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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0. 15:26

[포켓몬/아카히카(태홍빛나)] Unreachable 글/포켓몬2016. 11. 20. 15:26

아카히카() 위한 소재키워드 : 달콤한 와인 한잔 / 나른한 오후 / 허무함

 

[포켓몬/아카히카] Unreachable


스물일곱. 히카리는 그의 나이가 되면 이해할 있을 알았다. 서른에 가까운 한창 때의 나이. 제법 나름의 가치관과 사고가 뚜렷하게 자리 잡았을 나이. 나이가 되면 이해할 같았다.

 

어른이 되면 같았는데. 전혀, 수가 없네.”

 

새빨간 레드와인을 모금 축이며 히카리가 중얼거렸다. 열살 때건 스물 일곱일 때건 여전히 없는 사람이다. 아카기라는 이름의, 과거 신오우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긴가단의 보스 말이다. 열살 , 신오우 리그를 제패하고 긴가단을 물리친 어마어마한 전적을 가진 히카리다. 그로부터 벌써 17년이나 흘렀다. 신오우를 구한 작은 영웅도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와인을 마시고 시가를 피워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외모만이 어린 시절 정갈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만, 속은 조금 찌들은 어른이 관계로. 그녀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홀로 세상을 한탄하기도 했다.

 

이제 나도 당신 나이인데 말이야. 도무지- 아무 것도 이해가 안돼. 대체 그런 걸까?”

 

나른한 오후였다. 햇살이 네모난 사이로 쏟아지는 밝은 . 나옹마는 그르릉 소리를 내며 따뜻한 햇살 밑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와 대비되는 광경으로, 창가의 테이블에서 트레이너는 한껏 술에 취해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내뱉고 있었다.

 

도대체가 말이지. 감정이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니 뭐라니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나 잔뜩 늘어놓고. 웃긴 그런 소리에 혹해서 긴가단 애들이 모여 들었단 말이지? , 그거야 당신이 말재간이 워낙 좋았고 사람을 끄는 능력도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야? 세상에서 감정이 없어져야 하는 건데, 대체 그랬는데?”

 

와인을 벌써 병이나 비웠다. 사실 히카리는 술이 약했다. 달콤한 와인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지는데 오늘은 유독 무리를 했지 싶다. 희멀건 대낮부터 술을 들이키는 이유는, 그래, 오늘은 있었다. 잔뜩 있었다. 오늘은 사람의 기일이었다.

 

내가 기껏 막았는데 말이지. 정말 열심히 했는데 말이지. 고작 열살엄청 어렸는데도 정말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지? 그래서 신오우도 구하고 긴가단은 해체되고 같았는데 말이지…”

 

오늘따라 술맛이 좋지 않았다. 술이 약한데도 와인을 즐겨하는 특유의 달콤쌉싸름한 풍미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텁텁하고 쓰기만 했다. 억지로 먹는 기름을 속에 들이붓는 느낌마저 들었다. 오늘이 사람의 기일인 탓일까? 자신 말고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익숙해진 허무함은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만 갔다.

 

당신이 반전 세계로 가버렸을 때만 해도, 나한테 기라티나가 있으니까- 언제든 다시 데려올 있다고 생각해서그래서 바로 찾으러 건데. 내가 그랬을까, 어려서 상황 판단이 됐던 걸까? 후후, 나는 어릴 때부터 제법 똑부러진 아이었는데. 정말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네. 마지막 한마디를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어라, 눈물은 이제 마른 아니었나? 아직도 울어줄 사람이 있다니 받았네, 아카기.

 

아직도 주장은 이거야. 나는 잘못한 없어, 이상한 당신이야. 원하는 세계가 있었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버린 거야? 마음 같은 필요 없다고 당신이잖아. 그런데 외롭기라도 했던 거야? 쓸쓸하고, 허무하고, 고독했던 거야? 대체 , 대체 언제부터.”

 

어차피 지난 일이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히카리는 이지적인 아카기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적이지만, 누군가를 손쉽게 설득하고 통솔하며 스스로의 논리에 한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는 어른에게 자석처럼 끌렸더랬다. 그래서 때로는 신오우를 누비며 그를 찾아다닐 때에도, 그를 막기 위해서인지 혹은 만나기 위해서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열살인 히카리에게 아카기는 그릇되었지만 너무나 높고 아름다운, 모순된 이상이었다.

