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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각성


꿈을 꾸었다. 세실리아와 손을 잡고 숲을 거닐었다. 그녀의 손은 햇살을 머금은 솜털처럼 보드랍고 따사로웠다. 전에 없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나를 이끌었다. 세실리아의 하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커다란 불카모스가 춤을 추었다. 넘실넘실 바다를 유영하듯, 하늘하늘 구름 속을 헤치듯 춤을 추었다. 그 때마다 청명한 홍색 불꽃이 불카모스의 주위에서 반짝거렸다. 나와 세실리아는 웃으며 함께 불꽃춤을 보았다. 

 아아, 그건 분명 꿈이었다. 세실리아는 내 손을 잡아준 적 없고, 나를 보며 웃어준 적도 없다. 우리는 분명 둘 뿐인 친구였음에도. 나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아준 적이 없고, 세실리아를 보며 웃어준 적도 없다. 그녀는 나의 하나 뿐인 친구였음에도.

 그렇게 스스로 깨달아버린 나는, 부서진 꿈속에서 헐떡이며 깨어났다.


소녀가 성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결국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칠현인은 소녀가 사천왕을 이기고 챔피언의 방까지 올 수 없을 거라며 코웃음을 쳤었다. 자만심이 화를 부른 셈이다. N님이 아무리 우겼어도, 개치스님의 선에서 처리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철두철미한 개치스님마저도 소녀를 왕을 위한 시나리오의 일개 조연 정도로만 여겼다. 하나 지방의 마지막 희망으로 보이던 소녀가 N님 앞에서 처참히 무너진다, 그런 결말로 이야기를 꾸며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때론 야망에 눈이 뒤집혀 현실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확실하게 소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씨가 숲 전체를 활활 태워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소녀와 세실리아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리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휘청 복도를 걸었다. 방에 가서 몸이라도 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야….”

 다정하고 온화한 음색. 로트님이었다. 

“어디 아픈 게냐?”

“아닙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나는 그를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소녀와 N님의 이야기가 끝난다면, 플라즈마단도 어떤 식이든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 미래에도 내가 과연 로트님과 함께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주름진 눈으로 가년스런 딸을 달래듯 나를 보아도….

“저번부터 그렇고,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걱정 되는 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N님은 잘 해내실 테니까.”

“네에….”

“어떻게 되든 말이다…. 네가 있으면 잘 될 것 같구나. 여태껏 그래왔듯이 말이야….”

 그리 말하며 그는 내 손을 부여잡았다. 잔잔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대신 나도 모르게 낯선 단어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잘 된다는 게 어떤 거죠?”

 그것은 얼어붙은 세상처럼 날이 선 차가움.

“포켓몬의 해방이 잘 되는 일인 건가요?”

“미아야. 무슨 말을….”

“플라즈마단이 바라는 선의 세계라는 것이,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과 포켓몬을 떼어놓는 건가요? 그렇게 해놓고, 이 성을 지을 때처럼 계속 포켓몬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게 올바른 미래인 건가요?”

 로트님의 온화한 얼굴이 경직되어 간다. 

“정말 레지람이 N님을 영웅이라서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레지람은 한 번 하나를 멸망시켰는데 두 번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아요. 어쩌면 그 하얀 용은 파멸의 파트너로 N을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N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르지 않기로 했다. 단 한 번도 N을 세계를 구원할 선지자라고 여긴 적이 없다. 

“N의 마음에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죠? N의 마음이 해방되지 않았는데 그가 어찌 해방을 논할 수 있죠? 전부 거짓투성이야, 전부.”

 힘겹게 로트님의 손을 뿌리쳤다. 로트님은 경악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품에서 자란 것이 무리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돌연변이 새끼라는 것을. 개치스의 얄팍한 술수도 파악하지 못하는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그의 주름이 한층 깊어지고, 시선은 어지럽게 흩어진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에 후회는 없었다. 로트님을 실망시켰어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은 예전보다 더 명확한 박자로 울리고 있었다. 

 결국 로트님은 나에게 당분간 근신 처분을 내렸다. 나는 독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소녀와 N의 이야기가 끝난다면, 플라즈마단도 어떤 식이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세실리아도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맞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예전의 나인채로 머물 수 없었다. 해방도 꿈도 이상도 그 무엇도 없는 이곳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로 머물 수 없었다. 쿵쿵, 심장이 세찬 말발굽 소리처럼 전신을 울렸다.


 소녀가 성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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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5. 세실리아


며칠 지나지 않아 소녀가 다크 스톤을 입수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침내 소녀가 챔피언 로드로 향하게 되자, 성은 상당히 분주해졌다. 다크 트리니티에게 다크 스톤을 빼앗도록 시키면 될 것을, 굳이 N님은 소녀와 일대일로 결판을 짓기를 원했다. 어줍은 정의심과 비껴간 올곧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어차피 N님은 내세우기 좋은 깃발일 뿐, 플라즈마단의 열쇠는 개치스님이 쥐고 있었다. N님을 키운 것도, 해방이라는 환상을 덧씌운 것도, 플라즈마단을 조직한 것도 개치스님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를 거둬준 로트님은 휘장만 찬란한 플라즈마단의 썩어 문드러진 속살을 모르는 천진한 사람이라는 것도…플라즈마단에서 오랜 기간 있었던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참 밖을 떠돌던 세실리아가 돌연 성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깜깜한 그늘이 깔린 방 안에서 그녀는 단복을 벗고 말끔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낯빛은 어두웠지만 몸새가 정갈했다.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미련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새하얀 시트 위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앉은 그녀는 감감한 그늘 속에서도 찬연했다. 

