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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유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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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신이 총선 전체 9위하는 이야기

 

 

나는 괜찮아. 그도 그럴게, 하트는 아이돌인걸. 그 말을 수십 번이고 되뇌며 여기까지 왔다. 연습생 시절부터 일 년, 이 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한두 살 나이만 먹어가고. 데뷔가 결정되고도 제대로 CD 한 장 못 내봤지만. 그래도 하트는 아이돌이니까. 모두가 동경하는, 반짝이는 아이돌이니까-. 자기 최면처럼 수 없이 뇌까리며 끈질기게 버텨냈다.

 

살짝 얼린 맥주 캔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찌릿하게 시리다. 기분 같아선 한 그릇 가득한 오꼬노미야끼나 후라이드 치킨이라던지, 온갖 종류의 튀김을 안주로 삼고 싶다. 대신 땅콩 몇 개를 까서 입 안에 털어 넣는다. 나름 체중관리라는 사명이 있다. 마트에서 파격 세일을 할 때 산 땅콩은 밍밍하고 식감도 텁텁했다. 아마 질도 맛도 좋지 않아서 재고가 쌓이고 쌓인 것을, 파격 세일을 해서라도 처리해버리려던 거겠지. 하트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곤 이정도 뿐이야. 싸구려 맥주와 맛없는 땅콩 안주. 이마저도 순간일 뿐이지만. 

 

하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 척박하고 살벌한 아이돌 세계에서. 나는 왠지버텨냈다는 말이 어울린다. 스스로는 제법 귀여운 외모라고 여기지만- 어리지도 않고. 공을 들여 만들어낸 컨셉도 그다지 먹히지 않는 것 같고. 그럼에도 지금까지 버텨낸 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아이돌이 정말 좋아서-였다.

 

그렇게 몇 년을 버텼더라? 짧고도 긴 세월이다. 강산이 변하기엔 절반이 부족하지만,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어버리는 시간. 하트는 그동안 뭘 이뤘을까? 유일한 기회라고 할 수 있는 총선은, 번번이 실패였다. 늘 순위권 밖. 200에 가까운 숫자는 매번 배열만 달라질 뿐, 세 자리라는 점은 변하질 않았다. 하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꿈은 이루었지만, 그 다음이 더 괴로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빛나지 못하는 아이돌이라면, 아이돌로서 의미가 있는 걸까?

 

어느새 맥주 한 캔을 다 비웠다. 땅콩 껍질 부스러기를 휴지통에 아무렇게나 버렸다. 먹자마자 바로 잘 수는 없으니, 일단 샤워라도 할까. 제대로 클렌징을 하고 얼굴에 팩도 하고…. 스트레칭도 해야 겠다. 불면은 피부미용의 최대 악이다.

 

의미가 없더라도, 하트는 버텨야 해. 그게 과거의 나와 한 약속이니까.

 

장마철 눅눅한 습기가 밴 시트 위로 아무렇게나 몸을 뉘었다. 후드득 먼지 쌓인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와 함께 잠이 쏟아졌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기를. 의미 없는 주문처럼 마음속에 소원을 되새기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

 

미리 메이크업을 하고 오길 잘했다. 역시나, 행사장 대기실은 너무 좁고 변변치 않았다. 마을 변두리에 신장 개업하는 작은 쇼핑몰에 그럴듯한 시설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에요?”

 

상점 주인들과 그들의 지인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무슨 아이돌이야. 아무래도 개업 때 연예인을 부르면 조금이라도 이목을 받지 않을까 싶어 불렀지.”

 

누군지도 모르고 부른 거예요?”

 

그도 그럴게, 365프로에 가장 싼 아이돌을 데려다 달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저 아이가 왔어. 이름이 뭐지- 사토. 성이 사토였는데.”

 

우습게도, 나를 고용한 사람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구지?’ ‘아이돌인가’ ‘전혀 모르겠어’ ‘저런 애가 미시로에 있었다니’. 눈앞에 사람을 두고, 마치 우리 안의 동물을 보는 것 같은 말과 시선들. 온몸에 부스러기가 쏟아진 것처럼 간지러웠다. 괜찮아, 이런 대우는 익숙하다. 있는 힘껏 마이크를 쥐었다. 괜찮아, 그래도 노래할 수 있으니까. 스테이지가 있으니까.

 

그날 나는 노래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목청껏 노래를 했다. 조금 유행이 지난 남의 히트곡을 누구보다 열심히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낯선 눈길로 나를 보았다. ‘누구야?’ ‘슈가하트가 뭐지’ ‘아이돌이라고?’ ‘전혀 모르겠네’. 악의가 없는, 하지만 너무나도 괴로운 말과 시선들을 받아내며. 슈가하트는 스테이지를 마쳤다. 고마워, 고마워요. 눈물 대신 발랄한 무대인사를 건넨다.

 

땀을 닦고 간이 무대에서 내려올 때, 인파 속에서 낯익은 소녀가 보였다. 살짝 웨이브가 진 긴 머리에 초록색 눈망울의 소녀.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빛나지 못하는 아이돌이라면,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자신 있게, , 물론- 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대신 두 눈을 꽉 감았다. 나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 왜냐면 너에게 지금의 내 모습 따위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걸.

