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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세/월로윤슬] (등산가 월로)

히스이에서부터 따라온 등산가 아저씨가 너무 귀찮게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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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홀연히 나타나 빛나의 곁을 뻔뻔하게 지키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퍽 시일이 지난 화제였다. 빛나보다 몇 뼘이나 더 큰 사내의 모자를 벗겨보니 난천과 얼굴이 판박이었다는 사실도, 처음에는 천지가 요동할 정도의 대사건이었으나 이제는 별다른 뉴스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난천의 친척도 뭣도 아니었고, 자세히 알아보니 그녀의 먼 조상이 같을 뿐이었다. 유전자의 우연인지 위대함인지 모를 현상에 다들 입을 떠억 벌렸지만, 정작 그 사이에 낀 빛나는 무덤덤하였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며, 빛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토란떡을 먹었다. 빛나의 어머니는 그녀가 토란떡을 그리 좋아하는 지는 처음 알았다. 어쩌면 딸내미의 식성이 노인처럼 변해버린 게 더 큰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사내가 매일매일 틈도 주지 않고 빛나 옆에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아무래도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정작 빛나는 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난천 씨와 얼굴이 같으니까 어쩐지 안심 돼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미리 정해 둔 것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두 사람을 목격한 지인들은 하나같이 둘이 몇 시간이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잘도 떠든다고 묘사했다. 근 몇 개월 사이 빛나의 언행은 눈에 띄게 예스럽다고 해야 할지 조숙해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게 변모했는데, 또 그 사내도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유독 묘했다. 부모도 소꿉친구도 원인을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콕 집어 비난할 만한 소동도 없어 그저 오리무중인 사안이었다.

 

 

 

월로씨, 지겨워…….”

 

이른 아침, 대문을 열자마자 기둥처럼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빛나가 말했다. 그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조금 서운한 걸요.”

거짓말. 웃고 있잖아요.”

 

말과는 다르게 입술 사이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이런, 좀 봐주시죠. 몇 백 년만에 윤슬 씨를 보니 반가워서 그만.”

그러니까, 다시 만난 지 벌써 반 년이 넘었잖아요? 그만 반가워해도 될 것 같은데.”

제 오랜 세월 외로움을 아시긴 합니까? 조금 봐 주시죠.”

 

능글거리는 말투로 월로가 빛나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오늘은 어디를 가시죠?”

, 오후에 협회에, 볼 일이 좀 있어서. 그냥 시덥 잖은 미팅이랄지….”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을까?”

아침 일찍 안 나오면, 월로 씨가 제 방 창문을 수 백 번씩 두드리잖아요. 토게키스한테 그런 쓸데없는 일을 시키지 말아주세요….”

아침은 드셨습니까?”

우유 한 잔 마셨어요.”

저런, 한창 클 나이에 양이 부족하네요. 다이어트 중이 아니라면, 같이 식사나 하러 가시죠.”

 

빛나는 이럴 줄 알았어라며 툴툴 댄다. 어차피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왔어도, 월로는 자신이 아침을 안 먹었다며 아무 식당이나 끌고 간다. 또 식당에 가서 몇 시간 동안 떠들겠지….

 

-라는 빛나의 예상은 한 치의 빗나감도 없었다. 사실, 예상이라기보다는 통계에 가까웠다. 월로는 지난 반 년 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빛나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그녀의 소꿉친구가 사실을 알면 기함 할 노릇이었다.

 

배불러….”

고작 채소 몇 개 먹고 배부르다니, 윤슬 씨는 더 클 생각이 없나 보군요.”

성장기는 이미 지났다구요.”

많이 먹어야 저처럼 자란답니다.”

그렇게 커지고 싶진 않아요….”

 

빛나가 테이블 위로 엎드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또 월로가 핀잔을 준다.

 

어쩐지, 무기력하지 않습니까? 히스이를 다녀와서 번아웃이라도 온 거 아닙니까?”

저기…. 일단, 히스이를 다녀온 지는 꽤 지났구요. 그리고 월로 씨가 번아웃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좀 어색하고…. 뭣보다, 제가 지친 건 월로 씨 때문인데….”

? 제가 매일 이렇게 찾아와서, 식사까지 챙겨드리는데.”

아뇨 아뇨. 그 전에도 엄마가 삼시세끼 챙겨줘서, 누구보다 식사는 든든했거든요. 그보다는 월로 씨랑 매일 투머치 토크를 하는 거에 매우 진이 빠져서….”

하긴. 어머님의 요리솜씨는 매우 좋죠.”

 

포크를 입에 물고, 월로가 딴 소리를 한다. 뭐랄지, 그 모습을 보는 윤슬 속이 편치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있잖아요. 월로 씨…. 히스이에 있을 때에 비해서, 뭐랄까….”

 

빛나는 턱을 괴고 월로의 두 눈을 응시한다. 어쩐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다.

 

말 많은 할아버지 같아졌네요.”

 

 

2.

충격.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그 말을 듣고 월로는 한동안이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 많다할아버지어느 표현에 더 충격을 받았는지는 스스로도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빛나는 협회 미팅을 가야 한다며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시험 배틀, 이런저런 미팅. 이튿날은 말도 없이 하나지방으로 출장. 다시 만난 건 나흘이 지나서였다.

 

며칠만에 빛나를 본 월로의 첫마디는

 

그러는 당신도 좀 애늙은이 같아졌네요.”

 

였다. 빛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며칠 동안 그 말을 생각하고 있던 거에요? 치졸해….”

치졸하다니. 말도 없이 출장을 다녀왔으면서 심하시네요.”

말 했으면 하나까지 따라왔을 거 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일인데, 그건 좀.”

 

전혀 타격감이 없는 듯, 빛나는 비니 위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확실히 애늙은이 같긴 합니다. 그 나이에, 무슨 일이 그렇게 많습니까? 누가보면 당신이 리그 위원장인 줄 알겠습니다.”

사실, 챔피언이니까 위원장이랑 동급이긴 해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같은 상석에 앉거든요.”

지금 자랑하는 겁니까?”

그냥 설명하는 건데요.”

 

빛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말없이 두고 갔다고 투정부리는 셈이다.

 

어제는 난천 씨 얼굴 봐서 좋았는데…. 같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좀….”

누가 할아버지라는 겁니까. 어쨌든 같은 얼굴이잖습니까. 전에는 [같은 얼굴이라 안심]된다면서요.”

그게 실은…. 그런 줄 알았는데, 왠지 월로 씨 얼굴을 보면 좀 트라우마가 생각나요. 월로 씨가 저한테 저지른 일이 있어서.”

 

그 말에 약점이라도 찔린 듯 월로는 티나게 헛기침을 한다.

 

그게 대체 몇 백 년전의 일인데, 일일이 기억하고 계십니까.”

월로 씨한테는 몇 백 년 전의 일이지만, 저한테는 얼마 전의 사건인데요.”

 

그렇다. 월로는 긴 세월을 끊김없이 지내왔으나, 빛나는 시공의 균열을 통해 순식간에 히스이와 신오를 오간 셈이다. , 히스이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에게 있어 불과 일 년 전의 일들이었다.

 

쇼크엄청난 쇼크.”

거짓말 한 건 죄송합니다만.”

괴상한 헤어에 이상한 의상…. 완전 쇼크.”

그 쪽입니까?!”

 

월로의 목소리가 커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본다. 지인들이 말하는 둘이 몇 시간이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잘도 떠든다는 장면들이었다.

 

그런 괴상망측한 차림을 보여준 바람에, 가끔 난천 씨를 봐도 생각난다구요. 얼마나 실례인지 알아요? 엊그제 미팅할 때도, 난천 씨를 보고 떠올라서 그만웃음이….”

미팅 가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겁니까?”

“…나진 않았지만요. 어쨌든 저한테 많이 잘못한 건 알고 계시죠?”

 

그러자 월로가 고개를 푹 숙인다. 푹 숙여 봤자, 빛나가 한참 작지만.

 

정말이지, 얼마나 울었는데….”

“………울었습니까?”

 

갑자기 고개를 들고 묻는다. 또 눈동자가 초롱 거린다. , 빛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울었냐고요? 왜 답이 없습니까?”

아 좀…. 말이 너무 많아. 딱히 운 건 아니고요….”

방금 [얼마나 울었는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울만큼 괴로웠다던가 하는그런 뜻이니까요?”

 

알 수 없는 의문형의 문장. 월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울었군요. 엄청 많이.”

저기. 제가 운 게 왜 월로 씨가 흐뭇해 할 일이죠? 보통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사과는 이미 많이 했고. 어쨌든 아까 당신이 한 말처럼. 당신에게는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니, 아아주 기억이 생생하겠군요.”

 

사실, 동영상을 찍어 놓은 듯 생생하다. 월로의 배신을 알고, 그를 무찌르고, 축복마을로 돌아와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아무도 모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조사대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거울 옆에 쭈그려 앉아 하염없이 훌쩍였다. 원망, 분노, 회한. 어떤 말로도 수식되지 않는 감정들이 산산이 깨져 맨발에 밟혔다. 심장에 피가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아직도 어제 일 같지만…. 월로의 노련한 얼굴을 보면, 머릿속 핏기가 싹 가시곤 했다. 절대 말해주지 말아야지, 했는데.

 

사과는 아무리 해도 부족해요.”

, 그건 계속하겠습니다. 여튼 많이 울었다는 거죠. 윤슬 씨는 눈물이 많네요. 어라? 아닌가, 나 한정인가….”

그런 말투, 열 받으니까 쓰지 마세요.”

 

커피를 홀짝이며 킬킬 거리는 월로가 얄밉기 그지 없었다. 왜 울려 놓고 흐뭇해 하는 건지. 빛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어쨌거나, 제가 나쁘게 대하지 않는 건 다 난천 씨 덕분인 줄 아세요. 히스이에서 난천씨랑 닮은 사람을 만나서, 안심 되고 긴장이 풀어졌던 건 사실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난천이란 사람이 저를 닮은 거 아닙니까? 아니면 코기토 씨를요.”

하여튼저는 난천 씨를 엄청 좋아하니까. 닮은 사람도 좋아할 수 밖에 없죠.”

 

그러자 커피잔을 황급하게 내려놓으며 월로가 고개를 들이민다.

 

? 저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까? 방금?”

“…그 전 이야기는 안 들었죠? 전 난천씨를 좋아하는 거라니까요?”

원래 모든 이야기는 결론이 중요한 겁니다. . 저를 아주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그러고보니.”

 

히죽히죽, 귀가 시뻘개져서 키득 거리는 월로가 정말 악당처럼 보였다.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빛나는 화제를 돌렸다.

 

금경 대장을 처음 봤을 때도 엄청 놀랐어요. 태홍이랑 정말 비슷해서.”

태홍이라면, 몇 년 전에 신오를 들썩였던 갤럭시단인가 뭔가의 보스 말이군요.”

 

입가의 웃음은 가시질 않지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긴 한 모양이다.

 

, 그 시정잡배들은 윤슬 씨가 다 처단하지 않았습니까?”

