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

« 2025/1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015년 초 서코 등에서 나왔던 BW 기반 회지를 웹공개합니다.

게임 BW기반이라기엔 주인공즈는 많이 나오지 않고... 

가상의 플라즈마 단원들이 주인공인, 거의 3차창작(?)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두 명의 플라즈마 단원 소녀들의 눈을 통해 BW의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 이후 8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는데, 천천히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0. 프롤로그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었다면, 다른 이의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었을까?


세실리아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무언가에 애착을 느낀 적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든 포켓몬이든- 그랬다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아끼는 사람과 포켓몬을 떼어놓을 수 있었을까? 


미아. 넌 일생에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니? 포켓몬이나 사람에 정을 붙여 본 적 있니? 나는 없어, 우리는 없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플라즈마단일 수 있는 거야. 이건 포켓몬의 해방을 위한 일이에요, 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서 남의 포켓몬을 빼앗고 이용해 버릴 수 있는 거야.  


'해방'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세실리아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어두운 복도의 희미한 조명에 비쳐 번득였다.


 세실리아, 나의 아름다운 친구 세실리아는 그리 말했더랬다. 루나톤 같은 달이 어슴푸레 빛을 흘리던 밤, 우린 N님 방 앞에 서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플라즈마단이라기엔 너무도 불온한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칠현인님들이나 개치스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숙청당할 만큼 위험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솔직히 털어놓은 것일 테다. 우리는 이 비정상적이고 불분명한 조직, 플라즈마단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기에. 


 이곳, 플라즈마단에서는 N님과 개치스님, 그리고 칠현인님들을 제외한 모든 단원들은 같은 복장과 같은 머리를 한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임무를 나가도, 서로의 사정이나 출신 따위는 모른다.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게 규칙이다. 우리들은 누추한 지난날들을 허물어 버리고, 성역의 기사로 다시 태어났다- 고 여겨졌다. 여겨져야 했다. 우리들이 할 일은 옷에는 플라즈마단의 마크를 달고, 손에는 플라즈마단의 깃발을 들고, 싸우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서 빼앗은 포켓몬을 학대하며, 해방을 위해 N님을 위해 우리들의 왕을 위해.

 난 답도 없이, 그저 오래된 과실을 삼킨 듯 씁쓸하게 웃었다. 허나 그녀는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대신 열이 튀는 눈으로 내게 물어왔다. 


 미아. 내게 해방이란 뭐니?




1. 미아


해방. 매일 백 번도 더 들었어도, 마치 오래된 동화 속 어구처럼 실감이 안 나는 말이었다. 그건 내 삶이 그런 꿈결 같은 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단어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존. 사는 것이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생존의 문제에 비하면 해방은 몽상이고 환상이었다.


나는 고아였다. 생년월일도 모른다. 열 살 때까지는 고아원에서 지냈다. 원장은 무심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어서, 무명의 아이들에게 알파벳 순서대로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따다 붙이곤 했다. 내가 미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경위는 그만큼 하찮고 별 볼일 없었다. 게다가 고아원은 정부 지원금을 다 뒤로 빼내는 바람에, 시설 살림살이에는 신경도 쓰지 않아 건물의 간판도 다 떨어져 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깨봉이도 입에 안 댈 것 같은 꿀꿀이죽을 삼시 세끼 먹었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냄새나고 축축한 침대에서 몸을 구부리고 잠을 자야 했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내 이름은 미아고, 다른 어여쁜 이름을 붙여줄 만한 부모도 없었다. 나는 비린내가 날 것처럼 바짝 마른 미아고, 내가 숨을 편안히 쉬고 몸을 온전히 맡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까칠한 검은 머리에 주근깨가 난 미아고, 남들의 눈에 띌 만큼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다.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처지와 현실을, 그리고 이곳에 있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달이 유난히 밝던 어느 여름 밤, 나는 고아원에서 도망 나왔다. 


 포켓몬도 키우고 아끼는 세상인데 나 같은 어린 아이 하나 돌봐줄 선인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른 도시나 마을에 나의 불쌍한 행색을 보고 동정심이 동해, 자신의 따뜻한 집으로 데려갈 어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근거 없는 희망에 부풀어 달빛 아래를 맨발로 마구 달렸다. 귀뚤뚜기의 울음소리가 발밑의 풀을 타고 맥박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상에게 말라깽이 고아의 희망이란 길바닥에 들러붙은 껌 딱지만도 못한 것이었다. 꿈꾸던 선인과는 마주치지 못한 채, 난 정처 없이 하나지방을 떠돌았다. 큰 도시를 가도 작은 마을을 가도 상황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켓몬에 예쁘장한 액세서리를 달아줄 줄은 알았어도, 길거리의 거지 꼬마에게 빵조각 하나 던져 주는 법은 몰랐다. 