 

 

**

어린 시절 내 꿈은 놀이동산의 색색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신짱은 노래하는 목소리가 어여쁘구나. 춤도 잘 추네. 어디서든 기죽지 않고 페이스를 이어 나가는 끈기가 있어.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잡지와 TV, 라디오 등 온갖 미디어를 장식하는 아이돌을 보며 성장했다. 반짝반짝,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빛나는 아이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아이돌이 된다면, 매일매일 놀이동산에 가는 것처럼 모두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거야. 그럴 자격도, 재능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여겼다. 미시로 프로덕션 오디션에 떡하니 합격했을 때 까지만 해도.

 

스무 살. 아이돌로서는 제법 늦은 출발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와시마 미즈키, 키타나리 사나에…. 뒤늦게 떠오른 아이돌들의 이름을 줄줄 읊으며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단언했다. 내 무대를 보는 모두를 매일매일 놀이동산에 가는 기분처럼, 즐겁게 해줄 거야. 그 말을 하자 프로듀서는 싱긋 웃었다. 사토 신씨라면 할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굳게 믿고 나아갔다.

 

프로듀서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왜냐면 그 프로듀서는, 숱한 무명 아이돌을 양지로 끌어올린 능력자였으니까. 잘못이라면 아이돌인 나에게 있었을 테다. 아이돌이라는 명함만 달고, 제대로 된 성과 하나 못 올리는 바보 같은 슈가하트. 인생이 롤러코스터라면, 내 삶은 줄곧 아래로만 치닫고 있었다. 곧 올라가지 않을까? 매일매일 기도했지만.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매일매일 똑같거나, 혹은 더 나빠지거나였다.

 

내 첫 프로듀서는 2년 반 만에 곁을 떠났다. 그도 정말 오래버텼다’. 나와 함께 지하에서 양지로 올라가자고, 두 손 맞붙잡고 수십 번을 맹세했었다. 그 맹세는 싸구려 유리잔처럼 바닥에 닿자마자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난 그가 잘못했다고 여긴 적은 없다. 이후로 프로듀서는 여러 번 바뀌었다. 못 나가는 아이돌을 끌어올려 제대로 된 실적을 쌓겠다고 호기를 부렸던 신입프로듀서도 있었고, 어중간하게 일을 하다 내 곁으로 내쳐진 프로듀서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실패했다. 이윽고 제 입으로 날 맡겠다는 프로듀서는 없어졌다. 명실 공히 미시로의 골칫덩이가 된 것이다.

 

하트, 많이도 내려왔네. 이러다 지하 끝까지 가버릴지도.”

 

속에 담아둔 말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로 튀어나왔다.

 

발끝만 보며 걸으면 넘어져요, 신짱.”

 

나의 시선 끝에 익숙한 발끝이 들어왔다. 새까만 구두를 신은 작은 발.

 

나나 선배.”

 

신짱, 일 다녀온 거에요?”

 

, 선배도?”

 

그랬죠. 오늘은 라디오 토크쇼였는데, 뭔가 잔뜩 곤란한 질문들만 받아버려서- 정말이지 진이 쭈욱 빠지네요, 후하.”

 

방긋 웃어 보이는 나나 선배의 입가에 살짝 경련이 일어났다.

 

나랑 같이 파르페 먹으러 갈래요? 일을 마쳤더니 당분이 부족해서 말예요.”

 

, 이번 달 생활비 빠듯한데요….”

 

물론, 우사밍이 낼 거랍니다. 일에 찌든 우사밍과 놀아주는 답례예요.” 

 

나나선배의 손에 이끌려 아기자기한 스위츠 가게로 들어섰다. 몇몇은우사밍을 알아보고 이름을 외치거나,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슈가하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했다구요. 정말이지, 너무하지 않나요?”

 

앙증맞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하지만 내용은 썩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 그렇네요.”

 

신짱. 내 말 듣고 있어요?”

 

, 물론이죠, 선배.”

 

그럼 내가 무슨 말 했는지 다시 말해볼래요?”

 

-그러니까. 에헷, 최근 체중이 불었단 얘기였나-?”

 

, 그렇죠. 나름 관리를 하는대도 자꾸 몸무게가 늘어…, 가 아니잖아요! 나나는 아까 다녀온 라디오쇼 얘기를 하고 있었다구요-.”

 

볼을 잔뜩 부풀리며 토라진 포즈를 취한다. 어쩜, 모든 행동과 말투가 전부 사랑스러울까. 정말로우사밍별에서 온우사밍처럼.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래요, 곤란했겠네요. 저는, 라디오 일도 그다지 해본 적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배의 얼굴이 굳었다. , 방금은 조금 비꼬는 어조였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무례한 언행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나나선배.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신짱은 그게 문제에요.”

 

, 그러니까, 비꼬려는 뜻은 아니였구-”

 

! 나나선배가 제법 세게 탁자를 쳤다.

 

신짱은 말이죠, 그게 문제에요! 남들과 비교하는 점!”

 

….”