표현이 조금…. 그치만, 금경 대장은 정말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금경 대장을 떠올리면, 태홍도 조금 용서가 되는 거 같기도….”

당신 사고방식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겁니까? 그런 식으로 악당을 쉽게 용서해주면 안됩니다.”

본인 얘기를 하는 건 아니죠?”

 

도둑이 제 발 저린 건지, 월로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따지면 히스이에서 만난 사람들과 얼굴이 비슷한 인간에겐 전부 호감이 생기겠군요.”

. 어느정도 사실이긴 해요~. 광휘도 영빈 선배를 만나고 난 뒤 뭔가 더 친숙하고. 전진 씨도 그렇고…. 마박사 님은 좀 싫어졌을지도….”

 

왠일인지 빛나의 이야기에 토를 달지 않고 월로가 잠자코 듣는다.

 

왜냐면 히스이는 이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다들 다시 못 만난다는 얘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쓸쓸해져서…. 비슷한 사람에게 감정을 투영하면 좀 나아지는 거 같기도 하고….”

 

좀 심각한 얘기였나? 빛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이어나가다 월로의 눈치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사뭇 날카로워졌던 눈매가 금세 평소의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까? 수 백 년이 지난 후 재회라니. 감동을 느끼셔도 됩니다.”

그치만저는 월로 씨보단 금경 대장이나 영빈 선배가 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칼 같이 월로가 말을 자른다.

 

그러니까 저한테 난천인지 뭔지 하는 여자를 투영할 필요는 없단 얘깁니다. 월로의 오리지날은 여기. 바로 당신 앞에 있으니까요.”

흐음….”

 

전부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빛나는 쿠키를 한 조각 집어먹었다.

 

난천 씨를 투영 안 하면, 월로 씨에 대해선 온갖 악감정 밖에 없는데….”

“…….”

그래도 노력해볼게요. 왜냐면, 월로 씨가 있으니까- 히스이에 대한 기억이 거짓이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어서 좋거든요.”

 

이번 대답은 마음에 들었는지, 월로가 느긋하게 씨익 웃었다. 만족의 미소였다.

 

근데 그래서, 월로 씨는 왜 그렇게 오래 사는 거에요? 수명은 앞으로 얼마나 남았어요?”

그게 궁금하십니까? …당신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거뜬하니까, 걱정 마세요.”

헤에그 때까지도 안 늙으면 좀 징그러울지도….”

 

사실 지금도 좀 징그러울지도? 하는 생각은 쿠키와 함께 삼켰다. 월로는 순식간에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이토록 선명하게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이라니, 수 백 년은 허투루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배부르네요.”

주스랑 쿠키 하나 먹고요?”

어제 저녁에 난천 씨가 밥을 엄청 많이 먹였거든요…. 그러고보니, 계속해서 먹이는 건 둘이 똑같네요.”

빼빼 마른 당신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월로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계산을 하려는지 지갑을 꺼낸다.

 

그래서 다음 일정은 뭐죠?”

“…집에 가서 낮잠 자고 싶은데.”

저런. 한창 자랄 나이에 그런 무기력한 생활은 좋지 않습니다. 저와 봉신유적이라도 가시죠. 좀 걷기도 할 겸.”

그냥 본인이 가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리고 유적 재미없어요. 할아버지 같애.”

“……….”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상호교류광장이나 사파리존이 유행인데전혀 모르시는구나역시….”

 

다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아니, 지명인지 다른 이름인지 잘 모르겠다. 가게를 나서며 월로가 읊조린다.

 

그럼 그 상호어딘지나 가시죠.”

그럴까요? 사실 새로 잡은 이어롤을 데리고 가 보고 싶었어요.”

 

빛나는 배시시 웃으며 앞으로 뛰어나간다. 고작 주스 한 잔과 쿠키 한 조각을 먹었는데 기운이라도 차린 거 같다.

 

가요! 등산가 월로 씨.”

.”

 

앞장 선 빛나를 따라 월로가 느즈막하게 걸어 나갔다. 키가 두 뼘도 차이가 더 나고, 외모도 복식도 닮은 점이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정오에 높게 떠오른 태양에 진 그림자가 하염없이 길어져, 어쩐지 그림자 만큼은 키가 엇비슷해 보였다.

 

:
Posted by 새벽(dawn)
2023. 1. 30. 13:27

[레알세/월로윤슬] 파란 글/포켓몬2023. 1. 30. 13:27

 

 

 

 

 

 파란 (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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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슬픔 속에 잠긴 그대여.

 

#

 

언제부터인가 나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사실, ‘언제라는 말부터 불완전하다. 태생부터 완벽을 몰랐다. 더구나 다정하고 솔직한 당신 옆에 설 때면, 불온함이 가시질 않았다. 더러 누군가가 보기에, 당신은 심성이 제멋대로인 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누구나 알게 된다, 그 곁에 몇 분이라도 머물러 보면.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올곧으며, 수더분한 언행은 슬픔을 위장하기 위함이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된다. 모르더라도 알아야 한다. 슬픔 속에 머무는 그림자는 영영 깨닫지 못할, 밤하늘 너머에서 쏟아지는 별무더기의 바람들. 영원히 그런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살고 싶었다. 은하 보다 빛나는 존재에 눈이 멀어 세상을 되짚지 못하는 채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푸른 심해를 유영하는 거대한 그림자는 햇살을 받으러 나올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저 한 길만 향해 묵묵히 노를 젓는다. 다음에 만나면, 못했던 그 말을 해야지. 마음 한 구석에 내동댕이 쳐진 묵은 결심은 해가 지나도 썩지 않고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리고만 있을까? 아무도 나에게, 기다리라 한 적 없고 인내하라 한 일이 없다. 파도를 헤치는 새까만 그림자는 햇살이 비치는 풍광을 몰랐다. 수많은 물고기 떼와 해초, 해류를 타고 흘러오는 낯선 이의 속삭임만 들릴 뿐이었다.

 

나를 기다려 줬으면 했다.

어디에 있어도 슬픔에 젖지 않도록 나를 기다려 줬으면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줄 거라고 믿었다.

 

 

##

 

그리고 거짓말처럼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 소녀는 죽었어요.”

 

반 년 만에 찾은 축복마을에서 들은 첫마디. 더이상 은행상회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월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녹색 모자를 억지로 짓이겨 눌렀다.

 

죽었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이야기네요. 후우그 어린 아이가, 그런 고생을 했는데 너무나 허무하게….”

 

월로는 축복마을에 오랜만에 들러, 그 사이 새로 상긴 가게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고르다 주인장에게 물었다. 반 년 전 히스이를 구한 소녀는 여전히 은하단에 있느냐고. 그러자 돌아온 답이었다.

 

벼랑에서 떨어졌어요. 워글을 부릴 수 있다 들었는데, 왜 타지 않았는지….”

“…….”

그 아이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뤘죠. 이방인이지만, 히스이의 은인이니까. 그 쪽도 아이에게 빚이 있는 건가요?”

 

히스의 모두가 소녀에게 빚을 진 이였다. 월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농장 너머 언덕 위에 무덤이 있어요. 술이라도…. 아니, 아이니까, 꽃이라도바치면 기뻐하겠죠.”

 

그리고 주인장은 먼 곳을 응시한다. 술을 모르는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소녀. 시작은 이방인이었지만, 결국엔 누구보다 히스이에서 덕을 많이 쌓고, 천진하고 용감한 성품 덕에 소중한 인연을 쌓아 올린 아이.

 

월로는 두통이 이는 걸 느꼈다. 값은…. 그 사이에 히스이 물가가 조금 올랐다. 가게가 한 두 군데 더 생겼다. 사진관에는 월로와 토게피가 아닌 처음 보는 금강단원과 독케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가게를 나설 때, 주인장이 조금 서글픈 눈으로 재차 성묘를 당부했다.

 

#

 

언덕 위에는 정말로 무덤이 있었다. 회색 돌을 정갈하게 깎은 작은 비석에 소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몇 년도에 태어나고, 몇 년도에 사망했는지. 그렇지만 사실 그녀는 그 날짜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난 날짜 만이 정확했다. 조촐한 들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월로는 무표정하게, 꽃가게에서 사 온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는다. 소녀가 묻혀 있다기엔, 터가 너무 좁은 것 같다. 물론 소녀는 월로 보다 한참은 자그마했지만. 또래 중에서도 몸집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조그마한 땅에 들어가기엔, 그녀가 좀 더….

 

당신이 왜 여기에?”

 

익숙한 목소리가 뒷머리를 잡는다. 동그란 눈을 잔뜩 흘겨 뜨고 있는 소년이 어느새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분명, 소녀와 같은 은하단원이었다.

 

“…제가 여기에 오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온화하게 반겨주는 기색이 아니기에, 월로도 날 선 말투로 받아 친다. 소년은 화가 잔뜩 오른 얼굴이다.

 

아주 많죠.”

 

그는 품 안에 토란떡과 노란 국화를 한아름 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소녀와 소년과 박사가 노을이 지는 날 다 같이 토란떡을 먹으며 잔뜩 웃거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걸 자주 봤었다. 저녁마다 은행상회에 앉아있으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었다.

 

“…죽은 지도 몰랐던 주제에.”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소년은 터벅터벅 걸어와 무덤 앞에 토란떡과 노란 국화를 흐트러지지 않게 올려 놓는다. 그리고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인상을 쓴다.

 

그거 알아요? 그 애는….”

“…….”

개나리색을 좋아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그 애의 머리핀도 개나리색이었다. 하얀 국화 한송이가 노란 국화 한다발에 밀려 잔디 위로 떨어졌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군요, 당신은.”

저는….”

말하지 마시죠. 정말 화를 낼 거 같으니까.”

 

그리고 소년은 소녀의 무덤 앞에서, 한참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기도하는 손에 얼굴이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흐느끼는 것 같았다. 월로는 덩그러니 서서 그저 지켜봤다. 그는 기도를 올릴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월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지난 반 년간, 때때로 소녀를 떠올렸으나 축복마을에 돌아간 적도 편지를 부친 적도 없었다.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백은이나 은행상회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 소식 정도는 묻는 게 나았을까? 그치만 월로는 그들과도 그 정도로 막역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마을에 잠시 들러, 멀리서 안부라도 확인 했어야 했을까. 그치만 월로는 단 한 번도 소녀의 안녕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녀는 아르세우스에게 인정 받을 정도로 포켓몬과 친숙했고, 포켓몬 술사보다 포켓몬을 더 잘 다뤘고, 결국 그를 이겨냈고, 아르세우스가 부탁한대로 히스이의 모든 땅을 밟고 모든 포켓몬과 만났기에…. 어쩌면 월로는 그녀가 수 개월이고 수 년이고 그를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나 웃고 있었고, 상냥하고 용기가 넘쳤으며, 그 숱한 사건이 있음에도 월로를 힐난하지 않았기에….

 

그러면, 그러면…. ! 소년이 두 손을 강하게 맞부딪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대로 떠나려는 소년에게 월로가 말을 건넨다.

 

“…그녀가 남긴 말은?”

…….”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있을 리가 없잖아요. 즉사였다고요.”