 기력이 다해 울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에게 또 다른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나 같은 부류에겐 희망조차 사치였다. 밤바람을 이불 삼아 잠들고 굶주림을 벗 삼아 깨는 것, 그게 나에게 주어진 일생인 것이다. 


 때로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때로는 구걸을 하며 떠돌다, 나는 산로마을에 당도했다. 산로 마을은 땅위의 열기만으로도 온 몸이 구워지는 것처럼 뜨거운 곳이었다. 그곳은 유난히 사람이 적었고, 그래서인지 가게도 집도 드물었다. 이렇게 살림이 팍팍해 보이는 동네는 인심도 쓰다. 그래서인지 구걸을 하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마을 안에 곱게 머물고 있었으면 될 것을, 오래 굶주렸던 탓에 나는 풀숲에서 나무열매를 뒤지기로 결심했다. 이 세계의 상식이지만, 포켓몬 없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야생 포켓몬의 습격을 받았을 때, 방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결정은 너무나도 한심했다. 결국 그 선택이 내 생에 새로운 기회를 주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뒤진 풀숲은 하필 무장조의 서식지였다. 그 녀석들에게 들키자 나는 단숨에 마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무장조들은 귀가 깨질 것 같은 금속음을 내며 내 뒤를 추격했다. 며칠 굶은 아이의 발재간으로는 비행 포켓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제 풀에 지쳐 흙 속에 풀썩 쓰러졌다. 무장조들의 날카로운 부리가 내 몸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살이라는 거죽을 가르고 마구잡이로 사지육신을 헤집었다. 온 몸이 피와 상처로 벌겋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죽는다, 라는 말이 쉽사리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건 내 삶이 언제나 죽고 사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어도 별 아쉬울 것 없는 하찮은 삶이었기 때문일까. 


 살이 벗겨지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몸을 말 줄 밖에 모르는 벌레처럼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 때, 무장조들의 금속 날개가 부딪히는 굉음 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화염방사. 한순간 뜨거운 불꽃이 내 등 위에서 타올랐다 사라졌다. 무장조들은 힘없이 쓰러지거나 볼품없는 날갯짓으로 도망을 쳤다.


“괜찮니?”


 온화한 음성이 나를 불렀으나, 온몸은 물론 목 주변에도 상처를 입어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가엾게도…어린 아이가 홀로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부모님은?"


 그가 손을 내밀어 쓰러져 가는 내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했다. 희끄무레한 수염에 머리마저 백발인 노인은 고지식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의 뒤에는 풍채가 든든한 앤티골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살포시 안아 올렸다. 


"안 되겠다. 일단은 병원에 가자꾸나."


 그의 이름을 물을 틈도, 나의 이름을 말할 틈도 없이 나는 기절해 버렸다. 이후 그는 나를 간호해 줬고, 있을 곳도 마련해 준 은인이 되었다. 

 노인은 바로 로트. 플라즈마단의 칠현인 중 하나였다. 


로트님은 나에게 플라즈마단이라는 보금자리를 주셨다. N님이 새로 만드실 낙원에의 작업에 협조하고 포켓몬의 해방에 동의한다면, 얼마든지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로트님은 항상 N님과 포켓몬의 해방에 대해 말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혈혈단신 고아였고 플라즈마단 만이 내가 속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조직을 아우르는 비정상적인 이상과 충성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곳을 나가면 난 또다시 길거리를 헤매는 거지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해방이란 단어를 이해 못하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N님을 숭상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나에게 해방이란 생존, 그 자체였다. 생존에 성공한다면 그것이 해방이고 실패한다면 곧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실리아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로 난 세실리아에게 되물었다. 


 네게 해방은 뭔데?


 그녀는 마침내 웃으며 말했다. 


 -나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야.


 고개를 갸웃했다. 세실리아의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는 식으로 열변을 토해내더니, 갑자기 자신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라니. 똑똑하고 논리력 있는 세실리아는 가끔 이런 식으로 나를 사념의 곤경 속에 빠뜨리곤 했다.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자, 세실리아는 흐드러지게 지는 해당화처럼 샐쭉 웃었다. 연한 주홍빛이 파스텔처럼 그녀의 양 볼에 번져갔다. 아아, 그녀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
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