 

내 앞의 아이돌은, 전혀 다른 부분을 파고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우사밍슈가하트를 비교했죠? 그건 안 돼요. 왜냐면, ‘우사밍슈가하트는 전혀 다른걸요-.”

 

사뭇 진지하게, 속삭인다.

 

같은 아이돌이지만, ‘우사밍은 우사밍별에서 왔고, ‘슈가하트는 지구의 마법소녀잖아요?”

 

“…그런 포인트?”

 

내 말은 같은 아이돌이어도다른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거에요. 우사밍은 라디오나 쇼에 나가서, 성우 아이돌로서 자신이 줄 수 있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주고- 슈가하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서 또다른 기쁨을 주면 되는 거에요.”

 

그건, 마치.

 

마치 놀이동산에 갔을 때-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랑, 회전목마를 탔을 때랑, 둘 다 즐겁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즐거움이지요? 그런 거에요, 신짱.”

 

선배.”

 

예전에 신짱이 말했었죠, 아이돌이 된다는 건 모두를 놀이동산에 가는 것처럼 기쁘게 해주는 거라고. 한 놀이동산 안에도, 여러 가지 기쁨이 있어- 그게 수많은 아이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인 거에요.”

 

그 말은 너무나 깊숙이 내 안을 파고들어, 잊고 있었던 기억에 파문을 일으킨다.

어린 소녀는 어느 날 아이돌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아이돌을 보았다. 그 경험은 너무나 다채롭고 신비로워 그녀의 안에 보석처럼 박혔다. 어떤 풍경보다, 어떤 사건보다 풍요로웠다.

 

 

 

 

 

마음 속 고민이 지하 끝까지 파고들더라도, 하트는 포기할 수가 없어. 포기하는 게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니까. 이제 와서 전부 놓아버린다면- 분명 하트는 후회할 거야. 조금이라도 더 해 볼 걸. 몇 년만 더 노력해 볼 걸. 하트는 하트 자신을 너무 잘 아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버텨보자’. 늘 하루는 고민과 고통의 연속이니. 그 굴레 속에서도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을 입고, ‘슈가하트!’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바보처럼 행복해지니까-.

 

겨우 마음을 다 잡고 잘 준비를 하려는데,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렸다. 야심한 시각에 누구일까 하고 구형 폴더를 열어봤더니, 나나 선배였다.

 

몇 주 전, 술에 잔뜩 취해 야밤에 전화를 걸어선 마구 술주정을 했더랬다. 사실, 술주정을 빙자한 한탄이며 자조였겠지만. 나나선배도, 우사밍이 아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 얼마 없었다. 나는 예외라고나 할까. 예전에 함께 유닛활동도 했었고, 컨셉도 비슷해 고민거리도 겹쳤다. 서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라는 표현이 알맞을지도. 나는 바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나나선배, 무슨 일이에요?”

 

[아아아아아 신신짱!!]

 

에에~ 또 술 마신 거에요? 나나선배도 나만큼이나아니, 흠흠. 여튼 엄청 주당이라니까

 

[그그그게 아니야 신짱!!! 사무실 홈페이지 학인해 봤어요?]

 

아뇨?”

 

[오오늘 자정에 총선 결과가 발표된다고 했었잖아! 그게 방금 떴는데, 신짱-]

 

“…, 나나선배가 신데렐라 걸이라도 된 거에요…?”

 

[아아아니 그런 거보다 더 큰일이라고! 엄청나 신짱!!]

 

자신이 신데렐라 걸이 되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니. 그런 일이 이 세상에 있으려나? 나나선배의 전례 없던 호들갑에 재빨리 노트북을 켰다. 전원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 홈페이지에 금방 접속할 수 있었다.

 

선배, 설마 장난치는 건 아니죠-? 아무래도 술 마신 거 같은데….”

 

[으으, 너는 정말- 나나는 완전 맨정신이에요. 빨리 총선 결과 확인해 보세요!]

 

, . 얼마나 당황한 건지 존댓말과 반말이 마구 섞이고 있다. 어차피 나는 또 순위권 구경도 못해볼 거라고 여겨, 총선 진행 자체에 관심을 안 두고 있었다.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들어오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 헷갈렸다. 어디 보자, 총선 결과결과는….

 

화면에 제일 처음 뜬 것은 제 5회 신데렐라 걸, 시마무라 우즈키. 귀엽고 상냥한 아이이니,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다음은 꾸준히 단단한 지지층을 자랑하는, 아이돌 계의 전설인 타카가키 카에데. 이어서 4, 5, 6…. 총선 권위 안에서 익숙한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도 보였다.

 

어라?”

 

그리고 9위에 자리한, 너무나도 익숙한- 한 아이돌. 나이에 안 맞게 양갈래로 머리를 묶고, 천사 날개를 달고, 있는 힘껏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아이돌. 382,744의 득표수를 기록해 패션 3위까지 거머쥔 그 아이돌의 사진 아래에 적힌 이름은.

 

사토 신.

 

“……?”

 

나였다.

