

그저 내가 첫 번째였을 뿐이다. 누구나 너를 만나면 맑게 개인 하늘을 보고 경탄하듯, 사랑에 빠지게 될 텐데. 다만 내가 그 아름다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첫번째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아아, 그제야 깨닫고 나면. 나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으면서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는 것이다. 마치 불경죄를 지은 신도처럼. 조용히 지옥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어째서 삶은 이토록 부지불식간에, 모든 행복을 상실할 수 있는지.

 

 


:
Posted by 새벽(dawn)
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노도 글/포켓몬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_노도

 

수만 별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도 입에 담지 못한다. 진실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돌이켜왔던 나락의 파도가 궤를 달리해 무엇을 덮칠 지 모르는 탓이다. 기실 그다지 대단한 일도 아니다. 볼품없는 하나의 사항이다. 그것이 신오우 역사를 꿰뚫는 분수령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라도 조소를 터뜨릴 것이다. 그만큼 원인의 본질은 하찮기 그지 없었다. 깨달은 아카기조차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어느새 손목시계의 시침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숨겨진 세레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이 몇 번째인가, 세기를 그만둔 적은 없다. 아카기는 수에 밝았기에, 정확히 인지하고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횟수가, 터무니 없이 많아진 지금을 경험한 횟수, 스스로도 내세울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침이 정확하게 북쪽을 가리켰다. 동그란 모자를 쓴 아담한 그림자가 그의 발 밑으로 깔렸다. 수없이 겪어온 광경이지만, 어쩐지 가슴의 고동은 반복할수록 거세지는 것 같았다. 이제 앙증맞은 분홍색 부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하얀 비니를 쓰고 하얀 목도리를 두른, 새빨간 코트의 소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단의 적을 마주쳐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길을 잘못 든 소꿉친구를 만난 마냥 걱정스런 얼굴의- 양가적인 표정의 소녀가.

 

그리고 그는 웃었다. 각인된 기억은 미래 예지와 다름 없다. 그래서 좋았다. 되돌림을 멈출 수 없었다.

 

“…안녕?”

 

어제 싸우고 헤어진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어색한 머뭇거림. 열살도 넘게 차이 나는 적의 보스에게, 그런 말투를 구사하는 순진하고 겁 없는 소녀. 소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새하얀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아카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이 좋았다. 그녀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증거였으니까.

 

당신을 막으러 왔어. 예상했겠지만.”

 

그래.”

 

놀라지 않네? 정말 알고 있던 사람처럼. 아님, 감정이 없어서 그런 건지….”

 

이미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그럼, 배틀 해 줄래?”

 

그녀는 정말, 소꿉친구에게 마실 가듯 자연스레 배틀을 청했다. 처음에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연민하고 있다는 걸. 연민. 그토록 깊고 측은한 감정을 고작 10살 짜리 소녀가 그에게 품고 있다는 걸.

 

배틀은 수십 회를 상연한 연극처럼, 자연스레 같은 순서로 반복된다. 그는 이번에도, 구태여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첫 번째와 똑같은 명령을 내린다. 왜냐면, 그런 개입 한두 가지로 미래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그는 이 사실을 이미 몇 회차 전에 증명했다), 또 미래의 변화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악의 보스에게 승리할 것이다. 신오우 역사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쓰러진 악의 보스는? 승리한 소녀는?

 

답하자면.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그녀는 신오우의 평화를 수호하고자 하였으나, 그렇다고 한 불쌍한 청년의 삶에서 눈을 돌릴 만큼 매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천진한 10살의 소녀가 품은 연민의 감정이란, 스스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의 대상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신오우에서 가장 끔찍한 인간을 혐오하는 대신 동정하는 사람. 그가 얼마나 크고 따뜻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품어졌는지. 무한한 포용을 느낄 적마다 그는 생을 느꼈다. 살아있음에 감복했다.

 

그래, 이런 볼품 없는 한 가지 사항이 모든 일의 사단이었다.

 

아카기는 웃었다. 소녀는 왜 웃는 거야? 하고 울상이 되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수록, 소녀는 슬퍼졌으나. 그녀를 이해하게 될 수록, 그는 기뻐진다는 사실을. 소녀는 너무 어려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아마 어른이 되어도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신오우를 구했구나, 축하한다. 몇 회 전부터, 그가 이 연극에 추가한 새로운 대사였다. 진심으로 패배에 승복하는지, 혹은 소녀의 승리를 비꼬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말투. 그는 이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겉보기에는 둘 중 하나인 것 같았지만, 사실 어느 것도 답이 아니었다. 아카기는 진심이었다. 마음으로, 그녀의 과거와 미래에 온누리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었다. 그녀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그 축복을 빌어주는 이가 자격이 없다 해도-. 최소한 그는, 이 연극을 주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웃지 않는구나. 승리가 기쁘지 않은 거냐?”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압승을 거두어도, 혹은 벼랑 끝에 몰렸다 승리를 거머쥐어도. 소녀는 이날 이후로 웃지 않는다. 연극을 아무리 되풀이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자 그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 난제였다.

 

그래서 물었다. – 그동안의 상연에는 없었던, 애드리브 대사.

소녀는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로 되묻는다.

 

그러는 당신은, 어째서 웃는 거야? 지고 말았는데….”

 

답하지 않았다. 배우의 목표는 승패가 아니다. 연극을 성황리에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니, 주연으로 무대 위에 서는 것이다. 소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 굳이 입에 담지도 않았다.

 

오늘 이후로는 영영 행복해지지 못할 사람처럼….”

 

그 말은 마치, 소녀가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 같았다.

연극의 주인공인지도 깨닫지 못한 여배우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본에 없는 대사를 중얼거렸다.

 

“…마치 오늘을 기다린 사람처럼….”

“….”

 

소녀는 웃지 않는다. 이 날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웃지를 않는다.

주위 사람들은 저주라고 했다. 아카기라는 저주가 들러 붙어, 활기차고 어여쁜 소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버린 거라고 했다. 미신 따위는 신봉하지 않았건만, 아카기는 쉽게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실상, 그는 저주나 다름 없었다. 어리고 상냥한 소녀에게 들러붙어, 행복을 갉아먹고 사는 벌레.

 

그는 분명 노력했다. 찬란한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정말 그답지 않은 많은 시도를 했다. 전부 소용이 없었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하찮아서, 그녀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그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녀 곁에서 살아 숨쉬는 저주가 떨어져 나가면 된다. 아카기가 그녀를 떠나면 된다.

 

그러나 소녀라는 존재에서 멀어져 버리면, 그는 살아있음을 감지할 수 없었으므로. 정말로 세상을 미워할 뿐인 악한 주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기생하기로 했다.

소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하기 전으로. 소녀가 웃지 않게 된 시간- 그 전으로.

처음 만났던 그 날로. 그녀가 조금 아카기를 미워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수천 번 수 만번을 되돌리든-. 말라비틀어진 시간의 틈새에서 기생하기로 결심했다.

 

아카기는 흉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소녀가 한 말은, 예정된 마지막 대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연극은 끝을 고하고 있었다. 소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질 때. 그도 사라진다. 아니, 돌아간다. 그리고 재상연이다.

 

그는 허리춤에 숨겨둔 몬스터볼을 건드렸다. 세레비는 싫다고 했다. 작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더는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트레이너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세레비에게 고하는 한 줄의 명령과 함께- 연극은 막을 내렸다.

눈물을 떨어뜨릴 듯 아슬아슬한 빛의 동그란 눈동자가 필름처럼 동공에 찍히고,

 

늘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다음 회차도 즐기시길.

 

연극의 주관이자 주연의 공허한 외침이 텅 빈 객석에 울려 퍼졌다.

 


:
Posted by 새벽(dawn)
2017. 12. 4. 22:54

[썬문/구즈미월] 에나코코아 dream 글/포켓몬2017. 12. 4. 22:54

구즈미월_에나코코아, dream.

 


좋아하는 것은 에나코코아.”


!”


 미월의 말에 구즈마는 반사적으로 마시던 물을 뿜었다. 미월은 으엑, 지저분해,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구즈마는 되려 역정을 냈다.


, 꼬맹이, 뭘 그렇게 자꾸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 나는 스컬단 비밀암호를 외운 거 뿐인데? 전부 구즈마님이 좋아하는 거잖아. 집단구타, 갑주무사, 그리고...”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나지막이 읊는다.


에나코코아!”


어이, 놀리는 건 그만 둬.”


