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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우 


전기돌들이 파삭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거슬렸다. 전기돌 동굴은 전류가 풍부해 전기 타입 포켓몬에게 아주 좋은 서식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그다지 내 흥미를 돋우지 못했다. 발밑아래 파쪼옥 몇 마리가 쪼물쪼물 기어갔다. 몇몇 여자단원들은 귀엽다며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런 작고 귀엽다고 여겨지는 포켓몬조차도 내게는 그저 귀찮은 장애물일 뿐이었다. 

 오랜만의 임무였고,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그게 하필 칙칙한 동굴 안이라 해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산보 따위가 아니었다.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한다. 소녀의 얼굴을. 그녀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N님은 그녀가 전기돌 동굴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얼 원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세운 보르쥐 마냥 동굴 안을 살폈다. 천장까지 푸른 전류가 번져 번쩍거렸다. 분명 뇌문시티에서 N님과 소녀가 얘기를 나눴다고 들었다. 그것도 단둘이, 관람차 안에서. 그래놓고 또 그녀에게서 뭘 더 알아내고 싶은 걸까? 

 출동하기 전, 나는 N님에게 물었다. “그 애는 뭔가 특별해요?”라고. N님은 대답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애는 많이 특별해”라고.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포켓몬에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오는 걸 보니 가까이에 있던 단원이 누군가와 배틀을 시작한 것 같았다. 

 분명 그 소녀일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동료의 외마디 절규가 들려오고, 마침내 소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코너를 돌아오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그녀가 내가 잘 아는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에.


“세실리아…?”


 나는 무심코 그렇게 부르고 말았다.


배틀은 싱거웠다. 그 소녀 입장에서는 그랬을 거란 얘기다. 나는 고작 보르쥐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도무지 배틀에 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 친우의 얼굴을 가진 소녀와 승부를 하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을까. 보르쥐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배틀 도중에도 망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 저리 뜯어봐도 그녀는 영락없이 세실리아의 닮은꼴이었다. 밤색 머릿결, 사랑스런 눈썹, 잡티 없는 피부에 자신감이 담긴 입매까지.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 소녀에게는 세실리아에게는 없는, 갓 피어난 봄꽃에서 흘러나오는 활력이 느껴졌다. 그녀에 비하면 내 친구는 마치 오래전에 시들어 잎을 다 떨구어버린 꽃 무덤 같았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배틀은 삽시간에 종료되었다. 자신의 포켓몬을 볼에 넣으며 소녀는 그리 중얼거렸다.


“배틀에 이렇게 의욕이 없는 플라즈마단은 처음 봐.”


 마치 진기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배틀하면 보르쥐도 기뻐하지 않을 거야.”


“…상관없어. 어차피 포켓몬은 도구니까.”


 내 한 마디에 소녀의 눈매가 매섭게 변한다. 


“포켓몬을 해방시키는 게 플라즈마단의 이념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무래도 화를 돋운 모양이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소녀와는 달리, 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맙소사. 그럼 왜 플라즈마단에 있는 건데?”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지.”


“한번도, 도구로 이용당하는 보르쥐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없어.”


 언뜻 소녀의 눈빛이 간절해진다. 아, 이건 또 무엇일까.


“정말…단 한 번도 없어?”


“없어. 없다니까.”


 가까이 다가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가 물어왔다. 나는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재차 ‘없다’고 답했다. 


 이윽고 소녀의 커다란 두 눈에 슬픔이 맴돌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아이는…. 우리에게 없는 표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난 그만 가 봐야겠어.”


 모자를 고쳐 쓰는 그녀를 묵묵히 주시했다. 분명 외양은 연약해 보이는 소녀인데, 단호한 기백이 흘러넘친다.


“나는 플라즈마단을 무찌르고…N을 막을 거니까. 그러니까 모든 걸 끝내는 그 순간이 오면….”