 그토록 동경했음에도, 히카리는 아카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의 출생지, 나이, 그리고 긴가단 보스로서의 전적 정도를 외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의 사상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올곧음과 따뜻한 사랑 속에서 자라난 히카리에게 아카기의 비뚤어지고 복잡한 사고방식은 어렵기 그지 없었다.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있다는 자신감이 히카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는데. 아카기는 다름 아닌 그런 감정 자체를 부인했다. 부인하는 것을 넘어, 영영 지워버리려 했다. 히카리는 그런 비틀어진 판단이 어른들의 소유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긴가단은 보스도 간부도 조무래기들도 전부 어른들이었으니까. 어른이 되면 그런 이야기가 어쩌면 이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녀는 고작 열살. 너무 어려서, 단지 바르고 틀린 것만 구분할 저에 깔린 많고 닳은 사연과 적의들을 읽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치부했었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당신을 이해할 있겠지.

 스무살이 되던 , 히카리는 적잖이 실망했다. 단지 나이가 스물이 넘었다고 해서 아카기와 같은 어른이 되는 아니었다. 히카리는 여전히 여리고, 감정적이었으며, 열살 때와 똑같이 아카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그와 같은 나이가 된다면 어떨까? 7년을 기다려야했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시간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 훌쩍 지나가버리곤 한다. 마침내 올해, 히카리는 커다란 실망감에 휩싸였다. 여전히 당신을 모르겠다. 여전히, 아마도 평생. 당신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켜켜이 쌓인 허무함이 수백 개의 돌덩이가 되어 어깨를 마구 짓눌렀다.

 

내가 당신 나이가 되어서 알게 , 그냥 하나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당신이 그랬던 , 어른이어서도 아니고 똑똑해서도 아냐.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당신은. 열살 때부터 나랑 만났을 때까지 줄곧 똑같은 사람이었던 거야. ”

 

그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 그런데 죽도록 알고 싶은 사람.

 

히카리는 아카기를 잃었던 밤을 기억한다.

 어느 , 반전세계에 가봤더니 그가 보이질 않았다. 새까만 밤과 촘촘한 별들 사이를 마구 뒤지며 그를 찾았다. 그리고 무거운 벽과 돌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숨을 죽이고 누워있는 그를 발견했다. 히카리가 때의 일이다. 아카기가 스물 일곱일 적의 일이다. 히카리는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마구 마구 눈물을 쏟았다. 때문이야? 때문인거야? 앳된 목소리가 설움과 죄책감에 복받쳐 제대로 흘러나오지도 못했다. 혹한 속에 있기라도 하듯, 작은 손을 덜덜 떨며 커다란 아카기의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싸늘한 얼굴의 아카기는 언제나처럼, 답이 없었다. 그게 싫었다. 전부 싫었다. 나쁜 아이가 같았다. 아니, 나쁜 아이가 것보다 되돌릴 없다는 더욱 싫었다. 히카리의 가슴에 새까만 구멍 하나가 뚫렸다. 십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고 바람만 숭숭 지나다니는 구멍이었다. 어른이 되면 구멍을 채워줄 다른 이를 만날 있을 알았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구멍은 같은 구멍인 채로 17년이 지났다. 몸만 자랐지 마음은 그대로였다. 구멍이 뚫린 그대로. 숨이 없는 그의 손을 힘껏 붙잡은 채로.

 

마지막 잔을 비우자 외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히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밖을 보았다. 찬란한 햇살이 비추는 한가한 오후이다. 아카기는 이런 알았을까? 아카기도 따스한 빛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으면 마음이 아늑해 지곤 했을까?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리가, 방도가 있나.

 

아아, 내가. 당신을 조금 일찍 만났다면. 시간이…”

 

시간이.

 

시간이 겹쳐졌다면. 우리의 시간이 …. 조금 겹쳐졌다면.”

 

그랬다면, 아니 그래도.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나는 ,”

 

나는 당신을 만났던 걸까?

 

17번째 그의 기일에 홀로 울며 술을 마셨다. 여전히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 . 그저 자책만 넘쳐났다. 18번째에도, 19번째에도, 계속 그럴 거라면. 나는 당신을 만났던 걸까? 히카리는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17 때처럼, 열살의 어린아이처럼. 울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알면서도. 그렇게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사람도, 세상도,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무엇도 변하지 않는대도.

:
Posted by 새벽(dawn)

아카히카 <소원>


아카기는 생애 처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반전세계의 그림자 신에게 한 번. 숲의 사당에 사는 시간의 요정에게 한 번.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늘 한 곳이었다. 다만 가슴이 더디고 발걸음이 느렸을 뿐.


그래도 그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남은 생은 재와 같이 바스러져도 좋았다.


1.


반전세계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드디어 낙원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더랬다. 반골 포켓몬이 세운 나라는 끝도 시작도 없었다. 숨을 멈춰도 생이 끊이지 않았고, 눈을 감지 않아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신체는 지치거나 병든 기색 없이 그곳에 들어선 처음 순간과 늘 같았다. 표본 속의 곤충처럼 완벽한 보존. 그것이 지난 27년간, 아카기가 바라던 절대에 가까운 오롯함이었다.


