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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하지만 너무 얕게 묻어서 금방 드러나곤 한다. 무심히 길을 걸을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하늘을 보며 서 있을 때, 조금만 발을 굴러도 흙 속에서 튀어나오고 만다. 그 때마다 나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흙을 도로 덮었다. 깊숙이 묻지 않은 까닭은 그럴 수 없었던 탓이다. 나는 유약하다. 한 번의 버림에 모든 것을 잃을 정도로 유약하다. 이런 나를 지탱해주는 건 첫사랑이 바로 발밑에 있다는 안도감뿐이다. 
 체육관을 떠났다.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다. 문하생들은 토끼눈을 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미 계획한 일이었다. 포켓몬이 아팠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포켓몬들이 어느새 병을 앓고 있었다. 포켓몬 의사는 무리한 배틀에 피로가 축적된 탓이라고 했다. 과한 연습과 배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던 휴식 시간. 근근이 버텨오다 마침내 그들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적신호를 킨 것이다. 의사의 진단을 듣고 나서야 나는 포켓몬들을 살펴보았다. 아쿠스타의 표피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누오의 피부는 까칠했고, 골덕의 손발톱은 망가져 있었으며, 라프라스는 뿔과 귀가 상해있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구보다 물 포켓몬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악덕 고용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쓸었다. 포켓몬들은 저들이 미안하다는 듯 낑낑 울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날, 나는 그날 바로 결심했다.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체육관을 떠났다.
  짐의 간판을 떼던 날을 기억한다. 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부임할 때는 제법 호기로웠던 모양이지만, 해가 지날수록 낯간지러워진 문구다. 그만큼 정이 많이 들기도 했다. 잡지에서 소개될 때도, TV에서 인터뷰를 나왔을 때도, 우연히 나를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도…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하고 그 말부터 나왔으니까. 오래된 간판은 내 손으로 내렸다. 문하생과 주민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퇴야. 자신에게 벌을 주듯 말했다. 난 이제 은퇴야, 모두 잘 있어요. 그건 벌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루네시티로 향했다. 호우엔은 바다가 넓고 공기가 청정하다. 그 중에서도 바다로 둘러싸인 루네시티는 물타입 포켓몬에게 안성맞춤이다. 알고 지내던, 같은 물타입을 다루는 미쿠리씨의 소개로 새로운 섬에 정착할 수 있었다. 미쿠리씨는 내가 낯선 호우엔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사실 모두가 걱정했다. 에리카는 자신의 가까이에 와서 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벌이었다. 그러니, 좀 더 먼 곳으로 가야했다. 벌의 의미도 모르는 남자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했다. 
 그래서 루네를 택했다. 해변에 차오르는 푸른 물살에 살이 닿았을 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토록 낯선 땅과 바다, 그 안에 나만이 덩그러니 존재한다. 이제는 좀 더 깊게 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순간을, 지하 깊숙이 던져 넣을 것이다.
 상냥한 주민들은 이방인을 반겨주었다. 미쿠리가 미리 언질을 준 것인지, 주민들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짐리더였다는 것, 머나먼 칸토에서 왔다는 것, 물타입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며 열거하는 정보들은, 현재의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는 이제 짐리더도 아니며, 칸토에 살지도 않고,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완성해 주었던 모든 미사여구들이  분히 사라져갔다. 내가 걸어온 길은 해변가였다. 모래알 위의 잔상은 찰나의 파도에도 지워진다. 내가 소유했다고 믿었던 것들도… 해변의 발자국처럼 무연한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새 침대 위에 누웠다. 세제 냄새가 싸하게 코를 자극했다. 바로 천장을 응시한다. 천장은 하얗다. 네가 있던 산도 그랬다. 새하얀 눈이 끊임없이 허공을 메웠다. 너는 늘 그 산에 있었지만, 난 단 한 번도 너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네가 없을 때만 내가 산을 올랐기 때문이다. 어둑한 환상에 다리가 시려왔다.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이제 더 깊숙이 묻을 것이다. 아니면 곧 닥칠 장마에 전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차고 시린 물살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눈꺼풀 사이로 쓴 잠이 가라앉았다.


2. 