 또렷한 눈망울의 그녀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 날에 대해 이야기 해줄게.”


 나에게는 전해야겠다고, 그렇게 덧붙이며 세실리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꽤나 먼 옛날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어둔 밤, 나는 숲으로 도망쳤어.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였지.

 나는 미아처럼 고아였어. 다른 점이라면, 나는 고아원에서 자라지 않고 먼 친척의 손에서 자랐다는 거야.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가까운 친척도 이웃도 남아있질 않았는데…그러다 어찌어찌 연락이 닿은 먼 친척이 있는 빌리지 브릿지로 가게 된 거지. 

 먼 친척은 악기를 만드는 것이 업이었던 중년 사내였어. 서글서글한 외모에 아담한 체격을 가진 그는 어릴 적 포켓몬을 데리고 여행도 했더래. 그는 외모만치나 마음도 너그러워, 그다지 연락도 없었던 먼 친척의 아이를 맡아서 키울 결심을 세운 거야. 나를 업어온 그는 작업장에서 한나절 내내 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어,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었지. 때때로 유년시절의 경험을 살려 어린 조카에게 포켓몬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어. 그밖에 수많은 맛난 음식과 재미난 장난감들, 즐거운 악기들을 그는 내게 선물했단다. 

 그가 건네준 것 중에 내 마음에 유독 들었던 것은 작은 하늘색 하모니카였어. 앙증맞은 꼬지보리가 새겨진 하모니카는 내 작은 입술이 닿으면 잘랑잘랑 살가운 울음을 냈지. 나는 사내에게서 배운 곡조를 하모니카로 읊으며, 가느다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춤을 추곤 했더랬지. 그러면 사내는 방글방글 함박웃음을 흘리며 쿵닥쿵닥 손발로 박수를 쳐줬어.

 비록 일찍 부모를 여의였지만 난 행복했어. 행복이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내게로 돌아온 것 같았달까. 사내는 자신이 가진 감성과 지식을 전부, 내게 내어주었어. 마치 제 딸인 것 마냥, 어르고 아끼기를 마다하질 않았지. 나도 그를 아비처럼 따랐고. 그 옆에서 언젠가 크면 구름시티로 가서 춤과 노래를 배워보고 싶다는 꿈도 키웠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전부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데 인간의 생이란 예기치 못한 파도에 송두리째 뒤집히곤 하잖니?

 어느 밤, 그가 술에 잔뜩 절어 귀가했어. 거실에서 악보를 읽고 있던 난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대번 알았지. …평소의 사람 좋은 웃음기는 사라지고, 썩은 생선처럼 눈빛이 흐릿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내가 몸을 움츠리자,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내 어깨를 왁살스레 잡아챘어. 그리고, 그리고는… 눈이 뒤집힌 황소처럼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 머리, 팔, 어깨, 다리…. 우악스런 손길이 점점 내 몸을 감치자, 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책으로 그의 머리를 세게 쳤고…그가 잠시 머리를 붙잡고 멈춰선 사이, 재빨리 몸을 굽히고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어. 날 찾는 사내의 목소리가 천둥번개처럼 쩌렁쩌렁 뒤를 쫓아왔어. 그럴수록 맨발로 마구 달음박질쳤어.

 얼마나 내달렸을까, 난 이름 모를 풀숲에 다다랐지. 헉헉 차오르는 숨을 여미지도 못하고 근처 나무에 아무렇게나 기댔는데, 어느새 발밑까지 거무죽죽한 어둠이 깔려있었어. 종알종알 귀뚤뚜기만이 시끄럽게 울어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어. 연못에서 잉어킹이 뻐끔하고 입술을 벌리고 튀어 오르자, 그제야 정신이 난 거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고…. 이제는 더 이상 마음도 몸도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러자 투명한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어. 이젠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이 없다…. 세상은 여리고 어린 소녀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해. 다정함을 주고 또 버림을 주다니. 난 고작 열 살이었는걸. 시야를 가린 촉촉한 눈물을 닦아내자 까무룩한 어둠 밖에 보이질 않고, 속은 더 아득하고 처연해, 끝도 없고 색도 없는 구멍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짙은 검정뿐인 시야에,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스며들었어.

 눈물을 흘린 탓에 헛것을 본 걸까? 그런데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어른거리는 거야. 헛것이 아니었던 거지. 

 그것은 포켓몬이었어. 부슬부슬 하얀 털과 불꽃너울 같은 주홍색 날개를 두른 포켓몬. 검은 얼굴 한가운데 박힌 날이 선 눈은 전기돌처럼 시퍼렇게 빛이 났지만, 어쩐지 상냥한 눈빛을 가진 포켓몬. 난 처음 보는 포켓몬이었어. 이렇게 크고 화려한 포켓몬은 본 적이 없었거든. 더군다나 선녀처럼 하늘거리는 빛을 감고 있다니…. 그 포켓몬은 예전에 너에게 말했던, 그래. 불카모스였어.

 포켓몬은 춤을 추기 시작했어. 먹색으로 물든 밤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몸이 달처럼 떠올라 작은 별빛을 이끌었고. 깃털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다가 불새처럼 강직하게 날아올랐지. 그러다 이내 빙그르르, 나긋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촛불처럼 타오르는 날개를 펄럭였어. 불카모스의 보드라운 몸짓은 내 눈앞에서, 그러니까 나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어.

