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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초 서코 등에서 나왔던 BW 기반 회지를 웹공개합니다.

게임 BW기반이라기엔 주인공즈는 많이 나오지 않고... 

가상의 플라즈마 단원들이 주인공인, 거의 3차창작(?)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두 명의 플라즈마 단원 소녀들의 눈을 통해 BW의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 이후 8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는데, 천천히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0. 프롤로그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었다면, 다른 이의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었을까?


세실리아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무언가에 애착을 느낀 적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든 포켓몬이든- 그랬다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아끼는 사람과 포켓몬을 떼어놓을 수 있었을까? 


미아. 넌 일생에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사랑한 적 있니? 포켓몬이나 사람에 정을 붙여 본 적 있니? 나는 없어, 우리는 없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플라즈마단일 수 있는 거야. 이건 포켓몬의 해방을 위한 일이에요, 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서 남의 포켓몬을 빼앗고 이용해 버릴 수 있는 거야.  


'해방'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세실리아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어두운 복도의 희미한 조명에 비쳐 번득였다.


 세실리아, 나의 아름다운 친구 세실리아는 그리 말했더랬다. 루나톤 같은 달이 어슴푸레 빛을 흘리던 밤, 우린 N님 방 앞에 서서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플라즈마단이라기엔 너무도 불온한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칠현인님들이나 개치스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숙청당할 만큼 위험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솔직히 털어놓은 것일 테다. 우리는 이 비정상적이고 불분명한 조직, 플라즈마단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기에. 


 이곳, 플라즈마단에서는 N님과 개치스님, 그리고 칠현인님들을 제외한 모든 단원들은 같은 복장과 같은 머리를 한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임무를 나가도, 서로의 사정이나 출신 따위는 모른다.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게 규칙이다. 우리들은 누추한 지난날들을 허물어 버리고, 성역의 기사로 다시 태어났다- 고 여겨졌다. 여겨져야 했다. 우리들이 할 일은 옷에는 플라즈마단의 마크를 달고, 손에는 플라즈마단의 깃발을 들고, 싸우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서 빼앗은 포켓몬을 학대하며, 해방을 위해 N님을 위해 우리들의 왕을 위해.

 난 답도 없이, 그저 오래된 과실을 삼킨 듯 씁쓸하게 웃었다. 허나 그녀는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대신 열이 튀는 눈으로 내게 물어왔다. 


 미아. 내게 해방이란 뭐니?




1. 미아


해방. 매일 백 번도 더 들었어도, 마치 오래된 동화 속 어구처럼 실감이 안 나는 말이었다. 그건 내 삶이 그런 꿈결 같은 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단어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존. 사는 것이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생존의 문제에 비하면 해방은 몽상이고 환상이었다.


나는 고아였다. 생년월일도 모른다. 열 살 때까지는 고아원에서 지냈다. 원장은 무심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어서, 무명의 아이들에게 알파벳 순서대로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따다 붙이곤 했다. 내가 미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경위는 그만큼 하찮고 별 볼일 없었다. 게다가 고아원은 정부 지원금을 다 뒤로 빼내는 바람에, 시설 살림살이에는 신경도 쓰지 않아 건물의 간판도 다 떨어져 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깨봉이도 입에 안 댈 것 같은 꿀꿀이죽을 삼시 세끼 먹었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냄새나고 축축한 침대에서 몸을 구부리고 잠을 자야 했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내 이름은 미아고, 다른 어여쁜 이름을 붙여줄 만한 부모도 없었다. 나는 비린내가 날 것처럼 바짝 마른 미아고, 내가 숨을 편안히 쉬고 몸을 온전히 맡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까칠한 검은 머리에 주근깨가 난 미아고, 남들의 눈에 띌 만큼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다.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처지와 현실을, 그리고 이곳에 있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달이 유난히 밝던 어느 여름 밤, 나는 고아원에서 도망 나왔다. 


 포켓몬도 키우고 아끼는 세상인데 나 같은 어린 아이 하나 돌봐줄 선인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른 도시나 마을에 나의 불쌍한 행색을 보고 동정심이 동해, 자신의 따뜻한 집으로 데려갈 어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근거 없는 희망에 부풀어 달빛 아래를 맨발로 마구 달렸다. 귀뚤뚜기의 울음소리가 발밑의 풀을 타고 맥박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상에게 말라깽이 고아의 희망이란 길바닥에 들러붙은 껌 딱지만도 못한 것이었다. 꿈꾸던 선인과는 마주치지 못한 채, 난 정처 없이 하나지방을 떠돌았다. 큰 도시를 가도 작은 마을을 가도 상황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켓몬에 예쁘장한 액세서리를 달아줄 줄은 알았어도, 길거리의 거지 꼬마에게 빵조각 하나 던져 주는 법은 몰랐다. 