장례는….”

잘 치뤘어요. 금경님이 상주였고, 우리 전부 다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잔뜩 와서많이들 슬퍼했어요.”

 

우리안에 월로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가 없어도, 소녀는 편안히 이승을 떠났을 것이다. 월로는 목까지 채운 녹색 외투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은하단 건물 안에, 그 애의 사진을 걸어 뒀어요. 그 애는 히스이의 영웅이니까. 걔처럼 뛰어난 은하단원은 앞으로도 없겠죠. 십 년 뒤에도 이십 년 뒤에도, 모든 은하단원들이 그 애를 기억할 거에요.”

 

기도를 올렸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눈물 자국이 선연하다.

 

그런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 애는 이제….”

 

소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월로는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개나리색…. 그래, 당신은 개나리색을 좋아했구나. 사진도 은하단에 남아 있었구나. 그 밖에는 어떤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더이상 알 방도가 없었다.

 

 

 

 

#

 

은하단 건물에 숨어든 건 그날 밤의 일이다. 물론 계획된 침입은 아니었다. 월로는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 플레이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본질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아르세우스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역할이 다해서 신의 버림을 받았나? 혹은 그녀가 임무를 완수해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었나? 월로는 정답을 알고 싶었다.

 

경비는 의외로 허술했다. 은하단의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건지, 손쉽게 창문의 걸쇠를 따고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소녀의 사진은 박사가 머물던 방에 걸려 있었다. 언제적 찍은 건지, 태연하게 마그케인을 끌어 안고 웃고 있었다.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천연한 미소였다. 월로는 고개를 돌렸다.

 

월로는 플레이트의 중요성을 상기하며, 조사대 대장의 책상을 뒤졌다. 책상 서랍 하나에만 열쇠 구멍이 달려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구비해 온 철사를 이용해 서랍을 열었다. 어린 시절 이곳 저곳을 구르며 배운 기술이 쓸모는 제법 있었다. 서랍 안에는, 놀랍지도 않게, 플레이트가 차곡이 쌓여 있었다. 마치 읽지 않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둔 것처럼. 너무 손쉽고 빠르게 월로는 플레이트 전부 차지할 수 있었다. 기쁨의 미소는 흐르지 않았다.

 

 

#

천관산에 올랐다. 며칠 만인 것 같기도 하고, 몇 백 년 만의 등산인 것 같기도 했다. 플레이트는 제법 무게가 나갔지만, 월로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았다. 월로는 새삼 그 많은 짐을 지고 산을 타고 하늘을 날았던 소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은 체구에 제법 완력이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대담하고 용감했다. 그녀는 모험가나 영웅이 지녀야 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자질을 전부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문득 은하단 소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 애는 이제….

 

정상에 도착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월로는 서랍에서 꺼낸 모습 그대로, 플레이트를 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정적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아르세우스. 속으로 불렀다. 숱한 세월 동안, 아무리 마음 속으로 되뇌어도 답이 없던 창조주가 반응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벌떡 솟대처럼 일어났다.

 

아르세우스.”

 

목소리가 작다. 더 크게- 고함을 지른다.

 

아르세우스!”

 

메아리가 친다. 땅바닥에 부딪힌 그의 외침이 되돌아 온다. 떠도는 목소리와 함께, 잠잠한 천관산 너머 우물진 그림자가 찬찬히 지하에서 떠오른다. 거대한 고래 같던 그림자가 모이고 흩어지며, 오밀조밀한 동그라미가 퍼졌다 다가오기를 반복한다. 가까워질수록 월로는 알 수 있었다. 비록 검은 그늘에 불과하지만, 아르세우스의 형체라는 것을.

 

아르세우스! 어째서…. 어째서.”

 

그림자가 이내 월로의 발 밑까지 가까워졌다. 그는 세차게 숨을 참았다 뱉는다.

 

어째서 그녀가 죽은 겁니까? 그녀는 당신의 사도가 아니었습니까?”

 

감감한 그림자가 잠잠히 떠돈다. 이윽고 익숙하지만 무거운 음성이 그의 머리를 관통하듯 두들긴다.

 

[너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녀가 없는 세상이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그러고보니, 이 천관산 꼭대기에서 그녀와 마지막 결전을 펼칠 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소녀는 없다고…. 월로는 까마득해졌다. 사실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 소원을 빌었다고? 자신이?

 

내 소원은더이상 그런 게 아니야….”

 

고개를 떨구고, 낯빛에 절망이 감돈다. 갑자기 믿을 수 없어졌다. 아르세우스도, 자신도. 도대체 어떤 낙원을 소망하고, 어떤 기도를 이뤄줬다는 말인가? 아르세우스는 단 한 번도 월로에게 응답한 적이 없는데.

 

이윽고 검은 그림자가 담담히 덧붙인다. 방금 전은 질 나쁜 농이었다는 듯이.

 

[다시 말하지. 이건 오만한 인간에 대한 벌이다. 선한 영웅을 배척하였으니 히스이의 인간들은 그녀를 잃는 벌을 받아야 한다. 너 또한 악한 마음을 품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월로는 신의 사고 방식 따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영웅인 그녀는, 벌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찬란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소녀가 아닌가. 월로는 반문했다. 신은 가볍게 응수한다.

 

[그 아이에겐 벌이 아니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으니.]

 

“…원래의, 세상.”

 

맞다. 월로는 떠올랐다. 본래 그녀는 히스이 출신이 아니다. 어느 날 시공의 균열에서 떨어진 이방인이다. 제법 친밀해진 다음,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자신은 히스이보다 훨씬 발달했고, 포켓몬과 사람이 친구처럼 지내며, 그렇지만 여전히 천관산이 하늘 높이 솟은 곳에서 왔다고…. 분명, 그 지방 이름이.

 

자신의 고향과 같은 이름인 신오…. 히스이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신의 이름. 어째서 이런 간단한 사실도 잊고 마는 걸까? 삽시간에 월로는 아주 먼 세월이 지나면, 그녀 마저도 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다면세월이 지나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 애는 널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걸 깨달아야 한다, 신오인.]

 

월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피가 고인다.

 

그렇다면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100년이 될 지 200년이 될 지 모르는 기다림을 겪겠다고? 그건 아집이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신오인. 너를 애정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삶에 더는 허물이 없어야 한다. 그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것이고, 너는 그 안에 존재하지 못한다.]

 

가장 위대한 신이 고한다. 영원한 이별만이 있을 거라고. 두 번 다시 상냥한 만남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월로는 믿지 않는다. 본디 그는 불경한 신자였기에.

 

---기다릴 수 있어. 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까.

 

 

 

 

#

그림자로 현현한 아르세우스는 더이상 대꾸 없이, 점점이 사라졌다. 어느새 저녁 노을이 아득한 환상처럼 내려 앉았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월로는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던 플레이트를,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 가방에 넣었다.

 

플레이트 사이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편지 봉투였다.

원령플레이트 바닥에 붙어 있었던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월로의 동공이 커진다. 작고 오밀조밀한 글씨.

 

윤슬이 월로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새하얀 편지봉투를 열었다. 한 장 짜리 편지지에 짧은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 언젠가 이 플레이트가 당신에게로 돌아간다면, 그 땐 당신을 막을 수 없겠네요. 어쩌면 저는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걸 원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한번쯤 당신이,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정말이지 간결한 편지였다. 언젠가? ‘언제라는 말부터 불완전하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고작 플레이트 몇 개를 모으는 일이, 내 많은 생의 전부였지만. 그건 사실 보잘 것 없는 목적이었다. 긴 세월 플레이트를 찾아 헤맸었어도, 모든 일이 끝난 후 가벼이 내 손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라. 목적과 결과는 순식간에 뒤바뀌고 만다. 왜냐면 나는 태생부터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에게 빚을 달아 놓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소원이라는 말부터가 불완전하다. 나는 고작 몇 달 전의 비원도 금새 까먹고 말았다. 처음부터 잘못된 소원을 빌었으니, 그 따위 소망이 이루어진다 하여 행복해질 리 없었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알았어야 한다. 그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어째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의 마음은 모르는가?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말은….

 

월로는 편지를 짓이기듯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천관산을 내려왔다. 어쩐지 내리막길이 오르막길보다 괴롭고 길게 느껴졌다. 하산 도중에 끊임없이, 은하단 건물로 돌아가서 그 사진을 다시 보고 싶어 졌다. 그러나 이내 보고싶지 않아졌다. 그런 건 찰나의 기억일 뿐이다. 사진 속 포켓몬이, 그녀의 품 안에 쏙 들어가는마그케인이던 시절은 불과 몇 주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녀는 언제나 열다섯이다. 월로는 자신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셈을 한 지도 오래얼마나 더 많은 셈을 해야 열다섯이 넘은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월로는 축복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외곽의 산길로 접어 들었다. 정처 없는 발걸음이었다.

 

#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난생처음으로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단 한번도 당신은 뒤쳐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길을 잃은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지도도 전부 잃어버려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걸지도 몰라.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않는게 아니라 찾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방법을 모르는 것으로 해 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구름은 여행을 떠나듯 멀리 흘러갔다.

 

어디선가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못 다한 말을 해야지. 언제나 당신을 만나러 갈 때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말이야. 사실 나는 줄곧, 당신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했을 때에도. 마른 모래가 바람에 날려 희뿌연 먼지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때에도. 고동 속에 파란이 불었어. 가슴에 파문이 일었어. 심지에 불이 켜지지 못한 결심은 냉동된 채로 심장 어딘가에 잠겨져 있어. 그래도. 당신을 다시 만나면못다한 말을 해야지.

 

먼 하늘에 그리움이 고여 짙고 파란 웅덩이로 변했다.

 

더는 당신은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뱉어 버리면

인연은 여행을 떠나듯 파란 속으로 흘러 사라졌다.

 

 

 

---안녕, 슬픔 속에 잠긴 그대여.

