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

« 2025/1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원작 overgrowth 플롯 그대로 안 따름 주의 (날조)

**2편 없음 주의




[언더테일/플라워펠] 꽃과 벌과 사랑이 흐르는 이야기

 

플라위 꽃잎이 몇 개였더라?”

 

고개를 갸우뚱, 한손으로 입술을 짚으며 프리스크가 물었다. 마치 수수께끼를 내는 어린아이 같은 몸짓. 농담이지, 그거. 샌즈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폭포수처럼 탄막을 쏟아내는 파피루스를 겨우 따돌리고, 워터풀의 문턱에 힘겹게 발을 들였다. 그 사이 프리스크의 두 눈은 만개한 꽃으로 가득 차 버렸다. 조금의 틈도 없이 차갑게 시야를 가둬버린 꽃들을 가리키며, 꼭 꽃으로 안경을 만든 거 같지 않아? 하고. 세이브포인트에서 농담조로 프리스크가 말했더랬다. 허나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지금의 농담도 마찬가지.

 

내 꽃잎은 6장이야, 프리스크.”

 

그 와중에 노란 꽃이 상냥하게 대답을 한다.

 

그렇구나, 5개인지 6개인지 헷갈렸지 뭐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해 봐도 돼, .”

 

노란 꽃이 줄기를 내려 프리스크의 손을 자신의 꽃잎으로 인도한다. 프리스크는 아기를 쓰다듬듯 노란 꽃의 꽃잎을 한 장 한 장 세어간다.

 

“6개 맞네.”

그지? 이제 잊으면 안 돼.”

 

장난 끝났으면 그만 출발할까.”

 

멀찍이서 지켜보던 샌즈가 결국 입을 열었다. 프리스크는 샌즈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장난 친 거 아닌데, 샌즈.”

그래- sweetheart. 어쨌든 그만하고 출발하자. 파피루스한테 따라잡힐지도 몰라.”

 

혹은 다른 괴물이 나타나 공격해올지도 모르고-. 샌즈는 머릿속에 떠오른 대사를 끝까지 읊지 않고 프리스크의 손을 잡았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다는 건 알지만, sweetie. 하지만 난 네 그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그녀의 왼쪽 손목에도 어느새 꽃 몇 송이가 피어나 있었다. 그녀의 자비에 눈을 돌린 죄로 얼마나 많은 꽃을 피어나게 했던가. 그리고 그녀를 지키지 못한 죄로, 또 얼마나 많은 꽃을 피어나게 할까. 상상만으로도 샌즈는 죄악감이-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돼.

 

프리스크의 손을 꽉 잡으며 샌즈가 속으로 다짐했다.

 

그게 그녀와 한 약속이니까.

 

****

 

다짐하고 또 다잡았던 약속은, 부질없이 분쇄된 종잇조각처럼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워터풀의 동굴에서 벗어나자마자, 번쩍이는 수십 개의 창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악마, 학살자, 살인광. 언다인은 어떤 끔찍한 수식어를 붙여도 어울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프리스크의 목숨뿐이었다. 자비는 소용없었다. 자비에 대한 대가로 언다인은 때론 프리스크의 심장을, 머리를, 목을, 가차 없이 잘라내고 도륙했다. 그리고 결과는 늘 같았다. 소녀의 몸을 관통한 창끝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면, 다시 세이브포인트였다.

 

그만하자, sweetheart. 내가. 언다인을 죽일 테니까.”

 

몇 번이나 로드를 한 걸까. 기억할 수 없던 샌즈는 애원과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프리스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헤진 스웨터 사이로 새로운 꽃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팔다리는 뼈가 없는 생물처럼 축 늘어져있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며 단호하다.

 

아냐, 죽이는 건 안 돼.”

네가 죽는 건 괜찮고? 어째서 남의 편만 드는 거야, 자기 생각은 않고.”

그건 네가 있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sweetheart.”

 

살포시 기댄 건지, 기운을 잃고 스러지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무게 없는 감촉. 프리스크의 머리가 샌즈의 어깨에 닿는다. 낯설었던 온기가 어깨를 타고 전해진다.

 

네가 변해주었으니까.”

 

아아, 그거 말이구나. 샌즈는 그릴비에서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있잖아. 가장 나쁜 사람이라도 변할 수 있을까?

-노력만 한다면,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물론이지, 샌즈.

 

그래서 난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어.”

 

 

그 말에 샌즈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프리스크의 희망은 명백한 오산일지도 모른다. 샌즈가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괴물들도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찬 그릇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샌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하지만사실 내가 괴로워, 나는 네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무사히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어.”