낭랑한 음색이 어둔 세계의 고요를 꺼트리기 전까진.


안녕.”


거대한 기라티나의 등 위에서 한 소녀가 발랄하게 뛰어내린다. 이 세계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의 방문이었다. 아카기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주시했다. 그 사이 반 뼘 정도 자란 것 같다.


여기 있는 거, 재미있어?”


올적마다 히카리는 입버릇처럼 물었다. 아카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평생 여기 있을 거야?”


가까이 다가오자 짙푸른 머리칼이 어깨에 스쳤다. 심장에, 전기가 튀었다. 아카기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숨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이군. 여기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평생이란 단어는 묘사에 적절하지 못하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선 시간의 흐름이 없으니 언제라는 말도-.”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얼굴을 들자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친다. 미세한 진동도 없는 시선. 먼저 얼굴을 돌리게 되는 건 또 아카기였다.


어째서?”


어째서냐면. 나는 이제 당신이 그만하고, 바깥으로 나왔으면 하니까. 지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든 좌절에 죽치고 있는 거든, 이런 무의미한 외톨이 놀음은 관뒀으면 해. 보는 사람이 지겹고 속상하거든.”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부끄러워서도, 좌절해서도 아니다.”


뭐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만하고 현실로 나와. 여긴 당신의 세계가 아니니까.”


그럼 누구의 세계인데?”


“- 기라티나.”


너무나도 명료한 해답이라 아카기는 더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이상향이라 믿고 있는 이곳은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저, 그는 반전세계에 하등의 영향도 주지 못하는 미세한 이물질일 뿐. 이 검은 낙원의 주인은 기라티나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리고 기라티나는 나의 포켓몬이지. 그러니 내가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하지 않겠어?”


몇 년 새 제법 말이 늘었다. 처음 만났을 적만 해도, 아카기의 말에 더듬더듬 자기 생각을 제대로 정리도 못하던 꼬마였는데.


나가면 무엇이 있는데?”


당신이 망치지 못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신오우가 있어.”


그곳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무엇을? 하고 되물으려다 침을 삼켰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아카기는 움직일 줄 모르는 돌덩이처럼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듣기에는 쉬운 말이지만. 나의 현재 조건에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미래로군. 거절하겠다.”


- 정말 답답하네. 뭐 이렇게 앞뒤가 꽉꽉 막혀있어? 있잖아. 바깥세상은 꽤나 달라졌어. 이제 갤럭시단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고, 27살 갤럭시단 보스인 아카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지. 당신이 신오우 어디에서 새롭게 시작하더라도, 그다지 걸릴 건 없다는 이야기야.”


나는 지은 죄가 두려워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곳이 내가 꿈꾸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답이 마뜩치 않았는지, 히카리는 제자리에서 뜻 없이 빙글 돌았다.


거짓말이지, 그거. 이런 삭막한 곳이 꿈인 사람은 없어.”


비뚤어진 공간에서 홀로 바로 선 소녀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바보인 거겠지. 당신. 진짜 바람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혼잣말인지, 넋두리인지. 아니면 예언인지. 히카리는 시선 끝에 박힌 별을 어루만지듯 손을 뻗는다. 그 가녀린 손끝에 제가 닿은 것 마냥, 아카기는 어깨를 움찔한다.


오늘은 이만 갈게. 더 이상 설득도 안 될 거 같고. 다음번에는 우리.”


제대로 마주보며 이야기 해보자. 기라티나가 불러낸 어둠과 함께 흐려진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감쳤다. 다시 온다고. 그 때 너는 또 얼마나 자랐을까. 얼마나 더 당당해지고, 아름다워졌을까.


그 때까지만 해도 아카기는 믿고 있었다. 아니,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듯 내뱉은 한 마디가 언약이었다고-.

다음번에는이라는 말은 마치 마법처럼 그녀를 되돌려 줄 거라고.




2.


히카리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반전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다.



3.


아카기는 본디 사념으로 이루어진 생명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그것을 말로 서술하고, 다른 이를 설득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반전세계에는 그 외에 다른 존재는 없었다. 이따금 발을 디디는 작은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히카리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대상이었다. 말을 주고, 받고, 정리한 생각을 내뱉고, 주워 담고, 조그만 얼굴 속에서 표정 변화를 읽어내고. 아카기는 그녀가 상당히 감정이 풍부하단 사실에 새삼 놀랐었다. 말투는 경력 30년은 족히 되는 베테랑 트레이너마냥 이지적이지만, 표정은 앳된 나이를 속이지 못하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곤 했다. 히카리가 떠나고 나면 아카기는 아이의 다채롭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아카기는 본디 사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억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선명해졌다. 만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처럼. 그런 지경에 다다르자 그는 다시 그 이미지를 뇌리에 새기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이 사념의 전부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반전세계에서는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아카기는 사실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거라 다독이며 그 자리를 지켰다. 전에 없던 기대감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허투루 아무 말이나 하는 아이가 아니니까. 어쩌면 챔피언 일이 바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다음번에히카리가 방문한다면, 그녀의 말을 조금 들어주도록 하자. 마지막에 흘렸던 조그마한 진심에 답해주도록 하자. 이윽고 작은 눈 같던 희망은 불어났다. 기다림이 일상이 되고, 일상은 희망으로 찼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하루가 영원히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아카기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수많은 시간이 흘렀을 테다. 뚜렷한 세월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런 것 같다. 눈치를 챈 아카기는 뒤늦게 불안한 얼굴을 했다.