 호젓한 하늘 아래 일렁이는 춤에 넋을 잃고 말았어. 이토록 아름다운 춤사위라니, TV의 포켓몬 뮤지컬에서도 본 바가 없었으니까. 내 두 눈의 눈물은 어느새 마르고, 초롱초롱한 별빛이 박혀 있었지. 그래. 그 춤을 볼 때만큼은 내 본래의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무구하고 티 없는 그것들을….

 바스락. 하고 등 뒤에서 나무가 밟히는 소리가 났어.

 포켓몬은 춤을 멈추고, 난 뒤를 돌아보았어. 그 자리에는 초목과 같이 소년이 서 있었단다. 무던해 보이지만 경직된 얼굴의 소년…. 그는 하얀 몸을 이끌고 사뿐히 걸어오며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넸어. 

 그 모습을 시야에 담고, 그 목소리를 두 귀로 확인하자 내 심장이 거인에게 밟힌 듯 쿵쿵 내려앉았어. 큼지막한 발자국이 가슴에 찍히고 멍이 들고, 멍이 든 자리에는 미열이 나고 투닥대는 화음이 울렸고….

 응, 그래. 이건 내가 N님을 만난 날의 이야기야.


****


이야기를 마치고 세실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가 겪었던 일들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가 묻지 못해 알지 못했던, 묵혀두었던 그녀의 설움과 맞닥뜨리자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그녀에게 섭섭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세실리아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이젠 그 먼 친척의 소재조차 모른다고. 중요한 것은 현재라고….

“그래도 나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소녀의 얼굴을 보고 온 날, 계단 위에서 눈물을 쏟던 세실리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성으로 돌아오고, 오래된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고, 응어리진 것을 모두 풀어내면…그녀는 평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세실리아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덤덤했다.

“나아졌다라…. 그저 인정했을 뿐이야. N님에게 해방이 온다면…그걸 누군가 줄 수만 있다면. 그 주체가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그걸로, 괜찮은 거야?”

 나는 그녀가 나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녀가 나아지기 위해서 아직 남은 것들이 많았다. 

“으응.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아. 고마워, 미아.”

 세실리아는 창 너머의 머나먼 하늘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는 N님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 날의 꿈결 같던 불꽃춤을 떠올리는 걸까. 

 어느새 하늘에서 푸른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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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4. 영웅의 그림자


두 영웅이 있었다. 

 두 영웅은 같은 시각,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두 영웅은 위대한 드래곤 포켓몬과 힘을 합쳐 하나를 건국했다. 

 하나에서 둘로 나뉜 형제의 몸처럼, 두 사람의 의견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형은 진실을 원했고 동생은 이상을 쫒았다. 형제의 마음이 갈라지듯 드래곤 포켓몬도 몸을 둘로 나누었다. 

 진실을 찾아 새로운 선의 세계로 이끄는 하얀 용과 이상을 찾아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이끄는 검은 용. 

 두 마리의 용은 각각 형과 동생의 편이 되어 전쟁을 시작했다. 하얀 용이 내뿜는 거친 화염의 불길이 산천초목을 불태웠다. 검은 용이 내리친 푸른 번개의 칼날이 창천과 대지를 갈랐다. 

 두 형제가 세운 나라가 두 형제로 인해 멸해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화해를 청하려 했다. 그러나 형제의 아들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온 누리는 격정과 불안에 휘말렸다….

 결국 두 드래곤 포켓몬은 번개와 불꽃으로 하나를 순식간에 멸망시키고 사라졌다.


하나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 이야기다. 한낱 구닥다리 옛말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라이트 스톤과 다크 스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우리- 플라즈마단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모두들 진실을 추구하고 선의 세계를 이룩할 하얀 용이야말로 N님에게 어울린다고 믿고 있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전설이 진짜라면, 전설 속 포켓몬은 이미 한 번 세상을 쇠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존재다. 그런 존재가 두 번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 두 마리의 용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어지럽고 타락한 지금의 세계를 본다면…. 그렇다면 같은 결정을 내릴 지도 모른다. 이토록 추하고 더러워진 세상이라면 차라리 부수는 게 낫다고, 그렇게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


용나선탑에 투박한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N님은 연녹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겉모습은 마치 새와 같이 부드럽고 유연한, 하얀 용. 레지라무는 N님 앞에 나긋하게 고개를 숙였다. 용은 마치 왕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처럼 경건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얀 용은 N님을 자신의 영웅으로 택했다.

 세실리아는 내 생각만큼 들떠있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하듯 서 있었으나, 입가에는 약간의 웃음기도 없었다.

 귓가에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워커가 땅에 부딪히는 익숙한 소리. 나는 시선을 돌렸다.

 소녀가 차오르는 숨을 겨우 참아내고 N님의 앞에 서 있었다. 세실리아의 얼굴이 돌연 사색이 되었다. 반면 N님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 그의 눈에 도대체 무엇이 보였기에, 저 소녀가 얼마나 특별하기에, 그렇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약속을 건네는 것일까.

 자신이 한발 늦은 것을 깨달은 소녀는 이를 악 물고 외쳤다. 그녀가 꿈꾸는 이상을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분명 행복할 거라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새로운 희망은 찾아올 거라고. 그렇기에 그를 막아낼 것이라고. 

 그리고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소녀를 바로 보지 않고 등을 졌다. 소녀는 목소리마저 세실리아와 비슷했지만 소녀의 언동은 세실리아와 닮은 바가 하나도 없었다. 소녀의 얼굴은 세실리아와 빼다 박았지만, N님은 세실리아가 아닌 소녀만을 눈과 귀에 담았다.

