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W기반 회지 웹공개] 불꽃춤(Fiery Dance)- 2. 태동 글/포켓몬 회지 웹공개-불꽃춤(2015)2017. 11. 5. 02:22
2. 태동
태고의 전설처럼 퇴색한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무늬도 없이 희멀건 천정을 응시하며 멀뚱하니 서 있었다. 나는 비번이었고, N님은 외출 중이었다. 딱히 주어진 업무가 없어 하릴없이 복도를 서성였다. 바닥을 보다가 천정을 보다가 그림자를 보다가 멈추어서기를 반복했다. 복도는 빈 집 마냥 인기척도 없었다.
오늘 세실리아는 N님을 따라 나섰다. 세실리아나 나와 같이 플라즈마단에서 길러진 고아들은 N님의 최측근에서 머물곤 했다. 더 정확하게는 N님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벽에 기대 그들을 기다리며, 세실리아와 N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세실리아는 이상하다. 그토록 차분한 아이가 N님과 관계된 일이라면 허룽대기 일쑤다. 늘 차가울 정도로 진중한 그녀인데, 불에라도 데인 사람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라니. 납득할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여 있을 때, 마침 세실리아와 N님이 돌아왔다.
“오셨어요, N님.”
대충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는 N님의 얼굴이 평소와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아프기라도 한 걸까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실리아의 상태 또한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점이 나간 눈동자로 허공을 뒤지며, 두 손은 달리 붙잡을 게 없다는 듯 단복의 끄트머리를 세차게 쥐고 있었다. 늘 총명한 기운이 도는 그녀인데 이렇게나 넋이 나간 모습은 처음이었다.
“세실리아, 무슨 일이야?”
“아니…아무 것도.”
기운 없는 대답과 함께 세실리아는 쓰러지듯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난 낯선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날은, N님이 연설을 하는 개치스님과 함께 넝쿨마을에 갔던 날이었다. 아주 조그만 징후였지만, 그것은…그래. N님을 시작해 우리들의 세상이 뒤집힐 전조였다.
****
내가 플라즈마단에 들어온 지 몇 달 뒤, 로트님은 내 또래의 여자아이를 데려 오셨다. 밤색 곱슬머리에 동그랗지만 뚝심 있어 보이는 두 눈을 가진 아이였다. 입은 옷도 추레하고 얼굴도 지저분했지만 그 애가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단숨에 알아봤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썹 아래 잠긴 근심과 절망은 결코 읽지 못했다.
그녀는 내 룸메이트가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또래의 여자아이와 지내게 되어 사뭇 설렜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주고, 받고 떠들다가 시답잖은 농담에 자지러질 듯이 웃는 여느 소녀들의 대화 같은 걸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실리아와 같은 방을 쓴지 몇 주가 지나도, 별달리 관계에 진전은 없었다. 먼저 씻을게, 불 끌게, 창문 열게, 이런 것들 외에 불필요한 대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실망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다지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밥이나 얻어먹고 침대에서 잘 수 있는 생활에 다시 감사하는 마음을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달이 뽐내듯 꽃처럼 피어나던 밤이었다. 유난히 밝은 달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고아원을 박차고 나오던 밤이 떠올랐다. 근거 없는 희망에 가득 찼던 때를 생각하니 당시 귀뚤뚜기의 울음소리만이 생동하게 귀에서 울려댔다.
“자니?”
세실리아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난 누운 채로 대답했다.
“아니. 잠이 안 와.”
“달빛이 너무 환해서 그래. 나, 예전에도 이런 밤이 있었어.”
“그래? 나돈데.”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고 각자 위에 있는 천장에만 눈을 꽂은 채 이야기했다.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그녀답게 잔잔했다. 그럼에도 방안을 살며시 진동시키는 울림이 있었다.
“그렇구나. 있잖니, 넌 불꽃춤을 본 적이 있니?”
“아아니. 그거 포켓몬의 기술 아냐?”
“으응. 본 적 없어?”
“없어. 없다고 했잖아. 그게 대체 어떤데?”
세실리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불꽃춤은 포켓몬의 능력을 올려주는 기술이야. 내가 그걸 본 건 이렇게 달빛이 햇살처럼 쨍쨍하게 비치는 밤이었어. 나는 혼자 풀숲을 달리고 있었거든.”
“어둔 밤에 왜 혼자 숲 속에 있었어?”
내 물음에 세실리아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말에 답은 않고 그냥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근데 본 거야. 새까만 숲에서 귀뚤뚜기 울음소리밖엔 안 들렸는데 뭔가 환하게 번쩍이는 게 보였어. 불꽃춤이었던 거야. 불카모스의.”
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녀가 흥분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벅차올랐던 당시의 심정을 대변하듯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불카모스라는 포켓몬을 알지 못했다. 이번엔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쏘아붙이듯 말했다.
“너, 불카모스가 뭔지 모르는구나?”
“…어.”
자신 없는 내 대답에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고조되었다.
“불카모스는 활화르바의 진화형이야! 벌레랑 불꽃 타입을 동시에 갖고 있지. 모르는 것도 이해해. 별로 흔치 않거든.”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는 그녀의 억양에 왠지 내 무지에 대한 무시가 실려 있는 것 같아 약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청 멋있었어. 달에서 나오는 빛이랑 불카모스 몸에서 나오는 빛이랑 어우러져서, 와, 치렁치렁 별빛으로 수놓은 작은 전구들을 달고 춤추는 것 같았어. 물에 잠기듯 부드럽다가도 폭포를 오르듯 힘 있게 차오르기도 했지. 그런 것 처음 봤어. 죽어서 별님 달님 곁으로 간 줄 알았다니깐.”