 물잔을 든 구즈마의 투박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미월이 예고없이 들이닥치기 전에, 구즈마는 방에서 에나코코아를 먹을지 그냥 물이나 마실지 고민하고 있었다. 목이 텁텁해서 물을 고른 게 다행이지, 에나코코아를 마시고 있었으면 장난질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왜 이게 놀리는 거야? 구즈마는 에나코코아가 부끄러워? 그건 모든 에나코코아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에나코코아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 말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건 엄연히 스컬단의 암호라고! 이걸 대지 않으면 네 방까지 못 들어 온단 말이야!”


시끄러워! 암호가 바뀐 지가 언젠데. 그리고 네 얼굴만 보면 조무래기 녀석들이 겁먹고 도망가서 제멋대로 아지트 안을 돌아다니는 거 아냐!”


 구즈마의 고함에 미월은 거짓울음을 짓는 꼬지지처럼 몸을 움츠린다.


--. 구즈마 무서워, 그렇게 소리나 지르고!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시커먼 스컬단 남자애들한테나 인기 있고-.”


네가 뭔 상관인데. 어서 썩 안 나가냐?”


. 내가 나가면 에나코코아 마시려고?”


조용히 안해?”


흐응-. 구즈마는 심술쟁이. 연약한 소녀에게 허구한날 소리만 지르고….”


 그래봤자, 무서워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누가 연약한 소녀냐? 혼자서 포 마을에 들어와 아지트에 있는 스컬단 녀석들을 다 무찌르고, 그 다음엔 릴리에와 별구름을 구한다고 에테르 재단에 쳐들어가 루자미네를 무력화하고, 울트라비스트와 싸우고 다음에는 알로라의 첫번째 챔피언 자리까지 거머쥔 미월이다. 그 누구도 연약하다고 칭하지 않을 테고, 외려 마주치면 벌벌 떨기까지 한다. 미월이 들어오자 꽁지가 빠져라 내뺀 스컬단 조무래기 녀석들을 봐라.


, 구즈마 위해서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 사왔는데.”


?”


 어느새 미월은 크로스 백에서 부시럭 거리며 작은 박스를 하나 꺼내 놨다. 며칠 전에 새로 출시된 에나코코아였다. 상자 겉면에는 뉴 블랜드- 더 감미롭고 달콤한-이라는 수식어를 귀여운 에나비가 웃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새로 나온 건데. 더 달고 맛있다는데. 관심 없니?”


! 내가, , 무슨.”


구즈마 얼굴 다 팔려서 싸네 마트 가서 이런 거 사 오지도 못하잖아~. 그렇다고 다른 애들에게 시키긴 좀 그렇고.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사왔는데. 갖고 싶지 않아?”


 구즈마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 가지고 있던 에나코코아는 통이 비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라니? 구즈마의 간식 거리를 쌓아두는 찬장을 채우는 심부름꾼이 있긴 있었다. 물론 스컬단의 조무래기였고. 하지만 그 녀석은 아지트에 위험 상황을 알리는 손짓을 자신을 멋지다고 칭찬해주는 제스쳐라고 착각하는 멍청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뉴 에디션이니 뉴 블랜드니 하는 걸 센스 있게 사오는 재주는 없었을 테다.


사왔다면, 받아주도록 하지.”


으음~? 그건 불합격 멘트인데?”


하아?”


 미월은 두 손으로 엑스 자를 표시하며 악동처럼 웃었다. , 나왔다. 한참 구즈마를 골릴 때 미월의 표정.


구즈마는 말이야, 무슨 츤데레 악당도 아니고, 그런 쓸모 없는 허세는 필요가 없단 말이지. 여자애들이 원하는 건, 그거야. 솔직하고 담백하면서 다정한 남자아이!”


복잡하네.”


구즈마처럼 막-소리 지르고. 거칠게 행동하고. 또 틱틱 거리면서 솔직하지 못한 남자는 인기가 없다 이거야. 알겠어?”


“…내가 왜 인기가 있어져야 하지?”


 근본적인 반문에 미월도 살짝 당황한 모양이다. 어라, 예상치 못한 전개였나.


그야 구즈마도 언젠가 여, 여자애를 좋아하고 사귀고 결혼해야 하니까! 그건 인간의 섭리니까 구즈마도 그렇게 되어야하지 않겠어? 설마 비혼주의자는 아니지?”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모르지만…. ,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한 여자랑 사는 거 아냐. 그럼 그 여자만 나를 좋아하면 되지 왜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하지?”


? 그 그건….”


 글쎄, 장난꾸러기인 미월도 여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턱에 손을 갖다대고 나름 골몰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잔뜩 깜빡이며 애써 답을 내본다.


그 여자애한테, 인기 있어지는 법이지.”


말이 달라졌는데?”


어쨌거나 대체적으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가 되면, 장래 구즈마의 아아내가 될 여자애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어? 일반론이야, 일반론!”


그래서. 그게 지금 네가 나를 괴롭히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어쩐지 구즈마의 시선은 미월이 들고 있는 신상 에나코코아에 꽂혀있다. 그걸 미월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자애가 뭔가를 선물하면, 아까처럼 흥 받아주도록 하지이런 게 아니라-. 좀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고마워. 너의 마음 잘 받을게하고 스위트한 미소를 날려 준다던지 하는게 낫단 말이야.”


너 미쳤냐?”


왜애!”


스위트한 미소라니 내가 가능할 거 같냐?”


 미월은 잔뜩 볼을 부풀리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가능해! 인간은 뭐든 가능해! 내가 챔피언이 된 거 보단 쉬울 거야!”


하아? 너 정말 말도 안 되는됐어. 그건 필요 없다.”


.”


 의외로 구즈마는 너무나 순순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상 에나코코아를 포기선언했다.


됐어. 그렇게까지 먹고 싶지는 않다. 네 말도 안되는 투정을 받아주면서까지 내가 왜….”


왜냐니, 인기가 있어지려면….”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됐어. 장난 치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뭐야. 갑자기 진지해져선. 구즈마 백수라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정곡을 찌르지 말아줬으면 한다. 구즈마는 뒤를 돌아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리 조무래기가 바보들이라도 새로운 걸 사오는 것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미월의 갖은 떼와 투정을 받아주는 것보단, 그게 수월하겠지.


, 됐어. 기왕 사 온 거니 그냥 두고 갈래. 구즈마는 에나코코아를 엄--좋아하니까. 내가 엄--선심 써서 두고 가는 거야.”


뭐냐, 그 건방진 태도.”


구즈마 흉내거든. 구즈마는 만날 그러니까~.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엄청 선심 쓴다는 듯이.”


왜 네가 삐지냐?”


흐응. 나 안 삐졌거든. . 이제 갈 건데. , 갈 건데….”


 간다 간다 말만 하고 미월이는 좀체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구즈마는 다시 뒤를 돌아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냐. 지금 나가서 리자몽 탔으면 벌써 너네 집까지 갔겠다.”


으음. 그래서 갈 거라고. 근데 너무 잠깐 있다 가는 거 같지 않니?”


 예전 같으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했겠지만. 구즈마도 몇 달을 미월을 상대하다보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이건 삐졌으니 달래달라는 신호다. 그냥 보

내지 말고, 더 놀아달라는 얘기다.


“…그럼 네가 사 온 에나코코아라도 마시고 가던지.”


오오! 방금 그건 합격!”


“…?”


 언제 삐죽거렸냐는 듯 미월은 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방금 그 권유, 완전 좋았어. 그래, 여자애를 이렇게 그냥 보내면 안 되는 거야. 알겠니?”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데나 앉아라. 뜨거운 물 가져올 테니.”


 뭐가 좋은지, 미월은 어느새 방긋방긋 미소를 흘리며 먼지 투성이 소파에 털썩 앉는다. 소녀의 변덕이란 종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구즈마는 낡은 전기 주전자(근처 마을에서 주워온 것이다)에 물을 담아 끓였다. 티 스푼을 꺼내 두 잔의 에나코코아를 탔다. 하얀 잔을 미월에게 건네며, 구즈마가 퉁명스레 군다.


먹어라. 네가 사왔으니.”


, 말투는 별로지만. 권하는 건 합격이니까 됐어~.”


 라고 제멋대로 또 평가를 내리곤 뜨거운 에나코코아를 후루룩 잘도 마신다. 구즈마도 한 모금 마셨다.


! 달고 맛있어.”


“…….”


구즈마도 그렇지?”


“…어어.”