 하얀 용이 푸르르 새빨간 화염을 뱉었다. N님은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소녀는 담담하게 그의 뒷모습을 구시했다. 그녀의 눈에서 타오르는 결의는 사뭇 무겁고 단연했다. 그리고 나는 세실리아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오래된 전설처럼 퇴색한 계단…. 세실리아의 몸은 마른 솜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솜을 이고 걷는 나귀처럼 묵묵히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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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3. 조우 


전기돌들이 파삭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거슬렸다. 전기돌 동굴은 전류가 풍부해 전기 타입 포켓몬에게 아주 좋은 서식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그다지 내 흥미를 돋우지 못했다. 발밑아래 파쪼옥 몇 마리가 쪼물쪼물 기어갔다. 몇몇 여자단원들은 귀엽다며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런 작고 귀엽다고 여겨지는 포켓몬조차도 내게는 그저 귀찮은 장애물일 뿐이었다. 

 오랜만의 임무였고,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그게 하필 칙칙한 동굴 안이라 해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산보 따위가 아니었다.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한다. 소녀의 얼굴을. 그녀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N님은 그녀가 전기돌 동굴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얼 원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세운 보르쥐 마냥 동굴 안을 살폈다. 천장까지 푸른 전류가 번져 번쩍거렸다. 분명 뇌문시티에서 N님과 소녀가 얘기를 나눴다고 들었다. 그것도 단둘이, 관람차 안에서. 그래놓고 또 그녀에게서 뭘 더 알아내고 싶은 걸까? 

 출동하기 전, 나는 N님에게 물었다. “그 애는 뭔가 특별해요?”라고. N님은 대답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애는 많이 특별해”라고.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포켓몬에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오는 걸 보니 가까이에 있던 단원이 누군가와 배틀을 시작한 것 같았다. 

 분명 그 소녀일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동료의 외마디 절규가 들려오고, 마침내 소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코너를 돌아오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그녀가 내가 잘 아는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에.


“세실리아…?”


 나는 무심코 그렇게 부르고 말았다.


배틀은 싱거웠다. 그 소녀 입장에서는 그랬을 거란 얘기다. 나는 고작 보르쥐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도무지 배틀에 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 친우의 얼굴을 가진 소녀와 승부를 하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을까. 보르쥐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배틀 도중에도 망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 저리 뜯어봐도 그녀는 영락없이 세실리아의 닮은꼴이었다. 밤색 머릿결, 사랑스런 눈썹, 잡티 없는 피부에 자신감이 담긴 입매까지.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 소녀에게는 세실리아에게는 없는, 갓 피어난 봄꽃에서 흘러나오는 활력이 느껴졌다. 그녀에 비하면 내 친구는 마치 오래전에 시들어 잎을 다 떨구어버린 꽃 무덤 같았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배틀은 삽시간에 종료되었다. 자신의 포켓몬을 볼에 넣으며 소녀는 그리 중얼거렸다.


“배틀에 이렇게 의욕이 없는 플라즈마단은 처음 봐.”


 마치 진기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배틀하면 보르쥐도 기뻐하지 않을 거야.”


“…상관없어. 어차피 포켓몬은 도구니까.”


 내 한 마디에 소녀의 눈매가 매섭게 변한다. 


“포켓몬을 해방시키는 게 플라즈마단의 이념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무래도 화를 돋운 모양이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소녀와는 달리, 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맙소사. 그럼 왜 플라즈마단에 있는 건데?”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지.”


“한번도, 도구로 이용당하는 보르쥐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없어.”


 언뜻 소녀의 눈빛이 간절해진다. 아, 이건 또 무엇일까.


“정말…단 한 번도 없어?”


“없어. 없다니까.”


 가까이 다가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가 물어왔다. 나는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재차 ‘없다’고 답했다. 


 이윽고 소녀의 커다란 두 눈에 슬픔이 맴돌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아이는…. 우리에게 없는 표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난 그만 가 봐야겠어.”


 모자를 고쳐 쓰는 그녀를 묵묵히 주시했다. 분명 외양은 연약해 보이는 소녀인데, 단호한 기백이 흘러넘친다.


“나는 플라즈마단을 무찌르고…N을 막을 거니까. 그러니까 모든 걸 끝내는 그 순간이 오면….”


 걸어가다 나를 슬쩍 돌아본다. 가느다란 옆선조차도 세실리아와 똑 닮았다. 하지만 닮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네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녀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반짝이는 전기돌에 비친 그녀의 푸른 그림자가 점점 크고 길어졌다. 그녀가 지나간 길 뒤로 전기돌들이 따닥따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파쪼옥들이 곰실곰실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꼭 다문 손아귀에 축축하게 땀이 차올랐다. 알 수 없는 허무함과 중압감이 실타래처럼 가슴 언저리에서 뒤엉켰다. 


 그리고 세실리아가 저 소녀를 보고도 울지 않은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임무를 마치고 성으로 복귀한 뒤, 나는 어떤 낯으로 세실리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세실리아는 N님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라 오그라든 낙엽 같았다. 그녀의 맥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떠돌았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탄식하듯 내뱉었다.


“봤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는 미동도 없었지만, 홀로 붕 뜬 달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너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너무 닮았더라.”


 내 말에 세실리아는 취한 듯 읊조렸다.


“그래? 나는 처음에 거울을 보는 줄 알았어.”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 농담. 


“세실리아, 혹시…. 그 아이, 너와 관련 있는 건 아니지?”


“웃기는 이야기네. 알잖니, 내 가족사정. 잃어버린 여동생이라거나, 그런 3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냐.”


“그럼….”