그 아이돌은, 자기 자신을 슈가하트라고 부르며 자칭 마법소녀 컨셉을 들이밀고.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는 말투를 어색하지 않게 마구 내뱉으며. 포즈는 대담하게, 윙크는 자신 있게, 팬서비스는 언제나 넘치다 싶을 정도로 해주는 아이돌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솔로곡 하나 없고, 인지도는 열 살은 더 어린 아이들보다 한참 뒤떨어지지만. 포기하는 게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 어려웠던- 그런 아이돌이었다.

 

[…, 봤어요? 신짱. 신짱 정말 대단해….]

 

, 선배는 또 7위네요. 하하, 득표수 봐봐- 선배는 정말 대단해.”

 

[얘는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신짱. 듣고 있어요? 신짱이 해냈어요!]

 

, 하하….”

 

눈물이. 수년을 묵은 눈물이 환희와 함께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신짱….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요. 노력한 게 보상 받는 거에요. 팬들도, 대중들도 모두 신짱을 이제야 알아봐주는 거라구요.]

 

고마워요, 나나선배. 차마 말하지 못하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내 울음소리 위로, 수화기 안쪽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자장가를 부르듯 읊기 시작한다.

 

[신짱, CD 데뷔는 확정이에요. 이렇게 득표수가 높으니 분명 어마어마한 작곡가랑 작사가가 붙을 걸요? 그리고 단체곡도 불러야해요. 인지도도 쑥쑥 올라갈 테니, 분명 TV나 라디오 여기저기서 콜이 올 거라구요. 어쩌면 황금시간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리고 우리 소속사 콘서트에서도 동료들이랑 다 같이 노래 부를 수도 있고….]

 

“…하트, 앞으로도아이돌 계속, 해도 되는 거죠?”

 

[물론-. 하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나 많아요, 신짱.]

 

다행이다. 포기하지 않아서-. 수십 분 전, 머릿속을 얼키설키 헝클어 놓았던 실타래 같은 고민들이 순식간에 하얗게 사라져버렸다. 전부, 전부 너무나 바보 같은 고민들이었다. 정답은 이상하리만치 간단했는데 말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아서, 포기할 줄을 몰라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슈가하트는, 하트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스테이지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TV에 나와 시시콜콜한 개인기도 보여주고, 다른 아이돌들과 함께 무대를 꾸미기도 하고, 여기저기 행사에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기도 하고.

 

하트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서있을 곳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
Posted by 새벽(dawn)
2016. 5. 3. 14:05

[언더테일/샌즈프리] Unforgiven 글/기타2016. 5. 3. 14:05


*언더테일 스포일러 주의



 



 

내가 너를 사랑했던 순간을 잊지 마.

그리고 이건 내가 너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니까. 이 순간도 잊지 말아줘.

 

아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이별은 원한 적이 없다. 떠나는 건 의지가 아니다. 마지막 말은, 마지막 발악이다.

샌즈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부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듯. , 하고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순간 따위는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는 모든 친구들을 사랑했으므로.

그러나 단 한 존재만이 영원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되풀이 되는 영원을 증오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존재를 가장 사랑했다.

 

어쩔 수 없는 마지막이기에, 샌즈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므로. 그녀 또한 그럴 수 없었다.

 

겨우 발길을 돌리려는 아이에게 샌즈가 무어라 말을 뱉는다.

 

있잖아, kid.

나는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잊은 적이 없어.

아니,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게 맞겠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

 

우리가 만나고 헤어졌던 그 모든 순간, 넌 진심이었니?

 

방귀 쿠션을 대고 악수를 했던 우스꽝스러웠던 첫 만남. 그릴비의 바삭한 감자튀김과 달콤한 케첩. 망원경 속의 새까만 하늘. 함께 바라본 첫 석양. 아이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파피루스의 등 뒤로 풀럭거리던 새빨간 머플러. 어딘가 고장나버린 퍼즐. 새파란 불빛과 눈앞을 뒤덮는 희뿌연 먼지. 단 한 번도 거짓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멍처럼, 새까맣게 비어있던 샌즈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설핏 빛났다 사라졌다.


잘 가. 다신 돌아오지 말고.

아니, ‘되돌리진 말고가 맞으려나?

 

아이는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병아리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눈물도 고백도 소용이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쿠션 소리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나온 딸꾹질. 케첩을 묻혀가며 감자튀김을 오물오물 씹던 작은 입술. 새까만 하늘을 들여다보는 눈동자. 홀로 펄럭이는 새빨간 머플러. 주인을 잃은 퍼즐. 햇빛이 비치지 않는 복도와 먼지가 쌓인 어깨. 그는 고통 속에서 자비를 피워내는 작고 가여운 존재를 사랑하였다. 이내 재로 뒤덮인 작은 두 손을 증오하였다. 그런 아름답고 끔직한 나날이, 석양이, 몇 번 떠오르고 또 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네가 그 자리를 맴맴 돌았다는 것만 안다. 아이를 사랑하고, 버림받고, 그래서 사랑을 게워내고. 그저 그렇게 자신이 맴맴 돌았다는 것만 안다.

 

샌즈는 먼저 발길을 돌렸다. 그건 마지막 경고였다. 전부 마지막, 마지막이 되기만을 빌면서.

아이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갈 지는 모른다. 다만 어디든 그녀를 아는 이가 없는 곳으로.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떠나기로 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의 소원이라면. 자비도 행함도 없는 세상으로 영영 사라져도 괜찮다.

