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히카리+엠페르트] 화관 글/포켓몬2015. 3. 22. 00:11
2015.3.22 포켓몬 전력 참여
비석처럼 피어난 꽃을 꺾었다.
그라데시아는 까다롭다. 토양, 물, 햇빛이 완벽한 조건일 때만 꽃망울을 터뜨린다. 앞마당에 그라데시아의 모종을 심고 퍽 애지중지 길렀다. 뙤약볕에 시들까, 폭우에 꺾일까 노심초사하기 일쑤였다. 포켓몬들 중에서도 엠페르트는 유독 그라데시아를 좋아했다. 그 애는 팽도리였을 때부터 꽃만 보면 좋아라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라데시아를 함부로 밟지 말라고, 엠페르트에게 호통을 치고는 했다. 꽃을 해치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러면 엠페르트는 구석에 앉아 망연히 하늘만 보았다. 꽃은 다시 심으면 된다는 걸 몰랐다. 널 위해서라면, 전부 꺾어 가슴에 달아줄 수도 있었는데.
분홍색 꽃잎 위로 투명한 이슬이 굴렀다. 그라데시아는 간신히 꽃을 피우자마자 줄기가 잘려 나갔다. 나는 꽃받침을 다듬고, 얇은 줄로 꽃들을 이어 끼웠다. 어린 아이의 손발을 만지듯 살살, 조심스런 손놀림으로…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그라데시아 화관을 완성했다.
화관을 들고 집을 나섰다. 포켓몬들과 함께였다. 코우키와 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참석하고 싶단 의사를 밝혔었다. 옆에서 위로해주고 싶다했다. 나는 거절했다. 장례식은 우리끼리 치르겠다고 전했다. 여기서 ‘우리끼리’란 나와 포켓몬들을 말한다. 관을 든 눈설왕이 내 앞에서 걸어 나갔다. 날쌩마, 로토무, 찌르호크, 에테보스가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그것이 우리들의 대형이었다.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난 뒤, 이렇게 하기로 ‘우리들은’ 정했었다. 약속이었다. 언젠가 또 오늘과 같은 날이 오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가는 길을 위로해 주자는 맹세였다.
행렬은 진실호수로 향했다. 어느새 나타난 엠라이트가 구슬픈 새처럼 울었다. 그라데시아와 같은 색의 엠라이트는 내가 첫 번째로 본 신비한 포켓몬이었다. 그것이 시발점으로, 나는 소설 속 모험가처럼 신오우를 누볐다. 문헌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전설의 포켓몬을 만나고, 아무도 간 적이 없는 반전세계를 다녀왔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길고 험난한 여정을 이겨냈어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관장하는 포켓몬들도 내 소원은 이루어줄 수가 없다. 한 번 숨이 달아난 생명은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신도 바꾸지 못하는 운명의 법칙이다. 그 법칙이 나에게서 엠페르트를 데려갔다.
그 아이와 처음 만난 장소에 관을 내려놓았다. 밤처럼 검은 관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의 내 첫포켓몬에게, 분홍색 화관을 씌워주었다. 그라데시아 꽃은 생생하고 예뻤다. 모두들 우는 것 같았다.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다만 나만이 울지 않았다. 운다는 건 모독 같았다. 이제 엠페르트와 배틀을 함께 할 수 없고, 콘테스트도 나가지 못하고, 배틀 멤버의 첫 번째 주자는 다른 포켓몬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다고 잊는 건 아니다. 엠페르트와 진실호수에서 처음 만나고, 배틀하고, 진화하고, 배지를 얻고, 갤럭시단을 무찌르고, 전설의 포켓몬과 대면하고, 챔피언 로드를 올라가고, 사천왕을 이기고, 마침내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던 모든 순간을 잊는 건 아니다. 생애와 같았던 순간들을 눈물로 흘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운다는 건 모독 같았다. 나는 슬픔도 고독도 세월에 쓸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시작과 끝을 간직할 것이다. 그렇기에 운다는 것은….
한 줌의 추억이 관 뚜껑과 함께 닫혔다. 그라데시아 꽃잎 하나가 빠져나와 초록 풀밭에 앉아 있었다. 너를 잊지 않고, 살아갈 거야. 마지막 그 말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포켓몬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제 너를 처음 보았던 순간은 점점 희미해지겠지. 그리고 이제 너를 떠올리려 할 참이면, 처음 만났을 때 그 여린 얼굴이 아닌…관 뚜껑 아래 그림자가 진 창백한 얼굴만 생각이 나겠지. 배틀을 할 때도, 콘테스트에 나갈 때도, 어디에도 너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순간 나는 너를….
간신히 꽃잎을 주워 손안에 쥐었다. 축축한 손아귀 사이로 보드라운 잎새가 빠져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엠라이트의 울음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그 소리는 마치 뱃사공의 노래처럼, 호수 위로 여울져 떠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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