 3류 드라마처럼, 세실리아에게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내 이야기를 그저 흘려버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아이의 가정환경에 대해 조사했어. 하지만 나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어.”


 세실리아는 그 소녀의 가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가 사는 도시도, 그녀의 부모님도, 친구들도. 어느 하나 세실리아와 관련되는 요소는 없었다. 완벽한 타인인 것이다.


“그저, 겉모습이 비슷할 뿐.”


 그것이 ‘그저’라는 말로 형용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을 이어가는 세실리아의 낯빛이 점점 납빛으로 퇴색해갔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보는 N님의 얼굴도 보았니?”


“으응.”


 나는 대답 외엔 할 말이 전무했다.


“그 아이에 대해 말하는 N님의 목소리도 들어봤니?”


“으응.”


 세실리아는 우는 걸까?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난 단 한 번도 세실리아가 우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만큼 단단하고 묵직한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단단하고 묵직했던 세실리아의 얼굴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어떡하지? 그 아이가…. N님의 소중한 사람이 되면…. 난 어떡하지?”


“세실리아….”


“미아, 말해줘. 난 어떻게 해야 해?”



결국 그 날, 세실리아는 울었다. 


 언제나 단단하고 묵직하던 그녀가. 늘 정갈하고 정돈되어있던 그녀가. 낡고 구겨진 이불처럼 온 몸을 돌돌 감은 채, 주체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단복으로 닦아내며 울음을 토했다. 나는 멀찍이 서서 그저 지켜보았다. 괜찮을 거야. 그런 흔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나는 친우에게 따뜻한 말 하나 전하지 못하는 얼간이었다.

 

*****


며칠 뒤, 로트님이 나를 찾으셨다.


“곧 때가 올 거다.”


 근엄한 목소리였다. 로트님은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기대에 차 있었다.


“N님이 왕이 되고, 모든 포켓몬이 해방되는 날…. 그 때가 올 거다. 그 때가 오면, 세계는 비로소 평화로워지겠지.”


 수년이 넘게 귀에 닳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나는 여전히 뜻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N님이 설사 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딱히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포켓몬만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도 각자의 고통과 상념 속에서 해방될 것이다. 미아, 그 날을 기다리렴.”


 로토님의 말에 불현 듯 깨달았다.


 N님의 마음 자체가 평온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까?


 N님에게도 해방이 오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다른 이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미아야, 몸이 안 좋으냐?”


“아니, 아닙니다….”


 나는 제자리에서 주춤댔다. 세실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야.




 내 신체가, 바닷바람을 처음 맞는 가지 여린 나무처럼 불안한 각성에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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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동


태고의 전설처럼 퇴색한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무늬도 없이 희멀건 천정을 응시하며 멀뚱하니 서 있었다. 나는 비번이었고, N님은 외출 중이었다. 딱히 주어진 업무가 없어 하릴없이 복도를 서성였다. 바닥을 보다가 천정을 보다가 그림자를 보다가 멈추어서기를 반복했다. 복도는 빈 집 마냥 인기척도 없었다. 

 오늘 세실리아는 N님을 따라 나섰다. 세실리아나 나와 같이 플라즈마단에서 길러진 고아들은 N님의 최측근에서 머물곤 했다. 더 정확하게는 N님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벽에 기대 그들을 기다리며, 세실리아와 N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세실리아는 이상하다. 그토록 차분한 아이가 N님과 관계된 일이라면 허룽대기 일쑤다. 늘 차가울 정도로 진중한 그녀인데, 불에라도 데인 사람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라니. 납득할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여 있을 때, 마침 세실리아와 N님이 돌아왔다. 

“오셨어요, N님.”

 대충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는 N님의 얼굴이 평소와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아프기라도 한 걸까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실리아의 상태 또한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점이 나간 눈동자로 허공을 뒤지며, 두 손은 달리 붙잡을 게 없다는 듯 단복의 끄트머리를 세차게 쥐고 있었다. 늘 총명한 기운이 도는 그녀인데 이렇게나 넋이 나간 모습은 처음이었다. 

“세실리아, 무슨 일이야?”

“아니…아무 것도.”

 기운 없는 대답과 함께 세실리아는 쓰러지듯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난 낯선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날은, N님이 연설을 하는 개치스님과 함께 넝쿨마을에 갔던 날이었다. 아주 조그만 징후였지만, 그것은…그래. N님을 시작해 우리들의 세상이 뒤집힐 전조였다.


****


 내가 플라즈마단에 들어온 지 몇 달 뒤, 로트님은 내 또래의 여자아이를 데려 오셨다. 밤색 곱슬머리에 동그랗지만 뚝심 있어 보이는 두 눈을 가진 아이였다. 입은 옷도 추레하고 얼굴도 지저분했지만 그 애가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단숨에 알아봤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썹 아래 잠긴 근심과 절망은 결코 읽지 못했다.

 그녀는 내 룸메이트가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또래의 여자아이와 지내게 되어 사뭇 설렜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주고, 받고 떠들다가 시답잖은 농담에 자지러질 듯이 웃는 여느 소녀들의 대화 같은 걸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실리아와 같은 방을 쓴지 몇 주가 지나도, 별달리 관계에 진전은 없었다. 먼저 씻을게, 불 끌게, 창문 열게, 이런 것들 외에 불필요한 대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실망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다지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밥이나 얻어먹고 침대에서 잘 수 있는 생활에 다시 감사하는 마음을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달이 뽐내듯 꽃처럼 피어나던 밤이었다. 유난히 밝은 달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고아원을 박차고 나오던 밤이 떠올랐다. 근거 없는 희망에 가득 찼던 때를 생각하니 당시 귀뚤뚜기의 울음소리만이 생동하게 귀에서 울려댔다. 