 

 

 

 

 

 

 

 

:
Posted by 새벽(dawn)


1.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하지만 너무 얕게 묻어서 금방 드러나곤 한다. 무심히 길을 걸을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하늘을 보며 서 있을 때, 조금만 발을 굴러도 흙 속에서 튀어나오고 만다. 그 때마다 나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흙을 도로 덮었다. 깊숙이 묻지 않은 까닭은 그럴 수 없었던 탓이다. 나는 유약하다. 한 번의 버림에 모든 것을 잃을 정도로 유약하다. 이런 나를 지탱해주는 건 첫사랑이 바로 발밑에 있다는 안도감뿐이다. 
 체육관을 떠났다.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다. 문하생들은 토끼눈을 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미 계획한 일이었다. 포켓몬이 아팠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포켓몬들이 어느새 병을 앓고 있었다. 포켓몬 의사는 무리한 배틀에 피로가 축적된 탓이라고 했다. 과한 연습과 배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던 휴식 시간. 근근이 버텨오다 마침내 그들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적신호를 킨 것이다. 의사의 진단을 듣고 나서야 나는 포켓몬들을 살펴보았다. 아쿠스타의 표피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누오의 피부는 까칠했고, 골덕의 손발톱은 망가져 있었으며, 라프라스는 뿔과 귀가 상해있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구보다 물 포켓몬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악덕 고용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쓸었다. 포켓몬들은 저들이 미안하다는 듯 낑낑 울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날, 나는 그날 바로 결심했다.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체육관을 떠났다.
  짐의 간판을 떼던 날을 기억한다. 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부임할 때는 제법 호기로웠던 모양이지만, 해가 지날수록 낯간지러워진 문구다. 그만큼 정이 많이 들기도 했다. 잡지에서 소개될 때도, TV에서 인터뷰를 나왔을 때도, 우연히 나를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도…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하고 그 말부터 나왔으니까. 오래된 간판은 내 손으로 내렸다. 문하생과 주민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퇴야. 자신에게 벌을 주듯 말했다. 난 이제 은퇴야, 모두 잘 있어요. 그건 벌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루네시티로 향했다. 호우엔은 바다가 넓고 공기가 청정하다. 그 중에서도 바다로 둘러싸인 루네시티는 물타입 포켓몬에게 안성맞춤이다. 알고 지내던, 같은 물타입을 다루는 미쿠리씨의 소개로 새로운 섬에 정착할 수 있었다. 미쿠리씨는 내가 낯선 호우엔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사실 모두가 걱정했다. 에리카는 자신의 가까이에 와서 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벌이었다. 그러니, 좀 더 먼 곳으로 가야했다. 벌의 의미도 모르는 남자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했다. 
 그래서 루네를 택했다. 해변에 차오르는 푸른 물살에 살이 닿았을 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토록 낯선 땅과 바다, 그 안에 나만이 덩그러니 존재한다. 이제는 좀 더 깊게 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순간을, 지하 깊숙이 던져 넣을 것이다.
 상냥한 주민들은 이방인을 반겨주었다. 미쿠리가 미리 언질을 준 것인지, 주민들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짐리더였다는 것, 머나먼 칸토에서 왔다는 것, 물타입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며 열거하는 정보들은, 현재의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는 이제 짐리더도 아니며, 칸토에 살지도 않고,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완성해 주었던 모든 미사여구들이  분히 사라져갔다. 내가 걸어온 길은 해변가였다. 모래알 위의 잔상은 찰나의 파도에도 지워진다. 내가 소유했다고 믿었던 것들도… 해변의 발자국처럼 무연한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새 침대 위에 누웠다. 세제 냄새가 싸하게 코를 자극했다. 바로 천장을 응시한다. 천장은 하얗다. 네가 있던 산도 그랬다. 새하얀 눈이 끊임없이 허공을 메웠다. 너는 늘 그 산에 있었지만, 난 단 한 번도 너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네가 없을 때만 내가 산을 올랐기 때문이다. 어둑한 환상에 다리가 시려왔다.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이제 더 깊숙이 묻을 것이다. 아니면 곧 닥칠 장마에 전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차고 시린 물살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눈꺼풀 사이로 쓴 잠이 가라앉았다.


2. 

“아아, 졌잖아.”
 소년은 검은 머리를 벅벅 긁는다. 고개를 세우고 한마디를 던져준다.
“당연하지. 불타입인 파이리로 물타입 짐리더인 나에게 도전하다니, 언어도단이야.”
“하아-역시 기합만으로는 안 되는 거였나.” 
 짧은 투덜거림. 
 소년은 신참 트레이너였다. 불과 일주일 전에 포켓몬을 받고 고향을 떠나 모험길에 올랐다. 불과 일주일 만에, 타케시에게서 뱃지를 얻고 달맞이 동굴을 건너온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는 신참이었다. 배틀을 시작한지, 포켓몬을 다룬지 불과 일주일이다. 재능이 여물기에는 한창 모자란 시간이었다. 
“기합으로 상성을 이겼단 이야긴 들어본 적 없는 걸. 후우, 배틀 상식도 없구나.”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배틀을 시작했을 무렵, 천재라고 불리던 시절. 내가 차세대 챔피언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나조차도, 기초지식도 없어 시행착오를 겪기 일쑤였다.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재능에 덧씌웠던가. 소년을 보니 절로 옛시절이 떠올랐다. 선배로서, 짐리더로서, 제대로 조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짐에 도전할 거면, 풀이나 전기타입 포켓몬을 데려오는 게 좋아.”
“그렇구나.”
“뭐, 데려온다고 해도-레벨 차이가 심해서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파이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할 테니까.”
 듣는 태도가 엉망이었다. 다른 곳을 보는 채로, 대충 고개만 끄덕인다. 어린 여자애가 짐리더라서 무시하는 건 아닐까. 그리 생각되니 화가 갑자기 솟았다.
“너 말인데, 짐리더가 하는 말이라면 좀 더 제대로 듣는 편이….”
“파이리가 아니라 리자드면 괜찮을까?”
“뭐?”
“리자드가 되면 훨씬 세지잖아. 그러면 너에게 이길 수 있을까.”
 어이가 없어 숨이 턱 막혔다. 
“잠깐. 내가 한 얘기는 들은 거니? 불타입은 상성이 나빠서 안 된대두.”
“다 들었어. 풀이나 전기 타입이어도 레벨 차가 심하면 소용도 없다며. 그러면 새로운 포켓몬을 잡는 것보단, 파이리를 강하게 만드는 게 낫겠네.”
“뭐….”
“나는 파이리가 좋으니까.”
 그리고 소년은 유유히 짐을 나섰다. 내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파이리가 좋으니, 파이리로 이기겠다. 파이리는 아마 그의 첫 번째 포켓몬인 것 같았다. 첫 번째 아이에게 유독 정이 많이 가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건 좋다. 그래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분을 식혔다. 저런 태도라면, 다시 도전해도 분명 내가 이길 것이다. 나는 재능을 과신해 오만해진 트레이너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 녀석들은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혀 싹이 잘리고 만다. 안타깝지만, 그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빤히 보였다. 


타케시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 어절부터 그 소년의 이야기를 한다. 
“그 녀석, 카스미네 체육관에 왔었지?”
“응. 어제 왔다 갔어.”
“그래, 범상치 않은 아이야. 재능이 있더군.”
 눈살을 찌푸렸다. 
“배틀은 내가 이겼어.”
“네게 이기기엔 아직 조금 모자랄 테지. 그런데 그 녀석, 하루하루 엄청나게 발전하더군. 무서울 정도로.”
 그런 말투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모험을 시작한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된 트레이너에게 저런 대우는 과하다. 
“재능은 둘째고…태도가 영 아니던 걸. 내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
“하하, 네 이야기뿐만이 아니야. 원래 그런 식이라고.”
“그럼 웃을 일이 아니잖니.”
“재밌는 건, 사실은 전부 듣고 있다는 거지. 이야기를 제대로 걸러서 듣고 자양분으로 삼는다…그리고 성장한다, 그게 녀석의 방식인 거 같더군.”
 하나도 재미없었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이야기가 전부 그 아이에 대한 것들뿐이다. 입을 삐죽 내밀자, 타케시는 그제야 말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다시 올 거라며, 그 때를 기대해보라고 덧붙였다.
 대답 대신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거뭇거뭇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오늘은 도전자고 뭐고 없을 성 싶었다. 게다가 비가 내린다면, 파이리를 바깥에서 훈련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운이고 환경이고 그 애한테 따라주는 게 없었다. 내가 그리 말하자, 타케시는 빙긋 웃었다. 그러지 말고 기다려 봐, 넌 판단이 늘 빠르더군…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지. 
 먹구름 사이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2.

새 침대에서 케케묵은 환상을 보았다. 납덩이를 끌어안고 물속에 잠기듯 기분이 무겁다. 오래된 시절의 꿈은 좋지 않다. 꿈의 가지 끝에 설핏 걸렸던 그 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심한 눈동자. 꾹 다문 입. 까칠한 눈썹. 살짝 그을린 피부. 아주 오래 전, 그는 그런 얼굴일 때가 있었다. 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TV를 키자 예쁘장한 앵커가 어린 트레이너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어린 트레이너가 얼마나 강했던 건지, 앵커가 칭찬일색이다. 까무잡잡한 소년은 부끄러운지 낯을 붉힌다. 아이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여겼다. 지금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의 재능은 그럴 듯하지만, 우수하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재능을 남들보다 일찍 꽃피우는 타입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속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얀 모자를 쓴 저 아이가, 미래의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재능을 일찍 꽃피우는 것이 아닌, 남들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재능을 발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TV를 끄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하드에서 발견한 무려 2015년도에 써둔 레카스 중편소설의 앞부분입니다. 행사에 내기 위해 썼던 것 같은데, 뒷부분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까워서 일단 올려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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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21. 1. 13. 21:47

[쥰히카/용식빛나] 라벤더 글/포켓몬2021. 1. 13. 21:47

 

<라벤더 (Lavender)>

 

그치만 난 사랑이 뭔지 몰라.

옅은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남청색 머리칼, 손목 위 시계를 바라보는 동그랗고 투명한 눈동자. 상냥한 어조에 웃을 때마다 볼에 떠오르는 홍조. 어릴 적부터 봐왔기에,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펭도리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하게 웃는 얼굴도. 새벽부터 일어나 정원의 꽃에 물을 주는 모습도. 멀리서 나를 부를 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버릇도. 늘 지켜본 모습, 변하지 않는 일상.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주위 또래들이 떠들기 시작한 첫사랑 이야기 따위는 관심 없었다.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고 사귀는 일에 일말의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가끔 코우키가 나와 히카리의 사이에 대해 의문점을 표해도, 딱 잘라 말했다. 우린 소꿉친구야. 그 녀석이랑 나는 평생 친구라고.

 같은 말을 히카리 앞에서 한 날, 그 애는 멋쩍게 웃었다. 뭐야. 우린 친구야. 평생 친구지? 하고 되물으면, 그 애는 대답은 않고 뒷짐만 졌다. 불만이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 히카리의 나쁜 버릇이었다. 거듭 채근해도 커다란 두 눈만 깜빡 거릴 뿐이었다. 그러면서 죽어도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이름도 모를 놈팽이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대화로부터 몇 주 뒤였다. 히카리의 첫 남자친구라는 놈은, 짐리더도 사천왕도 아닌 정말 평범한 녀석이었다. 엘리트 트레이너 딱지를 달고 있긴 했지만, 글쎄. 실력이 특출 난 편은 아니었다. 히카리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키만 멀대처럼 크고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멍청한 인상이었다. 이래저래 뜯어봐도 히카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축복해 주었다. 다들 눈이 삔 게 분명하다.

 

 히카리와 단 둘이 되었을 때 그 애가 연애질을 시작하고는 도무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난 물었다. 왜 그런 녀석이랑 사귀는 거야? 시간이 아깝지 않아? 나라면 덜 떨어진 놈과 만날 시간에, 차라리 배틀 하며 실력이나 쌓겠어. 그러자 히카리가 저번처럼 볼을 긁으며 멋쩍게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날 좋아해주니까….

 대답을 듣자마자 열불이 났다.

 

-? 그럼 넌 널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은 거야?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그 사람은 굉장히 다정해.