 확실히 예전 에나코코아보다 훨씬 달작지근하고 깊은 풍미가 있었다. 미월이 하는 짓이지만 오늘은 제법 괜찮은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아아, 역시 모든 해봐야 안다니깐. 안 그래, 구즈마?”


. 음식도 먹어봐야 아는 거지.”


사람도 그래~. 사람도 다 겪어봐야 그때야 아는 거거든.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이 가진 가치나 깊이를 알 수 없어.”


갑자기 무슨 할애비 같은 소리냐?”


구즈마는 미월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뜬금없이 또 무슨 소리냐며 정색하려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걸 감지했다. 미월은 때때로 도를 터득한 현자처럼 어렵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툭툭 내뱉곤 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이 나이에는 분명 더 걸맞을 텐데.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녀의 내면을 너무 어른스럽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구즈마는 어른을 싫어했기에, 이미 미월이의 마음이 어른이 되어버렸다면 조금 슬플지도 모른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그거나 마셔.”


미월이는 구즈마에 대해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그건 아마구즈마가 스컬단의 보스라는 거, 섬 순례나 다른 일에서 실패한 아이들을 모아서 도피처를 만들

어주고 있다는 거그리고 구즈마도 그랬다는 것 정도 일까나….”


 구즈마도 그랬다는 말은. 구즈마도, 실패했었단 이야기다. 그렇게 포켓몬 배틀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는데도 섬의 캡틴이 되지 못했단 사실을 일컫는 거다. 구즈마는 소리를 또 버럭 질러야 했을까?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 말을 하는 미월이 유독 얌전하고 차분했던 탓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만이, 구즈마를 알게 해주는 걸까?”

“….”


왜냐면 봐봐. 나도 사람들이 아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되게 어마어마한 영웅에 천재 같잖아. 그런데 그게 나에 대해 정말 아는 사실이냐구.”


, 철학자가 되고 싶은 거냐?”


아아니. 나는 그냥그런 겉으로 보였던 성공이나 실패 말구, 이렇게 구즈마가 에나코코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구즈마에 대해 더 많이 알려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야.”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미월은 굳이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를 사들고 구즈마가 있는 아지트까지 찾아온 걸까. 구즈마는 뜨거운 김이 나오는 에나코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긴. 챔피언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보단, 사람 괴롭히길 좋아하는 치졸한 꼬맹이라는 게 더 너를 설명해줄지도 모르겠군.”


말이 심하네!”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라. 그리고 반성해라.”


난 별로그런 게, 아닌데.”


 방금 전까지 진중한 말들을 쏟아 내놓고, 또 입술을 삐죽거린다. 구즈마가 보기에도, 미월은 여자애의 일반론을 얘기하기엔 변덕이 심하다.


난 그냥 구즈마를 더 알고 싶을 뿐이야. 구즈마가 뭘 좋아하고, 구즈마가 좋아하는 에나코코아가 어떤 맛인지 궁금할 뿐이라고.”


 어쩐지 가슴을 쥐어짜내서 말하는 듯, 미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구즈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청한 소리를 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헤에? 정말 그걸 묻는 거야? 구즈마는 바보네!”


 잔뜩 힌트를 줘도 못 맞추네! 불합격이야. –라며 또 핀잔을 준다.


그건 간단한 거라고! 구즈마가 미월이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미월이가 구즈마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중요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도.”


“…미래를 어디까지 설계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너 왜 자꾸 스스로 미월이 미월이 부르냐? 설마 귀엽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 정말! 눈치도 없고! 그거나 마셔!”



그리곤 미월은 홍당무처럼 물든 얼굴을 휙 돌렸다. 구즈마는 역시, 종잡을 수 없는 꼬맹이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홀짝였다


옆에 앉은 사람의 온기 덕인지, 평소보다 따뜻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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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3. 조우 


전기돌들이 파삭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거슬렸다. 전기돌 동굴은 전류가 풍부해 전기 타입 포켓몬에게 아주 좋은 서식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그다지 내 흥미를 돋우지 못했다. 발밑아래 파쪼옥 몇 마리가 쪼물쪼물 기어갔다. 몇몇 여자단원들은 귀엽다며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런 작고 귀엽다고 여겨지는 포켓몬조차도 내게는 그저 귀찮은 장애물일 뿐이었다. 

 오랜만의 임무였고,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그게 하필 칙칙한 동굴 안이라 해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산보 따위가 아니었다.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한다. 소녀의 얼굴을. 그녀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N님은 그녀가 전기돌 동굴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얼 원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세운 보르쥐 마냥 동굴 안을 살폈다. 천장까지 푸른 전류가 번져 번쩍거렸다. 분명 뇌문시티에서 N님과 소녀가 얘기를 나눴다고 들었다. 그것도 단둘이, 관람차 안에서. 그래놓고 또 그녀에게서 뭘 더 알아내고 싶은 걸까? 

 출동하기 전, 나는 N님에게 물었다. “그 애는 뭔가 특별해요?”라고. N님은 대답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애는 많이 특별해”라고.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포켓몬에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오는 걸 보니 가까이에 있던 단원이 누군가와 배틀을 시작한 것 같았다. 

 분명 그 소녀일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동료의 외마디 절규가 들려오고, 마침내 소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코너를 돌아오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그녀가 내가 잘 아는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에.


“세실리아…?”


 나는 무심코 그렇게 부르고 말았다.


배틀은 싱거웠다. 그 소녀 입장에서는 그랬을 거란 얘기다. 나는 고작 보르쥐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도무지 배틀에 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 친우의 얼굴을 가진 소녀와 승부를 하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을까. 보르쥐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배틀 도중에도 망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 저리 뜯어봐도 그녀는 영락없이 세실리아의 닮은꼴이었다. 밤색 머릿결, 사랑스런 눈썹, 잡티 없는 피부에 자신감이 담긴 입매까지.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 소녀에게는 세실리아에게는 없는, 갓 피어난 봄꽃에서 흘러나오는 활력이 느껴졌다. 그녀에 비하면 내 친구는 마치 오래전에 시들어 잎을 다 떨구어버린 꽃 무덤 같았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배틀은 삽시간에 종료되었다. 자신의 포켓몬을 볼에 넣으며 소녀는 그리 중얼거렸다.


“배틀에 이렇게 의욕이 없는 플라즈마단은 처음 봐.”


 마치 진기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배틀하면 보르쥐도 기뻐하지 않을 거야.”


“…상관없어. 어차피 포켓몬은 도구니까.”


 내 한 마디에 소녀의 눈매가 매섭게 변한다. 


“포켓몬을 해방시키는 게 플라즈마단의 이념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무래도 화를 돋운 모양이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소녀와는 달리, 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맙소사. 그럼 왜 플라즈마단에 있는 건데?”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지.”


“한번도, 도구로 이용당하는 보르쥐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없어.”


 언뜻 소녀의 눈빛이 간절해진다. 아, 이건 또 무엇일까.


“정말…단 한 번도 없어?”


“없어. 없다니까.”


 가까이 다가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가 물어왔다. 나는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재차 ‘없다’고 답했다. 


 이윽고 소녀의 커다란 두 눈에 슬픔이 맴돌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아이는…. 우리에게 없는 표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난 그만 가 봐야겠어.”


 모자를 고쳐 쓰는 그녀를 묵묵히 주시했다. 분명 외양은 연약해 보이는 소녀인데, 단호한 기백이 흘러넘친다.


“나는 플라즈마단을 무찌르고…N을 막을 거니까. 그러니까 모든 걸 끝내는 그 순간이 오면….”


 걸어가다 나를 슬쩍 돌아본다. 가느다란 옆선조차도 세실리아와 똑 닮았다. 하지만 닮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네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녀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반짝이는 전기돌에 비친 그녀의 푸른 그림자가 점점 크고 길어졌다. 그녀가 지나간 길 뒤로 전기돌들이 따닥따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파쪼옥들이 곰실곰실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꼭 다문 손아귀에 축축하게 땀이 차올랐다. 알 수 없는 허무함과 중압감이 실타래처럼 가슴 언저리에서 뒤엉켰다. 


 그리고 세실리아가 저 소녀를 보고도 울지 않은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임무를 마치고 성으로 복귀한 뒤, 나는 어떤 낯으로 세실리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세실리아는 N님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라 오그라든 낙엽 같았다. 그녀의 맥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떠돌았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탄식하듯 내뱉었다.


“봤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는 미동도 없었지만, 홀로 붕 뜬 달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너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너무 닮았더라.”