 기력이 다해 울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에게 또 다른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나 같은 부류에겐 희망조차 사치였다. 밤바람을 이불 삼아 잠들고 굶주림을 벗 삼아 깨는 것, 그게 나에게 주어진 일생인 것이다. 


 때로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때로는 구걸을 하며 떠돌다, 나는 산로마을에 당도했다. 산로 마을은 땅위의 열기만으로도 온 몸이 구워지는 것처럼 뜨거운 곳이었다. 그곳은 유난히 사람이 적었고, 그래서인지 가게도 집도 드물었다. 이렇게 살림이 팍팍해 보이는 동네는 인심도 쓰다. 그래서인지 구걸을 하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마을 안에 곱게 머물고 있었으면 될 것을, 오래 굶주렸던 탓에 나는 풀숲에서 나무열매를 뒤지기로 결심했다. 이 세계의 상식이지만, 포켓몬 없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야생 포켓몬의 습격을 받았을 때, 방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결정은 너무나도 한심했다. 결국 그 선택이 내 생에 새로운 기회를 주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뒤진 풀숲은 하필 무장조의 서식지였다. 그 녀석들에게 들키자 나는 단숨에 마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무장조들은 귀가 깨질 것 같은 금속음을 내며 내 뒤를 추격했다. 며칠 굶은 아이의 발재간으로는 비행 포켓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제 풀에 지쳐 흙 속에 풀썩 쓰러졌다. 무장조들의 날카로운 부리가 내 몸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살이라는 거죽을 가르고 마구잡이로 사지육신을 헤집었다. 온 몸이 피와 상처로 벌겋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죽는다, 라는 말이 쉽사리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건 내 삶이 언제나 죽고 사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어도 별 아쉬울 것 없는 하찮은 삶이었기 때문일까. 


 살이 벗겨지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몸을 말 줄 밖에 모르는 벌레처럼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 때, 무장조들의 금속 날개가 부딪히는 굉음 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화염방사. 한순간 뜨거운 불꽃이 내 등 위에서 타올랐다 사라졌다. 무장조들은 힘없이 쓰러지거나 볼품없는 날갯짓으로 도망을 쳤다.


“괜찮니?”


 온화한 음성이 나를 불렀으나, 온몸은 물론 목 주변에도 상처를 입어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가엾게도…어린 아이가 홀로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부모님은?"


 그가 손을 내밀어 쓰러져 가는 내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했다. 희끄무레한 수염에 머리마저 백발인 노인은 고지식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의 뒤에는 풍채가 든든한 앤티골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살포시 안아 올렸다. 


"안 되겠다. 일단은 병원에 가자꾸나."


 그의 이름을 물을 틈도, 나의 이름을 말할 틈도 없이 나는 기절해 버렸다. 이후 그는 나를 간호해 줬고, 있을 곳도 마련해 준 은인이 되었다. 

 노인은 바로 로트. 플라즈마단의 칠현인 중 하나였다. 


로트님은 나에게 플라즈마단이라는 보금자리를 주셨다. N님이 새로 만드실 낙원에의 작업에 협조하고 포켓몬의 해방에 동의한다면, 얼마든지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로트님은 항상 N님과 포켓몬의 해방에 대해 말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혈혈단신 고아였고 플라즈마단 만이 내가 속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조직을 아우르는 비정상적인 이상과 충성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곳을 나가면 난 또다시 길거리를 헤매는 거지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해방이란 단어를 이해 못하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N님을 숭상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나에게 해방이란 생존, 그 자체였다. 생존에 성공한다면 그것이 해방이고 실패한다면 곧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실리아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로 난 세실리아에게 되물었다. 


 네게 해방은 뭔데?


 그녀는 마침내 웃으며 말했다. 


 -나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야.