“불카모스는 어떻게 됐어?”
“그게, 그렇게 춤을 추다가 사라져 버렸어. 사라져 버렸어.”
‘사라져 버렸다’고 연달아 말하는 음성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천장만을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도 어느새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정말 멋졌는데, 그 순간.”
달빛을 받아 빛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은 경이로움을 읊는 시인과 같았다. 아마 그 때가 처음 세실리아와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했던 날인 것 같다.
이후 세실리아와 나는 가까워졌다. 내가 원했던 바와 같이 사춘기 소녀들처럼, 시시콜콜한 얘기로 재잘거리고 웃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전과 같은 거리감은 사라져갔다. 그녀가 손짓을 하면 나는 따라갔으며 내가 손을 흔들면 그녀는 나에게로 왔다. N님의 방 앞에서 말없이 서로 그림자를 밟으며 놀기도 하고 마냥 서로의 손바닥을 보며 손금을 봐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왜 세실리아가 홀로 밤의 숲을 거닐었는지 묻지 않았다. 세실리아에게 내 과거를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진정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나는 불카모스에 대해서도, 불꽃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더욱이 불꽃춤이 궁극에 달한 불카모스만이 쓸 수 있는 이상(理想)의 기술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 화려하게 불타는 춤사위도, 번쩍이는 푸른 눈빛도, 나로서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묻지 않았다. 다만, 가끔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는 새까만 그늘과 N님을 볼 때면 다시금 화사해지는 그녀의 표정이- 그 때 일어났던 무언가를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
넝쿨마을에 다녀온 뒤로 N님은 외출이 잦아졌다. 나는 그저 플라즈마단의 활동을 위해서려니 하고 여겼다. 그런데 N님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N님이 관심을 두는 아이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초기에는 소문이 너무 두루뭉술해서 그 아이가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소문이 구체적으로 변하자, 그제야 그 아이가 열서너 살 먹은 소녀라는 알게 되었다. N님과 함께 나갔을 때 혹은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그녀와 맞닥뜨렸던 단원들이 자세한 정보를 일러준 것이다.
듣자하니 그 소녀는 훤칠하고 팔다리는 쭉쭉 뻗었는데, 춥지도 않은지 민소매 상의에 핫팬츠를 입고 다닌다고 했다. 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풍성한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캡 모자를 눌러쓴 것이 특징인 것 같았다. N님은 성을 나갈 때마다 그녀의 행적을 뒤쫓았다. 단원들이 직접 물어보니 “그녀를 시험하고 알아내고 싶은 게 있어.”라고 말하셨다고 한다. N님이 그녀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N님이 없을 때, 단원들은 N님은 예쁘장한 그 소녀에게 홀린 거라며 쑥덕거렸다.
나는 그런 소문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물론 소녀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지는 않았겠지만, N님이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부분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녀를 본 단원들은 전부 그녀의 아리따운 외모에 N님이 혹했다고 떠들어대는데,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기론 조직의 심벌과도 같은 사랑과 평화의 여신도 빼어난 미인들이다. 가끔 TV를 볼 때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보다도 그녀들이 훨씬 예쁘다. 내 친구, 세실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피부도 하얗고 이목구비도 가지런한 미인상이라 몇몇 남자단원들이 치근덕거린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아름다운 소녀들과 어린 시절부터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N님은 단 한 번도 이성적인 호감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소녀가 예쁘다는 이유로 N님이 홀라당 넘어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연심이라니, 그에게 그런 감성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 분은 일찍이 감성의 성장이 멈췄다. 게다가 머릿속엔, 상처받는 포켓몬들의 해방 혹은 복잡하고 난해한 수식들뿐. 날 때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도록 교육 받았는데, 이제 와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였다.
그러나 소문이 크기를 부풀리면 부풀릴수록 세실리아의 낯빛은 어두워져갔다. 결국 난 참다못해 그녀에게 말했다.
“죽을 상 그만해. N님이 진짜로 그 애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단순한 호기심이야. 그 분은 순수하잖아.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에 대한 티 없는 호기심일 뿐이라고.”
다그치듯 말하자 세실리아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찬찬히 들었다. 그 또렷했던 눈망울은 어디 갔는지 흐리멍덩한 검은자위만 둥둥 떠올랐다. 그녀는 낮게 중얼댔다.
“-네가 그 애를 못 봐서 그래.”
그녀는 뭔가에 정신이 팔린 혼령처럼 말했다. 생기를 잃은 그녀의 한마디는, 한 바퀴 돌아 날아오는 바람처럼 내 가슴에 꽂히었다.
생소한 감정의 물결을 인지하며 나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눈앞에 N님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N님.”
“응.”
여전히 무미건조한 말투와 음성.
“다음에 나가실 땐 저도 데려가 주세요. 요즈음 늘 성에만 있었거든요.”
“…그러네. 알았어.”
손쉽게 승낙을 얻어냈다. 텅 빈 얼굴로 끝없는 복도를 바라보는 그의 옆에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이런 사람이 사랑을 느낄 리가 없다. 이렇게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인형 같은 사람이 감정에 대해 알 리가 없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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