어째서 히카리가 돌아오지 않는 걸까?


무한한 별이 박힌 밤하늘 같은 반전세계를 응시했다. 이 세계의 주인, 기라티나의 주인은 다름 아닌 히카리다. 그녀는 원할 때면 언제든지 반전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는. 아카기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혹은. 그저 오고 싶지 않아서.


건조한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그가 울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더 매서운 눈동자로 빛이 잠긴 하늘을 바라봤다. 그 끝에서 익숙한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뱀과 같은 몸으로 반전세계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이야기 속 포켓몬-.


아카기는 큰 소리로 그 포켓몬을 불렀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느냐고.

:
Posted by 새벽(dawn)
2016. 5. 3. 14:05

[언더테일/샌즈프리] Unforgiven 글/기타2016. 5. 3. 14:05


*언더테일 스포일러 주의



 



 

내가 너를 사랑했던 순간을 잊지 마.

그리고 이건 내가 너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니까. 이 순간도 잊지 말아줘.

 

아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이별은 원한 적이 없다. 떠나는 건 의지가 아니다. 마지막 말은, 마지막 발악이다.

샌즈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부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듯. , 하고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순간 따위는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는 모든 친구들을 사랑했으므로.

그러나 단 한 존재만이 영원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되풀이 되는 영원을 증오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존재를 가장 사랑했다.

 

어쩔 수 없는 마지막이기에, 샌즈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므로. 그녀 또한 그럴 수 없었다.

 

겨우 발길을 돌리려는 아이에게 샌즈가 무어라 말을 뱉는다.

 

있잖아, kid.

나는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잊은 적이 없어.

아니,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게 맞겠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

 

우리가 만나고 헤어졌던 그 모든 순간, 넌 진심이었니?

 

방귀 쿠션을 대고 악수를 했던 우스꽝스러웠던 첫 만남. 그릴비의 바삭한 감자튀김과 달콤한 케첩. 망원경 속의 새까만 하늘. 함께 바라본 첫 석양. 아이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파피루스의 등 뒤로 풀럭거리던 새빨간 머플러. 어딘가 고장나버린 퍼즐. 새파란 불빛과 눈앞을 뒤덮는 희뿌연 먼지. 단 한 번도 거짓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멍처럼, 새까맣게 비어있던 샌즈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설핏 빛났다 사라졌다.


잘 가. 다신 돌아오지 말고.

아니, ‘되돌리진 말고가 맞으려나?

 

아이는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병아리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눈물도 고백도 소용이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쿠션 소리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나온 딸꾹질. 케첩을 묻혀가며 감자튀김을 오물오물 씹던 작은 입술. 새까만 하늘을 들여다보는 눈동자. 홀로 펄럭이는 새빨간 머플러. 주인을 잃은 퍼즐. 햇빛이 비치지 않는 복도와 먼지가 쌓인 어깨. 그는 고통 속에서 자비를 피워내는 작고 가여운 존재를 사랑하였다. 이내 재로 뒤덮인 작은 두 손을 증오하였다. 그런 아름답고 끔직한 나날이, 석양이, 몇 번 떠오르고 또 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네가 그 자리를 맴맴 돌았다는 것만 안다. 아이를 사랑하고, 버림받고, 그래서 사랑을 게워내고. 그저 그렇게 자신이 맴맴 돌았다는 것만 안다.

 

샌즈는 먼저 발길을 돌렸다. 그건 마지막 경고였다. 전부 마지막, 마지막이 되기만을 빌면서.

아이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갈 지는 모른다. 다만 어디든 그녀를 아는 이가 없는 곳으로.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떠나기로 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의 소원이라면. 자비도 행함도 없는 세상으로 영영 사라져도 괜찮다.

 

이 순간도 잊지 말아줘.

 

잊을 리 없다. 샌즈는 경련이 일 듯 멈춰 돌아봤다. 아이는 없었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잡탕처럼 뒤범벅 된 상처와 희망이 현재를 베일처럼 가릴 뿐이었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가 원했기 때문에. 샌즈는 다시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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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