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타케히카] 특별한 착각 글/기타2016. 3. 20. 14:36
너는 초록도 잘 어울리는구나. 중학교 교복을 처음 입었을 때, 그 애가 말했다. 난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노랑, 분홍, 다 잘 어울리지만 진녹색의 교복도 퍽이나 어울리네. 언제나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나는 또 웃기만 했다. 야가미 히카리, 바보 같기도 하지. 그 다정함과 찬사가 나만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살아왔으니.
아홉 살. 순수와 미덕만으로 가슴을 가득 채웠던 시절. 우리는 서로가 빛과 희망이라고 믿고 있었다. 같은 나이와 또래의 형제가 있다는 소소한 교집합만으로도 서로가 꽤나 닮았다고 여겼다. 파트너 디지몬들은 유독 사이가 좋았고, 단 둘이 남아 극한까지 악의 디지몬과 싸워보기도 했다.
우리 둘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사고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특별했으니까. 아니, 특별하다고 믿고 싶었다. 눈치채보면 어느새 그 애는 내 옆에 와서 서 있었다. 깊고 투명한 눈동자로, 나긋하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히카리, 히카리. 그 음성이 좋아 나는 한 번도 대답을 않은 적이 없었다. 응, 그래, 타케루군.
아홉 살의 타케루와 열세 살의 타케루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사실 그 애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먼저 다가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미소를 지어주고. 그러면 나는 또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하고. 웃음을 흘리고. 손을 흔들고.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특별하다고 여긴 게 잘못이었다.
“타케루. 여자 친구 생겼다며?”
눈치도 없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오빠가 툭하고 내뱉었다.
“뭐랄까, 대단하네. 타케루-. 원래 인기도 많았다며?”
“어….”
“근데 우리 동생은, 표정이 왜 그러실까.”
약 올리는 거야? 아니면 속도 모르고 무신경하게 하는 말이야. 머리가 지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혹시 좋아했어?”
“뭐??”
느닷없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큰 목소리가 나왔다.
“아님, 좋아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 나는.
딱히 답할 수가 없었다. 특별해, 특별하지 않아. 라고 물으면 당연히 특별하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어찌 답해야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특별하다고 여긴 게 좋아하는 거라면. 그 ‘좋아함’이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우리집안은 참, 대대로 안 좋은 풍습이라도 있나봐.”
“그건 또 무슨 소리….”
“그냥, 그냥 하는 소리야.”
뜻 모를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는, 오빠는 자기 방으로 유유히 돌아갔다. 좋아해, 좋아하지 않아? 골몰해 답을 내려고 해도-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걸.
타케루와 그 아이는 매일 아침 함께 등교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쉬는 시간 틈틈이 만나고, 함께 하교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안녕, 히카리- 안녕, 타케루군, 하고 잘게 토막 나버린 인사를 나누는 것 뿐. 그마저도 타케루의 그 아이가 싫어했다. 그 아이는 질투심이 강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나를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질투심보다는 촉이 강했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난 여전히 안녕 히카리, 하고 날 부르는 그 목소리가 특별하다고 느꼈으니까.
****
“눈물은 안 나와?”
태양이 베란다를 뜨겁게 달구던 날. 하드를 입에 물고 있던 오빠가 말했다.
“아니, 한 번쯤은 울지 않았을까 해서.”
“…내가 왜?”
“타케루랑 그 아이 말이야, 생각보다 오래 가잖어. 눈이 내리던 지난 겨울부터 만났는데 벌써 쨍쨍 내리쬐는 여름이니.”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간신히 연못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혀 놓았는데. 깊숙이 잠겨있던 어리석고 앳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한 번쯤 울지 않았어?”
“……. 오빠는, 내가 울었으면 좋겠어?”
“당연히 그 반대지. 만약 내 여동생이 울었다면, 그 자식의 면상에 한 대 날려버릴…수는 없겠지만. 위로는 해줄 수 있잖냐.”
언제나 생각했지만- 오빠는 정말. 다정하다. 어중간함이 없는, 말끔하고 올곧은 상냥함. 그렇기에 때로는 눈치가 부족하고,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그런 오빠를 늘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울지 않았어.”
“한 번도?”
기대고 싶지 않다. 기대는 순간,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았다.
“억지로 참은 건 아냐. 정말 눈물 안 났어.”
“정말로?”
어느새 오빠는 하드를 다 먹어치우고, 남은 나무막대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만큼 별 일 아니었단 뜻이겠지.”
“……흐음, 그렇단 말이지.”
미심쩍은 얼굴을 하기에, 애써 단단한 얼굴을 했다. 오빠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또 뜻 모를 소리를 했다.
“그것도 우리 집안 전통인가보네.”
“…무슨 소리야?”
“그냥, 네가 이러는 거 전부.”
소라 언니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난 오빠의 연못에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오빠의 연못은 내 것보다 훨씬 오래 묵었다. 얼마나 많은 추억과 헛된 소망들이 그 바닥에 잠들어 있을지. 난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울지는 않았나보지만, 많이 까칠해졌네, 내 동생.”
“……뭐….”
“다정다감한 히카리로 돌아와주라. 그게 내 유일한 낙이었거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단지 변한 게 있다면 그저….
안녕, 히카리. 그 애가 더 이상 나를 특별하게 불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타케루에게 더 이상 내가 특별하지 않고- 아니. 한 번도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따름이다. 단지 그 뿐으로, 그 밖의 별다른 일은 내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늘 같이 흘러가고, 사계는 변함이 없고, 일상은 꼭 맞춰둔 알람처럼 정해진 순번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 결국 우는구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댕그랑. 휴지통 안으로 나무막대가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했다. 오빠는 천천히 몸을 옮겨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특별하다는 건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간신히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고 다시 안으로 욱여넣었다. 오빠가 으응, 하고 수긍인지 부정인지 모를 짧은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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