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아카히카(태홍빛나)] 불빛 글/포켓몬2015. 9. 6. 12:34
아카히카- 불빛
찰나를 반짝였던 감정은 그저 묻어두기로 했다. 어둠을 떠도는 반딧불이도 계절이 바뀌면 제 풀에 지쳐 숨이 다하니. 그와 별반 다르지도 않다. 특별한 순간을 정하는 건 자신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건 감정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감정. 모이를 받은 새가 부리나케 바닥에 부리를 박는 것처럼. 어미의 젖을 보고 삼삼오오 달려드는 새끼들처럼. 감정은 한순간을 지배하는 본능이다. 그 밖에는 어떤 사건도 아니다.
찰나를 반짝였던 불빛은 눈을 감고 지나치기로 했다. 사소한 일상에 의미가 없다면 일생 모든 일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실상, 삶이란 늘 그러했다. 옷깃이 스치는 인연이나 평생을 부대끼고 살아온 인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둘을 분간하는 건 손바닥을 뒤집듯 쉬웠다. 아니, 손바닥을 뒤집듯 두 가지 인연이 뒤바뀌곤 했다. 어머니는 타인이 되고, 이웃은 먼 과거의 사람이 되고, 유년을 함께한 포켓몬은 낡아빠진 묘비가 되었다. 그러니 타인이 심장의 전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특별하지 못하다.
또다시 손바닥을 뒤집듯,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 버릴 테니.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소녀가 물었다.
생각. 생각은 사념이다. 현상을 뇌에서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라, 한다면 그만큼 복잡하고도 쉬운 일은 없다. 나에게 있어 소녀는 소녀다. 히카리라는 이름에 길고 찬란한 머리칼을 가진 아이. 나이도 성별도 조건도 나와는 정반대이지만, 내 앞길을 가로막는 숙적이자 희대의 라이벌.
답이 늦어지자 소녀는 재차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 날 보면 어떤 느낌이야?”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애매하고 모호한 이야기. 존재조차 증명할 수 없는 감정에 답하는 것. 고개를 젓자 소녀는 내 옷깃을 슬그머니 붙잡는다.
“피하지 말고. 자, 말해줘. 부탁이니까.”
절벽에 선 듯 머리가 아찔하다. 겨우 이마를 짚고 더듬더듬 말했다.
“-너는 후타바타운에서 온 어린 트레이너고….”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점잖은 타박. 바닥과 하늘을 메우는 목소리. 전신에서 힘이 빠진다. 분명, 잊기로 했다.
“그럼 나부터 말할까. 나는 마지막으로 듣고 싶었어-. 우리가 끝을 향해 가기 전에. 뭔지 알고 싶었어. 나와 당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있잖아, 나는.”
침을 삼킨다. 작은 목에 습기가 베여 있다. 눈을 감고 싶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정말 이상했어.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봤거든…. 메마르고, 비어있고, 그러면서 말은 청산유수. 그래서 궁금해졌나봐. 당신이 누구인지…. 결국, 긴가단의 보스란 걸 알았을 때엔 세상을 저주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눈을 감았다. 소녀는 계속 내 옷깃을 쥐고 있다.
“왜 세상을 저주하고 싶었을까? 그것도 이상하지. -그치만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어. 난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길 바랐던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난 세계에서 가장 나쁘고 몹쓸 인간이 되었다. 그녀의 말은 주박이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실은 좋은 사람이었음…그랬던 거지. 그래, 난 여기까지 할게. 이번엔 당신이 말해줘-.”
무엇을? 이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소녀는 도망갈 겨를도 주지 않았다.
소녀 대신 먼 하늘을 응시했다.
“불빛이…반짝였다.”
텁텁한 목소리가 속에서 뒤끓듯 올라왔다.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인지, 소녀의 몸이 점점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천관산에서. 봉신의 유적에서…. 그리고 너를 만날 때마다…. 불빛이 있었다. 그건…. 찰나를 반짝이는 불빛이다. 이제 내가 믿지 않는, 세상을 현혹시키는 불빛이지.”
그 빛은 여름밤의 불꽃놀이처럼 찬연하다. 샛노랗고 새파랗고 새빨간, 형형색색의 불꽃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봄날의 꽃밭처럼, 여름날의 구름처럼, 가을날의 단풍처럼 불빛들이 파란을 일으키고. 그 옆에는 겨울처럼 새하얀 소녀가 서 있다. 소리가 없는 적막이다. 하지만 늘 같은 소녀가 서 있다. 말없이, 미소만으로 빛과 어우러지는 소녀가 서 있다.
“이제, 믿지 않는다니….”
스륵, 소녀의 손길이 멀어졌다. 내려다보니 망연하게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그럼 옛날엔 믿었다는 거네. 그런데 왜 지금은 아닌 걸까…. 나는, 믿고 있는데…. 믿고 싶어서,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
이윽고 투명한 눈물이 하나, 둘. 소녀의 눈꺼풀 끝에서 떨어지기 시작한다. 눈가는 더욱 충혈되고 볼을 새빨갛다.
“더 말해줘…. 부탁이니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내 손은 단단하고 무거워, 내밀 수가 없다. 누구에게도 허락된 적이 없다.
찰나를 장식하는 불빛은 그저 하룻밤의 일이다.
“잘못 말했군. 난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다.”
거짓말이다.
“한 번도 그런 것들을 믿어본 적이 없다.”
거듭 강조한다. 그럴수록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차라리 내가 색을 모르는 인간이었더라면. 어떤 동물처럼 평생 흑백의 세계만을 시야에 담고 살 수 있었다면. 거짓을 말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을 테다.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내 앞에서, 눈물로 흥건히 젖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았을 테다.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네-.”
그것이 소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남겨준, 무거운 한마디였다.
이제 나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인간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은 주박이기에. 풀리지 않는 주술이기에.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어투, 모든 것이 잔잔히 나를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이 소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등을 지고 머플러를 고쳐 맸다. 흘러내린 모자도 모양이 망가진 치맛자락도 가다듬었다. 이윽고 언제 울었냐는 듯-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그게 답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하나도 남지 않았겠네.”
음색은 명랑하지만, 내용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당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난 나의 세계를 지켜야하니까…. 그저 그 일 밖에는, 할 수가 없겠네…….”
구름 위에 뜬 것처럼 소녀는 발걸음을 옮긴다. 결국 무엇 하나 뚜렷하게 말해준 것이 없다. 그녀는 늘 그랬다. 나에 대해 명명할 때엔 한없이 직선적이고 무겁다가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빙빙 에둘러 말하기가 일쑤였다. 그 점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말해주지 않는 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서글펐다’라는 감정을 내가 제대로 느낄 수 인간이라면, 그건 분명 서글픔이었다.
그녀는 내 서글픔과 작은 불빛들을 모두 안고 떠났다. 다음번에 만날 땐-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네, 하고. 또다시 두루뭉술한 단어만 남기고.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떠났다.
그렇게 차라리 영영 떠난 것이면 좋을 텐데.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오직 둘 만인 오롯한 다툼에 발을 들이기 위해. 오직 둘 뿐인 외로운 싸움을 끝내기 위해.
이제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는 나는. 그래, 그곳으로 갈 것이다. 내가 눈을 감고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후회와 자조로 돌아오는 장소. 소리 없는 바람마저 멈춘 창기둥 아래로. 찬연한 불빛이 잠긴 그 두 눈동자가, 그저 나만을 바라봐주는 그곳으로.
이제 그 곳 외에는 달리 갈 곳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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