 고개를 갸웃했다. 세실리아의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는 식으로 열변을 토해내더니, 갑자기 자신의 해방은 N님의 해방이라니. 똑똑하고 논리력 있는 세실리아는 가끔 이런 식으로 나를 사념의 곤경 속에 빠뜨리곤 했다.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자, 세실리아는 흐드러지게 지는 해당화처럼 샐쭉 웃었다. 연한 주홍빛이 파스텔처럼 그녀의 양 볼에 번져갔다. 아아, 그녀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
Posted by 새벽(dawn)


내일을 사는 소녀 (1)

노조마키

 

다시 만난 노조미는 여전히 가을날 하늘처럼 밝고 아리따웠다. 마키는 남몰래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 환자들이 어여쁘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갈고 닦여진 미소였다. 노조미는 반사작용처럼 따라웃었다. 그 표정이 수년 전과 같이 티가 없어서, 마키는 어쩐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안그래도 마키짱을 만나러갈까 했데이."

 

사투리는 완전히 입에 붙었는지, 예전보다 더욱 감칠맛이 났다.

 

"3년 만인가."

"정확히는 2년 반이래이."

 

벌써 그렇게 됐나. 마키는 새삼스레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봤다. 마키는 스물 다섯, 노조미는 스물일곱. 이제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였고, 어른이라기엔 조금 애매한 나이었다. 그래도 스쿨아이돌을 하던 시절에 비하면 탈피를 한 것처럼 여물어버린 인생이었지만.

 

"2년 반 동안이나 연락 한 번 안하다가, 이제와서 날 찾다니. 마키짱 너무하네."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먼저 메일 한번 보낸 적 없으면서."

"나도 나름 바빴구, 그래도 일년에 한두번 있는 뮤즈 모임만은 꼬박꼬박 나갔데이! 거기 마저 안 나온 마키짱 잘못이지."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나도 바빴거든?"

 

교류가 없었던 세월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노조미와 마키는 여고생처럼 시시콜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마키짱, 레지던트라 했나?"

"그렇지. 이제 겨우..란 느낌? 그래도 아직 가야할 길이 멀어."

"그래도 거의 다 왔네! 마키짱 대견하대이-"

"우왓. 나는 강아지가 아니거든? 그, 그리고 이 나이 되어서 머리 쓰다듬는 거, 좀 창피하지 않아?"

"나는 상관없는데, 마키짱은 여직도 부끄럼을 많이 타네."

 

그리고 노조미는 입가에 손을 대고 키득키득 거렸다. 정말, 사람이 변함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마키는 작게 웅얼거렸다.

 

"노조미는 아직도 그 일 하는 거야?"

"응! 그래도 나름 입지를 굳혀가고 있대이. 여전히 신출내기지만-."

 

노조미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란, 고교시절의 그녀와 닮기도 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직업이었다.

영화연출가. 노조미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오토노키자카를 졸업하고, 노조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영화 제작사에 말단으로 발을 들여, 바닥부터 구르기 시작했다.

노조미가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던가? 마키는 그런 기억은 없었다. 노조미와 절친했던 에리나 니코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그들에게 넌지시 물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우문이었다. 모두에게, 노조미는 점과 약간의 오컬트, 그리고 뮤즈를 사랑하던 소녀로 기억되고 있었다.

결국 마키는 노조미에게 직접 물어봤었다. 어째서 그 직업을 선택한 거냐고. 노조미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런 얼굴로, "그냥 해보고 싶었어"라고 답했다.

자신이 갈 길을 그렇게 손쉬운 이유로 결정하다니, 마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키는 어릴 적부터 잘 짜여지고 닦여진- 마치 일류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와 같은 진로를 밟고 있었으니까. 전채요리 다음에는 메인 메뉴, 그런 식으로, 오토노키자카 다음에는 의대 진학, 그런 식으로. 이미 치밀하게 정해져 있던 것이다. '그냥 해보고 싶었어'라는 터무니 없는 발상은 뮤즈 활동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재밌어? 영화 일은."

"그게 내 생각보다- 무시무시하게 힘들고, 어마어마하게 재밌데이! 참, 그 말 했었나? 내가 처음 제작사에 지원했을 때 면접을 봤는데 말이제-."

"했어, 그거."

"아. 그래? 벌써 오래 전 일이니께... 여튼, 그 때 면접관 분이 '왜 영화를 만들고 싶나요?'하고 물어봐서, '그냥 재밌어 보여서요'라고 했더니 무지 혼났다는 거 아이가. 뭐, 실제로 당시에 나는 영화엔 일자무식이었으니."