 

이 순간도 잊지 말아줘.

 

잊을 리 없다. 샌즈는 경련이 일 듯 멈춰 돌아봤다. 아이는 없었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잡탕처럼 뒤범벅 된 상처와 희망이 현재를 베일처럼 가릴 뿐이었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가 원했기 때문에. 샌즈는 다시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웃었다.

 

:
Posted by 새벽(dawn)

**원작 overgrowth 플롯 그대로 안 따름 주의 (날조)

**2편 없음 주의




[언더테일/플라워펠] 꽃과 벌과 사랑이 흐르는 이야기

 

플라위 꽃잎이 몇 개였더라?”

 

고개를 갸우뚱, 한손으로 입술을 짚으며 프리스크가 물었다. 마치 수수께끼를 내는 어린아이 같은 몸짓. 농담이지, 그거. 샌즈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폭포수처럼 탄막을 쏟아내는 파피루스를 겨우 따돌리고, 워터풀의 문턱에 힘겹게 발을 들였다. 그 사이 프리스크의 두 눈은 만개한 꽃으로 가득 차 버렸다. 조금의 틈도 없이 차갑게 시야를 가둬버린 꽃들을 가리키며, 꼭 꽃으로 안경을 만든 거 같지 않아? 하고. 세이브포인트에서 농담조로 프리스크가 말했더랬다. 허나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지금의 농담도 마찬가지.

 

내 꽃잎은 6장이야, 프리스크.”

 

그 와중에 노란 꽃이 상냥하게 대답을 한다.

 

그렇구나, 5개인지 6개인지 헷갈렸지 뭐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해 봐도 돼, .”

 

노란 꽃이 줄기를 내려 프리스크의 손을 자신의 꽃잎으로 인도한다. 프리스크는 아기를 쓰다듬듯 노란 꽃의 꽃잎을 한 장 한 장 세어간다.

 

“6개 맞네.”

그지? 이제 잊으면 안 돼.”

 

장난 끝났으면 그만 출발할까.”

 

멀찍이서 지켜보던 샌즈가 결국 입을 열었다. 프리스크는 샌즈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장난 친 거 아닌데, 샌즈.”

그래- sweetheart. 어쨌든 그만하고 출발하자. 파피루스한테 따라잡힐지도 몰라.”

 

혹은 다른 괴물이 나타나 공격해올지도 모르고-. 샌즈는 머릿속에 떠오른 대사를 끝까지 읊지 않고 프리스크의 손을 잡았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다는 건 알지만, sweetie. 하지만 난 네 그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그녀의 왼쪽 손목에도 어느새 꽃 몇 송이가 피어나 있었다. 그녀의 자비에 눈을 돌린 죄로 얼마나 많은 꽃을 피어나게 했던가. 그리고 그녀를 지키지 못한 죄로, 또 얼마나 많은 꽃을 피어나게 할까. 상상만으로도 샌즈는 죄악감이-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돼.

 

프리스크의 손을 꽉 잡으며 샌즈가 속으로 다짐했다.

 

그게 그녀와 한 약속이니까.

 

****

 

다짐하고 또 다잡았던 약속은, 부질없이 분쇄된 종잇조각처럼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워터풀의 동굴에서 벗어나자마자, 번쩍이는 수십 개의 창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악마, 학살자, 살인광. 언다인은 어떤 끔찍한 수식어를 붙여도 어울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프리스크의 목숨뿐이었다. 자비는 소용없었다. 자비에 대한 대가로 언다인은 때론 프리스크의 심장을, 머리를, 목을, 가차 없이 잘라내고 도륙했다. 그리고 결과는 늘 같았다. 소녀의 몸을 관통한 창끝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면, 다시 세이브포인트였다.

 

그만하자, sweetheart. 내가. 언다인을 죽일 테니까.”

 

몇 번이나 로드를 한 걸까. 기억할 수 없던 샌즈는 애원과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프리스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헤진 스웨터 사이로 새로운 꽃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팔다리는 뼈가 없는 생물처럼 축 늘어져있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며 단호하다.

 

아냐, 죽이는 건 안 돼.”

네가 죽는 건 괜찮고? 어째서 남의 편만 드는 거야, 자기 생각은 않고.”

그건 네가 있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sweetheart.”

 

살포시 기댄 건지, 기운을 잃고 스러지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무게 없는 감촉. 프리스크의 머리가 샌즈의 어깨에 닿는다. 낯설었던 온기가 어깨를 타고 전해진다.

 

네가 변해주었으니까.”

 

아아, 그거 말이구나. 샌즈는 그릴비에서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있잖아. 가장 나쁜 사람이라도 변할 수 있을까?

-노력만 한다면,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물론이지, 샌즈.

 

그래서 난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어.”

 

 

그 말에 샌즈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프리스크의 희망은 명백한 오산일지도 모른다. 샌즈가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괴물들도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찬 그릇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샌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하지만사실 내가 괴로워, 나는 네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무사히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어.”

샌즈, 그거 알아?”

?”