-그러면 너는, 널 좋아해주고 다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런 단순한 사항으로 결정해버려도 되는 건가?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항상 서로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히카리는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그 자식을 고른 걸까?

 

-그럼 너는 그냥 예쁨 받는 게 좋은 거네.

-맞아.

-실망이야. 네가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

-그치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망설이다, 이내 히카리가 조금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그치만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는 걸. 나를 정말로 소중하게,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네가 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걸. 쥰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잖아.

 

거기서 왜 내 얘기가 나오는 거야? 어쩐지 히카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쥰은 언제나 제멋대로에, 나를 남자애처럼 대하듯 거칠게 다루고, 막 아무 소리나 하고...

-그건 우리가 친구니까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해주는 그 사람이 좋아. 쥰은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겠지만.

 

더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면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히카리는 그 이후로 더이상, 비슷한 화제를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그 녀석과 영화를 보러 가고, 놀이동산에 가고, 까페에 가고, 심지어 배틀 연구도 그 녀석이랑 했다. 나와 만날 일은 점점 적어졌다.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왜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을까?  

 히카리는 항상 여자애였다. 거울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옷을 고르느라 제 시간에 나오지를 못했을 때도. 새로 산 비니를 쓰고 해맑게 어울리냐고 물어오던 날도. 새빨간 머플러를 고쳐 매며 이거, 쥰이랑 같은 거야하고 말할 적에도. 여자애였다. 한여름 원피스를 입을 때 보이는 새하얀 어깨도. 나보다 몇 치수는 작은 분홍색 부츠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도. 히카리는 언제나 여자애였다. 다만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여긴 적 없을 뿐. 왜냐면 아주 오래 전부터 히카리는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평생 같은 모습일 테니까. 사랑스럽다는 느낌마저 낯간지럽다. 우리는 정원에 피어난 라벤더를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꽃이 필 적 마다 향기롭다고 감탄하지 않는다. 굳이 입으로 꺼내 부산 떨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네가 후타바타운의 평범한 여자아이든, 신오우의 마스터이든. 우리가 함께 예지호수에 있었단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네가 긴가단에게 패해도, 신오우를 구한 영웅이 되어도. 너와 같이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는 추억이 더 소중했다. 그렇지만 네가 다른 누구의 여자가 되는 건, 혹은 되지 않는 건. 그로 인해 더이상 예전의 모습들을 만날 수 없다면. 전부 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애의 말이 맞다. 난 사랑이 뭔지 모른다. 어째서 그 애를 상냥하게 대해줘야 하는 모른다. 아니, 어떻게 상냥하게 다뤄야할 지 모른다. 영화관에 같이 가고 함께 포켓몬을 돌보는게 왜 특별한데이트가 되는지 납득 가지 않는다. 그런 건 히카리와 어린 시절부터 늘 같이 해오던 일상이다. 그렇지만 히카리는 특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똑같이 특별하다고 여겨줄 사람을 찾은 것이다. 라벤더를 볼 때마다 사랑스럽게 잎새를 만지고 향기롭다고 감탄해 줄 사람을 선택했다. 그것이 그 애의 선택이라면, 나는 아무런 변명도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슬퍼? 어느 날 코우키가 물었다. 슬플 리가 없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히카리와 나는 줄곧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애가 이라고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러니까 슬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외로워? 라고 묻는다면. 분명 고독해졌다. 계절이 지나 라벤더 꽃이 피어도, 더이상 가까이서 볼 수 없으니까. 분명 꽃이 피든, 피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을 텐데. 후회 돼? 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치만,

 

 나는 사랑이 뭔지 몰라.

 

 

 

 

:
Posted by 새벽(dawn)
2020. 10. 30. 09:19

[아카히카/태홍빛나] Last Act 글/포켓몬2020. 10. 30. 09:19

<Last Act>

 

 

 

 만남으로부터 일년 그다지  세월도 아니었다관계는 애매모호했다친구라기엔 연배가 달랐고연인이라기엔 거리감이 멀었으며동료라기엔 어떤 모험도 함께  적이 없었다라이벌이라기엔 경쟁한 적이 없고적대자라 하기엔 일련의 사건은 오래 전에 종식 되었다그렇다고 남남이라기엔 이미 산더미 만큼 많은 감정과 찌꺼기가  사람 사이에 쌓여 있었다.

 

햇살이 유독 밝은 여름날예지호수에  히카리는 먼저 운을 떼기를 어려워했다새처럼 조잘조잘 떠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지만 오늘만큼은 유독 입이 무겁다아카기도 무어라 말을 시작해야할지 몰랐다좌중을 휘어잡는 달변가도 생애  이별에 담담히 연설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먼저 입을  것은 히카리였다.

 

나는…”

 

아카기는 조그만 입술에  신경을 기울인다.

 

나는…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

 

목적어가 없는 문장아카기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한다.

 

너와 네가….”

한번쯤은 ‘우리가’ 라고 해주면  되는 거야?”

 

히카리가 바로 면박을 준다지난 일년  동안 줄곧 참아왔던 말이다  일찍 하는  좋았을까이런 생각을 이제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라고 말하기에는.. 아무 것도 시작한 것이 없었다.”

 

냉정하네.”

 

 사람은 참으로 뭐라 정의 내리기 모호한 사이였다벗이라기엔 정이 부족하고애인이라기엔 사귄 적이 없으며지인이라기엔 서로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남남이라기엔

 

정말로 아무 것도 시작된  없다고 생각해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끝나는 건데?”

 

목구멍까지 끓어오른 감정을 겨우 죽이며히카리가 덤덤한  말한다목소리가 떨린다.

 

시작이 없는데 어떻게 끝이 있어?”

 

“…예를 들어마라톤의 시작 선에 서있고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도경기는 언젠가 끝나는 법이다.”

 

기가  표정으로 히카리가 아카기를 올려다본다아니쏘아본다.

 

정말이지 근사한 은유네!”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 결국 끝난다는 얘기다.”

 

그정도는 나도 이해한다고 두번 설명하지 않아도 정도로  빠진 어린 애는 아니니까..."

 

설명을 거듭하는  어쩌면 직업병인지도 몰랐다긴가단의 부하들은  재차 강조를 해줘야했으니까그래서인지 눈앞의 소녀는 한번 말하면 귀신같이 알아듣는똘똘한 아이라는  금새 잊곤 했다.

 

그치만 시작 선에 섰다는 무언가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는 거잖아.”

 

그것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지.”

 

 놈의 생각생각…”

 

히카리는 분홍색 부츠로  밑의 자갈들을 가볍게 걷어찼다회색빛 돌가루가 아카기의 부츠 위로 스멀스멀 내려앉는다칙칙한 그의 부츠와 대비되어 히카리의 부츠는 유독 어린애 장난감처럼 유치해보였다이제 분홍색은 졸업할 때가 되었나?

 

그럼 소감을 말해줘시작 선에 섰지만 걸음도 달리지 않은 채로 경기가 끝나버린 심정 말이야.”

 

아카기는 대답하지 않는다.

 

후회 ?”

 

아카기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님 다행이다 싶어쓸데없이 기운 빼지 않아서어차피 끝까지 달리지도 못했을 텐데….”

 

끝은 있나?”

 

문득 되묻듯이 아카기가 답했다히카리는 더욱 얼이 빠졌다.

 

세상에 끝이 없는  어딨어….”

 

있다면 그건...말을 이으려던 히카리가 아카기의 표정을 발견하고 멈춘다.

아카기는 바로 보지 못하겠다는  고개를 돌리며  하늘을 응시한다구름   없는  하늘시를 읊듯아니 혼잣말을 하듯그의 속마음이 비친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구름   없는  하늘이 공허한 눈동자에 비친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했다.”

 

 말을 듣자마자 히카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아아그런 거였어진짜 바보 같네하고 여느 때처럼 핀잔을 주지도 못하고커다란 눈동자에서 뚝하고 눈물이 흘렀다.

 

네가 이럴  같아서…”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울음소리를 밀어내고 간신히 할말을 꺼낸다.

 

나는그런  믿지 않아…”

 

그래.”

 

끝나지 않는 소설 같은 망상이나 하는… 당신이나… 생각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그럴 필요 없었어.”

 

그래.”

 

그럴필요 없었다고.”

 

그냥 말하면 됐잖아. 솔직하게 두려워서 시작하지 못했다고그러면 내가 당신의 그런 두려움을 툭툭 털어버리고대신 힘껏 어깨를 안아줬을 텐데실속 없는 상상은 그만하고  앞의 있는  손을 잡으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정말로 끝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되는 거다.”

 

정말이지 바보같은 사내는 끝까지 단호하게 말한다꿈결 같은 이야기가그런 영화 같은 스토리가 정말 일어났을 거라고 단언한다. 사이에 영원한 사랑이 있었을 거라고... 시작조차 해보지 않은 사내가 단언한다

 

그래서 마지막이다.”

 

끔찍한.... 인사네.”

 

멍청하고 끔찍하고 로맨틱해이런 이별은 앞으로 평생 없을 거라고 히카리는 생각했다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다

여전히 눈물이 앞을 가려 아카기의 형체만이 어슴푸레 보였다.

 

안녕.”

 

“…..”

 

 있어라히카리.”

 

이제는 신오우에 오지 않을 거야영영 다시 보지 못하는 거야어른이 되어도 만날  없어수많은 말들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어쩐지 울음이 먼저 나와 꺼낼 수가 없었다뒤돌아가는 모습이라도 눈에 담고 싶었지만먼지가 일어난  시야가 하얗게 변해 아카기의 색조차 희미했다.

 

 …”

 

결국 너무나도 짤막한 이별의 언사를 마지막으로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채로 침침한 세계와 깜깜한 마음에 갇힌 채로 히카리는 아카기와 이별을 했다이제는 정말 마지막으로어차피 시작한  없으니 마지막일리도 없었지만굳이 포장하자면 영원히 시작하지 않은 채로 끝이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명확히 남이 되었다.

 

아카기가 말한 영원이 이런 형태였다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시시하다고히카리는 생각했지만기약이 없었으므로 반문도  수가 없었다이제 그가 없어서 아무 말도 얹을  없었다대답 없는 이름만 불러대면서히카리는 어쩌면 아카기가 말한 영원이 이런 걸지도 모른다고영원히 메아리만 치고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라면기다려도 찾아오지 않는 거라면 끔직도 하다고. 출발선 앞에서 영영 울리지 않을 총성 소리를 기다리며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
Posted by 새벽(dawn)
2020. 7. 15. 16:32

[아카히카/태홍빛나] 마음 글/포켓몬2020. 7. 15. 16:32

 

<마음>

 

 

 

 

 

생각에 잠긴 당신을 좋아했어.

 

말을 걸면, 살짝 고개를 기울이곤 초간 생각에 잠기는 옆얼굴이 좋았다. 익숙지 않을 때는 무슨 말실수라도 해서 답을 바로 해주지 않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적합한 답변을 떠올리기 위해 잠시 고민하는 순간이라는 알게 , 초간의 침묵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왠지, 나와의 대화를 조금은 특별하게 여겨주는 같았으니까.