"어차피 얘기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본거야."

"후후. 그래도 어찌저찌 포장을 잘 해서 취직은 됐다는 거지. 스쿨아이돌로서 정점에 섰던 녀석이, 아무 발판도 없는 영화계에 발을 들이민 게 흥미로웠던가 보제. 아, 마키짱. 그 후로 벌써 7년이야! 7년이 지났어. 나도 이제 제법 뼈가 굵었단 말이지."

"그래, 그래."

"이제 내 이름으로 영화도 만든데이."

 

그 말에 마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노조미가 감독이란 얘기야?"

"그렇게 말하니 거창해보이긴 하는데. 후후, 엄청 쬐끄만 독립영화래이."

"그래도 엄청나잖아! 스물아홉에 감독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영화에 문외한인 마키라지만, 서른도 되기 전에 감독 타이틀을 거머쥔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지는 실감하고 있다.

혹시 노조미는 천재가 아닐까? 뮤즈 때도, 제일 마지막에 멤버로 합류했는데도 훌륭한 춤과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번엔 전혀 연고도 배경지식도 없던 영화계에서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머쥐려하고 있다. 이쯤되면 예술 쪽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별로, 그렇게 감탄할 정도는 아니래이. 20대 감독들은 종종 있고, 나보다 더 어릴 때 작품을 만든 사람들도 많으니까. 음, 오히려 9년 만에 첫 작품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좀 늦은 편일지도 모르제."

"하지만 노조미는 영화를 전혀 몰랐잖아. 그 전까지는 전혀 다른 일을 했었고."

"그러게, 그냥 속편하게 아이돌이나 계속 할 걸 그랬나? 마키짱이랑 같이."

 

농담처럼 던진 소리였지만 마키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속이 쓰리고 불편했다.

아이돌을 계속하지 그랬어, 라는 이야기는 부모님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에게 숱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마키는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외로움과 후회감에 마음이 따가웠다.

 

"세상에 어떤 일이 속이 편하겠느냐만은. 뭘하든 고통스럽고 즐거울 뿐이지."

"....인생 다 산 할아버지 같아."

"마키짱보다, 2년이나 더 살았다구?"

"인생 선배 노릇이라면, 사양할게."

 

녹음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니시키노 병원이 보였다. 노조미와는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 만났기에, 곧 들어가봐야했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연락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노조미는 노조미다. 뮤즈의 모두들 전부 어린애 같아서, 다들 십년 전보다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노조미는 유독 철부지 같았다.

2년 반 만인데도, 여실히 아이 같고 조금은 바보 같아서- 그럼에도 꾸준히 자신의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어서. 마키는 안심했다.

 

"나 이제 들어가봐야 돼."

"으응. 다음 번에 또 보자."

"노조미도 잘 지내."

"마키짱도. 내가 조만간 연락할게."

 

노조미와 마키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해후의 인사를 나눴다.

마키는 노조미를 만나고 안심했다.

지난 2년 반, 머뭇거림과 부끄러움에 연락도 하지 못하고 모임에도 나가지 못했던 건 노조미에게는 비밀로 하자.

2년 반 만에, 겨우 용기가 나서 먼저 메일을 보냈다는 것도 노조미에게는 비밀로 하자.

그동안 소홀했던 만큼. 아니, 두려웠던 만큼. 노조미에게 다가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하자.

그런 연유로, 마키는 안심했다. 하지만 너무 안심하고 말았다.

감정은 늘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어도, 인생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려주지 않는데 말이다.

 

 

 

 

노조미는 일주일 뒤 마키를 찾아왔다.

 

"안녕, 마키짱."

 

태연하게 하얀 침대 위에 앉아 흰 가운을 입은 마키를 응시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마키짱을 만날 일이 있을 거 같다고 하지 않았었나?"

 

여느 때처럼 장난기가 잔뜩 묻어있는 얼굴.

허나 마키는 우스갯소리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게 이런 얘기였어?"

 

영화를 만든다고.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영화를 만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고 있어야 할 노조미가, 어째서 니시키노 병원의 병실에 있는지.

새하얗고 볼품없는 십자가 무늬가 새겨진 환자복을 입고 있는지.

마키의 뇌는 인지한 현실의 풍경을 따라갈 수 없었다.

 

"뭐, 현실은 가끔 영화보다 더 영화 같기도 하니까."