바깥에는 말이지,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가 있어. 아마 밖으로만 나갈 수 있다면- 나는 분명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거야.”

 

초연한 그녀의 그림자에 거짓이 드리우고 있다. 샌즈가 금세 눈치 챘다. 그건 그녀의 버릇이었다. 안심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태연한 척 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내뱉는 버릇. 프리스크와 돌고 돈 로드가 수십 번이었다. 그 많은 시간을 함께 걸어온 샌즈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프리스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나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 얼마나 다치던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중요한 건 괴물들이 다치지 않는 거야.”

 

…….”

 

왜냐면 나는 죽어도 다시 로드할 수 있지만, 괴물들은 아니잖아. 토리엘도, 파피루스도, 언다인도, 다른 괴물들도. 한 번 죽으면 먼지로 변해버리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는 수백 번을 죽어도 괜찮다는 거니, sweetheart.

 

그러니까 난 괜찮아. 다시 한 번 가보자, 샌즈.”

 

그런 그녀의 자비를 사랑하였지만.

너무도 사랑함으로 인해 괴로워질 수도 있다는 걸- 샌즈는 목이 메는 고통 속에서 깨달았다.

 

****

 

이번에는 언다인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발이 빠른 언다인은 순식간에 뒤를 따라잡곤 했지만, 그때마다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이윽고 핫랜드에 간신히 다다랐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뒤쫓아 오던 언다인은 뜨거운 대지 열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쓰러진 것이다.

 

됐어, 이제 가자- 프리스크?”

 

프리스크는 그대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빨리 가야지, 뭐하는 거야. 프리스크?”

.”

 

재촉하는 노란꽃을 무시하고- 프리스크가 한 손을 내민다.

 

?”

여기 정수기가 있다고 했지. 그걸 줘.”

물 마시려고?”

 

노란 꽃이 줄기를 길게 늘어뜨려 물 한잔을 건넨다. 프리스크는 보물단지라도 쥔 마냥 잔을 두 손으로 감싼다.

 

내가 아니라.”

그만둬, sweetie.”

 

그녀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린 순간, 샌즈가 막아섰다.

 

그만둬. 지금까지 한 일을 수포로 만들 셈이야?”

아니, 이건 지금까지 한 일의 연장선이야.”

 

프리스크는 샌즈의 팔을 가볍게 물리쳤다.

그래. 분명 언다인이 여기에서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프리스크가 바란 결말이 아니었을 테다. 아니. 애초에 샌즈는 프리스크를 막을 자격조차 없었다. 그는 동행인일 뿐, 인도자가 아니었다.

 

물을 받은 언다인은 간신히 두 눈을 떴다. 자신에게 물을 준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자, 오묘한 감정의 그림자가 얼굴에 떠올랐다. 마치 고마워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샌즈처럼.

또다시 세찬 창들의 빗줄기를 받아내야 할까 두려웠지만. 놀랍게도 언다인은 아무 공격도 없이,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되돌아갔다

 

그럼, 갈까.”

 

그녀는 샌즈의 외투를 걸치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외투 사이로 삐져나온 꽃송이들을 바라보았다.

 

샌즈?”

 

답이 없자 플라위가 그를 재촉한다. 샌즈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수백 번을 더 삼켜두었던 질문을 했다.

 

“sweetheart, 대체 그 꽃은 뭐야?”

 

대신 노란꽃이 대답한다.

 

우리도 몰라. 다만 프리스크가 죽을 때 마다 생겨난다는 것하고, 억지로 떼어낼 수 없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그런 게 어째서 생기는 건데?”

글쎄, 모른다니깐.”

 

샌즈는 프리스크의 답을 기다렸다. 명확한 답이 없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존재하지 않는 하늘을 응시하듯, 프리스크가 고개를 세웠다.

 

그냥 내 생각인데.”

 

금세라도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꽃잎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건 벌일지도 몰라.”

 

? 그게 벌이라면, 네가 받아야 할 이유는 없어, sweetheart.”

 

그게 벌이라면- 자비를 베푸는 소녀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고, 수천 번도 더 피를 토하게 하고, 수십 번의 죽음을 경험하게 한 녀석들이 받아야 마땅했다. 적어도 샌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샌즈. 벌이란 건 원래 그런 거야.”

 

프리스크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벌이라는 건 원래. 지은 사람이 꼭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결백한 사람이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마치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현자처럼, 소녀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쩌면 한 사람이 전부 받아야 할 수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원망과 통한이 쌓이고 쌓였다면. 그게 꽃의 저주라면. 견뎌내야 하는 건 나일 수도 있겠지.”

 

숱한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것이 자신뿐이라 마치 다행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샌즈는 고개를 돌렸다.

 

그거 알아, sweetie? 너는 신도 성직자도 아니야.”

당연히 알고 있지. 나는 신도 성직자도 아니니까, 이런 방법 밖에는 못 쓰는 거야. 내가 신이었다면. 좀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고, 행할 능력도 있었을 거야.”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난 네가 이 방법을 그만둔다고 말할 때를 언제든 기다리고 있어.”

으응, 고마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샌즈. 난 말야.”

 

그녀의 한 마디는 불어오지 않는 바람을 타고 지하 저 너머로 날아갔다.

