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히카/태홍빛나] Last Act 글/포켓몬2020. 10. 30. 09:19
<Last Act>
첫 만남으로부터 일년 반. 그다지 긴 세월도 아니었다. 관계는 애매모호했다. 친구라기엔 연배가 달랐고, 연인이라기엔 거리감이 멀었으며, 동료라기엔 어떤 모험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라이벌이라기엔 경쟁한 적이 없고, 적대자라 하기엔 일련의 사건은 오래 전에 종식 되었다. 그렇다고 남남이라기엔 이미 산더미 만큼 많은 감정과 찌꺼기가 두 사람 사이에 쌓여 있었다.
햇살이 유독 밝은 여름날, 예지호수에 선 히카리는 먼저 운을 떼기를 어려워했다. 새처럼 조잘조잘 떠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지만 오늘만큼은 유독 입이 무겁다. 아카기도 무어라 말을 시작해야할지 몰랐다. 좌중을 휘어잡는 달변가도 생애 첫 이별에 담담히 연설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히카리였다.
“나는…”
아카기는 조그만 입술에 온 신경을 기울인다.
“나는…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
목적어가 없는 문장. 아카기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한다.
“너와 네가….”
“한번쯤은 ‘우리가’ 라고 해주면 안 되는 거야?”
히카리가 바로 면박을 준다. 지난 일년 반 동안 줄곧 참아왔던 말이다. 좀 더 일찍 하는 게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이제 와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라고 말하기에는.. 아무 것도 시작한 것이 없었다.”
“냉정하네.”
두 사람은 참으로 뭐라 정의 내리기 모호한 사이였다. 벗이라기엔 정이 부족하고, 애인이라기엔 사귄 적이 없으며, 지인이라기엔 서로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남남이라기엔…
“정말로 아무 것도 시작된 적 없다고 생각해? 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끝나는 건데?”
목구멍까지 끓어오른 감정을 겨우 죽이며, 히카리가 덤덤한 척 말한다. 목소리가 떨린다.
“시작이 없는데 어떻게 끝이 있어?”
“…예를 들어, 마라톤의 시작 선에 서있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도…경기는 언젠가 끝나는 법이다.”
기가 찬 표정으로 히카리가 아카기를 올려다본다. 아니, 쏘아본다.
“정말이지 근사한 은유네!”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 결국 끝난다는 얘기다.”
“그정도는 나도 이해한다고 두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정도로 얼 빠진 어린 애는 아니니까..."
설명을 거듭하는 건 어쩌면 직업병인지도 몰랐다. 긴가단의 부하들은 늘 재차 강조를 해줘야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눈앞의 소녀는 한번 말하면 귀신같이 알아듣는, 똘똘한 아이라는 걸 금새 잊곤 했다.
“그치만 시작 선에 섰다는 건, 무언가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는 거잖아.”
“그것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지.”
“그 놈의 생각, 생각…”
히카리는 분홍색 부츠로 발 밑의 자갈들을 가볍게 걷어찼다. 회색빛 돌가루가 아카기의 부츠 위로 스멀스멀 내려앉는다. 칙칙한 그의 부츠와 대비되어 히카리의 부츠는 유독 어린애 장난감처럼 유치해보였다. 이제 분홍색은 졸업할 때가 되었나?
“그럼 소감을 말해줘. 시작 선에 섰지만, 한 걸음도 달리지 않은 채로 경기가 끝나버린 심정 말이야.”
아카기는 대답하지 않는다.
“후회 돼?”
아카기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님 다행이다 싶어? 쓸데없이 기운 빼지 않아서? 어차피 끝까지 달리지도 못했을 텐데….”
“끝은 있나?”
문득 되묻듯이 아카기가 답했다. 히카리는 더욱 얼이 빠졌다.
“세상에 끝이 없는 게 어딨어….”
있다면 그건...말을 이으려던 히카리가 아카기의 표정을 발견하고 멈춘다.
아카기는 바로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먼 하늘을 응시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빈 하늘. 시를 읊듯, 아니 혼잣말을 하듯, 그의 속마음이 비친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빈 하늘이 공허한 눈동자에 비친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히카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아, 그런 거였어? 진짜 바보 같네, 하고 여느 때처럼 핀잔을 주지도 못하고, 커다란 눈동자에서 뚝하고 눈물이 흘렀다.
“네가 이럴 거 같아서…”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울음소리를 밀어내고 간신히 할말을 꺼낸다.
“나는…그런 건 믿지 않아…”
“그래.”
“끝나지 않는 건, 소설 같은 망상이나 하는… 당신이나… 생각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그럴 필요 없었어.”
“그래.”
“그럴…필요 없었다고.”
그냥 말하면 됐잖아. 솔직하게 두려워서 시작하지 못했다고. 그러면 내가 당신의 그런 두려움을 툭툭 털어버리고, 대신 힘껏 어깨를 안아줬을 텐데. 실속 없는 상상은 그만하고 눈 앞의 있는 내 손을 잡으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정말로 끝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안 되는 거다.”
정말이지 바보같은 사내는 끝까지 단호하게 말한다. 꿈결 같은 이야기가, 그런 영화 같은 스토리가 정말 일어났을 거라고 단언한다. 둘 사이에 영원한 사랑이 있었을 거라고... 시작조차 해보지 않은 사내가 단언한다.
“그래서 마지막이다.”
“끔찍한.... 인사네.”
멍청하고 끔찍하고 로맨틱해. 이런 이별은 앞으로 평생 없을 거라고 히카리는 생각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다.
여전히 눈물이 앞을 가려 아카기의 형체만이 어슴푸레 보였다.
“안녕.”
“…..”
“잘 있어라. 히카리.”
이제는 신오우에 오지 않을 거야? 영영 다시 보지 못하는 거야? 어른이 되어도 만날 수 없어? 수많은 말들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어쩐지 울음이 먼저 나와 꺼낼 수가 없었다. 뒤돌아가는 모습이라도 눈에 담고 싶었지만, 먼지가 일어난 듯 시야가 하얗게 변해 아카기의 색조차 희미했다.
“잘 가…”
결국 너무나도 짤막한 이별의 언사를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채로 침침한 세계와 깜깜한 마음에 갇힌 채로 히카리는 아카기와 이별을 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으로, 어차피 시작한 적 없으니 마지막일리도 없었지만, 굳이 포장하자면 영원히 시작하지 않은 채로 끝이 난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명확히 남이 되었다.
아카기가 말한 영원이 이런 형태였다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시시하다고, 히카리는 생각했지만. 기약이 없었으므로 반문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가 없어서 아무 말도 얹을 수 없었다. 대답 없는 이름만 불러대면서, 히카리는 어쩌면 아카기가 말한 영원이 이런 걸지도 모른다고. 영원히 메아리만 치고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라면,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는 거라면, 참 끔직도 하다고. 출발선 앞에서 영영 울리지 않을 총성 소리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건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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