 

습관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이어진다는 알고부터 나와 대화할 때는 초가 걸리는지 혹은 초가 걸리는지 어림짐작하기 시작했다. 대답하는 걸리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혹은 ,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때로 침묵은 찰나 같기도 영겁 같기도 했으니까.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파리한 손가락이 좋았어.

 

마치 화살표처럼 정확하게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바닥 만한 노트 위의 작은 글자도, 세계 지도 위의 후타바 타운도, 어두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도. 손가락을 이정표 삼아 바른 길을 찾아갈 있었다. 이따금 파란 스웨터에 가려져 있던 손목도 목덜미에 걸쳐있는 와이셔츠 깃도 당신 답게 반듯해서 좋았다.

 

이따금 나와 같은 어조로 말해주는 당신이 좋았어.

 

나이는 나보다 열댓살은 많고 누구보다 이지적이지만. 이따금 또래의 남자아이 같은 말투를 하곤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주 오래 전부터 사귀어 친구처럼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때로 입술에서 내뱉는 농담이 너무나 아이 같아서, 그러면서도 너무나 재미 있어서, 우리 둘을 떼어 놓는 길고 세월조차 거짓말처럼 느껴지곤 했다. 전부 거짓말처럼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눈이 좋았어.

 

전부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적거나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가끔씩 말없이 얼굴을 응시하던 눈빛이 좋았다. 마주치지 않아도 눈동자가 또렷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는 알았다. 전부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무심코 피식 웃어버리는 순간이 좋았어.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아무런 징조도 전후도 없이 문득 웃음을 흘리는 경우가 있었다. 어째서 웃는지, 유독 냉철하고 차가운 당신이 어째서 나와 마주보고 이야기하다 무심코 웃음을 흘려버리는지, 어린 나는 없었다. 제멋대로 행복한 예측을 해보다가도, 어쩜 사소한 찰나조차 자신의 망상으로 삼아버리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자책하다가도 당신의 그런 웃음을 떠올리면 나도 따라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당신 앞에선 웃을 수가 없었어.

 

마음을 따르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당신과 마주 순간에도 그리고 안녕하고 즐거운 헤어짐의 인사를 나눈 후에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야 했다. 그렇지만 내키는 대로 미소를 지을 없었다. 조금이라도 흘려버리면. 마음이 흘러 나오면 들킬 테니까. 들키면 어떡하지? 혹시 이미 들켜버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신과 나는

 

참고 버티기엔 아직 어른스럽지 못했고, 그렇다고 떼를 쓰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다. 아마 당신은 나보다 곱절은 시간을 걸어왔기에. 아마 이런 사소한 대화나 만남에 어떤 자유로운 설렘도 새로운 기대감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당신에 비하면 여전히 너무나 어렸고 그리고 당신은

 

그래서 당신 앞에서 웃을 수가 없었어.

 

마음을 따르자면, 하루 종일 해바라기처럼 웃고 싶었다. 마음을 따르자면, 철없이 좋아한다 말하고 덥석 손을 움켜잡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따르자니, 좋아하는 당신의 모습을 순간에 잃을까 겁이 났다.

 

그래서 언제나 당신 앞에서 절반 만큼만 웃었어. 마음을 싹둑 잘라서 내보여도 이미 너무 크게 보였으니까.

 

그래서 언제나 동강 마음만큼만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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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8. 10. 4. 12:08

[아카히카/태홍빛나] 노도2 글/포켓몬2018. 10. 4. 12:08

아카히카_ 노도2

 

 

그늘진 마음 달랠 수 없을 때엔 바람이 저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새벽녘, 그를 닮은 조용한 햇살이 천천히 창가에 다가오기 시작하면 무릎에 볼을 얹고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녀는 다독인다. 이제는 소녀가 아니기에, 그 시절보다는 차분하게 되짚어 본다.

 

줄곧 당신을 보고 있었다. 만난 횟수를 헤아려 보자면, 손에 꼽을 정도지만.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비정한 운명을 보물처럼 안고 기뻐하기도 했다. 봉신유적에서도 그랬다. 어쩐지 당신이 했던 말은 사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차갑게 가라앉은 옆얼굴에 시선이 팔려서. 나보다 키가 두 뼘은 더 큰 당신. 언제쯤 그 어깨 쯤까지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바라는 세상 같은 건.

 

허망한 두 눈에 빠져, 그 두 눈이 바라보는 세상 같은 건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을 향해 손짓하면 손가락 끝만 바라보는 사람처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왠지. 당신이 바라는 모든 일들을 망쳐버릴 생각만 했다. 신오우를 구해야겠다는 대의나 악을 처단한다는 정의감에서 온 대승적 감정이 아니라. 그저, 어쩌면. 당신이 갈망했던 이상향을 전부 이룰 수 없던 꿈으로 만들어 버리면. 당신의 꿈보다 더 크게 내가 자리잡을 것 같다는 치기 어린 심정이 앞섰다. 아직 당신의 반토막 밖에 안 되는 내가. 당신이라는 어른에게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불확실한 계획으로

 

엉성하게 다져진 마음은 몰아치는 노도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당신이, 혹은 나의 마음이. 아니, 당신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나를 바라는 눈동자는 언제나 부질 없이 불투명했다. 온갖 이물질로 가득 차서, 걸러낼 수도 없는 욕망 덩어리. 그렇기에 거꾸로 내가. 차고 무딘 심성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

 

줄곧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먼 하늘 구름에 가려진 별 만을 뒤적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당신을 떠올렸다.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왜냐면,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어떤 기분인지 어떤 감정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아이가 모래성을 쌓으면 일부러 무너뜨리는 아이처럼, 당신이 힘들게 쌓아 올린 성을 부숴버렸다. 그제야 당신은 나를 바라보았던가?

 

이따금씩 불온한 마음에 불안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회색빛으로 침잠한 눈동자에 마침내 내가 비췄을 때, 거센 불안보다 세차게 고동이 뛰었다. 그제야 실감했다. 나는 살아서 저 두 눈에 담기고 싶었다고. 그것이 분노이건, 원망이건, 혹은 슬픔이건 간에. 어린 나는 복잡한 감정들을 구분할 줄을 몰랐으니까. 그저 당신 안에 나라는 존재가 커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조금 어른이 된 후,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았을 때. 나는 후회했던가? 그보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지난 날을 되돌린다해도, 어린 나는 같은 짓을 반복테니까. 또 당신의 꿈을 부수고, 모든 걸 헤집어버릴 테니까. 후회는 의미가 없었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괴로웠다. 사실 내가 정말 원했던 미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걸 깨닫는 게 버거웠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안락한 미래를 잡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어른이 되기 위한 무한한 인내. 망쳐버린 과거를 당신에게 돌려주기 위한 양보심. 더이상, 그 무엇도 빼앗지 않으려는 노력들.

 

태생부터 불온한 생명인지, 혹은 배려란 모르는 이기적 유전자인지. 나는 그 무수한 노력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행할 수 없었다. 영영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응석받이처럼. 늘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훔쳐내려는 해적처럼. 당신의 마음을 약탈하려 했다. 마주보고 서서 조곤조곤 심장을 다독여 진심을 끌어낼 생각은 않고. 언제나 앗아버리고 싶었다. 빼앗아서, 두 손에 움켜지면 당신이 더는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심장을 잡아채면 당신은 늘 그 공허한 두 눈에 나를 채워줬으니까.

 

결국 두려운 건 스스로의 본심이었다. 모두가 신오우를 구한 영웅이라고, 어린 챔피언이라고 치켜세워줬지만. 사실 내 장기는 파괴 뿐이었다. 누군가가 쌓아 올린 노력을 망가뜨리는 재주 뿐이었다. 단지 운이 좋아서, 부순 물건이 악의 온상이었을 따름이다. 사실, 그것 또한 잘 전시된 다른 이의 산물이었는데. 나로서는 다다를 수 없던, 뜨거운 열망이 탄생시킨 꿈의 결정체였을 텐데.

 

깨닫고 나면, 행복할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을 망칠 뿐인 나를 소중히 여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신을 다시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했다. 남은 방도는 그 뿐이었으므로. 당신이 어디로 가고 싶어하든,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그 길이 내가 가장 혐오하는, 자신이 있는 장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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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8. 6. 8. 00:53

[쥰히카(용식빛나)] Unrelished 글/포켓몬2018. 6. 8. 00:53

쥰히카_Unrelished

 

아마도 너는 봄하늘 아래 피어나는 무구한 꽃을 사랑했던 것 같다. 고작 추측인 까닭은, 너를 알고 지낸 십 년이 넘는 세월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고사리 만한 손으로 흙장난을 하던 시절부터 옆에 있었지만. 네가 노란색 가방을 매고 신오우를 횡단하며 신화와 전설의 모험과 맞닥뜨렸을 때도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 다음에도, 그로부터 많은 해가 지난 다음에도, 나는 줄곧 네 가장 친근한 벗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던 너를 기억하기에, 추측할 뿐이다.

 

그래도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날이면, 창가에 앉아 고즈넉하게 밖을 바라보며 코코아로 몸을 데우곤 했으니까. 평소보다 가라앉은 머리카락에 조금 담담해 보이는 눈동자. 말없이 살며시 턱을 괴고 있으면 맞은 편에 내가 앉곤 했다. 앉아도 괜찮냐고, 그런 상투적인 예의가 없어도, 너는 언제나 그 자리를 허락해 줬다. 그 사실이 늘 기뻤지만 나 역시 말은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왜냐면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어린애 다운 미숙한 추측으로,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너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악하게도, 수 년 전까지 내가 너의 가장 훌륭한 이해자라고 자부했다. 나름 탄탄한 근거들도 있었다. 왜냐면 나는 네 고향친구이자, 소꿉친구이자, 라이벌 트레이너이자, 제일 오래 알고 지낸 벗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연과 호승지심과 세월이라는 낡고 허튼 무언가가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준다고 믿었다. 여행으로 너를 이끈 건 막무가내인 나였기에, 어쩌면 나는 너에게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너의 운명을 결정 지은 건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섣부른 망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너는 훨씬 전부터, 스스로를 빛으로 채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바보같던 나는 깨달음이 늘 한 걸음 늦었다.

 

열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수없이 많은 낯선 존재들에게 너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처음은 분명, 첫번째 포켓몬이었던 팽도리. 그 녀석은 너의 가장 아이 답고 순수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네 허리춤을 채운 다른 포켓몬들은 점점 더 많은 애정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모험길에서 만나게 된 별 같은 인연들. 나나카마도 박사님, 스모모나 아카네들, , 시로나, 또는 고요우 같은 사천왕들. 그들은 만나자마자, 네 천진한 매력에 흠뻑 빠져버려 금세 친구가 되기로 맹세하였으며 또. 나로서는 선사할 수 없는, 숨막히고 치열한 배틀의 스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건 말 그대로 별과 같은 경지라, 조금 기대를 받은 신인 트레이너따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아카기와 같은 긴가단은 다른 의미로 네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생애 첫 분노와 적개심은 늘 차분했던 네 머리를 불 같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긴가단과 관련된 사건들은 늘 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든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차오를 수 있게, 넌 강해져야만 했다. 때로는 이기지 못한 울분을 못 참고 얼굴이 새빨개지고, 때로는 지키지 못한 슬픔에 젖어 눈물을 마구 쏟아내면서- 강해져야, 이길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간 강렬한 기억들은 전부,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자. 전부, 내가 짓게 할 수 없었던 표정들.