샌즈, 그거 알아?”

?”

바깥에는 말이지,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가 있어. 아마 밖으로만 나갈 수 있다면- 나는 분명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거야.”

 

초연한 그녀의 그림자에 거짓이 드리우고 있다. 샌즈가 금세 눈치 챘다. 그건 그녀의 버릇이었다. 안심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태연한 척 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내뱉는 버릇. 프리스크와 돌고 돈 로드가 수십 번이었다. 그 많은 시간을 함께 걸어온 샌즈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프리스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나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 얼마나 다치던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중요한 건 괴물들이 다치지 않는 거야.”

 

…….”

 

왜냐면 나는 죽어도 다시 로드할 수 있지만, 괴물들은 아니잖아. 토리엘도, 파피루스도, 언다인도, 다른 괴물들도. 한 번 죽으면 먼지로 변해버리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는 수백 번을 죽어도 괜찮다는 거니, sweetheart.

 

그러니까 난 괜찮아. 다시 한 번 가보자, 샌즈.”

 

그런 그녀의 자비를 사랑하였지만.

너무도 사랑함으로 인해 괴로워질 수도 있다는 걸- 샌즈는 목이 메는 고통 속에서 깨달았다.

 

****

 

이번에는 언다인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발이 빠른 언다인은 순식간에 뒤를 따라잡곤 했지만, 그때마다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이윽고 핫랜드에 간신히 다다랐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뒤쫓아 오던 언다인은 뜨거운 대지 열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쓰러진 것이다.

 

됐어, 이제 가자- 프리스크?”

 

프리스크는 그대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빨리 가야지, 뭐하는 거야. 프리스크?”

.”

 

재촉하는 노란꽃을 무시하고- 프리스크가 한 손을 내민다.

 

?”

여기 정수기가 있다고 했지. 그걸 줘.”

물 마시려고?”

 

노란 꽃이 줄기를 길게 늘어뜨려 물 한잔을 건넨다. 프리스크는 보물단지라도 쥔 마냥 잔을 두 손으로 감싼다.

 

내가 아니라.”

그만둬, sweetie.”

 

그녀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린 순간, 샌즈가 막아섰다.

 

그만둬. 지금까지 한 일을 수포로 만들 셈이야?”

아니, 이건 지금까지 한 일의 연장선이야.”

 

프리스크는 샌즈의 팔을 가볍게 물리쳤다.

그래. 분명 언다인이 여기에서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프리스크가 바란 결말이 아니었을 테다. 아니. 애초에 샌즈는 프리스크를 막을 자격조차 없었다. 그는 동행인일 뿐, 인도자가 아니었다.

 

물을 받은 언다인은 간신히 두 눈을 떴다. 자신에게 물을 준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자, 오묘한 감정의 그림자가 얼굴에 떠올랐다. 마치 고마워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샌즈처럼.

또다시 세찬 창들의 빗줄기를 받아내야 할까 두려웠지만. 놀랍게도 언다인은 아무 공격도 없이,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되돌아갔다

 

그럼, 갈까.”

 

그녀는 샌즈의 외투를 걸치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외투 사이로 삐져나온 꽃송이들을 바라보았다.

 

샌즈?”

 

답이 없자 플라위가 그를 재촉한다. 샌즈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수백 번을 더 삼켜두었던 질문을 했다.

 

“sweetheart, 대체 그 꽃은 뭐야?”

 

대신 노란꽃이 대답한다.

 

우리도 몰라. 다만 프리스크가 죽을 때 마다 생겨난다는 것하고, 억지로 떼어낼 수 없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그런 게 어째서 생기는 건데?”

글쎄, 모른다니깐.”

 

샌즈는 프리스크의 답을 기다렸다. 명확한 답이 없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존재하지 않는 하늘을 응시하듯, 프리스크가 고개를 세웠다.

 

그냥 내 생각인데.”

 

금세라도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꽃잎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건 벌일지도 몰라.”

 

? 그게 벌이라면, 네가 받아야 할 이유는 없어, sweetheart.”

 

그게 벌이라면- 자비를 베푸는 소녀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고, 수천 번도 더 피를 토하게 하고, 수십 번의 죽음을 경험하게 한 녀석들이 받아야 마땅했다. 적어도 샌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샌즈. 벌이란 건 원래 그런 거야.”

