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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4. 12:08

[아카히카/태홍빛나] 노도2 글/포켓몬2018. 10. 4. 12:08

아카히카_ 노도2

 

 

그늘진 마음 달랠 수 없을 때엔 바람이 저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새벽녘, 그를 닮은 조용한 햇살이 천천히 창가에 다가오기 시작하면 무릎에 볼을 얹고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녀는 다독인다. 이제는 소녀가 아니기에, 그 시절보다는 차분하게 되짚어 본다.

 

줄곧 당신을 보고 있었다. 만난 횟수를 헤아려 보자면, 손에 꼽을 정도지만.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비정한 운명을 보물처럼 안고 기뻐하기도 했다. 봉신유적에서도 그랬다. 어쩐지 당신이 했던 말은 사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차갑게 가라앉은 옆얼굴에 시선이 팔려서. 나보다 키가 두 뼘은 더 큰 당신. 언제쯤 그 어깨 쯤까지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바라는 세상 같은 건.

 

허망한 두 눈에 빠져, 그 두 눈이 바라보는 세상 같은 건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을 향해 손짓하면 손가락 끝만 바라보는 사람처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왠지. 당신이 바라는 모든 일들을 망쳐버릴 생각만 했다. 신오우를 구해야겠다는 대의나 악을 처단한다는 정의감에서 온 대승적 감정이 아니라. 그저, 어쩌면. 당신이 갈망했던 이상향을 전부 이룰 수 없던 꿈으로 만들어 버리면. 당신의 꿈보다 더 크게 내가 자리잡을 것 같다는 치기 어린 심정이 앞섰다. 아직 당신의 반토막 밖에 안 되는 내가. 당신이라는 어른에게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불확실한 계획으로

 

엉성하게 다져진 마음은 몰아치는 노도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당신이, 혹은 나의 마음이. 아니, 당신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나를 바라는 눈동자는 언제나 부질 없이 불투명했다. 온갖 이물질로 가득 차서, 걸러낼 수도 없는 욕망 덩어리. 그렇기에 거꾸로 내가. 차고 무딘 심성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

 

줄곧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먼 하늘 구름에 가려진 별 만을 뒤적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당신을 떠올렸다.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왜냐면,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어떤 기분인지 어떤 감정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아이가 모래성을 쌓으면 일부러 무너뜨리는 아이처럼, 당신이 힘들게 쌓아 올린 성을 부숴버렸다. 그제야 당신은 나를 바라보았던가?

 

이따금씩 불온한 마음에 불안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회색빛으로 침잠한 눈동자에 마침내 내가 비췄을 때, 거센 불안보다 세차게 고동이 뛰었다. 그제야 실감했다. 나는 살아서 저 두 눈에 담기고 싶었다고. 그것이 분노이건, 원망이건, 혹은 슬픔이건 간에. 어린 나는 복잡한 감정들을 구분할 줄을 몰랐으니까. 그저 당신 안에 나라는 존재가 커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조금 어른이 된 후,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았을 때. 나는 후회했던가? 그보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지난 날을 되돌린다해도, 어린 나는 같은 짓을 반복테니까. 또 당신의 꿈을 부수고, 모든 걸 헤집어버릴 테니까. 후회는 의미가 없었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괴로웠다. 사실 내가 정말 원했던 미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걸 깨닫는 게 버거웠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안락한 미래를 잡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어른이 되기 위한 무한한 인내. 망쳐버린 과거를 당신에게 돌려주기 위한 양보심. 더이상, 그 무엇도 빼앗지 않으려는 노력들.

 

태생부터 불온한 생명인지, 혹은 배려란 모르는 이기적 유전자인지. 나는 그 무수한 노력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행할 수 없었다. 영영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응석받이처럼. 늘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훔쳐내려는 해적처럼. 당신의 마음을 약탈하려 했다. 마주보고 서서 조곤조곤 심장을 다독여 진심을 끌어낼 생각은 않고. 언제나 앗아버리고 싶었다. 빼앗아서, 두 손에 움켜지면 당신이 더는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심장을 잡아채면 당신은 늘 그 공허한 두 눈에 나를 채워줬으니까.

 

결국 두려운 건 스스로의 본심이었다. 모두가 신오우를 구한 영웅이라고, 어린 챔피언이라고 치켜세워줬지만. 사실 내 장기는 파괴 뿐이었다. 누군가가 쌓아 올린 노력을 망가뜨리는 재주 뿐이었다. 단지 운이 좋아서, 부순 물건이 악의 온상이었을 따름이다. 사실, 그것 또한 잘 전시된 다른 이의 산물이었는데. 나로서는 다다를 수 없던, 뜨거운 열망이 탄생시킨 꿈의 결정체였을 텐데.

 

깨닫고 나면, 행복할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을 망칠 뿐인 나를 소중히 여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신을 다시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했다. 남은 방도는 그 뿐이었으므로. 당신이 어디로 가고 싶어하든,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그 길이 내가 가장 혐오하는, 자신이 있는 장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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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