 

그리고 너는 신오우 가장 꼭대기에 올라 누구보다 빛나는 첫번째가 되었다. 최연소 챔피언, 신오우의 영웅, 전설을 다루는 수호자-. 무엇이든 너를 칭하는 멋진 수식어였고, 무엇이든 네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다만 나만이.

 

다만 나만이 너와 흙장난을 하던 시절에- 너의 손을 억지로 이끌어 예지호수로 데려갔던 시절에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번쩍이는 빛을 타고 너는 사라졌고, 나는 도태됐다. 그렇기에 이제는 추측 밖에 남지 않았다. 너에 대한 추측. 분명 수 년 전에는 자신감에 가득 찬 확신이었을 그 수많은 가설들. 모두 불확실한 맹점이 되어 공허한 머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추측 밖에 할 수 없게 된 날부터, 나는 결코 즐거울 수 없었다. 네가 봄꽃을 좋아하는 걸 아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꽃다발을 선심 쓰듯 선물하곤 했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네 맞은 편에 앉을 수 있게 된 이들도 무수히 많았다. 더이상은 특권은 없었고, 특등석도 사라졌다. 이제 나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네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미리 연락해 두지 않으면, 먼저 허락을 받아두지 않으면. 네 곁에는 늘 다른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자연스레 너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

 

그저 내가 첫 번째였을 뿐이다. 누구나 너를 만나면 맑게 개인 하늘을 보고 경탄하듯, 사랑에 빠지게 될 텐데. 다만 내가 그 아름다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첫번째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아아, 그제야 깨닫고 나면. 나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으면서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는 것이다. 마치 불경죄를 지은 신도처럼. 조용히 지옥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어째서 삶은 이토록 부지불식간에, 모든 행복을 상실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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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노도 글/포켓몬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_노도

 

수만 별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도 입에 담지 못한다. 진실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돌이켜왔던 나락의 파도가 궤를 달리해 무엇을 덮칠 지 모르는 탓이다. 기실 그다지 대단한 일도 아니다. 볼품없는 하나의 사항이다. 그것이 신오우 역사를 꿰뚫는 분수령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라도 조소를 터뜨릴 것이다. 그만큼 원인의 본질은 하찮기 그지 없었다. 깨달은 아카기조차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어느새 손목시계의 시침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숨겨진 세레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이 몇 번째인가, 세기를 그만둔 적은 없다. 아카기는 수에 밝았기에, 정확히 인지하고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횟수가, 터무니 없이 많아진 지금을 경험한 횟수, 스스로도 내세울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침이 정확하게 북쪽을 가리켰다. 동그란 모자를 쓴 아담한 그림자가 그의 발 밑으로 깔렸다. 수없이 겪어온 광경이지만, 어쩐지 가슴의 고동은 반복할수록 거세지는 것 같았다. 이제 앙증맞은 분홍색 부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하얀 비니를 쓰고 하얀 목도리를 두른, 새빨간 코트의 소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단의 적을 마주쳐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길을 잘못 든 소꿉친구를 만난 마냥 걱정스런 얼굴의- 양가적인 표정의 소녀가.

 

그리고 그는 웃었다. 각인된 기억은 미래 예지와 다름 없다. 그래서 좋았다. 되돌림을 멈출 수 없었다.

 

“…안녕?”

 

어제 싸우고 헤어진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어색한 머뭇거림. 열살도 넘게 차이 나는 적의 보스에게, 그런 말투를 구사하는 순진하고 겁 없는 소녀. 소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새하얀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아카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이 좋았다. 그녀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증거였으니까.

 

당신을 막으러 왔어. 예상했겠지만.”

 

그래.”

 

놀라지 않네? 정말 알고 있던 사람처럼. 아님, 감정이 없어서 그런 건지….”

 

이미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그럼, 배틀 해 줄래?”

 

그녀는 정말, 소꿉친구에게 마실 가듯 자연스레 배틀을 청했다. 처음에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연민하고 있다는 걸. 연민. 그토록 깊고 측은한 감정을 고작 10살 짜리 소녀가 그에게 품고 있다는 걸.

 

배틀은 수십 회를 상연한 연극처럼, 자연스레 같은 순서로 반복된다. 그는 이번에도, 구태여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첫 번째와 똑같은 명령을 내린다. 왜냐면, 그런 개입 한두 가지로 미래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그는 이 사실을 이미 몇 회차 전에 증명했다), 또 미래의 변화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악의 보스에게 승리할 것이다. 신오우 역사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쓰러진 악의 보스는? 승리한 소녀는?

 

답하자면.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그녀는 신오우의 평화를 수호하고자 하였으나, 그렇다고 한 불쌍한 청년의 삶에서 눈을 돌릴 만큼 매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천진한 10살의 소녀가 품은 연민의 감정이란, 스스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의 대상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신오우에서 가장 끔찍한 인간을 혐오하는 대신 동정하는 사람. 그가 얼마나 크고 따뜻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품어졌는지. 무한한 포용을 느낄 적마다 그는 생을 느꼈다. 살아있음에 감복했다.

 

그래, 이런 볼품 없는 한 가지 사항이 모든 일의 사단이었다.

 

아카기는 웃었다. 소녀는 왜 웃는 거야? 하고 울상이 되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수록, 소녀는 슬퍼졌으나. 그녀를 이해하게 될 수록, 그는 기뻐진다는 사실을. 소녀는 너무 어려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아마 어른이 되어도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신오우를 구했구나, 축하한다. 몇 회 전부터, 그가 이 연극에 추가한 새로운 대사였다. 진심으로 패배에 승복하는지, 혹은 소녀의 승리를 비꼬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말투. 그는 이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겉보기에는 둘 중 하나인 것 같았지만, 사실 어느 것도 답이 아니었다. 아카기는 진심이었다. 마음으로, 그녀의 과거와 미래에 온누리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었다. 그녀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그 축복을 빌어주는 이가 자격이 없다 해도-. 최소한 그는, 이 연극을 주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웃지 않는구나. 승리가 기쁘지 않은 거냐?”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압승을 거두어도, 혹은 벼랑 끝에 몰렸다 승리를 거머쥐어도. 소녀는 이날 이후로 웃지 않는다. 연극을 아무리 되풀이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자 그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 난제였다.

 

그래서 물었다. – 그동안의 상연에는 없었던, 애드리브 대사.

소녀는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로 되묻는다.

 

그러는 당신은, 어째서 웃는 거야? 지고 말았는데….”

 

답하지 않았다. 배우의 목표는 승패가 아니다. 연극을 성황리에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니, 주연으로 무대 위에 서는 것이다. 소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 굳이 입에 담지도 않았다.

 

오늘 이후로는 영영 행복해지지 못할 사람처럼….”

 

그 말은 마치, 소녀가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 같았다.

연극의 주인공인지도 깨닫지 못한 여배우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본에 없는 대사를 중얼거렸다.

 

“…마치 오늘을 기다린 사람처럼….”

“….”

 

소녀는 웃지 않는다. 이 날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웃지를 않는다.

주위 사람들은 저주라고 했다. 아카기라는 저주가 들러 붙어, 활기차고 어여쁜 소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버린 거라고 했다. 미신 따위는 신봉하지 않았건만, 아카기는 쉽게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실상, 그는 저주나 다름 없었다. 어리고 상냥한 소녀에게 들러붙어, 행복을 갉아먹고 사는 벌레.

 

그는 분명 노력했다. 찬란한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정말 그답지 않은 많은 시도를 했다. 전부 소용이 없었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하찮아서, 그녀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그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녀 곁에서 살아 숨쉬는 저주가 떨어져 나가면 된다. 아카기가 그녀를 떠나면 된다.

 

그러나 소녀라는 존재에서 멀어져 버리면, 그는 살아있음을 감지할 수 없었으므로. 정말로 세상을 미워할 뿐인 악한 주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기생하기로 했다.

소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하기 전으로. 소녀가 웃지 않게 된 시간- 그 전으로.

처음 만났던 그 날로. 그녀가 조금 아카기를 미워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수천 번 수 만번을 되돌리든-. 말라비틀어진 시간의 틈새에서 기생하기로 결심했다.

 

아카기는 흉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소녀가 한 말은, 예정된 마지막 대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연극은 끝을 고하고 있었다. 소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질 때. 그도 사라진다. 아니, 돌아간다. 그리고 재상연이다.

 

그는 허리춤에 숨겨둔 몬스터볼을 건드렸다. 세레비는 싫다고 했다. 작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더는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트레이너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세레비에게 고하는 한 줄의 명령과 함께- 연극은 막을 내렸다.

눈물을 떨어뜨릴 듯 아슬아슬한 빛의 동그란 눈동자가 필름처럼 동공에 찍히고,

 

늘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다음 회차도 즐기시길.

 

연극의 주관이자 주연의 공허한 외침이 텅 빈 객석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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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7. 12. 4. 22:54

[썬문/구즈미월] 에나코코아 dream 글/포켓몬2017. 12. 4. 22:54

구즈미월_에나코코아, dream.

 


좋아하는 것은 에나코코아.”


!”


 미월의 말에 구즈마는 반사적으로 마시던 물을 뿜었다. 미월은 으엑, 지저분해,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구즈마는 되려 역정을 냈다.


, 꼬맹이, 뭘 그렇게 자꾸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 나는 스컬단 비밀암호를 외운 거 뿐인데? 전부 구즈마님이 좋아하는 거잖아. 집단구타, 갑주무사, 그리고...”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나지막이 읊는다.


에나코코아!”


어이, 놀리는 건 그만 둬.”


 물잔을 든 구즈마의 투박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미월이 예고없이 들이닥치기 전에, 구즈마는 방에서 에나코코아를 먹을지 그냥 물이나 마실지 고민하고 있었다. 목이 텁텁해서 물을 고른 게 다행이지, 에나코코아를 마시고 있었으면 장난질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왜 이게 놀리는 거야? 구즈마는 에나코코아가 부끄러워? 그건 모든 에나코코아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에나코코아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 말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건 엄연히 스컬단의 암호라고! 이걸 대지 않으면 네 방까지 못 들어 온단 말이야!”


시끄러워! 암호가 바뀐 지가 언젠데. 그리고 네 얼굴만 보면 조무래기 녀석들이 겁먹고 도망가서 제멋대로 아지트 안을 돌아다니는 거 아냐!”


 구즈마의 고함에 미월은 거짓울음을 짓는 꼬지지처럼 몸을 움츠린다.


--. 구즈마 무서워, 그렇게 소리나 지르고!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시커먼 스컬단 남자애들한테나 인기 있고-.”