 내 말에 세실리아는 취한 듯 읊조렸다.


“그래? 나는 처음에 거울을 보는 줄 알았어.”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 농담. 


“세실리아, 혹시…. 그 아이, 너와 관련 있는 건 아니지?”


“웃기는 이야기네. 알잖니, 내 가족사정. 잃어버린 여동생이라거나, 그런 3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냐.”


“그럼….”


 3류 드라마처럼, 세실리아에게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내 이야기를 그저 흘려버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아이의 가정환경에 대해 조사했어. 하지만 나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어.”


 세실리아는 그 소녀의 가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가 사는 도시도, 그녀의 부모님도, 친구들도. 어느 하나 세실리아와 관련되는 요소는 없었다. 완벽한 타인인 것이다.


“그저, 겉모습이 비슷할 뿐.”


 그것이 ‘그저’라는 말로 형용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을 이어가는 세실리아의 낯빛이 점점 납빛으로 퇴색해갔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보는 N님의 얼굴도 보았니?”


“으응.”


 나는 대답 외엔 할 말이 전무했다.


“그 아이에 대해 말하는 N님의 목소리도 들어봤니?”


“으응.”


 세실리아는 우는 걸까?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난 단 한 번도 세실리아가 우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만큼 단단하고 묵직한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단단하고 묵직했던 세실리아의 얼굴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어떡하지? 그 아이가…. N님의 소중한 사람이 되면…. 난 어떡하지?”


“세실리아….”


“미아, 말해줘. 난 어떻게 해야 해?”



결국 그 날, 세실리아는 울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묵직하던 그녀가. 늘 정갈하고 정돈되어있던 그녀가. 낡고 구겨진 이불처럼 온 몸을 돌돌 감은 채, 주체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단복으로 닦아내며 울음을 토했다. 나는 멀찍이 서서 그저 지켜보았다. 괜찮을 거야. 그런 흔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나는 친우에게 따뜻한 말 하나 전하지 못하는 얼간이었다.

 

*****


며칠 뒤, 로트님이 나를 찾으셨다.


“곧 때가 올 거다.”


 근엄한 목소리였다. 로트님은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기대에 차 있었다.


“N님이 왕이 되고, 모든 포켓몬이 해방되는 날…. 그 때가 올 거다. 그 때가 오면, 세계는 비로소 평화로워지겠지.”


 수년이 넘게 귀에 닳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나는 여전히 뜻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N님이 설사 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딱히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포켓몬만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도 각자의 고통과 상념 속에서 해방될 것이다. 미아, 그 날을 기다리렴.”


 로토님의 말에 불현 듯 깨달았다.


 N님의 마음 자체가 평온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까?


 N님에게도 해방이 오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다른 이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미아야, 몸이 안 좋으냐?”


“아니, 아닙니다….”


 나는 제자리에서 주춤댔다. 세실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야.




 내 신체가, 바닷바람을 처음 맞는 가지 여린 나무처럼 불안한 각성에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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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동


태고의 전설처럼 퇴색한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무늬도 없이 희멀건 천정을 응시하며 멀뚱하니 서 있었다. 나는 비번이었고, N님은 외출 중이었다. 딱히 주어진 업무가 없어 하릴없이 복도를 서성였다. 바닥을 보다가 천정을 보다가 그림자를 보다가 멈추어서기를 반복했다. 복도는 빈 집 마냥 인기척도 없었다. 

 오늘 세실리아는 N님을 따라 나섰다. 세실리아나 나와 같이 플라즈마단에서 길러진 고아들은 N님의 최측근에서 머물곤 했다. 더 정확하게는 N님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벽에 기대 그들을 기다리며, 세실리아와 N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세실리아는 이상하다. 그토록 차분한 아이가 N님과 관계된 일이라면 허룽대기 일쑤다. 늘 차가울 정도로 진중한 그녀인데, 불에라도 데인 사람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라니. 납득할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여 있을 때, 마침 세실리아와 N님이 돌아왔다. 

“오셨어요, N님.”

 대충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는 N님의 얼굴이 평소와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아프기라도 한 걸까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실리아의 상태 또한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점이 나간 눈동자로 허공을 뒤지며, 두 손은 달리 붙잡을 게 없다는 듯 단복의 끄트머리를 세차게 쥐고 있었다. 늘 총명한 기운이 도는 그녀인데 이렇게나 넋이 나간 모습은 처음이었다. 

“세실리아, 무슨 일이야?”

“아니…아무 것도.”

 기운 없는 대답과 함께 세실리아는 쓰러지듯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난 낯선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날은, N님이 연설을 하는 개치스님과 함께 넝쿨마을에 갔던 날이었다. 아주 조그만 징후였지만, 그것은…그래. N님을 시작해 우리들의 세상이 뒤집힐 전조였다.


****


 내가 플라즈마단에 들어온 지 몇 달 뒤, 로트님은 내 또래의 여자아이를 데려 오셨다. 밤색 곱슬머리에 동그랗지만 뚝심 있어 보이는 두 눈을 가진 아이였다. 입은 옷도 추레하고 얼굴도 지저분했지만 그 애가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단숨에 알아봤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썹 아래 잠긴 근심과 절망은 결코 읽지 못했다.

 그녀는 내 룸메이트가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또래의 여자아이와 지내게 되어 사뭇 설렜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주고, 받고 떠들다가 시답잖은 농담에 자지러질 듯이 웃는 여느 소녀들의 대화 같은 걸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실리아와 같은 방을 쓴지 몇 주가 지나도, 별달리 관계에 진전은 없었다. 먼저 씻을게, 불 끌게, 창문 열게, 이런 것들 외에 불필요한 대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실망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다지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밥이나 얻어먹고 침대에서 잘 수 있는 생활에 다시 감사하는 마음을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달이 뽐내듯 꽃처럼 피어나던 밤이었다. 유난히 밝은 달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고아원을 박차고 나오던 밤이 떠올랐다. 근거 없는 희망에 가득 찼던 때를 생각하니 당시 귀뚤뚜기의 울음소리만이 생동하게 귀에서 울려댔다. 

“자니?”

 세실리아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난 누운 채로 대답했다.

“아니. 잠이 안 와.”

“달빛이 너무 환해서 그래. 나, 예전에도 이런 밤이 있었어.”

“그래? 나돈데.”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고 각자 위에 있는 천장에만 눈을 꽂은 채 이야기했다.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그녀답게 잔잔했다. 그럼에도 방안을 살며시 진동시키는 울림이 있었다.

“그렇구나. 있잖니, 넌 불꽃춤을 본 적이 있니?”

“아아니. 그거 포켓몬의 기술 아냐?”

“으응. 본 적 없어?”

“없어. 없다고 했잖아. 그게 대체 어떤데?”

 세실리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불꽃춤은 포켓몬의 능력을 올려주는 기술이야. 내가 그걸 본 건 이렇게 달빛이 햇살처럼 쨍쨍하게 비치는 밤이었어. 나는 혼자 풀숲을 달리고 있었거든.”

“어둔 밤에 왜 혼자 숲 속에 있었어?”

 내 물음에 세실리아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말에 답은 않고 그냥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근데 본 거야. 새까만 숲에서 귀뚤뚜기 울음소리밖엔 안 들렸는데 뭔가 환하게 번쩍이는 게 보였어. 불꽃춤이었던 거야. 불카모스의.”

 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녀가 흥분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벅차올랐던 당시의 심정을 대변하듯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불카모스라는 포켓몬을 알지 못했다. 이번엔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쏘아붙이듯 말했다.

“너, 불카모스가 뭔지 모르는구나?”

“…어.”

 자신 없는 내 대답에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고조되었다.

“불카모스는 활화르바의 진화형이야! 벌레랑 불꽃 타입을 동시에 갖고 있지. 모르는 것도 이해해. 별로 흔치 않거든.”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는 그녀의 억양에 왠지 내 무지에 대한 무시가 실려 있는 것 같아 약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청 멋있었어. 달에서 나오는 빛이랑 불카모스 몸에서 나오는 빛이랑 어우러져서, 와, 치렁치렁 별빛으로 수놓은 작은 전구들을 달고 춤추는 것 같았어. 물에 잠기듯 부드럽다가도 폭포를 오르듯 힘 있게 차오르기도 했지. 그런 것 처음 봤어. 죽어서 별님 달님 곁으로 간 줄 알았다니깐.”

“불카모스는 어떻게 됐어?”

