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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노도 글/포켓몬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_노도

 

수만 별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도 입에 담지 못한다. 진실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돌이켜왔던 나락의 파도가 궤를 달리해 무엇을 덮칠 지 모르는 탓이다. 기실 그다지 대단한 일도 아니다. 볼품없는 하나의 사항이다. 그것이 신오우 역사를 꿰뚫는 분수령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라도 조소를 터뜨릴 것이다. 그만큼 원인의 본질은 하찮기 그지 없었다. 깨달은 아카기조차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어느새 손목시계의 시침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숨겨진 세레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이 몇 번째인가, 세기를 그만둔 적은 없다. 아카기는 수에 밝았기에, 정확히 인지하고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횟수가, 터무니 없이 많아진 지금을 경험한 횟수, 스스로도 내세울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침이 정확하게 북쪽을 가리켰다. 동그란 모자를 쓴 아담한 그림자가 그의 발 밑으로 깔렸다. 수없이 겪어온 광경이지만, 어쩐지 가슴의 고동은 반복할수록 거세지는 것 같았다. 이제 앙증맞은 분홍색 부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하얀 비니를 쓰고 하얀 목도리를 두른, 새빨간 코트의 소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단의 적을 마주쳐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길을 잘못 든 소꿉친구를 만난 마냥 걱정스런 얼굴의- 양가적인 표정의 소녀가.

 

그리고 그는 웃었다. 각인된 기억은 미래 예지와 다름 없다. 그래서 좋았다. 되돌림을 멈출 수 없었다.

 

“…안녕?”

 

어제 싸우고 헤어진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어색한 머뭇거림. 열살도 넘게 차이 나는 적의 보스에게, 그런 말투를 구사하는 순진하고 겁 없는 소녀. 소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새하얀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아카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이 좋았다. 그녀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증거였으니까.

 

당신을 막으러 왔어. 예상했겠지만.”

 

그래.”

 

놀라지 않네? 정말 알고 있던 사람처럼. 아님, 감정이 없어서 그런 건지….”

 

이미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그럼, 배틀 해 줄래?”

 

그녀는 정말, 소꿉친구에게 마실 가듯 자연스레 배틀을 청했다. 처음에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연민하고 있다는 걸. 연민. 그토록 깊고 측은한 감정을 고작 10살 짜리 소녀가 그에게 품고 있다는 걸.

 

배틀은 수십 회를 상연한 연극처럼, 자연스레 같은 순서로 반복된다. 그는 이번에도, 구태여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첫 번째와 똑같은 명령을 내린다. 왜냐면, 그런 개입 한두 가지로 미래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그는 이 사실을 이미 몇 회차 전에 증명했다), 또 미래의 변화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악의 보스에게 승리할 것이다. 신오우 역사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쓰러진 악의 보스는? 승리한 소녀는?

 

답하자면.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그녀는 신오우의 평화를 수호하고자 하였으나, 그렇다고 한 불쌍한 청년의 삶에서 눈을 돌릴 만큼 매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천진한 10살의 소녀가 품은 연민의 감정이란, 스스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의 대상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신오우에서 가장 끔찍한 인간을 혐오하는 대신 동정하는 사람. 그가 얼마나 크고 따뜻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품어졌는지. 무한한 포용을 느낄 적마다 그는 생을 느꼈다. 살아있음에 감복했다.

 

그래, 이런 볼품 없는 한 가지 사항이 모든 일의 사단이었다.

 

아카기는 웃었다. 소녀는 왜 웃는 거야? 하고 울상이 되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수록, 소녀는 슬퍼졌으나. 그녀를 이해하게 될 수록, 그는 기뻐진다는 사실을. 소녀는 너무 어려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아마 어른이 되어도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신오우를 구했구나, 축하한다. 몇 회 전부터, 그가 이 연극에 추가한 새로운 대사였다. 진심으로 패배에 승복하는지, 혹은 소녀의 승리를 비꼬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말투. 그는 이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겉보기에는 둘 중 하나인 것 같았지만, 사실 어느 것도 답이 아니었다. 아카기는 진심이었다. 마음으로, 그녀의 과거와 미래에 온누리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었다. 그녀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그 축복을 빌어주는 이가 자격이 없다 해도-. 최소한 그는, 이 연극을 주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웃지 않는구나. 승리가 기쁘지 않은 거냐?”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압승을 거두어도, 혹은 벼랑 끝에 몰렸다 승리를 거머쥐어도. 소녀는 이날 이후로 웃지 않는다. 연극을 아무리 되풀이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자 그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 난제였다.

 

그래서 물었다. – 그동안의 상연에는 없었던, 애드리브 대사.

소녀는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로 되묻는다.

 

그러는 당신은, 어째서 웃는 거야? 지고 말았는데….”

 

답하지 않았다. 배우의 목표는 승패가 아니다. 연극을 성황리에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니, 주연으로 무대 위에 서는 것이다. 소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 굳이 입에 담지도 않았다.

 

오늘 이후로는 영영 행복해지지 못할 사람처럼….”

 

그 말은 마치, 소녀가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 같았다.

연극의 주인공인지도 깨닫지 못한 여배우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본에 없는 대사를 중얼거렸다.

 

“…마치 오늘을 기다린 사람처럼….”

“….”

 

소녀는 웃지 않는다. 이 날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웃지를 않는다.

주위 사람들은 저주라고 했다. 아카기라는 저주가 들러 붙어, 활기차고 어여쁜 소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버린 거라고 했다. 미신 따위는 신봉하지 않았건만, 아카기는 쉽게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실상, 그는 저주나 다름 없었다. 어리고 상냥한 소녀에게 들러붙어, 행복을 갉아먹고 사는 벌레.

 

그는 분명 노력했다. 찬란한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정말 그답지 않은 많은 시도를 했다. 전부 소용이 없었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하찮아서, 그녀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그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녀 곁에서 살아 숨쉬는 저주가 떨어져 나가면 된다. 아카기가 그녀를 떠나면 된다.

 

그러나 소녀라는 존재에서 멀어져 버리면, 그는 살아있음을 감지할 수 없었으므로. 정말로 세상을 미워할 뿐인 악한 주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기생하기로 했다.

소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하기 전으로. 소녀가 웃지 않게 된 시간- 그 전으로.

처음 만났던 그 날로. 그녀가 조금 아카기를 미워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수천 번 수 만번을 되돌리든-. 말라비틀어진 시간의 틈새에서 기생하기로 결심했다.

 

아카기는 흉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소녀가 한 말은, 예정된 마지막 대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연극은 끝을 고하고 있었다. 소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질 때. 그도 사라진다. 아니, 돌아간다. 그리고 재상연이다.

 

그는 허리춤에 숨겨둔 몬스터볼을 건드렸다. 세레비는 싫다고 했다. 작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더는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트레이너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세레비에게 고하는 한 줄의 명령과 함께- 연극은 막을 내렸다.

눈물을 떨어뜨릴 듯 아슬아슬한 빛의 동그란 눈동자가 필름처럼 동공에 찍히고,

 

늘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다음 회차도 즐기시길.

 

연극의 주관이자 주연의 공허한 외침이 텅 빈 객석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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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