 

마치 스크린 속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듯, 노조미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기에.

마키는 자신이 지금 노조미가 만든 허무맹랑한 영화 속의 배역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착각했다.

그녀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차가운 병동의 바닥이었는데.

 

 

 

 

 

 

:
Posted by 새벽(dawn)

 

항상 중2력을 아카히카로 뽐냈더니 가끔은 발랄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본 이야기...

 

 

 

우주적 모멘텀 (momentum)

아카히카(태홍빛나)

1.

 

"아, 정말 짜증나!"

 

테이블 위의 디저트를 우걱우걱 먹어치우며 히카리가 말했다. 귀여운 두 볼은 마치 포핀을 욕심껏 먹은 파치리스처럼 빵빵해져 있었다.

 

"내가 응, 이정도 노력했으면 말야, 이제 자기 쪽에서 좀, 일케, 뭔가 해봐야하는 거 아냐?"

"야. 일단 삼키고 말하지 그래?"

 

분노에 차 음식을 해치우는 히카리를 보며 쥰이 한심한 얼굴을 했다. 그의 소꿉친구는 어릴 적부터 겉모습과 달리 마이페이스에 약간 극성맞은 구석도 있긴 했지만, 요즘은 유독 심했다. 그리고 쥰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카기 망할 놈!"

"그래 그래."

 

문제는 아카기였다. 5년 전 신오우를 소란과 절망의 도가니로 밀어넣었던 긴가단의 보스, 그 아키기였다. 그리고 히카리는 그 악명 높은 긴가단의 야망을 저지하고 신오우를 지킨 어린 영웅이자 최연소 챔피언이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 어떤 일도 옅어지기 마련인지. 지난 5년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신오우는 제자리로 겨우 돌아온 듯 했고, 긴가단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지는 듯 했다. 쥰도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히카리가 아카기와 재회하고, 만남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쥰은 들릴듯 말듯 한숨을 쉬었다. 분명 5년 전만 해도, 쥰이 더 막무가내여서 히카리가 휘둘렸던 것 같은데. 아마 여행도 쥰이 호수에 가자고 야단을 떨어서 시작된 거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는 히카리가 더 야단이다. 

 

"흥. 내가 먼저 연락하나 봐라."

 

히카리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야무지게 잘랐다. 세상 떠나가라 난리를 부리지만, 별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원인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아카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엄동설한에 얇고 귀여운 원피스를 입고 거리에 서 있었는데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열불이 난 히카리는 아카기에게 뭐라뭐라 따졌지만 그는 딱히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아카기는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입고 있던 감색 코트를 벗어 걸쳐주는 법도 모르는 남자였다.

결국 히카리는 콧물을 훌쩍이며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감기에는 안 걸려서 다행이네."

"그게 뭔가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럴 때 확 열감기가 나서, 침대에서 골골대고 있어야 아카기가 죄책감이라도 느낄텐데!"

 

이제는 자신의 건강한 신체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소꿉친구인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인데, 남들보다 눈치가 열 배는 떨어지는 아카기가 비위를 맞추기는 어려울 테지. 쥰은 입으로는 히카리를 위로하면서 머리로는 아카기를 동정했다.

 

"내가 신오우에서 제일 귀엽고 잘 나가는데, 아카기가 그걸 몰라요."

"............."

"뭐야. 왜 긍정을 안 해?"

"아, 네, 그렇습죠."

"후우. 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쨍- 히카리가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내려놓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게 문제 아닐까?"

"뭐가?"

"너는 잘 나가는데 아카기는 아니잖아."

"으음?"

 

그녀는 못 알아듣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각해 봐. 아카기는 신오우를 멸망시키려고 한 악당 보스고, 너는 그를 무찌른 영웅이라고. 애초에 둘이 만난다는 거 자체가..."

"자체가 뭐?"

 

히카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쥰이 말투를 가다듬는다.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거지. 아카기한테는. 뭐, 일반 사람들은 아카기가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그 긴가단 보스]일 거라는 생각은 안할테고, 눈에 띄는 직업만 갖지 않으면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을 테지만... 너랑 만난다면..."

"요지는. 내가 아카기한테 부담스러운 여자라는 거?"

 

쨍- 다시 한번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정말이지. 왜 아카기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예민해지는 거야? 못살겠네.'

