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쥰히카/용식빛나] 라벤더 글/포켓몬2021. 1. 13. 21:47
<라벤더 (Lavender)>
그치만 난 사랑이 뭔지 몰라.
옅은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남청색 머리칼, 손목 위 시계를 바라보는 동그랗고 투명한 눈동자. 상냥한 어조에 웃을 때마다 볼에 떠오르는 홍조. 어릴 적부터 봐왔기에,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펭도리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하게 웃는 얼굴도. 새벽부터 일어나 정원의 꽃에 물을 주는 모습도. 멀리서 나를 부를 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버릇도. 늘 지켜본 모습, 변하지 않는 일상.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주위 또래들이 떠들기 시작한 첫사랑 이야기 따위는 관심 없었다.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고 사귀는 일에 일말의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가끔 코우키가 나와 히카리의 사이에 대해 의문점을 표해도, 딱 잘라 말했다. 우린 소꿉친구야. 그 녀석이랑 나는 평생 친구라고.
같은 말을 히카리 앞에서 한 날, 그 애는 멋쩍게 웃었다. 뭐야. 우린 친구야. 평생 친구지? 하고 되물으면, 그 애는 대답은 않고 뒷짐만 졌다. 불만이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 히카리의 나쁜 버릇이었다. 거듭 채근해도 커다란 두 눈만 깜빡 거릴 뿐이었다. 그러면서 죽어도 ‘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이름도 모를 놈팽이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대화로부터 몇 주 뒤였다. 히카리의 첫 남자친구라는 놈은, 짐리더도 사천왕도 아닌 정말 평범한 녀석이었다. 엘리트 트레이너 딱지를 달고 있긴 했지만, 글쎄. 실력이 특출 난 편은 아니었다. 히카리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키만 멀대처럼 크고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멍청한 인상이었다. 이래저래 뜯어봐도 히카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축복해 주었다. 다들 눈이 삔 게 분명하다.
히카리와 단 둘이 되었을 때 – 그 애가 연애질을 시작하고는 도무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 난 물었다. 왜 그런 녀석이랑 사귀는 거야? 시간이 아깝지 않아? 나라면 덜 떨어진 놈과 만날 시간에, 차라리 배틀 하며 실력이나 쌓겠어. 그러자 히카리가 저번처럼 볼을 긁으며 멋쩍게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날 좋아해주니까….
대답을 듣자마자 열불이 났다.
-뭐? 그럼 넌 널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은 거야?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그 사람은 굉장히 다정해.
-그러면 너는, 널 좋아해주고 다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응.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런 단순한 사항으로 결정해버려도 되는 건가?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항상 서로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히카리는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그 자식을 고른 걸까?
-그럼 너는 그냥 예쁨 받는 게 좋은 거네.
-맞아.
-실망이야. 네가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
-그치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망설이다, 이내 히카리가 조금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그치만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는 걸. 나를 정말로 소중하게,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네가 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걸. 쥰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잖아.
거기서 왜 내 얘기가 나오는 거야? 어쩐지 히카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쥰은 언제나 제멋대로에, 나를 남자애처럼 대하듯 거칠게 다루고, 막 아무 소리나 하고...
-그건 우리가 친구니까…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해주는 그 사람이 좋아. 쥰은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겠지만.
더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면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히카리는 그 이후로 더이상, 비슷한 화제를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그 녀석과 영화를 보러 가고, 놀이동산에 가고, 까페에 가고, 심지어 배틀 연구도 그 녀석이랑 했다. 나와 만날 일은 점점 적어졌다.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왜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을까?
히카리는 항상 여자애였다. 거울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옷을 고르느라 제 시간에 나오지를 못했을 때도. 새로 산 비니를 쓰고 해맑게 어울리냐고 물어오던 날도. 새빨간 머플러를 고쳐 매며 “이거, 쥰이랑 같은 거야”하고 말할 적에도. 여자애였다. 한여름 원피스를 입을 때 보이는 새하얀 어깨도. 나보다 몇 치수는 작은 분홍색 부츠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도. 히카리는 언제나 여자애였다. 다만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여긴 적 없을 뿐. 왜냐면 아주 오래 전부터 히카리는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평생 같은 모습일 테니까. 사랑스럽다는 느낌마저 낯간지럽다. 우리는 정원에 피어난 라벤더를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꽃이 필 적 마다 향기롭다고 감탄하지 않는다. 굳이 입으로 꺼내 부산 떨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네가 후타바타운의 평범한 여자아이든, 신오우의 마스터이든. 우리가 함께 예지호수에 있었단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네가 긴가단에게 패해도, 신오우를 구한 영웅이 되어도. 너와 같이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는 추억이 더 소중했다. 그렇지만 네가 다른 누구의 여자가 되는 건, 혹은 되지 않는 건. 그로 인해 더이상 예전의 모습들을 만날 수 없다면. 전부 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애의 말이 맞다. 난 사랑이 뭔지 모른다. 어째서 그 애를 상냥하게 대해줘야 하는 모른다. 아니, 어떻게 상냥하게 다뤄야할 지 모른다. 영화관에 같이 가고 함께 포켓몬을 돌보는게 왜 ‘특별한’ 데이트가 되는지 납득 가지 않는다. 그런 건 히카리와 어린 시절부터 늘 같이 해오던 일상이다. 그렇지만 히카리는 특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똑같이 특별하다고 여겨줄 사람을 찾은 것이다. 라벤더를 볼 때마다 사랑스럽게 잎새를 만지고 향기롭다고 감탄해 줄 사람을 선택했다. 그것이 그 애의 선택이라면, 나는 아무런 변명도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슬퍼? 어느 날 코우키가 물었다. 슬플 리가 없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히카리와 나는 줄곧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애가 ‘응’이라고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러니까 슬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외로워? 라고 묻는다면. 분명 고독해졌다. 계절이 지나 라벤더 꽃이 피어도, 더이상 가까이서 볼 수 없으니까. 분명 꽃이 피든, 피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을 텐데. 후회 돼? 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치만,
나는 사랑이 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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