 

프리스크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벌이라는 건 원래. 지은 사람이 꼭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결백한 사람이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마치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현자처럼, 소녀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쩌면 한 사람이 전부 받아야 할 수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원망과 통한이 쌓이고 쌓였다면. 그게 꽃의 저주라면. 견뎌내야 하는 건 나일 수도 있겠지.”

 

숱한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것이 자신뿐이라 마치 다행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샌즈는 고개를 돌렸다.

 

그거 알아, sweetie? 너는 신도 성직자도 아니야.”

당연히 알고 있지. 나는 신도 성직자도 아니니까, 이런 방법 밖에는 못 쓰는 거야. 내가 신이었다면. 좀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고, 행할 능력도 있었을 거야.”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난 네가 이 방법을 그만둔다고 말할 때를 언제든 기다리고 있어.”

으응, 고마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샌즈. 난 말야.”

 

그녀의 한 마디는 불어오지 않는 바람을 타고 지하 저 너머로 날아갔다.

 

포기하지 않는 게,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

 

:
Posted by 새벽(dawn)
2016. 3. 20. 14:36

[디지몬/타케히카] 특별한 착각 글/기타2016. 3. 20. 14:36




너는 초록도 잘 어울리는구나. 중학교 교복을 처음 입었을 때, 그 애가 말했다. 난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노랑, 분홍, 다 잘 어울리지만 진녹색의 교복도 퍽이나 어울리네. 언제나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나는 또 웃기만 했다. 야가미 히카리, 바보 같기도 하지. 그 다정함과 찬사가 나만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살아왔으니.

아홉 살. 순수와 미덕만으로 가슴을 가득 채웠던 시절. 우리는 서로가 빛과 희망이라고 믿고 있었다. 같은 나이와 또래의 형제가 있다는 소소한 교집합만으로도 서로가 꽤나 닮았다고 여겼다. 파트너 디지몬들은 유독 사이가 좋았고, 단 둘이 남아 극한까지 악의 디지몬과 싸워보기도 했다.

우리 둘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사고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특별했으니까. 아니, 특별하다고 믿고 싶었다. 눈치채보면 어느새 그 애는 내 옆에 와서 서 있었다. 깊고 투명한 눈동자로, 나긋하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히카리, 히카리. 그 음성이 좋아 나는 한 번도 대답을 않은 적이 없었다. , 그래, 타케루군.

아홉 살의 타케루와 열세 살의 타케루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사실 그 애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먼저 다가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미소를 지어주고. 그러면 나는 또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하고. 웃음을 흘리고. 손을 흔들고.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특별하다고 여긴 게 잘못이었다.

 

타케루. 여자 친구 생겼다며?”

눈치도 없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오빠가 툭하고 내뱉었다.

뭐랄까, 대단하네. 타케루-. 원래 인기도 많았다며?”

.”

근데 우리 동생은, 표정이 왜 그러실까.”

약 올리는 거야? 아니면 속도 모르고 무신경하게 하는 말이야. 머리가 지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혹시 좋아했어?”

??”

느닷없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큰 목소리가 나왔다.

아님, 좋아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 나는.

딱히 답할 수가 없었다. 특별해, 특별하지 않아. 라고 물으면 당연히 특별하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어찌 답해야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특별하다고 여긴 게 좋아하는 거라면. 좋아함이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우리집안은 참, 대대로 안 좋은 풍습이라도 있나봐.”

그건 또 무슨 소리.”

그냥, 그냥 하는 소리야.”

뜻 모를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는, 오빠는 자기 방으로 유유히 돌아갔다. 좋아해, 좋아하지 않아? 골몰해 답을 내려고 해도-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걸.

타케루와 그 아이는 매일 아침 함께 등교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쉬는 시간 틈틈이 만나고, 함께 하교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안녕, 히카리- 안녕, 타케루군, 하고 잘게 토막 나버린 인사를 나누는 것 뿐. 그마저도 타케루의 그 아이가 싫어했다. 그 아이는 질투심이 강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나를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질투심보다는 촉이 강했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난 여전히 안녕 히카리, 하고 날 부르는 그 목소리가 특별하다고 느꼈으니까.

 

****


눈물은 안 나와?”

태양이 베란다를 뜨겁게 달구던 날. 하드를 입에 물고 있던 오빠가 말했다.

아니, 한 번쯤은 울지 않았을까 해서.”

내가 왜?”

타케루랑 그 아이 말이야, 생각보다 오래 가잖어. 눈이 내리던 지난 겨울부터 만났는데 벌써 쨍쨍 내리쬐는 여름이니.”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간신히 연못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혀 놓았는데. 깊숙이 잠겨있던 어리석고 앳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한 번쯤 울지 않았어?”