 

불만은 속으로만 품기로 하고. 쥰은 자기도 성질대로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꾹꾹 눌러담았다.

 

"내 얘기는, 그럴 수도 있다고. 너야 아카기를 좋아하지만. 아카기는 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나저나 대체 아카기가 좋은 이유가 뭐야? 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히카리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러고보니, 아카기는, 얘기해준 적 없어. 날 좋아한다고."

"그래?"

 

그건 좀 의외였다. 아카기라는 인물이, 마음에도 없는 사람하고 관계를 맺을 건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그만큼 진실성은 있었다. 5년 전부터 히카리를 대하는 눈빛과 태도만 봐도....

 

"호, 혹시. 안 좋아하는데 내가 보채니까 만나주는 건가? 거절하면 왠지 내가 배틀로 뭉개버릴 거 같으니까, 무서워서 만나는 거야?"

"그럴수도..."

 

이번엔 마음의 소리를 참지 못하고 무심결에 내뱉어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의외로 히카리는 태클 걸지 않았다. 자기 생각에 골몰한 탓이었다.

 

"큭. 안되겠어. 이번엔 절대 내가 먼저 연락 안하려고 했는데!"

"연락 하려고?"

"그럼 어떡해? 갑자기 엄청 불안해졌는데. 확인해 볼래."

"배틀로 때려 죽이진 않을테니, 본심을 말하라고?"

"응. 확인해야겠어."

 

순식간에 옷을 챙겨입고 가게를 나선다. 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 히카리는 빙그르르 돌더니 쥰에게 한마디 던진다.

 

"아참. 그리고 너는 이 일 끝나고 좀 보자. 아주 생각나는대로 잘 말하더라?"

"헉."

 

자기 생각에 골몰해서 그런 게 아니라, 중요한 일부터 해치우려는 심산이었다.

 

 

2.

 

봉신유적은 언제나 인적이 드물었다. 5년전, 신오우의 전설이 긴가단 사태와 연관이 있다는 설이 매스컴을 통해 떠돌면서 한동안 관광객이 붐빈 적은 있었다. 유행도 잠시였다. 낡은 냄새가 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평화에 물들어 긴가단도 잊어가는 것처럼, 전설은 또다시 퇴색되어 갔다. 덕분에 아카기는 유적에 개의치 않고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예스럽고 어느새 탁해진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것이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알았기에, 유적에 들릴 적마다 기꺼웠다.

 오늘도 아카기는 홀로 봉신 유적에 들렀다. 늘 입던 감색 코트와 까만 구두. 키는 크지만 어쩐지 인상이 희미해 사람들은 그를 굳이 쳐다보지 않고 지나쳤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깊게 눌러쓴 모자 밑에 흐르는 새까만 눈동자가 매서워 눈길을 피하곤 했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 건 오직 한 사람. 굳이 그를 찾아와서 눈을 마주치고자 하는 존재도, 오직 한 사람. 하얀 비니를 쓴 작고 발랄한 소녀였다. 

 

"아카기!"

 

히카리였다. 익숙한 외침에 아카기는 뒤를 돌아봤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다. 어린애처럼.

 

"또 여기 와 있네! 나보다 여기가 더 좋아?"

"......오랜만이군."

"딴 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하라고!"

 

대뜸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역시나 유치한 질문이다. 아카기는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려다, 그것마저 귀찮아졌다.

 

"무슨 대답?"

"방금 한 질문!"

"네가 하도 볼 때마다 질문을 많이 해서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다."

"아씨, 지금 얘기했잖아. 방금 한 질문! 내가 좋냐고!"

 

엊그제 분명 다퉜었다. 싸움의 이유는 전적으로 아카기의 책임이었다. 다른 일에 골몰하느라 히카리와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연락두절까지 됐었다. 뒤늦게 떠올리고 약속장소로 달려갔지만, 어쩐지 헐레벌떡 뛰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잔뜩 혼났다. 변명을 해야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더 혼났다. 분명 나이는 자신이 한참 많은데. 화술도 논리도 자신이 훨씬 뛰어날텐데. 왜인지 반박할 수가 없어 그냥 고개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대구도 없이 서 있기만 하냐고 또 혼났다. 그렇게 잔뜩 뿔이 난 히카리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날씨에 비해 너무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자신의 코트를 벗어주고 싶었는데. 그마저 타이밍을 놓쳤다. 아카기는 그런 남자였다.