“자니?”

 세실리아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난 누운 채로 대답했다.

“아니. 잠이 안 와.”

“달빛이 너무 환해서 그래. 나, 예전에도 이런 밤이 있었어.”

“그래? 나돈데.”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고 각자 위에 있는 천장에만 눈을 꽂은 채 이야기했다.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그녀답게 잔잔했다. 그럼에도 방안을 살며시 진동시키는 울림이 있었다.

“그렇구나. 있잖니, 넌 불꽃춤을 본 적이 있니?”

“아아니. 그거 포켓몬의 기술 아냐?”

“으응. 본 적 없어?”

“없어. 없다고 했잖아. 그게 대체 어떤데?”

 세실리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불꽃춤은 포켓몬의 능력을 올려주는 기술이야. 내가 그걸 본 건 이렇게 달빛이 햇살처럼 쨍쨍하게 비치는 밤이었어. 나는 혼자 풀숲을 달리고 있었거든.”

“어둔 밤에 왜 혼자 숲 속에 있었어?”

 내 물음에 세실리아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말에 답은 않고 그냥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근데 본 거야. 새까만 숲에서 귀뚤뚜기 울음소리밖엔 안 들렸는데 뭔가 환하게 번쩍이는 게 보였어. 불꽃춤이었던 거야. 불카모스의.”

 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녀가 흥분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벅차올랐던 당시의 심정을 대변하듯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불카모스라는 포켓몬을 알지 못했다. 이번엔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쏘아붙이듯 말했다.

“너, 불카모스가 뭔지 모르는구나?”

“…어.”

 자신 없는 내 대답에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고조되었다.

“불카모스는 활화르바의 진화형이야! 벌레랑 불꽃 타입을 동시에 갖고 있지. 모르는 것도 이해해. 별로 흔치 않거든.”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는 그녀의 억양에 왠지 내 무지에 대한 무시가 실려 있는 것 같아 약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청 멋있었어. 달에서 나오는 빛이랑 불카모스 몸에서 나오는 빛이랑 어우러져서, 와, 치렁치렁 별빛으로 수놓은 작은 전구들을 달고 춤추는 것 같았어. 물에 잠기듯 부드럽다가도 폭포를 오르듯 힘 있게 차오르기도 했지. 그런 것 처음 봤어. 죽어서 별님 달님 곁으로 간 줄 알았다니깐.”

“불카모스는 어떻게 됐어?”

“그게, 그렇게 춤을 추다가 사라져 버렸어. 사라져 버렸어.”

 ‘사라져 버렸다’고 연달아 말하는 음성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천장만을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도 어느새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정말 멋졌는데, 그 순간.”

 달빛을 받아 빛나는 세실리아의 얼굴은 경이로움을 읊는 시인과 같았다. 아마 그 때가 처음 세실리아와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했던 날인 것 같다. 

 이후 세실리아와 나는 가까워졌다. 내가 원했던 바와 같이 사춘기 소녀들처럼, 시시콜콜한 얘기로 재잘거리고 웃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전과 같은 거리감은 사라져갔다. 그녀가 손짓을 하면 나는 따라갔으며 내가 손을 흔들면 그녀는 나에게로 왔다. N님의 방 앞에서 말없이 서로 그림자를 밟으며 놀기도 하고 마냥 서로의 손바닥을 보며 손금을 봐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왜 세실리아가 홀로 밤의 숲을 거닐었는지 묻지 않았다. 세실리아에게 내 과거를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진정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나는 불카모스에 대해서도, 불꽃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더욱이 불꽃춤이 궁극에 달한 불카모스만이 쓸 수 있는 이상(理想)의 기술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 화려하게 불타는 춤사위도, 번쩍이는 푸른 눈빛도, 나로서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묻지 않았다. 다만, 가끔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는 새까만 그늘과 N님을 볼 때면 다시금 화사해지는 그녀의 표정이- 그 때 일어났던 무언가를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


넝쿨마을에 다녀온 뒤로 N님은 외출이 잦아졌다. 나는 그저 플라즈마단의 활동을 위해서려니 하고 여겼다. 그런데 N님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N님이 관심을 두는 아이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초기에는 소문이 너무 두루뭉술해서 그 아이가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소문이 구체적으로 변하자, 그제야 그 아이가 열서너 살 먹은 소녀라는 알게 되었다. N님과 함께 나갔을 때 혹은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그녀와 맞닥뜨렸던 단원들이 자세한 정보를 일러준 것이다.

 듣자하니 그 소녀는 훤칠하고 팔다리는 쭉쭉 뻗었는데, 춥지도 않은지 민소매 상의에 핫팬츠를 입고 다닌다고 했다. 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풍성한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캡 모자를 눌러쓴 것이 특징인 것 같았다. N님은 성을 나갈 때마다 그녀의 행적을 뒤쫓았다. 단원들이 직접 물어보니 “그녀를 시험하고 알아내고 싶은 게 있어.”라고 말하셨다고 한다. N님이 그녀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N님이 없을 때, 단원들은 N님은 예쁘장한 그 소녀에게 홀린 거라며 쑥덕거렸다. 