 

포기하지 않는 게,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

 

:
Posted by 새벽(dawn)
2016. 3. 20. 14:36

[디지몬/타케히카] 특별한 착각 글/기타2016. 3. 20. 14:36




너는 초록도 잘 어울리는구나. 중학교 교복을 처음 입었을 때, 그 애가 말했다. 난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노랑, 분홍, 다 잘 어울리지만 진녹색의 교복도 퍽이나 어울리네. 언제나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나는 또 웃기만 했다. 야가미 히카리, 바보 같기도 하지. 그 다정함과 찬사가 나만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살아왔으니.

아홉 살. 순수와 미덕만으로 가슴을 가득 채웠던 시절. 우리는 서로가 빛과 희망이라고 믿고 있었다. 같은 나이와 또래의 형제가 있다는 소소한 교집합만으로도 서로가 꽤나 닮았다고 여겼다. 파트너 디지몬들은 유독 사이가 좋았고, 단 둘이 남아 극한까지 악의 디지몬과 싸워보기도 했다.

우리 둘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사고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특별했으니까. 아니, 특별하다고 믿고 싶었다. 눈치채보면 어느새 그 애는 내 옆에 와서 서 있었다. 깊고 투명한 눈동자로, 나긋하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히카리, 히카리. 그 음성이 좋아 나는 한 번도 대답을 않은 적이 없었다. , 그래, 타케루군.

아홉 살의 타케루와 열세 살의 타케루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사실 그 애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먼저 다가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미소를 지어주고. 그러면 나는 또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하고. 웃음을 흘리고. 손을 흔들고.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특별하다고 여긴 게 잘못이었다.

 

타케루. 여자 친구 생겼다며?”

눈치도 없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오빠가 툭하고 내뱉었다.

뭐랄까, 대단하네. 타케루-. 원래 인기도 많았다며?”

.”

근데 우리 동생은, 표정이 왜 그러실까.”

약 올리는 거야? 아니면 속도 모르고 무신경하게 하는 말이야. 머리가 지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혹시 좋아했어?”

??”

느닷없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큰 목소리가 나왔다.

아님, 좋아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 나는.

딱히 답할 수가 없었다. 특별해, 특별하지 않아. 라고 물으면 당연히 특별하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어찌 답해야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특별하다고 여긴 게 좋아하는 거라면. 좋아함이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우리집안은 참, 대대로 안 좋은 풍습이라도 있나봐.”

그건 또 무슨 소리.”

그냥, 그냥 하는 소리야.”

뜻 모를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는, 오빠는 자기 방으로 유유히 돌아갔다. 좋아해, 좋아하지 않아? 골몰해 답을 내려고 해도-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걸.

타케루와 그 아이는 매일 아침 함께 등교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쉬는 시간 틈틈이 만나고, 함께 하교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안녕, 히카리- 안녕, 타케루군, 하고 잘게 토막 나버린 인사를 나누는 것 뿐. 그마저도 타케루의 그 아이가 싫어했다. 그 아이는 질투심이 강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나를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질투심보다는 촉이 강했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난 여전히 안녕 히카리, 하고 날 부르는 그 목소리가 특별하다고 느꼈으니까.

 

****


눈물은 안 나와?”

태양이 베란다를 뜨겁게 달구던 날. 하드를 입에 물고 있던 오빠가 말했다.

아니, 한 번쯤은 울지 않았을까 해서.”

내가 왜?”

타케루랑 그 아이 말이야, 생각보다 오래 가잖어. 눈이 내리던 지난 겨울부터 만났는데 벌써 쨍쨍 내리쬐는 여름이니.”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간신히 연못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혀 놓았는데. 깊숙이 잠겨있던 어리석고 앳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한 번쯤 울지 않았어?”

……. 오빠는, 내가 울었으면 좋겠어?”

당연히 그 반대지. 만약 내 여동생이 울었다면, 그 자식의 면상에 한 대 날려버릴수는 없겠지만. 위로는 해줄 수 있잖냐.”

언제나 생각했지만- 오빠는 정말. 다정하다. 어중간함이 없는, 말끔하고 올곧은 상냥함. 그렇기에 때로는 눈치가 부족하고,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그런 오빠를 늘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울지 않았어.”

한 번도?”

기대고 싶지 않다. 기대는 순간,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았다.

억지로 참은 건 아냐. 정말 눈물 안 났어.”

정말로?”

어느새 오빠는 하드를 다 먹어치우고, 남은 나무막대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만큼 별 일 아니었단 뜻이겠지.”

……흐음, 그렇단 말이지.”

미심쩍은 얼굴을 하기에, 애써 단단한 얼굴을 했다. 오빠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또 뜻 모를 소리를 했다.

그것도 우리 집안 전통인가보네.”

무슨 소리야?”

그냥, 네가 이러는 거 전부.”

소라 언니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난 오빠의 연못에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오빠의 연못은 내 것보다 훨씬 오래 묵었다. 얼마나 많은 추억과 헛된 소망들이 그 바닥에 잠들어 있을지. 난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울지는 않았나보지만, 많이 까칠해졌네, 내 동생.”