"뭔 바보같은 질문을..."

 

맞춰주고 싶어도 그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다. 이런 사소한 다툼은 그만두고 좀더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은데. 히카리는 그럴 짬을 주질 않는다.

눈을 마주치자, 히카리는 전혀 다른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화를 내더니. 어느새 울 것 같은 얼굴.

 

'아니, 울고 있잖아.'

 

아카기는 그대로 돌덩이가 되고 말았다. 그의 이지적인 두뇌 속에는 물음표가 수천 수만 개 떠올라 마구 뛰어다녔다. 왜지? 어째서?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카리는 세상 잃은 사람처럼 뚝뚝 눈물을 흘렸다.

 

"내가 좋은 게 아니구나..."

"아니...."

"흑, 내가 좋은 게 아닌데... 억지로 만나준 거구나...내가 무서워서..."

"............"

 

이제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이벤트에서 결정장애. 아카기는 그런 남자였다.

 

"무슨 이상한 상상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아니다."

"우우, 그럼 좋아하는 거 맞아?"

"그..."

"거 봐 대답 못하잖아! 우으...."

 

눈물샘 탱크의 수도꼭지라도 열어둔 건지 펑펑 잘도 운다. 아카기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히카리가 선물해준, 촌스러운 흔들풍손 문양이 있는 손수건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긴가단의 전 보스가 쩔쩔매고 있다. 한 때 세상을 점령하고 신세계를 탄생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남자가, 눈물 닦아줄 타이밍을 못잡고 벌벌 떨고 있다.

히카리는 너무 울어서 눈앞이 안 보이는 상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이렇게 만나지 않는다."

"......"

"그러니까, 널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말구, 확실하게 말해줘."

"그러니까, 나는 널...."


수초의 정적이 흘렀다. 일초, 이초, 삼초. 그 정적이 마치 무한의 시간 같았다. 땀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혔다. 이렇게 중요한 말을,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해야한단 말인가? 아카기의 두뇌 속에서 수많은 논리와 감정들이 얼키고 설켰다. 그래도 결국 감정의 손을 들어줘야겠지. 그는 십 초의 침묵 뒤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이번엔 죽음과도 같은 조용함이었다. 맺힌 땀이 목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도무지 그녀의 반응을 종잡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다."

"얼만큼?"

"....."


두 번째 난제가 찾아왔다. 이토록 난해한 질문을 또 받은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아카기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어휘를 동원했다.


"우주...만큼."

"우왓."


방금 전까지 눈물을 쏟아내던 히카리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우주? 정말로? 아카기가 갖고 싶었던 세계만큼?"

"그런 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좋아한다."

"우와아!!!?"


이윽고 입을 헤 벌리고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아이 마냥 들떠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진담을 말해버렸군.'


반면 아카기는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창피해서 머리 끝까지 달아오를 것 같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정말이지?"

"정말이다."

"날 그만큼이나 좋아했단 말야?! 헤헤헷. 어쩌면 아카기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들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순간 자신도 낯간지러워진 것이다. 

언제나 "응" "아니" 혹은 "그래" 정도 밖에 말하지 않았던 남자가.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빨간 끈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행복하고

부끄러웠다. 히카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사스럽네."

"........."


네가 부추켰잖아. 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사실, 그런 제멋대로인 점 마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전해야 할 진심이었다. 

아카기는 답지않게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이걸 받아라."

"응?"


아카기의 말에 히카리가 손가락 사이를 살짝 벌려 그를 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워 심장에 안 좋았다. 중증인가? 아카기는 지금의 기막힌 상황 탓이려니 하고 콩닥대는 심장을 자제시키려 노력했다.


"그, 네가 나에게 손수건을 선물해준 ...답례다."

"어? 아카기가 나한테 주는 거라고??"


히카리는 전광석화처럼 아카기의 선물을 낚아채 포장지를 뜯었다. 세련되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신형 포켓치가 들어있었다.


"와아! 새로 나온 포켓치네! 그것도 분홍색!"

"너는... 분홍색이니까."


분홍색이 잘 어울리니까,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전한 문장을 말하기엔 낯간지러움이 폭발할 거 같아 대충 줄여버렸다.


"고마워! 아카기, 정말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구나."

"..응.."

"그런데 나는 아카기가 안좋아하는데 날 억지로 만난다고 생각해서. 오해해서 미안해. 막 화낸 것도 미안해."