“그게, 그렇게 춤을 추다가 사라져 버렸어. 사라져 버렸어.”

 ‘사라져 버렸다’고 연달아 말하는 음성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천장만을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도 어느새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정말 멋졌는데, 그 순간.”

 달빛을 받아 빛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은 경이로움을 읊는 시인과 같았다. 아마 그 때가 처음 세실리아와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했던 날인 것 같다. 

 이후 세실리아와 나는 가까워졌다. 내가 원했던 바와 같이 사춘기 소녀들처럼, 시시콜콜한 얘기로 재잘거리고 웃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전과 같은 거리감은 사라져갔다. 그녀가 손짓을 하면 나는 따라갔으며 내가 손을 흔들면 그녀는 나에게로 왔다. N님의 방 앞에서 말없이 서로 그림자를 밟으며 놀기도 하고 마냥 서로의 손바닥을 보며 손금을 봐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왜 세실리아가 홀로 밤의 숲을 거닐었는지 묻지 않았다. 세실리아에게 내 과거를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진정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나는 불카모스에 대해서도, 불꽃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더욱이 불꽃춤이 궁극에 달한 불카모스만이 쓸 수 있는 이상(理想)의 기술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 화려하게 불타는 춤사위도, 번쩍이는 푸른 눈빛도, 나로서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묻지 않았다. 다만, 가끔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는 새까만 그늘과 N님을 볼 때면 다시금 화사해지는 그녀의 표정이- 그 때 일어났던 무언가를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


넝쿨마을에 다녀온 뒤로 N님은 외출이 잦아졌다. 나는 그저 플라즈마단의 활동을 위해서려니 하고 여겼다. 그런데 N님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N님이 관심을 두는 아이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초기에는 소문이 너무 두루뭉술해서 그 아이가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소문이 구체적으로 변하자, 그제야 그 아이가 열서너 살 먹은 소녀라는 알게 되었다. N님과 함께 나갔을 때 혹은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그녀와 맞닥뜨렸던 단원들이 자세한 정보를 일러준 것이다.

 듣자하니 그 소녀는 훤칠하고 팔다리는 쭉쭉 뻗었는데, 춥지도 않은지 민소매 상의에 핫팬츠를 입고 다닌다고 했다. 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풍성한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캡 모자를 눌러쓴 것이 특징인 것 같았다. N님은 성을 나갈 때마다 그녀의 행적을 뒤쫓았다. 단원들이 직접 물어보니 “그녀를 시험하고 알아내고 싶은 게 있어.”라고 말하셨다고 한다. N님이 그녀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N님이 없을 때, 단원들은 N님은 예쁘장한 그 소녀에게 홀린 거라며 쑥덕거렸다. 

 나는 그런 소문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물론 소녀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지는 않았겠지만, N님이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부분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녀를 본 단원들은 전부 그녀의 아리따운 외모에 N님이 혹했다고 떠들어대는데,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기론 조직의 심벌과도 같은 사랑과 평화의 여신도 빼어난 미인들이다. 가끔 TV를 볼 때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보다도 그녀들이 훨씬 예쁘다. 내 친구, 세실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피부도 하얗고 이목구비도 가지런한 미인상이라 몇몇 남자단원들이 치근덕거린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아름다운 소녀들과 어린 시절부터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N님은 단 한 번도 이성적인 호감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소녀가 예쁘다는 이유로 N님이 홀라당 넘어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연심이라니, 그에게 그런 감성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 분은 일찍이 감성의 성장이 멈췄다. 게다가 머릿속엔, 상처받는 포켓몬들의 해방 혹은 복잡하고 난해한 수식들뿐. 날 때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도록 교육 받았는데, 이제 와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였다.

 그러나 소문이 크기를 부풀리면 부풀릴수록 세실리아의 낯빛은 어두워져갔다. 결국 난 참다못해 그녀에게 말했다.

“죽을 상 그만해. N님이 진짜로 그 애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단순한 호기심이야. 그 분은 순수하잖아.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에 대한 티 없는 호기심일 뿐이라고.”

 다그치듯 말하자 세실리아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찬찬히 들었다. 그 또렷했던 눈망울은 어디 갔는지 흐리멍덩한 검은자위만 둥둥 떠올랐다. 그녀는 낮게 중얼댔다.

“-네가 그 애를 못 봐서 그래.”

 그녀는 뭔가에 정신이 팔린 혼령처럼 말했다. 생기를 잃은 그녀의 한마디는, 한 바퀴 돌아 날아오는 바람처럼 내 가슴에 꽂히었다.


생소한 감정의 물결을 인지하며 나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눈앞에 N님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N님.”

“응.”

여전히 무미건조한 말투와 음성. 

“다음에 나가실 땐 저도 데려가 주세요. 요즈음 늘 성에만 있었거든요.”

“…그러네. 알았어.”

 손쉽게 승낙을 얻어냈다. 텅 빈 얼굴로 끝없는 복도를 바라보는 그의 옆에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이런 사람이 사랑을 느낄 리가 없다. 이렇게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인형 같은 사람이 감정에 대해 알 리가 없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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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 "귀여움을 높이기 위해 1인칭을 쓰도록 하죠." 마키&에리 "?"

 

1.

우미 귀여움을 높이기 위해 1인칭을 쓰도록 하죠.”

마키 &에리 ?”

우미 뭐죠 반응은?”

에리 아니.. 우미 입에서 그런 말은 의외라고 할지, 그리고 귀여움이란 코드도 우리랑은 그다지-“

우미 그게 문제입니다!”

에리 에엣?!”

우미 스쿨아이돌의 본분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마키!”

마키 갑자기 나한테 화살이? , 그거야 노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아니겠어? (빙글빙글)”

우미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스쿨아이돌은, 그저 노래만 부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키 그럼 뭔데..?”

우미 귀여워야합니다!”

마키 에에~?”

우미 귀여워야한다고요! 누구보다! 무엇보다! 초귀여워야한다구요!”

에리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듣고 거야…”

우미 , 예를 들어보죠. 우리 뮤즈의 다른 멤버들- 일단, 호노카부터. 호노카는 귀엽죠?”

에리 , 호노카는 활기차고 귀엽지

마키 “….귀엽지.”

우미 소꿉친구인 코토리와 그녀를 곧잘 따르는 하나요는요?”

에리 코토리는 뭔가 푹신푹신~ 귀여운 여자애의 결정체라는 느낌이지.”

마키 하나요 귀여워.”

우미 그럼 니코랑 노조미는 어떻습니까?”

에리 노조미, 언뜻 보면 어른스러움만이 매력인 같지만사실 굉장히 귀여운 편이야. 야끼니꾸를 좋아한다던가, 스피리추얼~ 말버릇이라던가….”

마키 니코짱은 , 귀여운 컨셉이니까.”

에리 귀엽단 거야 아니란거야.”

우미 마지막으로, 스스로 귀엽지 않다고 생각하는 린은 어떻습니까?”

에리 귀엽지- 스스로 귀엽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오히려, 뭔가를 자극시킨달까…”

마키 - 약간 위험한 발언.”

에리 , 뭐야. 그럼 마키는 린이 귀엽지 않다고 생각하는거야?”

마키 아니, 나도 귀엽다고는 생각하지만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버릇도 그렇고.”

우미 그렇죠? 그에 반해 우리는 어떻습니까?”

에리 & 마키 …..”

우미 솔저게임조가 문제입니다! (책상 쾅쾅)”

에리 우리가 문제라니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우리는 애초에 그런 작고 귀여운 이미지는 아니고…”

마키 맞아. 굳이 말하자면 우리들 계열은, 쿨하고 멋져서 좋은 아니야?”

우미 아니에요, 아니에요, 자신들이 스쿨아이돌이라는 자각을 버려선 안됩니다!”

에리 & 마키 (흠칫)

우미 아이돌은, 귀여워야해요! 봐봐요. 호노카처럼 귀여운 호노카 옆에 같은 우미가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여기겠습니까? - 둘이 하나도 어울리네, 언밸런스 커플아냐? 이렇게 생각하진 않겠습니까?”

에리 어어, 이거 자기 커플링에 신경 쓰고 있는 거잖아…”

우미 반면 호노카랑 코토리랑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귀여워- 너무 귀여워- 이렇게 생각할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저희도 귀여워져야해요!”

마키 결국 호노카를 독차지하고 싶단 아니야? 논리를 이상하게 몰고 가지 말아줄래?”