……. 오빠는, 내가 울었으면 좋겠어?”

당연히 그 반대지. 만약 내 여동생이 울었다면, 그 자식의 면상에 한 대 날려버릴수는 없겠지만. 위로는 해줄 수 있잖냐.”

언제나 생각했지만- 오빠는 정말. 다정하다. 어중간함이 없는, 말끔하고 올곧은 상냥함. 그렇기에 때로는 눈치가 부족하고,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그런 오빠를 늘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울지 않았어.”

한 번도?”

기대고 싶지 않다. 기대는 순간,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았다.

억지로 참은 건 아냐. 정말 눈물 안 났어.”

정말로?”

어느새 오빠는 하드를 다 먹어치우고, 남은 나무막대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만큼 별 일 아니었단 뜻이겠지.”

……흐음, 그렇단 말이지.”

미심쩍은 얼굴을 하기에, 애써 단단한 얼굴을 했다. 오빠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또 뜻 모를 소리를 했다.

그것도 우리 집안 전통인가보네.”

무슨 소리야?”

그냥, 네가 이러는 거 전부.”

소라 언니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난 오빠의 연못에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오빠의 연못은 내 것보다 훨씬 오래 묵었다. 얼마나 많은 추억과 헛된 소망들이 그 바닥에 잠들어 있을지. 난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울지는 않았나보지만, 많이 까칠해졌네, 내 동생.”

…….”

다정다감한 히카리로 돌아와주라. 그게 내 유일한 낙이었거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단지 변한 게 있다면 그저.

 

안녕, 히카리. 그 애가 더 이상 나를 특별하게 불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타케루에게 더 이상 내가 특별하지 않고- 아니. 한 번도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따름이다. 단지 그 뿐으로, 그 밖의 별다른 일은 내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늘 같이 흘러가고, 사계는 변함이 없고, 일상은 꼭 맞춰둔 알람처럼 정해진 순번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 결국 우는구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댕그랑. 휴지통 안으로 나무막대가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했다. 오빠는 천천히 몸을 옮겨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특별하다는 건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간신히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고 다시 안으로 욱여넣었다. 오빠가 으응, 하고 수긍인지 부정인지 모를 짧은 답을 했다. 




:
Posted by 새벽(dawn)
2016. 1. 31. 10:47

[포켓몬/휴우메이] 무제 글/포켓몬2016. 1. 31. 10:47

정확히는 휴우->메이.



*******

 

나 그 사람에게 새하얀 방을 선물하고 싶어.”

 

느닷없는 이야기에 휴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퉁명스런 대답에도 메이는 활짝 웃는다.

 

그 사람의 방에 가봤거든. 그래서.” “그래서?” 취조하듯 휴우가 되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처음부터 다시 꾸밀 수 있는, 하얀 방을 주고 싶어.”

 

휴우는 시를 읊듯 뜬구름 같은 소리만 하게 된 메이가 싫었다. 개나리색 바지 끝을 살짝 붙잡고 손을 떨며 얘기하는, 메이가 싫었다. ‘그 사람이라고 칭하는 N이라는 작자를 만나고 나서- 그의 이웃친구는 변했다. 그 전에는 한 톨의 망설임도 모르는 아이였다. 무엇을 입에 담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허리는 곧게 피고, 주저함이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왜 그가 가장 아끼던 모습은 사라지고 낯선 표현만 내뱉는 걸까. 꼭 꿈속에서 말을 거는 것처럼.

 

예전에 그 사람이 지냈던 방- 보자마자, 뭐랄지. 안타까움이 턱 밑까지 차오르더라. 제자리에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어. 우리가 흔하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물의 제자리 말이야. 그 사람은 줄곧 세계를 그렇게 보아왔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가슴이 답답해서. 엷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니까 괜스레 더 울컥해버린 거야.”

 

왜 나한테 그렇게 세세하게 설명하는 거야? 휴우는 말을 자르고 묻고 싶었다. 허나 은하수처럼 오색영롱한 눈동자를 보자니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면 늘 그런 표정이었다. 구름 너머 사는 요정님이라도 만났는지 색색의 설렘이 묻은 얼굴. 휴우가 제일 싫어하는, 메이의 얼굴.