 걸어가다 나를 슬쩍 돌아본다. 가느다란 옆선조차도 세실리아와 똑 닮았다. 하지만 닮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네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녀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반짝이는 전기돌에 비친 그녀의 푸른 그림자가 점점 크고 길어졌다. 그녀가 지나간 길 뒤로 전기돌들이 따닥따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파쪼옥들이 곰실곰실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꼭 다문 손아귀에 축축하게 땀이 차올랐다. 알 수 없는 허무함과 중압감이 실타래처럼 가슴 언저리에서 뒤엉켰다. 


 그리고 세실리아가 저 소녀를 보고도 울지 않은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임무를 마치고 성으로 복귀한 뒤, 나는 어떤 낯으로 세실리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세실리아는 N님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라 오그라든 낙엽 같았다. 그녀의 맥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떠돌았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탄식하듯 내뱉었다.


“봤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는 미동도 없었지만, 홀로 붕 뜬 달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너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너무 닮았더라.”


 내 말에 세실리아는 취한 듯 읊조렸다.


“그래? 나는 처음에 거울을 보는 줄 알았어.”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 농담. 


“세실리아, 혹시…. 그 아이, 너와 관련 있는 건 아니지?”


“웃기는 이야기네. 알잖니, 내 가족사정. 잃어버린 여동생이라거나, 그런 3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냐.”


“그럼….”


 3류 드라마처럼, 세실리아에게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내 이야기를 그저 흘려버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아이의 가정환경에 대해 조사했어. 하지만 나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어.”


 세실리아는 그 소녀의 가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가 사는 도시도, 그녀의 부모님도, 친구들도. 어느 하나 세실리아와 관련되는 요소는 없었다. 완벽한 타인인 것이다.


“그저, 겉모습이 비슷할 뿐.”


 그것이 ‘그저’라는 말로 형용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을 이어가는 세실리아의 낯빛이 점점 납빛으로 퇴색해갔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보는 N님의 얼굴도 보았니?”


“으응.”


 나는 대답 외엔 할 말이 전무했다.


“그 아이에 대해 말하는 N님의 목소리도 들어봤니?”


“으응.”


 세실리아는 우는 걸까?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난 단 한 번도 세실리아가 우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만큼 단단하고 묵직한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단단하고 묵직했던 세실리아의 얼굴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어떡하지? 그 아이가…. N님의 소중한 사람이 되면…. 난 어떡하지?”


“세실리아….”


“미아, 말해줘. 난 어떻게 해야 해?”



결국 그 날, 세실리아는 울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묵직하던 그녀가. 늘 정갈하고 정돈되어있던 그녀가. 낡고 구겨진 이불처럼 온 몸을 돌돌 감은 채, 주체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단복으로 닦아내며 울음을 토했다. 나는 멀찍이 서서 그저 지켜보았다. 괜찮을 거야. 그런 흔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나는 친우에게 따뜻한 말 하나 전하지 못하는 얼간이었다.

 

*****


며칠 뒤, 로트님이 나를 찾으셨다.


“곧 때가 올 거다.”


 근엄한 목소리였다. 로트님은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기대에 차 있었다.


“N님이 왕이 되고, 모든 포켓몬이 해방되는 날…. 그 때가 올 거다. 그 때가 오면, 세계는 비로소 평화로워지겠지.”


 수년이 넘게 귀에 닳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나는 여전히 뜻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N님이 설사 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딱히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포켓몬만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도 각자의 고통과 상념 속에서 해방될 것이다. 미아, 그 날을 기다리렴.”


 로토님의 말에 불현 듯 깨달았다.


 N님의 마음 자체가 평온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까?


 N님에게도 해방이 오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다른 이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미아야, 몸이 안 좋으냐?”


“아니, 아닙니다….”


 나는 제자리에서 주춤댔다. 세실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야.




 내 신체가, 바닷바람을 처음 맞는 가지 여린 나무처럼 불안한 각성에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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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