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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웅의 그림자


두 영웅이 있었다. 

 두 영웅은 같은 시각,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두 영웅은 위대한 드래곤 포켓몬과 힘을 합쳐 하나를 건국했다. 

 하나에서 둘로 나뉜 형제의 몸처럼, 두 사람의 의견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형은 진실을 원했고 동생은 이상을 쫒았다. 형제의 마음이 갈라지듯 드래곤 포켓몬도 몸을 둘로 나누었다. 

 진실을 찾아 새로운 선의 세계로 이끄는 하얀 용과 이상을 찾아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이끄는 검은 용. 

 두 마리의 용은 각각 형과 동생의 편이 되어 전쟁을 시작했다. 하얀 용이 내뿜는 거친 화염의 불길이 산천초목을 불태웠다. 검은 용이 내리친 푸른 번개의 칼날이 창천과 대지를 갈랐다. 

 두 형제가 세운 나라가 두 형제로 인해 멸해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화해를 청하려 했다. 그러나 형제의 아들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온 누리는 격정과 불안에 휘말렸다….

 결국 두 드래곤 포켓몬은 번개와 불꽃으로 하나를 순식간에 멸망시키고 사라졌다.


하나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 이야기다. 한낱 구닥다리 옛말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라이트 스톤과 다크 스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우리- 플라즈마단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모두들 진실을 추구하고 선의 세계를 이룩할 하얀 용이야말로 N님에게 어울린다고 믿고 있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전설이 진짜라면, 전설 속 포켓몬은 이미 한 번 세상을 쇠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존재다. 그런 존재가 두 번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 두 마리의 용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어지럽고 타락한 지금의 세계를 본다면…. 그렇다면 같은 결정을 내릴 지도 모른다. 이토록 추하고 더러워진 세상이라면 차라리 부수는 게 낫다고, 그렇게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


용나선탑에 투박한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N님은 연녹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겉모습은 마치 새와 같이 부드럽고 유연한, 하얀 용. 레지라무는 N님 앞에 나긋하게 고개를 숙였다. 용은 마치 왕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처럼 경건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얀 용은 N님을 자신의 영웅으로 택했다.

 세실리아는 내 생각만큼 들떠있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하듯 서 있었으나, 입가에는 약간의 웃음기도 없었다.

 귓가에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워커가 땅에 부딪히는 익숙한 소리. 나는 시선을 돌렸다.

 소녀가 차오르는 숨을 겨우 참아내고 N님의 앞에 서 있었다. 세실리아의 얼굴이 돌연 사색이 되었다. 반면 N님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 그의 눈에 도대체 무엇이 보였기에, 저 소녀가 얼마나 특별하기에, 그렇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약속을 건네는 것일까.

 자신이 한발 늦은 것을 깨달은 소녀는 이를 악 물고 외쳤다. 그녀가 꿈꾸는 이상을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분명 행복할 거라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새로운 희망은 찾아올 거라고. 그렇기에 그를 막아낼 것이라고. 

 그리고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소녀를 바로 보지 않고 등을 졌다. 소녀는 목소리마저 세실리아와 비슷했지만 소녀의 언동은 세실리아와 닮은 바가 하나도 없었다. 소녀의 얼굴은 세실리아와 빼다 박았지만, N님은 세실리아가 아닌 소녀만을 눈과 귀에 담았다.

 하얀 용이 푸르르 새빨간 화염을 뱉었다. N님은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소녀는 담담하게 그의 뒷모습을 구시했다. 그녀의 눈에서 타오르는 결의는 사뭇 무겁고 단연했다. 그리고 나는 세실리아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오래된 전설처럼 퇴색한 계단…. 세실리아의 몸은 마른 솜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솜을 이고 걷는 나귀처럼 묵묵히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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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