우미 아닙니다! 그런 사심은 없습니다! 저는 우리 솔저게임조의 미래를 걱정해서 그러는 겁니다!”

에리 “…하아~ 그래서 , 귀여워지기 위한 방법이라는게..”

우미 . 1인칭을 쓰기로 하죠.”

에리 어째서 그런 결론이..?”

우미 다시 한번 우리 뮤즈의 귀여운 멤버들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죠. 멤버들의 공통점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 1인칭을 쓴다는 겁니다.”

마키 그건 맞는 말이네.”

우미 호노카가, 호노카가 말이지~ 이럴 얼마나 귀엽습니까!”

마키 은근슬쩍 호노카 성대모사하지 말아 줄래. 똑같으니까

우미 마키, 린도 무의식적으로 1인칭을 쓰지 않습니까!”

마키 어어, 그렇지. 그게 꽤나 귀엽지 …”

에리 노조미는 . 써도 귀엽다고.”

우미 여하튼! 1인칭을 쓰면 귀여워 보입니다.”

마키 엄청 부실한 논리네.”

우미 그러니 우리도 씁시다.”

에리 어째서 우리까지!? 우미만 하면 되잖아?”

우미 혼자 하면 부끄러우니까 같이 해봅시다.”

마키 뻔뻔해!”

에리 우리가 순순히 그런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우미 분은, 귀여워지고 싶지 않습니까…? 귀여워져서, 신경쓰이는 아이 옆에 당당히 서고 싶지 않습니까?”

에리 “(흠칫)”

마키 “(흠칫)”

우미 우리모두 노력해보죠. 그리고 제가 솔저게임조의 리더 아닙니까? 리더의 말은 모두가 따라야죠.”

에리 잠깐. 언제부터 우미가 리더야?! 리더는 제일 연장자인 아니었어?”

마키 “…애초에 임시유닛인데 리더가 따로 있었어?”

우미 어쨌거나 내일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죠.”

에리 독재자구만.”

마키 제멋대로네.”

우미 내일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에리& 마키 , …”

 

 

2. 다음날

 

1학년 교실

 

마키짱 안녕-!”

하나요 안녕, 마키짱.”

마키 “ (…….) , 안녕.”

, 마키짱 아침부터 기운이 없어?”

마키 , 마키는 별로기운이 없진 않은 .”

하나요 마키짱, 아침밥 제대로 먹고 거지? 끼를 챙겨먹는 중요해!”

마키 , 마키아침 당연히 먹고 왔어.”

헤에~ 그렇다면 다행이다냐!”

하나요 점심도 챙겨먹어야해, 무엇보다 흰쌀밥과 반찬은…. (주절주절)”

마키 “(어라? 이거 뭐지?)”

린은 점심도 라면으로 먹고 싶은데 말이다냐-“

마키 “(…… 아무도 신경 쓰는데?)”

 

 

 

 

3학년 교실

노조미 에리치~ 오늘 학생회 말인디…”

에리 , 에리가 있어?”

노조미 “ “

에리 , 에리가 학생회에서 일이…”

노조미 “…..”

에리 , 에리에리치카..에리치카가 카시코이 카와이..”

노조미 “……”

에리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뭔가 말을 해줘!”

노조미 …. ….(눈길 피함)”

에리 , 에리가.. 그렇게 이상해?”

노조미 ….그게……(우물쭈물)…”

에리 으아아아아!! (박차고 달아남)”

 

그리고 에리는 한없이 교정을 방황했다.

 

 

2학년 교실

호노카 코토리짱, 숙제 보여줘~”

코토리 하하, 호노카짱, 숙제 안해 온거야?”

호노카 깜빡했지 뭐야. 빌려줄거지, 코토리짜앙~?”

코토리 호노카는 정말 어쩔 없다니깐~-“

우미 안됩니다.”

호노카 히익! 우미짱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우미 굳이 보겠다면, 소노다 우미의 노트를 빌려드리죠.”

호노카 , 그래. 그럼 우미짱의어라?”

우미 소노다 우미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호노카 아니…”

코토리 그게….”

우미 , 소노다 우미의 노트를 쓰시죠. ()”

코토리 우미짱, 어제 사극이라도 봤어..?”

우미 “? 아닙니다만.”

호노카 그럼, 그건 뭐야..?”

우미 “? 뭐가 말입니까. , 숙제는 제대로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호노카 아니 그게 아니라…(머엉)”

우미빨리빨리 참고하세요.”

호노카, 알았어. 우미짱.”

코토리”…..?”

 

 

(점심시간)

우미 그래서 어땠나요?”

마키 놀랍게도 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어.”

우미 “! 그래요? 그렇다면 마키는마키는 평소에 1인칭을 써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자기 멋대로에 공주병인 캐릭터였다는 거군요 (메모)”

마키 얘기가 그렇게 되는거야? 우미는 어땠는데?”

우미 저요? 저도 딱히 없었습니다.”

마키 헤에…? 그거야 말로 의외인데. 우미가 1인칭을 썼는데, 호노카랑 코토리가 아무 반응이 없었다니…”

우미 그러게요. 아무래도 어필이 부족한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에리는…”

마키 에리 아직 왔는데.”

우미연장자가 제일 늦어서야, 저기 오는군요.”

에리”…….(죽을상)”

마키으에엑? 에리, 얼굴이 그래?”

우미점심에 먹는 탄산음료라도 나왔나요?”

마키탄산 먹는 우미 뿐이잖아. 소리를 하는 거야?”

에리” …..이게 .”

우미?”

에리이게 우미 때문이야! (탈탈)”

우미에에에에에?? 그러십니까. 폭력은 됩니다!”

마키폭력이라기엔, 그냥 어깨를 흔드는 수준인데…”

에리우아아, , 어울리지도 않는 1인칭을 쓰는 바람에, , 노조미가…”

마키노조미가?”

에리노조미가 세상 경멸하는 눈으로 봤다고! ‘~ 이거 진짜야? 에리가 스스로 에리라 부르면서 귀엽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도 안돼 뭐라고 대응해야 하지?’하는 엄청 난감한 얼굴로 아무 코멘트도 안하고 한참 보기만 했어!”

마키히에에…”

우미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에리어떻게 했냐니!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와 지금까지 교내를 방황했다고!”

우미땡땡이?!”

에리그게 중요한 아니잖아! 이제 노조미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

우미얼굴이야 그냥 보면 되는 아닌가요.”

에리뭐야 흥미 없어 보이는 대꾸는! 우미 때문에 인생이 끝나버렸는데!”

마키아니 우미 때문인 맞지만, 끝나진 않았으니까.”

에리아아아아! 교실에 돌아갈 없어!”

우미, 진정하고일단 교실로 돌아가세요.”

에리으앙, 싫어!”

마키어린애 같아…”

우미그냥 아무 일도 없었단 돌아가세요. 그리고 평소처럼 지내면, 노조미도 모른 해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아까 에리치가 그런 말을 했던가?’라며 기억에 혼동이 수도 있습니다.”

마키저기, 우미는 노조미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바보라고 여기고 있지?”

우미어쨌든. 무단결석은 학생회장으로서 옳지 않잖아요? 돌아갑시다. “

에리우으알았어.”

우미그리고 우리 작전은 방과후 뮤즈 연습 재개하는 걸로…”

마키재개하는 거야?!”

에리어째서! 트라우마 커진다고!”

우미 모르시는군요. 에리는 늦게 와서 듣지 못했을 테지만, 에리와 달리 저희 둘의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1인칭을 썼는데도, 아무도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에리에에..?”

우미그러니까, 과한 반응이 돌아왔던 에리와 아무 반응도 없었던 저와 마키가 다같이 작전을 이행하면, 중간 정도의 반응이 돌아올 겁니다. 그걸 방과 후에 실행합시다.”

에리..?

마키납득하는 거야?! 말도 안되는 논리인데? 이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도 아니고!”

우미그럼. 방과 후에 다시 봅시다.”

에리, 알았어. 일단 그렇게 하자…”

마키”. …..(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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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5년 초 서코 등에서 나왔던 BW 기반 회지를 웹공개합니다.

게임 BW기반이라기엔 주인공즈는 많이 나오지 않고... 

가상의 플라즈마 단원들이 주인공인, 거의 3차창작(?)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두 명의 플라즈마 단원 소녀들의 눈을 통해 BW의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 이후 8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는데, 천천히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0. 프롤로그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었다면, 다른 이의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었을까?