"...사실 그 때 늦은 것도, 예약한 네 포켓치를 받으러 가느라 늦은 거였다."

"어. 정말?"


포켓치는 신오우에서 인기 만점인 상품이다. 그러니 신형이 나오면 늘 예약폭주에, 출시 당일엔 상점에 줄이 늘어선다. 

아카기는 여성용 분홍색 포켓치를 사기 위해 1시간이나 줄을 서 있었다. 예전 긴가단 단원들이 보면 경악해 까무러칠 광경이었다.


"아카기 것두 샀어?"

"? 아니, 내 건 안 샀다만.."

"왜애! 샀으면 커플 포켓치일텐데."


아카기는 차마 예산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말은 못했다.


"뭐. 됐어. 아카기 건 또 내가 사줄게! 난 챔피언이라 돈이 많거든."

"그래.."


어느새 히카리는 아카기 옆에 꼬옥 붙어 있었다. 자석도 아니고... 그래도 아카기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무슨 사단이 날지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흐흥. 결국 내가 아카기에게 화 낼 건덕지는 사실 하나도 없었단 거네. 아카기도 날 무지무지 좋아하니깐!"

"....그..래."

"그럼 주말에 잇슈라도 놀러갈까? 나 라이문 시티에서 관람차 타고 싶어!"

"그래."


혹시 이러다가 히카리의 예스 머신으로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도 상관없었기에 아카기는 계속 "그래"라고 답했다. 표현의 강도가 다를 뿐이지 정말 아카기가 마음이 클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화해하고, 유적을 나섰다.



3.


"쥰은 입버릇을 좀 고쳐야겠어."

"헉!"


히카리가 재앙을 예언한 이후로, 쥰은 외진 장소만 골라 다니며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감이 좋은 히카리는 쥰을 금세 찾아내고 말았다. 쥰은 떨었다. 구구를 만난 캐터피처럼 떨었다.


"네가 응, 이상한 소리를 해가지고, 내가 아카기를 오해했잖아! 아카기는 나를 사실 엄청엄청 좋아하는 거였는데."

"그, 그래? 잘됐네!"


겁나는 얼굴을 인간이 시전하면 이런 느낌일까. 히카리의 매서운 눈과 마주치자 쥰은 절로 주눅이 들었다. 배틀하고 이탈하고 싶었지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 잘 됐으니까 봐준다."

"??????"
"잘됐으니까 이번만은 넘어가지."


의외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히카리는 쿨하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배틀이던 육탄전이든 쥰을 때려눕혔을 텐데..? 쥰은 어리둥절 두 눈만 소처럼 꿈뻑였다.


"후후.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덕분에, 아카기한테서 엄청 로맨틱한 말을 들었지 뭐야... 흐흥, 나를 우주만큼 좋아한다나?"

"으엑."

"더 하면 정말 가만 안 둘거다?"

"미안."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다시 말해주지. 아카기가 나를 우주만큼 좋아한대! 내가 얼마나 날 좋아하냐구 물었더니, 날 우주만큼 좋아한대! 아마도 우주만큼 나를 좋아하나보지?"

"똑같은 얘기 세 번 했거든?"

"헤헤. 그리고 날 위해서 한정판 신형 포켓치를 미리 예약까지 해서. 1시간 줄까지 서서 기다렸다지 뭐야? 나랑 약속도 그래서 늦은 거더라구.. 정말, 하하, 후후, 아카기는 귀여운 면이 있어."


어디가?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맞을 거 같아서 쥰은 잠자코 있었다.


"여튼. 덕분에 우리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돈독해졌어. 결과적으론 잘했어!"
"...그래."

"상으로 배틀 해줄까?"

"아니, 됐어."


어차피 질테니까. 히카리를 이겨서 챔피언이 되겠다는 꿈은 이미 5년 전에 접었다. 실력과 재능의 갭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쥰은 아버지를 이어 배틀 프론티어의 브레인이 되기 위해 수행 중이었다.


"그래? 너랑 배틀 안 한지 오래됐는데. 뭐, 됐어! 그럼 난 갈게."

"응. 제발 좀 가라."


그 말에 히카리는 쥰에게 꿀밤을 쥐어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해맑은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정말 유난이지? 저 커플. 쥰은 어서 코우키나 시로나 씨나, 다른 이에게 전화해 이 꼴나사운 커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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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