“아아, 졌잖아.”
 소년은 검은 머리를 벅벅 긁는다. 고개를 세우고 한마디를 던져준다.
“당연하지. 불타입인 파이리로 물타입 짐리더인 나에게 도전하다니, 언어도단이야.”
“하아-역시 기합만으로는 안 되는 거였나.” 
 짧은 투덜거림. 
 소년은 신참 트레이너였다. 불과 일주일 전에 포켓몬을 받고 고향을 떠나 모험길에 올랐다. 불과 일주일 만에, 타케시에게서 뱃지를 얻고 달맞이 동굴을 건너온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는 신참이었다. 배틀을 시작한지, 포켓몬을 다룬지 불과 일주일이다. 재능이 여물기에는 한창 모자란 시간이었다. 
“기합으로 상성을 이겼단 이야긴 들어본 적 없는 걸. 후우, 배틀 상식도 없구나.”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배틀을 시작했을 무렵, 천재라고 불리던 시절. 내가 차세대 챔피언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나조차도, 기초지식도 없어 시행착오를 겪기 일쑤였다.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재능에 덧씌웠던가. 소년을 보니 절로 옛시절이 떠올랐다. 선배로서, 짐리더로서, 제대로 조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짐에 도전할 거면, 풀이나 전기타입 포켓몬을 데려오는 게 좋아.”
“그렇구나.”
“뭐, 데려온다고 해도-레벨 차이가 심해서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파이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할 테니까.”
 듣는 태도가 엉망이었다. 다른 곳을 보는 채로, 대충 고개만 끄덕인다. 어린 여자애가 짐리더라서 무시하는 건 아닐까. 그리 생각되니 화가 갑자기 솟았다.
“너 말인데, 짐리더가 하는 말이라면 좀 더 제대로 듣는 편이….”
“파이리가 아니라 리자드면 괜찮을까?”
“뭐?”
“리자드가 되면 훨씬 세지잖아. 그러면 너에게 이길 수 있을까.”
 어이가 없어 숨이 턱 막혔다. 
“잠깐. 내가 한 얘기는 들은 거니? 불타입은 상성이 나빠서 안 된대두.”
“다 들었어. 풀이나 전기 타입이어도 레벨 차가 심하면 소용도 없다며. 그러면 새로운 포켓몬을 잡는 것보단, 파이리를 강하게 만드는 게 낫겠네.”
“뭐….”
“나는 파이리가 좋으니까.”
 그리고 소년은 유유히 짐을 나섰다. 내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파이리가 좋으니, 파이리로 이기겠다. 파이리는 아마 그의 첫 번째 포켓몬인 것 같았다. 첫 번째 아이에게 유독 정이 많이 가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건 좋다. 그래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분을 식혔다. 저런 태도라면, 다시 도전해도 분명 내가 이길 것이다. 나는 재능을 과신해 오만해진 트레이너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 녀석들은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혀 싹이 잘리고 만다. 안타깝지만, 그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빤히 보였다. 


타케시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 어절부터 그 소년의 이야기를 한다. 
“그 녀석, 카스미네 체육관에 왔었지?”
“응. 어제 왔다 갔어.”
“그래, 범상치 않은 아이야. 재능이 있더군.”
 눈살을 찌푸렸다. 
“배틀은 내가 이겼어.”
“네게 이기기엔 아직 조금 모자랄 테지. 그런데 그 녀석, 하루하루 엄청나게 발전하더군. 무서울 정도로.”
 그런 말투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모험을 시작한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된 트레이너에게 저런 대우는 과하다. 
“재능은 둘째고…태도가 영 아니던 걸. 내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
“하하, 네 이야기뿐만이 아니야. 원래 그런 식이라고.”
“그럼 웃을 일이 아니잖니.”
“재밌는 건, 사실은 전부 듣고 있다는 거지. 이야기를 제대로 걸러서 듣고 자양분으로 삼는다…그리고 성장한다, 그게 녀석의 방식인 거 같더군.”
 하나도 재미없었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이야기가 전부 그 아이에 대한 것들뿐이다. 입을 삐죽 내밀자, 타케시는 그제야 말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다시 올 거라며, 그 때를 기대해보라고 덧붙였다.
 대답 대신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거뭇거뭇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오늘은 도전자고 뭐고 없을 성 싶었다. 게다가 비가 내린다면, 파이리를 바깥에서 훈련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운이고 환경이고 그 애한테 따라주는 게 없었다. 내가 그리 말하자, 타케시는 빙긋 웃었다. 그러지 말고 기다려 봐, 넌 판단이 늘 빠르더군…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지. 
 먹구름 사이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2.

새 침대에서 케케묵은 환상을 보았다. 납덩이를 끌어안고 물속에 잠기듯 기분이 무겁다. 오래된 시절의 꿈은 좋지 않다. 꿈의 가지 끝에 설핏 걸렸던 그 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심한 눈동자. 꾹 다문 입. 까칠한 눈썹. 살짝 그을린 피부. 아주 오래 전, 그는 그런 얼굴일 때가 있었다. 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TV를 키자 예쁘장한 앵커가 어린 트레이너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어린 트레이너가 얼마나 강했던 건지, 앵커가 칭찬일색이다. 까무잡잡한 소년은 부끄러운지 낯을 붉힌다. 아이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여겼다. 지금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의 재능은 그럴 듯하지만, 우수하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재능을 남들보다 일찍 꽃피우는 타입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속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얀 모자를 쓴 저 아이가, 미래의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재능을 일찍 꽃피우는 것이 아닌, 남들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재능을 발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TV를 끄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하드에서 발견한 무려 2015년도에 써둔 레카스 중편소설의 앞부분입니다. 행사에 내기 위해 썼던 것 같은데, 뒷부분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까워서 일단 올려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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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