 

그래서 생각했어. 그 사람한테 하얀 방을 선물해주면 좋겠다-라고.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알려주는 거야. 하늘은 천장, 풀밭은 바닥에. 창가에 원목 책상을 놓고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한 구석에는 말끔하게 시트를 씌워놓은 알맞은 크기의 침대를 두고. 옷걸이에 가지런하게 옷가지를 정리하기도 하고. 낮은 의자 위에 동그란 방석을 올리고. 때론 앉았다가, 일어났다. 창을 열어 환기도 시키고, 주말에는 먼지도 털고. -모든 사이클이 평범하게, 제자리에 있는 곳. 그런 방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 휴우는 어떻게 생각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물어온다. 휴우는 한 손으로 입을 감싸고 간신히 답했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난 그 N이라는 사람 알지도 못하니까.”

 

무뚝뚝하네. 정말, 내가 원하는 조언은 그런 게 아니라니까. 같은 남자로서 여자애한테 그런 선물을 받으면, 어떨까하고 물어보는 거야.”

 

이런 메이는 유독 위화감이 든다. 다른 사람을 향한 온전한 희열과 기대로 가득 찬 메이. 휴우는 저도 모르게 목이 멨다. 왜 이런 하찮은 일에 절망해야 하는 걸까. 눈이 따갑고 시렸다. 메이의 사소한 언행에 반응하는 몸뚱이가 진절머리 났다.

 

난 모르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 두 눈을 차마 뜨지 못하고 말했다.

 

뭐야, 왜 그런 심한 이야기를 해? 나는 휴우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어차피 두 사람의 일인데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해? 네가 알아서 해. 넌 언제나 네가 알아서 잘 해왔잖아.”

 

그게 무엇이든. 언제나 홀로 잘 해내왔잖아. 내가 없이도.

 

메이의 분홍색 운동화가 주춤 뒤로 물러선다.

 

오늘 휴우는 유독 쌀쌀맞네.”

 

마치 언제나의 휴우는 다정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정말 얼간이 같은 질문이다. 휴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시야가 다시 메이로 가득 찬다.

 

네가 그러고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야. 어디 나사 빠진 것처럼, 헐렁헐렁. 정신도 못 차리고 바보처럼-.”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심보가 못되진 거네. 휴우. 지금 말은 좀 심했어.”

 

심한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휴우는 영원히 꺼내지도 못할 말을 꿀꺽 삼켰다.

 

됐어. 나 이제 휴우한테 이런 거 안 물어볼 거니까. 알아서, 잘 해볼게. 휴우도 알아서 잘 하든 말든-. 알아서 해.”

 

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돌아선다. 터벅터벅 박자에 안 맞게 걸어가는 폼이 제법 화가 난 모양이다.

 

젠장,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이상하다. 분명 하나만 봐도 열을 알았는데. 휴우와 메이는. 성격이나 외모는 정반대였어도 누구보다 가까웠다. 친구인지, 동료인지, 그저 이웃사촌인지는 그 관계를 명명하기 어려웠지만. 걷는 모양새만 봐도 서로의 기분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휴우는 메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처음 보는 표정, 몸짓, 말투. 온갖 낯선 징후들을 흘려대니 정답이 뭐라고 찍을 수도 없었다. 그냥 메이가 N이라는 남자를 만난 이후로 바보 멍청이가 되어버린 거라고. 뭐 하나 똑바로 설명도 못하는 얼간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길 위의 돌멩이를 있는 힘껏 짓밟는다. 하얀 방을 주고 싶다고. 메이는 휴우에게 생일마다 꼬박꼬박 선물을 주곤 했다. 그렇지만. 너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라며 볼을 붉히며 말한 적은 없었다. 바보 같은 메이. 하얀 방을 주고 싶다느니, 시답지 않은 일에 열을 내고 다니고. 휴우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래도 속은 시원해지지 않는다. 휴우의 방은 그렇게 자주 와봤으면서도, 한마디라도 덜어준 적 없으면서.

 

 

어쩌면 정말 멍청해진 건 휴우인지도 몰랐다. 메이가 토라져 돌아선 그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으니. 후회할 거라면 왜 뾰족한 말들만 골라서 내뱉은 걸까. 휴우는 삐죽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일 아침에 사과하러 가야겠다. 젠장. 자조와 짜증이 뒤섞여 속에서 펄펄 들끓었다. 그러면서도 내일 메이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휴우가 알던 익숙한 메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저도 모르게 그런 바람이, 먹먹한 가슴에 담겼다.

 



(참고) 휴우메이()를 위한 소재키워드 절망 하얀 방 영원히


(bw2를 플레이한 지 오래되어서.. 메이가 N의 방에 갈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긴 하는데 ㅠ 설정붕괴여도 그냥 써봤습니다...)

 

:
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