…….”

다정다감한 히카리로 돌아와주라. 그게 내 유일한 낙이었거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단지 변한 게 있다면 그저.

 

안녕, 히카리. 그 애가 더 이상 나를 특별하게 불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타케루에게 더 이상 내가 특별하지 않고- 아니. 한 번도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따름이다. 단지 그 뿐으로, 그 밖의 별다른 일은 내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늘 같이 흘러가고, 사계는 변함이 없고, 일상은 꼭 맞춰둔 알람처럼 정해진 순번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 결국 우는구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댕그랑. 휴지통 안으로 나무막대가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했다. 오빠는 천천히 몸을 옮겨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특별하다는 건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간신히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고 다시 안으로 욱여넣었다. 오빠가 으응, 하고 수긍인지 부정인지 모를 짧은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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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5. 5. 1. 03:19

[내청춘] 결혼한다면 글/기타2015. 5. 1. 03:19

드림 상황을 설정, 작성해본 겁니다.
주요남캐인 하치만, 하야마, 토츠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황과 설정은..사심으로..구성되어 있습니다..아마도.



1.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치만: 뭐야, 지금 깬 거냐? 세상 모르고 자던데. ...많이 피곤했나 보네. 별로 늦지 않았어. 아침은 내가 대충 차려뒀으니 먹으면 돼-아니 잠깐, 그 얼굴은 뭔데. 나도 요리 정도는 할 줄 안다고. 아침엔 밥이랑 국이면 충분하잖아? 식성까지 파악해서, 부인이 잠든 사이 아침을 차려놓다니- 제법 로맨틱한 시추에이션이란 생각이 드는 걸. ...아니라고. 그렇게 딱잘라 말하는 건 좀.... .... 어이..농담이면 농담처럼 하라고. 놀라잖냐. 됐고, 빨리 앉아라. 국 식겠다.

하야토: 일어났어? 햇살이 너무 밝아서 커텐을 쳐뒀어. 으응, 늦잠 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너는- 곤히 잠든 모습이 제법 무방비하구나. 나도 모르게 계속 봐버렸는걸. 부끄럽다니, 우리 사이에 무슨... 그보다 자, 식사하자. ..내가 직접 차렸다기엔 별 거 없지만-그냥 빵이랑 계란 프라이 정도야. 그런 걸로도 기뻐해주는 거야? 하핫, 이쪽이야말로 기쁘네. 그럼 식사할까.

토츠카: 좋은 아침-! 헤헷, 우렁찬 기상이야!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모른다구-? 전혀, 얼굴 붓거나 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고 이쪽을 봐봐. 널 위한 아침을 차려봤어. 어때-? 조금 칭찬해주고 싶어지지 않아? 어.. ..어라. 으, 베이컨은 안 먹는다고...? 미안... 나, 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네.. 이건 스스로한테도 마이너스인걸. 대, 대신 과일은 어때? 이건 괜찮구나. 휴우, 다행이다.. 있잖아, 너에 대해 더 많이 알려줘. 네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제대로 알아서, 늘 네가 좋아하는 걸로만 준비할 수 있게!



2. 출근 준비

하치만: 햇살은 은혜롭게 쏟아지고, 바람은 정겹게 살랑이고.. 그야말로 그날이구만, 그날. 뭐냐니..당연히 출근하기 싫은 날이지. .....후우, 그래 알고 있다고. 이렇게 말은 해도 지각 않고 매일매일 성실히 일을 나간다고? 너야말로 잘 준비하라고. 저번처럼 서류 두고 가서 한바탕 난리 피우지 말고... 음, 눈빛이 매서운걸. 혹독한 사회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겠어. ..실없는 소리여도, 넌 잘 받아주잖냐. ...어이, 오늘은 정시 퇴근이야? -아니, 끝나고 시간이 맞으면.. 데리러 갈까, 하고 생각한 거 뿐이야. 어어..그래. 알았다고, 그럼, 그 시간에.

하야마: 이런 거, 좋네. 응? 당연히 너랑 같이 이렇게 준비하는 거 말야. 하루를 함께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거든. 하하, 물론 그게 너라서 더 좋은 걸지도. -낯간지러워도 어쩔 수 없어. 남들이 보는 앞에선 제약이 많고, 스스로도 위압감이 드니까..단둘이 있을때 더 솔직하고 흐트러지는 건 당연한 거야..-나에게 있어서, 말이지. 어라, 넥타이 해주는 거야? 하하, 네 행동이 더 낯간지러운걸. 미안, 싫단 얘긴 아니니까- 좀 더, 가까이 와줄래?

토츠카: 앗, 하품. 졸리면 커피 더 마실래-? 헤헤, 내 거 한 모금 마셔. 아침은 힘들지. 일어나서 바로 출근해야 되니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힘낼 수 있는 건지도 몰라. 너도 그렇지? 후후, 같은 마음가짐이네-. 엘리베이터까지 손 잡고 갈까? 그냥 위로 받고 싶어서.. 안 돼? 앗, 허락 받았다. 그럼 손을 주세요-따뜻한 손, 위로가 되니까. 기분 좋아-. 그럼 오늘도 같이 나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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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