 나는 그런 소문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물론 소녀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지는 않았겠지만, N님이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부분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녀를 본 단원들은 전부 그녀의 아리따운 외모에 N님이 혹했다고 떠들어대는데,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기론 조직의 심벌과도 같은 사랑과 평화의 여신도 빼어난 미인들이다. 가끔 TV를 볼 때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보다도 그녀들이 훨씬 예쁘다. 내 친구, 세실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피부도 하얗고 이목구비도 가지런한 미인상이라 몇몇 남자단원들이 치근덕거린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아름다운 소녀들과 어린 시절부터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N님은 단 한 번도 이성적인 호감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소녀가 예쁘다는 이유로 N님이 홀라당 넘어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연심이라니, 그에게 그런 감성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 분은 일찍이 감성의 성장이 멈췄다. 게다가 머릿속엔, 상처받는 포켓몬들의 해방 혹은 복잡하고 난해한 수식들뿐. 날 때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도록 교육 받았는데, 이제 와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였다.

 그러나 소문이 크기를 부풀리면 부풀릴수록 세실리아의 낯빛은 어두워져갔다. 결국 난 참다못해 그녀에게 말했다.

“죽을 상 그만해. N님이 진짜로 그 애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단순한 호기심이야. 그 분은 순수하잖아.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에 대한 티 없는 호기심일 뿐이라고.”

 다그치듯 말하자 세실리아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찬찬히 들었다. 그 또렷했던 눈망울은 어디 갔는지 흐리멍덩한 검은자위만 둥둥 떠올랐다. 그녀는 낮게 중얼댔다.

“-네가 그 애를 못 봐서 그래.”

 그녀는 뭔가에 정신이 팔린 혼령처럼 말했다. 생기를 잃은 그녀의 한마디는, 한 바퀴 돌아 날아오는 바람처럼 내 가슴에 꽂히었다.


생소한 감정의 물결을 인지하며 나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눈앞에 N님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N님.”

“응.”

여전히 무미건조한 말투와 음성. 

“다음에 나가실 땐 저도 데려가 주세요. 요즈음 늘 성에만 있었거든요.”

“…그러네. 알았어.”

 손쉽게 승낙을 얻어냈다. 텅 빈 얼굴로 끝없는 복도를 바라보는 그의 옆에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이런 사람이 사랑을 느낄 리가 없다. 이렇게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인형 같은 사람이 감정에 대해 알 리가 없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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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초 서코 등에서 나왔던 BW 기반 회지를 웹공개합니다.

게임 BW기반이라기엔 주인공즈는 많이 나오지 않고... 

가상의 플라즈마 단원들이 주인공인, 거의 3차창작(?)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두 명의 플라즈마 단원 소녀들의 눈을 통해 BW의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 이후 8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는데, 천천히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0. 프롤로그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었다면, 다른 이의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었을까?


세실리아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무언가에 애착을 느낀 적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든 포켓몬이든- 그랬다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아끼는 사람과 포켓몬을 떼어놓을 수 있었을까? 


미아. 넌 일생에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니? 포켓몬이나 사람에 정을 붙여 본 적 있니? 나는 없어, 우리는 없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플라즈마단일 수 있는 거야. 이건 포켓몬의 해방을 위한 일이에요, 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서 남의 포켓몬을 빼앗고 이용해 버릴 수 있는 거야.  


'해방'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세실리아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어두운 복도의 희미한 조명에 비쳐 번득였다.


 세실리아, 나의 아름다운 친구 세실리아는 그리 말했더랬다. 루나톤 같은 달이 어슴푸레 빛을 흘리던 밤, 우린 N님 방 앞에 서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플라즈마단이라기엔 너무도 불온한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칠현인님들이나 개치스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숙청당할 만큼 위험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솔직히 털어놓은 것일 테다. 우리는 이 비정상적이고 불분명한 조직, 플라즈마단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기에. 


 이곳, 플라즈마단에서는 N님과 개치스님, 그리고 칠현인님들을 제외한 모든 단원들은 같은 복장과 같은 머리를 한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임무를 나가도, 서로의 사정이나 출신 따위는 모른다.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게 규칙이다. 우리들은 누추한 지난날들을 허물어 버리고, 성역의 기사로 다시 태어났다- 고 여겨졌다. 여겨져야 했다. 우리들이 할 일은 옷에는 플라즈마단의 마크를 달고, 손에는 플라즈마단의 깃발을 들고, 싸우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서 빼앗은 포켓몬을 학대하며, 해방을 위해 N님을 위해 우리들의 왕을 위해.

 난 답도 없이, 그저 오래된 과실을 삼킨 듯 씁쓸하게 웃었다. 허나 그녀는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대신 열이 튀는 눈으로 내게 물어왔다. 


 미아. 내게 해방이란 뭐니?




1. 미아


해방. 매일 백 번도 더 들었어도, 마치 오래된 동화 속 어구처럼 실감이 안 나는 말이었다. 그건 내 삶이 그런 꿈결 같은 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단어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존. 사는 것이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생존의 문제에 비하면 해방은 몽상이고 환상이었다.


나는 고아였다. 생년월일도 모른다. 열 살 때까지는 고아원에서 지냈다. 원장은 무심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어서, 무명의 아이들에게 알파벳 순서대로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따다 붙이곤 했다. 내가 미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경위는 그만큼 하찮고 별 볼일 없었다. 게다가 고아원은 정부 지원금을 다 뒤로 빼내는 바람에, 시설 살림살이에는 신경도 쓰지 않아 건물의 간판도 다 떨어져 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깨봉이도 입에 안 댈 것 같은 꿀꿀이죽을 삼시 세끼 먹었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냄새나고 축축한 침대에서 몸을 구부리고 잠을 자야 했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내 이름은 미아고, 다른 어여쁜 이름을 붙여줄 만한 부모도 없었다. 나는 비린내가 날 것처럼 바짝 마른 미아고, 내가 숨을 편안히 쉬고 몸을 온전히 맡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까칠한 검은 머리에 주근깨가 난 미아고, 남들의 눈에 띌 만큼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다.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처지와 현실을, 그리고 이곳에 있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달이 유난히 밝던 어느 여름 밤, 나는 고아원에서 도망 나왔다. 