세실리아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무언가에 애착을 느낀 적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든 포켓몬이든- 그랬다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아끼는 사람과 포켓몬을 떼어놓을 수 있었을까? 


미아. 넌 일생에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니? 포켓몬이나 사람에 정을 붙여 본 적 있니? 나는 없어, 우리는 없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플라즈마단일 수 있는 거야. 이건 포켓몬의 해방을 위한 일이에요, 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서 남의 포켓몬을 빼앗고 이용해 버릴 수 있는 거야.  


'해방'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세실리아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어두운 복도의 희미한 조명에 비쳐 번득였다.


 세실리아, 나의 아름다운 친구 세실리아는 그리 말했더랬다. 루나톤 같은 달이 어슴푸레 빛을 흘리던 밤, 우린 N님 방 앞에 서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플라즈마단이라기엔 너무도 불온한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칠현인님들이나 개치스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숙청당할 만큼 위험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솔직히 털어놓은 것일 테다. 우리는 이 비정상적이고 불분명한 조직, 플라즈마단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기에. 


 이곳, 플라즈마단에서는 N님과 개치스님, 그리고 칠현인님들을 제외한 모든 단원들은 같은 복장과 같은 머리를 한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임무를 나가도, 서로의 사정이나 출신 따위는 모른다.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게 규칙이다. 우리들은 누추한 지난날들을 허물어 버리고, 성역의 기사로 다시 태어났다- 고 여겨졌다. 여겨져야 했다. 우리들이 할 일은 옷에는 플라즈마단의 마크를 달고, 손에는 플라즈마단의 깃발을 들고, 싸우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서 빼앗은 포켓몬을 학대하며, 해방을 위해 N님을 위해 우리들의 왕을 위해.

 난 답도 없이, 그저 오래된 과실을 삼킨 듯 씁쓸하게 웃었다. 허나 그녀는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대신 열이 튀는 눈으로 내게 물어왔다. 


 미아. 내게 해방이란 뭐니?




1. 미아


해방. 매일 백 번도 더 들었어도, 마치 오래된 동화 속 어구처럼 실감이 안 나는 말이었다. 그건 내 삶이 그런 꿈결 같은 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단어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존. 사는 것이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생존의 문제에 비하면 해방은 몽상이고 환상이었다.


나는 고아였다. 생년월일도 모른다. 열 살 때까지는 고아원에서 지냈다. 원장은 무심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어서, 무명의 아이들에게 알파벳 순서대로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따다 붙이곤 했다. 내가 미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경위는 그만큼 하찮고 별 볼일 없었다. 게다가 고아원은 정부 지원금을 다 뒤로 빼내는 바람에, 시설 살림살이에는 신경도 쓰지 않아 건물의 간판도 다 떨어져 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깨봉이도 입에 안 댈 것 같은 꿀꿀이죽을 삼시 세끼 먹었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냄새나고 축축한 침대에서 몸을 구부리고 잠을 자야 했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내 이름은 미아고, 다른 어여쁜 이름을 붙여줄 만한 부모도 없었다. 나는 비린내가 날 것처럼 바짝 마른 미아고, 내가 숨을 편안히 쉬고 몸을 온전히 맡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까칠한 검은 머리에 주근깨가 난 미아고, 남들의 눈에 띌 만큼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다.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처지와 현실을, 그리고 이곳에 있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달이 유난히 밝던 어느 여름 밤, 나는 고아원에서 도망 나왔다. 


 포켓몬도 키우고 아끼는 세상인데 나 같은 어린 아이 하나 돌봐줄 선인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른 도시나 마을에 나의 불쌍한 행색을 보고 동정심이 동해, 자신의 따뜻한 집으로 데려갈 어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근거 없는 희망에 부풀어 달빛 아래를 맨발로 마구 달렸다. 귀뚤뚜기의 울음소리가 발밑의 풀을 타고 맥박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상에게 말라깽이 고아의 희망이란 길바닥에 들러붙은 껌 딱지만도 못한 것이었다. 꿈꾸던 선인과는 마주치지 못한 채, 난 정처 없이 하나지방을 떠돌았다. 큰 도시를 가도 작은 마을을 가도 상황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켓몬에 예쁘장한 액세서리를 달아줄 줄은 알았어도, 길거리의 거지 꼬마에게 빵조각 하나 던져 주는 법은 몰랐다. 


 기력이 다해 울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에게 또 다른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나 같은 부류에겐 희망조차 사치였다. 밤바람을 이불 삼아 잠들고 굶주림을 벗 삼아 깨는 것, 그게 나에게 주어진 일생인 것이다. 


 때로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때로는 구걸을 하며 떠돌다, 나는 산로마을에 당도했다. 산로 마을은 땅위의 열기만으로도 온 몸이 구워지는 것처럼 뜨거운 곳이었다. 그곳은 유난히 사람이 적었고, 그래서인지 가게도 집도 드물었다. 이렇게 살림이 팍팍해 보이는 동네는 인심도 쓰다. 그래서인지 구걸을 하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마을 안에 곱게 머물고 있었으면 될 것을, 오래 굶주렸던 탓에 나는 풀숲에서 나무열매를 뒤지기로 결심했다. 이 세계의 상식이지만, 포켓몬 없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야생 포켓몬의 습격을 받았을 때, 방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결정은 너무나도 한심했다. 결국 그 선택이 내 생에 새로운 기회를 주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뒤진 풀숲은 하필 무장조의 서식지였다. 그 녀석들에게 들키자 나는 단숨에 마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무장조들은 귀가 깨질 것 같은 금속음을 내며 내 뒤를 추격했다. 며칠 굶은 아이의 발재간으로는 비행 포켓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제 풀에 지쳐 흙 속에 풀썩 쓰러졌다. 무장조들의 날카로운 부리가 내 몸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살이라는 거죽을 가르고 마구잡이로 사지육신을 헤집었다. 온 몸이 피와 상처로 벌겋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죽는다, 라는 말이 쉽사리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건 내 삶이 언제나 죽고 사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어도 별 아쉬울 것 없는 하찮은 삶이었기 때문일까. 


 살이 벗겨지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몸을 말 줄 밖에 모르는 벌레처럼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 때, 무장조들의 금속 날개가 부딪히는 굉음 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화염방사. 한순간 뜨거운 불꽃이 내 등 위에서 타올랐다 사라졌다. 무장조들은 힘없이 쓰러지거나 볼품없는 날갯짓으로 도망을 쳤다.


“괜찮니?”


 온화한 음성이 나를 불렀으나, 온몸은 물론 목 주변에도 상처를 입어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가엾게도…어린 아이가 홀로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부모님은?"


 그가 손을 내밀어 쓰러져 가는 내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했다. 희끄무레한 수염에 머리마저 백발인 노인은 고지식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의 뒤에는 풍채가 든든한 앤티골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살포시 안아 올렸다. 


"안 되겠다. 일단은 병원에 가자꾸나."


 그의 이름을 물을 틈도, 나의 이름을 말할 틈도 없이 나는 기절해 버렸다. 이후 그는 나를 간호해 줬고, 있을 곳도 마련해 준 은인이 되었다. 

 노인은 바로 로트. 플라즈마단의 칠현인 중 하나였다. 


로트님은 나에게 플라즈마단이라는 보금자리를 주셨다. N님이 새로 만드실 낙원에의 작업에 협조하고 포켓몬의 해방에 동의한다면, 얼마든지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로트님은 항상 N님과 포켓몬의 해방에 대해 말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혈혈단신 고아였고 플라즈마단 만이 내가 속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조직을 아우르는 비정상적인 이상과 충성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곳을 나가면 난 또다시 길거리를 헤매는 거지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해방이란 단어를 이해 못하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N님을 숭상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나에게 해방이란 생존, 그 자체였다. 생존에 성공한다면 그것이 해방이고 실패한다면 곧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실리아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로 난 세실리아에게 되물었다. 


 네게 해방은 뭔데?


 그녀는 마침내 웃으며 말했다. 


 -나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야.


 고개를 갸웃했다. 세실리아의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는 식으로 열변을 토해내더니, 갑자기 자신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라니. 똑똑하고 논리력 있는 세실리아는 가끔 이런 식으로 나를 사념의 곤경 속에 빠뜨리곤 했다.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자, 세실리아는 흐드러지게 지는 해당화처럼 샐쭉 웃었다. 연한 주홍빛이 파스텔처럼 그녀의 양 볼에 번져갔다. 아아, 그녀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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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내일을 사는 소녀 (1)

노조마키

 

다시 만난 노조미는 여전히 가을날 하늘처럼 밝고 아리따웠다. 마키는 남몰래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 환자들이 어여쁘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갈고 닦여진 미소였다. 노조미는 반사작용처럼 따라웃었다. 그 표정이 수년 전과 같이 티가 없어서, 마키는 어쩐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안그래도 마키짱을 만나러갈까 했데이."