네가 뭔 상관인데. 어서 썩 안 나가냐?”


. 내가 나가면 에나코코아 마시려고?”


조용히 안해?”


흐응-. 구즈마는 심술쟁이. 연약한 소녀에게 허구한날 소리만 지르고….”


 그래봤자, 무서워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누가 연약한 소녀냐? 혼자서 포 마을에 들어와 아지트에 있는 스컬단 녀석들을 다 무찌르고, 그 다음엔 릴리에와 별구름을 구한다고 에테르 재단에 쳐들어가 루자미네를 무력화하고, 울트라비스트와 싸우고 다음에는 알로라의 첫번째 챔피언 자리까지 거머쥔 미월이다. 그 누구도 연약하다고 칭하지 않을 테고, 외려 마주치면 벌벌 떨기까지 한다. 미월이 들어오자 꽁지가 빠져라 내뺀 스컬단 조무래기 녀석들을 봐라.


, 구즈마 위해서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 사왔는데.”


?”


 어느새 미월은 크로스 백에서 부시럭 거리며 작은 박스를 하나 꺼내 놨다. 며칠 전에 새로 출시된 에나코코아였다. 상자 겉면에는 뉴 블랜드- 더 감미롭고 달콤한-이라는 수식어를 귀여운 에나비가 웃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새로 나온 건데. 더 달고 맛있다는데. 관심 없니?”


! 내가, , 무슨.”


구즈마 얼굴 다 팔려서 싸네 마트 가서 이런 거 사 오지도 못하잖아~. 그렇다고 다른 애들에게 시키긴 좀 그렇고.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사왔는데. 갖고 싶지 않아?”


 구즈마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 가지고 있던 에나코코아는 통이 비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라니? 구즈마의 간식 거리를 쌓아두는 찬장을 채우는 심부름꾼이 있긴 있었다. 물론 스컬단의 조무래기였고. 하지만 그 녀석은 아지트에 위험 상황을 알리는 손짓을 자신을 멋지다고 칭찬해주는 제스쳐라고 착각하는 멍청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뉴 에디션이니 뉴 블랜드니 하는 걸 센스 있게 사오는 재주는 없었을 테다.


사왔다면, 받아주도록 하지.”


으음~? 그건 불합격 멘트인데?”


하아?”


 미월은 두 손으로 엑스 자를 표시하며 악동처럼 웃었다. , 나왔다. 한참 구즈마를 골릴 때 미월의 표정.


구즈마는 말이야, 무슨 츤데레 악당도 아니고, 그런 쓸모 없는 허세는 필요가 없단 말이지. 여자애들이 원하는 건, 그거야. 솔직하고 담백하면서 다정한 남자아이!”


복잡하네.”


구즈마처럼 막-소리 지르고. 거칠게 행동하고. 또 틱틱 거리면서 솔직하지 못한 남자는 인기가 없다 이거야. 알겠어?”


“…내가 왜 인기가 있어져야 하지?”


 근본적인 반문에 미월도 살짝 당황한 모양이다. 어라, 예상치 못한 전개였나.


그야 구즈마도 언젠가 여, 여자애를 좋아하고 사귀고 결혼해야 하니까! 그건 인간의 섭리니까 구즈마도 그렇게 되어야하지 않겠어? 설마 비혼주의자는 아니지?”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모르지만…. ,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한 여자랑 사는 거 아냐. 그럼 그 여자만 나를 좋아하면 되지 왜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하지?”


? 그 그건….”


 글쎄, 장난꾸러기인 미월도 여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턱에 손을 갖다대고 나름 골몰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잔뜩 깜빡이며 애써 답을 내본다.


그 여자애한테, 인기 있어지는 법이지.”


말이 달라졌는데?”


어쨌거나 대체적으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가 되면, 장래 구즈마의 아아내가 될 여자애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어? 일반론이야, 일반론!”


그래서. 그게 지금 네가 나를 괴롭히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어쩐지 구즈마의 시선은 미월이 들고 있는 신상 에나코코아에 꽂혀있다. 그걸 미월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자애가 뭔가를 선물하면, 아까처럼 흥 받아주도록 하지이런 게 아니라-. 좀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고마워. 너의 마음 잘 받을게하고 스위트한 미소를 날려 준다던지 하는게 낫단 말이야.”


너 미쳤냐?”


왜애!”


스위트한 미소라니 내가 가능할 거 같냐?”


 미월은 잔뜩 볼을 부풀리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가능해! 인간은 뭐든 가능해! 내가 챔피언이 된 거 보단 쉬울 거야!”


하아? 너 정말 말도 안 되는됐어. 그건 필요 없다.”


.”


 의외로 구즈마는 너무나 순순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상 에나코코아를 포기선언했다.


됐어. 그렇게까지 먹고 싶지는 않다. 네 말도 안되는 투정을 받아주면서까지 내가 왜….”


왜냐니, 인기가 있어지려면….”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됐어. 장난 치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뭐야. 갑자기 진지해져선. 구즈마 백수라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정곡을 찌르지 말아줬으면 한다. 구즈마는 뒤를 돌아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리 조무래기가 바보들이라도 새로운 걸 사오는 것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미월의 갖은 떼와 투정을 받아주는 것보단, 그게 수월하겠지.


, 됐어. 기왕 사 온 거니 그냥 두고 갈래. 구즈마는 에나코코아를 엄--좋아하니까. 내가 엄--선심 써서 두고 가는 거야.”


뭐냐, 그 건방진 태도.”


구즈마 흉내거든. 구즈마는 만날 그러니까~.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엄청 선심 쓴다는 듯이.”


왜 네가 삐지냐?”


흐응. 나 안 삐졌거든. . 이제 갈 건데. , 갈 건데….”


 간다 간다 말만 하고 미월이는 좀체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구즈마는 다시 뒤를 돌아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냐. 지금 나가서 리자몽 탔으면 벌써 너네 집까지 갔겠다.”


으음. 그래서 갈 거라고. 근데 너무 잠깐 있다 가는 거 같지 않니?”


 예전 같으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했겠지만. 구즈마도 몇 달을 미월을 상대하다보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이건 삐졌으니 달래달라는 신호다. 그냥 보

내지 말고, 더 놀아달라는 얘기다.


“…그럼 네가 사 온 에나코코아라도 마시고 가던지.”


오오! 방금 그건 합격!”


“…?”


 언제 삐죽거렸냐는 듯 미월은 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방금 그 권유, 완전 좋았어. 그래, 여자애를 이렇게 그냥 보내면 안 되는 거야. 알겠니?”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데나 앉아라. 뜨거운 물 가져올 테니.”


 뭐가 좋은지, 미월은 어느새 방긋방긋 미소를 흘리며 먼지 투성이 소파에 털썩 앉는다. 소녀의 변덕이란 종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구즈마는 낡은 전기 주전자(근처 마을에서 주워온 것이다)에 물을 담아 끓였다. 티 스푼을 꺼내 두 잔의 에나코코아를 탔다. 하얀 잔을 미월에게 건네며, 구즈마가 퉁명스레 군다.


먹어라. 네가 사왔으니.”


, 말투는 별로지만. 권하는 건 합격이니까 됐어~.”


 라고 제멋대로 또 평가를 내리곤 뜨거운 에나코코아를 후루룩 잘도 마신다. 구즈마도 한 모금 마셨다.


! 달고 맛있어.”


“…….”


구즈마도 그렇지?”


“…어어.”


 확실히 예전 에나코코아보다 훨씬 달작지근하고 깊은 풍미가 있었다. 미월이 하는 짓이지만 오늘은 제법 괜찮은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아아, 역시 모든 해봐야 안다니깐. 안 그래, 구즈마?”


. 음식도 먹어봐야 아는 거지.”


사람도 그래~. 사람도 다 겪어봐야 그때야 아는 거거든.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이 가진 가치나 깊이를 알 수 없어.”


갑자기 무슨 할애비 같은 소리냐?”


구즈마는 미월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뜬금없이 또 무슨 소리냐며 정색하려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걸 감지했다. 미월은 때때로 도를 터득한 현자처럼 어렵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툭툭 내뱉곤 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이 나이에는 분명 더 걸맞을 텐데.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녀의 내면을 너무 어른스럽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구즈마는 어른을 싫어했기에, 이미 미월이의 마음이 어른이 되어버렸다면 조금 슬플지도 모른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그거나 마셔.”


미월이는 구즈마에 대해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그건 아마구즈마가 스컬단의 보스라는 거, 섬 순례나 다른 일에서 실패한 아이들을 모아서 도피처를 만들

어주고 있다는 거그리고 구즈마도 그랬다는 것 정도 일까나….”


 구즈마도 그랬다는 말은. 구즈마도, 실패했었단 이야기다. 그렇게 포켓몬 배틀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는데도 섬의 캡틴이 되지 못했단 사실을 일컫는 거다. 구즈마는 소리를 또 버럭 질러야 했을까?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 말을 하는 미월이 유독 얌전하고 차분했던 탓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만이, 구즈마를 알게 해주는 걸까?”

“….”


왜냐면 봐봐. 나도 사람들이 아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되게 어마어마한 영웅에 천재 같잖아. 그런데 그게 나에 대해 정말 아는 사실이냐구.”


, 철학자가 되고 싶은 거냐?”


아아니. 나는 그냥그런 겉으로 보였던 성공이나 실패 말구, 이렇게 구즈마가 에나코코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구즈마에 대해 더 많이 알려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야.”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미월은 굳이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를 사들고 구즈마가 있는 아지트까지 찾아온 걸까. 구즈마는 뜨거운 김이 나오는 에나코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긴. 챔피언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보단, 사람 괴롭히길 좋아하는 치졸한 꼬맹이라는 게 더 너를 설명해줄지도 모르겠군.”


말이 심하네!”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라. 그리고 반성해라.”


난 별로그런 게, 아닌데.”


 방금 전까지 진중한 말들을 쏟아 내놓고, 또 입술을 삐죽거린다. 구즈마가 보기에도, 미월은 여자애의 일반론을 얘기하기엔 변덕이 심하다.


난 그냥 구즈마를 더 알고 싶을 뿐이야. 구즈마가 뭘 좋아하고, 구즈마가 좋아하는 에나코코아가 어떤 맛인지 궁금할 뿐이라고.”


 어쩐지 가슴을 쥐어짜내서 말하는 듯, 미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구즈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청한 소리를 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헤에? 정말 그걸 묻는 거야? 구즈마는 바보네!”


 잔뜩 힌트를 줘도 못 맞추네! 불합격이야. –라며 또 핀잔을 준다.


그건 간단한 거라고! 구즈마가 미월이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미월이가 구즈마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중요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도.”


“…미래를 어디까지 설계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너 왜 자꾸 스스로 미월이 미월이 부르냐? 설마 귀엽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 정말! 눈치도 없고! 그거나 마셔!”



그리곤 미월은 홍당무처럼 물든 얼굴을 휙 돌렸다. 구즈마는 역시, 종잡을 수 없는 꼬맹이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홀짝였다


옆에 앉은 사람의 온기 덕인지, 평소보다 따뜻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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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