 포켓몬도 키우고 아끼는 세상인데 나 같은 어린 아이 하나 돌봐줄 선인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른 도시나 마을에 나의 불쌍한 행색을 보고 동정심이 동해, 자신의 따뜻한 집으로 데려갈 어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근거 없는 희망에 부풀어 달빛 아래를 맨발로 마구 달렸다. 귀뚤뚜기의 울음소리가 발밑의 풀을 타고 맥박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상에게 말라깽이 고아의 희망이란 길바닥에 들러붙은 껌 딱지만도 못한 것이었다. 꿈꾸던 선인과는 마주치지 못한 채, 난 정처 없이 하나지방을 떠돌았다. 큰 도시를 가도 작은 마을을 가도 상황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켓몬에 예쁘장한 액세서리를 달아줄 줄은 알았어도, 길거리의 거지 꼬마에게 빵조각 하나 던져 주는 법은 몰랐다. 


 기력이 다해 울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에게 또 다른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나 같은 부류에겐 희망조차 사치였다. 밤바람을 이불 삼아 잠들고 굶주림을 벗 삼아 깨는 것, 그게 나에게 주어진 일생인 것이다. 


 때로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때로는 구걸을 하며 떠돌다, 나는 산로마을에 당도했다. 산로 마을은 땅위의 열기만으로도 온 몸이 구워지는 것처럼 뜨거운 곳이었다. 그곳은 유난히 사람이 적었고, 그래서인지 가게도 집도 드물었다. 이렇게 살림이 팍팍해 보이는 동네는 인심도 쓰다. 그래서인지 구걸을 하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마을 안에 곱게 머물고 있었으면 될 것을, 오래 굶주렸던 탓에 나는 풀숲에서 나무열매를 뒤지기로 결심했다. 이 세계의 상식이지만, 포켓몬 없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야생 포켓몬의 습격을 받았을 때, 방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결정은 너무나도 한심했다. 결국 그 선택이 내 생에 새로운 기회를 주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뒤진 풀숲은 하필 무장조의 서식지였다. 그 녀석들에게 들키자 나는 단숨에 마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무장조들은 귀가 깨질 것 같은 금속음을 내며 내 뒤를 추격했다. 며칠 굶은 아이의 발재간으로는 비행 포켓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제 풀에 지쳐 흙 속에 풀썩 쓰러졌다. 무장조들의 날카로운 부리가 내 몸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살이라는 거죽을 가르고 마구잡이로 사지육신을 헤집었다. 온 몸이 피와 상처로 벌겋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죽는다, 라는 말이 쉽사리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건 내 삶이 언제나 죽고 사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어도 별 아쉬울 것 없는 하찮은 삶이었기 때문일까. 


 살이 벗겨지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몸을 말 줄 밖에 모르는 벌레처럼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 때, 무장조들의 금속 날개가 부딪히는 굉음 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화염방사. 한순간 뜨거운 불꽃이 내 등 위에서 타올랐다 사라졌다. 무장조들은 힘없이 쓰러지거나 볼품없는 날갯짓으로 도망을 쳤다.


“괜찮니?”


 온화한 음성이 나를 불렀으나, 온몸은 물론 목 주변에도 상처를 입어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가엾게도…어린 아이가 홀로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부모님은?"


 그가 손을 내밀어 쓰러져 가는 내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했다. 희끄무레한 수염에 머리마저 백발인 노인은 고지식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의 뒤에는 풍채가 든든한 앤티골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살포시 안아 올렸다. 


"안 되겠다. 일단은 병원에 가자꾸나."


 그의 이름을 물을 틈도, 나의 이름을 말할 틈도 없이 나는 기절해 버렸다. 이후 그는 나를 간호해 줬고, 있을 곳도 마련해 준 은인이 되었다. 

 노인은 바로 로트. 플라즈마단의 칠현인 중 하나였다. 


로트님은 나에게 플라즈마단이라는 보금자리를 주셨다. N님이 새로 만드실 낙원에의 작업에 협조하고 포켓몬의 해방에 동의한다면, 얼마든지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로트님은 항상 N님과 포켓몬의 해방에 대해 말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혈혈단신 고아였고 플라즈마단 만이 내가 속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조직을 아우르는 비정상적인 이상과 충성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곳을 나가면 난 또다시 길거리를 헤매는 거지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해방이란 단어를 이해 못하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N님을 숭상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나에게 해방이란 생존, 그 자체였다. 생존에 성공한다면 그것이 해방이고 실패한다면 곧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실리아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로 난 세실리아에게 되물었다. 


 네게 해방은 뭔데?


 그녀는 마침내 웃으며 말했다. 


 -나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야.


 고개를 갸웃했다. 세실리아의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는 식으로 열변을 토해내더니, 갑자기 자신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라니. 똑똑하고 논리력 있는 세실리아는 가끔 이런 식으로 나를 사념의 곤경 속에 빠뜨리곤 했다.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자, 세실리아는 흐드러지게 지는 해당화처럼 샐쭉 웃었다. 연한 주홍빛이 파스텔처럼 그녀의 양 볼에 번져갔다. 아아, 그녀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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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