 

사투리는 완전히 입에 붙었는지, 예전보다 더욱 감칠맛이 났다.

 

"3년 만인가."

"정확히는 2년 반이래이."

 

벌써 그렇게 됐나. 마키는 새삼스레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봤다. 마키는 스물 다섯, 노조미는 스물일곱. 이제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였고, 어른이라기엔 조금 애매한 나이었다. 그래도 스쿨아이돌을 하던 시절에 비하면 탈피를 한 것처럼 여물어버린 인생이었지만.

 

"2년 반 동안이나 연락 한 번 안하다가, 이제와서 날 찾다니. 마키짱 너무하네."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먼저 메일 한번 보낸 적 없으면서."

"나도 나름 바빴구, 그래도 일년에 한두번 있는 뮤즈 모임만은 꼬박꼬박 나갔데이! 거기 마저 안 나온 마키짱 잘못이지."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나도 바빴거든?"

 

교류가 없었던 세월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노조미와 마키는 여고생처럼 시시콜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마키짱, 레지던트라 했나?"

"그렇지. 이제 겨우..란 느낌? 그래도 아직 가야할 길이 멀어."

"그래도 거의 다 왔네! 마키짱 대견하대이-"

"우왓. 나는 강아지가 아니거든? 그, 그리고 이 나이 되어서 머리 쓰다듬는 거, 좀 창피하지 않아?"

"나는 상관없는데, 마키짱은 여직도 부끄럼을 많이 타네."

 

그리고 노조미는 입가에 손을 대고 키득키득 거렸다. 정말, 사람이 변함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마키는 작게 웅얼거렸다.

 

"노조미는 아직도 그 일 하는 거야?"

"응! 그래도 나름 입지를 굳혀가고 있대이. 여전히 신출내기지만-."

 

노조미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란, 고교시절의 그녀와 닮기도 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직업이었다.

영화연출가. 노조미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오토노키자카를 졸업하고, 노조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영화 제작사에 말단으로 발을 들여, 바닥부터 구르기 시작했다.

노조미가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던가? 마키는 그런 기억은 없었다. 노조미와 절친했던 에리나 니코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그들에게 넌지시 물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우문이었다. 모두에게, 노조미는 점과 약간의 오컬트, 그리고 뮤즈를 사랑하던 소녀로 기억되고 있었다.

결국 마키는 노조미에게 직접 물어봤었다. 어째서 그 직업을 선택한 거냐고. 노조미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런 얼굴로, "그냥 해보고 싶었어"라고 답했다.

자신이 갈 길을 그렇게 손쉬운 이유로 결정하다니, 마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키는 어릴 적부터 잘 짜여지고 닦여진- 마치 일류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와 같은 진로를 밟고 있었으니까. 전채요리 다음에는 메인 메뉴, 그런 식으로, 오토노키자카 다음에는 의대 진학, 그런 식으로. 이미 치밀하게 정해져 있던 것이다. '그냥 해보고 싶었어'라는 터무니 없는 발상은 뮤즈 활동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재밌어? 영화 일은."

"그게 내 생각보다- 무시무시하게 힘들고, 어마어마하게 재밌데이! 참, 그 말 했었나? 내가 처음 제작사에 지원했을 때 면접을 봤는데 말이제-."

"했어, 그거."

"아. 그래? 벌써 오래 전 일이니께... 여튼, 그 때 면접관 분이 '왜 영화를 만들고 싶나요?'하고 물어봐서, '그냥 재밌어 보여서요'라고 했더니 무지 혼났다는 거 아이가. 뭐, 실제로 당시에 나는 영화엔 일자무식이었으니."

"어차피 얘기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본거야."

"후후. 그래도 어찌저찌 포장을 잘 해서 취직은 됐다는 거지. 스쿨아이돌로서 정점에 섰던 녀석이, 아무 발판도 없는 영화계에 발을 들이민 게 흥미로웠던가 보제. 아, 마키짱. 그 후로 벌써 7년이야! 7년이 지났어. 나도 이제 제법 뼈가 굵었단 말이지."

"그래, 그래."

"이제 내 이름으로 영화도 만든데이."

 

그 말에 마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노조미가 감독이란 얘기야?"

"그렇게 말하니 거창해보이긴 하는데. 후후, 엄청 쬐끄만 독립영화래이."

"그래도 엄청나잖아! 스물아홉에 감독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영화에 문외한인 마키라지만, 서른도 되기 전에 감독 타이틀을 거머쥔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지는 실감하고 있다.

혹시 노조미는 천재가 아닐까? 뮤즈 때도, 제일 마지막에 멤버로 합류했는데도 훌륭한 춤과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번엔 전혀 연고도 배경지식도 없던 영화계에서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머쥐려하고 있다. 이쯤되면 예술 쪽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별로, 그렇게 감탄할 정도는 아니래이. 20대 감독들은 종종 있고, 나보다 더 어릴 때 작품을 만든 사람들도 많으니까. 음, 오히려 9년 만에 첫 작품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좀 늦은 편일지도 모르제."

"하지만 노조미는 영화를 전혀 몰랐잖아. 그 전까지는 전혀 다른 일을 했었고."

"그러게, 그냥 속편하게 아이돌이나 계속 할 걸 그랬나? 마키짱이랑 같이."

 

농담처럼 던진 소리였지만 마키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속이 쓰리고 불편했다.

아이돌을 계속하지 그랬어, 라는 이야기는 부모님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에게 숱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마키는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외로움과 후회감에 마음이 따가웠다.

 

"세상에 어떤 일이 속이 편하겠느냐만은. 뭘하든 고통스럽고 즐거울 뿐이지."

"....인생 다 산 할아버지 같아."

"마키짱보다, 2년이나 더 살았다구?"

"인생 선배 노릇이라면, 사양할게."

 

녹음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니시키노 병원이 보였다. 노조미와는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 만났기에, 곧 들어가봐야했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연락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노조미는 노조미다. 뮤즈의 모두들 전부 어린애 같아서, 다들 십년 전보다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노조미는 유독 철부지 같았다.

2년 반 만인데도, 여실히 아이 같고 조금은 바보 같아서- 그럼에도 꾸준히 자신의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어서. 마키는 안심했다.

 

"나 이제 들어가봐야 돼."

"으응. 다음 번에 또 보자."

"노조미도 잘 지내."

"마키짱도. 내가 조만간 연락할게."

 

노조미와 마키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해후의 인사를 나눴다.

마키는 노조미를 만나고 안심했다.

지난 2년 반, 머뭇거림과 부끄러움에 연락도 하지 못하고 모임에도 나가지 못했던 건 노조미에게는 비밀로 하자.

2년 반 만에, 겨우 용기가 나서 먼저 메일을 보냈다는 것도 노조미에게는 비밀로 하자.

그동안 소홀했던 만큼. 아니, 두려웠던 만큼. 노조미에게 다가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하자.

그런 연유로, 마키는 안심했다. 하지만 너무 안심하고 말았다.

감정은 늘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어도, 인생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려주지 않는데 말이다.

 

 

 

 

노조미는 일주일 뒤 마키를 찾아왔다.

 

"안녕, 마키짱."

 

태연하게 하얀 침대 위에 앉아 흰 가운을 입은 마키를 응시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마키짱을 만날 일이 있을 거 같다고 하지 않았었나?"

 

여느 때처럼 장난기가 잔뜩 묻어있는 얼굴.

허나 마키는 우스갯소리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게 이런 얘기였어?"

 

영화를 만든다고.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영화를 만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고 있어야 할 노조미가, 어째서 니시키노 병원의 병실에 있는지.

새하얗고 볼품없는 십자가 무늬가 새겨진 환자복을 입고 있는지.

마키의 뇌는 인지한 현실의 풍경을 따라갈 수 없었다.

 

"뭐, 현실은 가끔 영화보다 더 영화 같기도 하니까."

 

마치 스크린 속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듯, 노조미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기에.

마키는 자신이 지금 노조미가 만든 허무맹랑한 영화 속의 배역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착각했다.

그녀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차가운 병동의 바닥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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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