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아카히카(태홍빛나)] 소원 (1) ~(3) 글/포켓몬2016. 8. 16. 14:56
아카히카 <소원>
아카기는 생애 처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반전세계의 그림자 신에게 한 번. 숲의 사당에 사는 시간의 요정에게 한 번.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늘 한 곳이었다. 다만 가슴이 더디고 발걸음이 느렸을 뿐.
그래도 그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남은 생은 재와 같이 바스러져도 좋았다.
1.
반전세계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드디어 낙원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더랬다. 반골 포켓몬이 세운 나라는 끝도 시작도 없었다. 숨을 멈춰도 생이 끊이지 않았고, 눈을 감지 않아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신체는 지치거나 병든 기색 없이 그곳에 들어선 처음 순간과 늘 같았다. 표본 속의 곤충처럼 완벽한 보존. 그것이 지난 27년간, 아카기가 바라던 절대에 가까운 오롯함이었다.
낭랑한 음색이 어둔 세계의 고요를 꺼트리기 전까진.
“안녕.”
거대한 기라티나의 등 위에서 한 소녀가 발랄하게 뛰어내린다. 이 세계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의 방문이었다. 아카기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주시했다. 그 사이 반 뼘 정도 자란 것 같다.
“여기 있는 거, 재미있어?”
올적마다 히카리는 입버릇처럼 물었다. 아카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평생 여기 있을 거야?”
가까이 다가오자 짙푸른 머리칼이 어깨에 스쳤다. 심장에, 전기가 튀었다. 아카기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숨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이군. 여기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평생’이란 단어는 묘사에 적절하지 못하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선 시간의 흐름이 없으니 ‘언제’라는 말도-.”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얼굴을 들자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친다. 미세한 진동도 없는 시선. 먼저 얼굴을 돌리게 되는 건 또 아카기였다.
“어째서…?”
“어째서냐면. 나는 이제 당신이 그만하고, 바깥으로 나왔으면 하니까. 지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든 좌절에 죽치고 있는 거든, 이런 무의미한 외톨이 놀음은 관뒀으면 해. 보는 사람이 지겹고 속상하거든.”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부끄러워서도, 좌절해서도 아니다.”
“뭐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만하고 현실로 나와. 여긴 당신의 세계가 아니니까.”
“그럼 누구의 세계인데?”
“- 기라티나.”
너무나도 명료한 해답이라 아카기는 더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이상향이라 믿고 있는 이곳은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저, 그는 반전세계에 하등의 영향도 주지 못하는 미세한 이물질일 뿐. 이 검은 낙원의 주인은 기라티나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리고 기라티나는 나의 포켓몬이지. 그러니 내가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하지 않겠어?”
몇 년 새 제법 말이 늘었다. 처음 만났을 적만 해도, 아카기의 말에 더듬더듬 자기 생각을 제대로 정리도 못하던 꼬마였는데.
“나가면 무엇이 있는데?”
“당신이 망치지 못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신오우가 있어.”
“그곳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무엇을? 하고 되물으려다 침을 삼켰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아카기는 움직일 줄 모르는 돌덩이처럼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듣기에는 쉬운 말이지만. 나의 현재 조건에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미래로군. 거절하겠다.”
“아- 정말 답답하네. 뭐 이렇게 앞뒤가 꽉꽉 막혀있어? 있잖아. 바깥세상은 꽤나 달라졌어. 이제 갤럭시단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고, 27살 갤럭시단 보스인 아카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지. 당신이 신오우 어디에서 새롭게 시작하더라도, 그다지 걸릴 건 없다는 이야기야.”
“나는 지은 죄가 두려워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곳이 내가 꿈꾸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답이 마뜩치 않았는지, 히카리는 제자리에서 뜻 없이 빙글 돌았다.
“거짓말이지, 그거. 이런 삭막한 곳이 꿈인 사람은 없어.”
비뚤어진 공간에서 홀로 바로 선 소녀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바보인 거겠지. 당신. 진짜 바람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혼잣말인지, 넋두리인지. 아니면 예언인지. 히카리는 시선 끝에 박힌 별을 어루만지듯 손을 뻗는다. 그 가녀린 손끝에 제가 닿은 것 마냥, 아카기는 어깨를 움찔한다.
“오늘은 이만 갈게. 더 이상 설득도 안 될 거 같고. 다음번에는 우리….”
제대로 마주보며 이야기 해보자. 기라티나가 불러낸 어둠과 함께 흐려진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감쳤다. 다시 온다고. 그 때 너는 또 얼마나 자랐을까. 얼마나 더 당당해지고, 아름다워졌을까.
그 때까지만 해도 아카기는 믿고 있었다. 아니,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듯 내뱉은 한 마디가 언약이었다고-.
다음번에는’이라는 말은 마치 마법처럼 그녀를 되돌려 줄 거라고.
2.
히카리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반전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다.
3.
아카기는 본디 사념으로 이루어진 생명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그것을 말로 서술하고, 다른 이를 설득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반전세계에는 그 외에 다른 존재는 없었다. 이따금 발을 디디는 작은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히카리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대상이었다. 말을 주고, 받고, 정리한 생각을 내뱉고, 주워 담고, 조그만 얼굴 속에서 표정 변화를 읽어내고. 아카기는 그녀가 상당히 감정이 풍부하단 사실에 새삼 놀랐었다. 말투는 경력 30년은 족히 되는 베테랑 트레이너마냥 이지적이지만, 표정은 앳된 나이를 속이지 못하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곤 했다. 히카리가 떠나고 나면 아카기는 아이의 다채롭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아카기는 본디 사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억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선명해졌다. 만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처럼. 그런 지경에 다다르자 그는 다시 그 이미지를 뇌리에 새기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이 사념의 전부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반전세계에서는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아카기는 사실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거라 다독이며 그 자리를 지켰다. 전에 없던 기대감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허투루 아무 말이나 하는 아이가 아니니까. 어쩌면 챔피언 일이 바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다음번에’ 히카리가 방문한다면, 그녀의 말을 조금 들어주도록 하자. 마지막에 흘렸던 조그마한 진심에 답해주도록 하자. 이윽고 작은 눈 같던 희망은 불어났다. 기다림이 일상이 되고, 일상은 희망으로 찼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하루가 영원히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아카기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수많은 시간이 흘렀을 테다. 뚜렷한 세월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런 것 같다. 눈치를 챈 아카기는 뒤늦게 불안한 얼굴을 했다.
어째서 히카리가 돌아오지 않는 걸까?
무한한 별이 박힌 밤하늘 같은 반전세계를 응시했다. 이 세계의 주인, 기라티나의 주인은 다름 아닌 히카리다. 그녀는 원할 때면 언제든지 반전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는. 아카기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혹은. 그저 오고 싶지 않아서.
건조한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그가 울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더 매서운 눈동자로 빛이 잠긴 하늘을 바라봤다. 그 끝에서 익숙한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뱀과 같은 몸으로 반전세계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이야기 속 포켓몬-.
아카기는 큰 소리로 그 포켓몬을 불렀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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