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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꺼먼 먹구름 사이로 빗줄기가 치덕치덕 떨어졌다. 돈카로스는 삐걱이는 날개로 하늘을 날았다. 온갖 먼지와 빗방울이 안구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빗물인지 다른 것일지 모를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굴을 덮는다. 이윽고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는 구도자처럼 고개를 떨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약한 목소리로 간원한다. 그의 어린 새, 작은 생명체, 유일한 색과 향... 무너진다면 사라질 것들을 위해 기도한다. 

 

예상했던 장소에 그는 내렸다. 젖은 땅을 밟자 돈카로스는 느닷없이 끅끅 한숨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말없이 검은 새의 깃을 털어주었다. 

쇠사슬을 몇 겹이나 휘감은듯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그 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애는 모든 것을 그에게 터놓았다. 탄생, 시작, 우정, 소망, 꿈, 추억... 삶의 온갖 미신과 덩어리를 동화책 읽듯 읊어주곤 했다.  그렇기에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있었어도,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그는 삐걱이는 다리로 대지를 걸었다.

 

성당의 종소리가 적막처럼 울렸다. 단지 움직이는 종이 희멀건 눈동자 위에 둥둥 떠오를 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했다. 그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달달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비스듬히 열린 성당 문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색을 잃은 두 눈 위에 떠오른 것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

뒷모습의 사람들이 길고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란히 앉아있다. 그 애에게 포켓몬을 선물했던, 중년의 박사가 느릿하게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슬픔의 언사를 중얼거린다. 뒷모습의 어깨들이 여린 물결처럼 흔들린다. 중년의 박사는 손을 내려놓으며 위로의 표현을 건넨다. 그 애의 소꿉친구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앞좌석에 앉아있던 그 애의 어머니가 제자리에서 주춤거린다. 금발의 챔피언이 고개를 돌린다. 그 애의 어머니는 입술을 쥐어뜯으며 헛구역질하듯 오열한다. 박사의 조수가 눈시울을 붉힌다. 그 애의 어머니는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애먼 가슴만 퍽퍽 쳐댔다. 박사는 떠나간 영혼의 생을 읊조린다. 그 안의 모두가 그 애에게 빚을 졌거나 빛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성당 밖에 있는 그도 그 애에게 빚을 지고 빛을 받은 사람이었다. 문고리에 걸쳐둔 손이 빗물에 주욱 미끄러졌다. 소원은 늘 먹먹한 하늘에 가려 한 줌의 햇살도 받지 못한다. 애원의 씨앗은 눅눅한 땅 속에 묻혀, 썩지도 틔우지도 못한채 영원히 그대로일 것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관이, 그 애를 담기엔 너무 크고 장엄해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어머니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성당 내의 어수선한 소란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가려졌다.

포켓몬센터의 문을 열었다. 직원이 수건을 가져다 준다고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자신의 것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는, 그 애의 박스를 열어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애가 바보처럼 모든 걸 터놓았기 때문이다. 태어나던 날 아침의 바람과 햇살, 처음 모험 떠나던 날의 설렘과 두려움, 소꿉친구와의 첫배틀부터 마지막 배틀, 포켓몬을 위해 포핀을 만드는 법과 함께 노니던 날들, 명예의 전당의 고요함과 웅장함, 그를 처음 만나던 때의 두근거림.. 그리고 박스의 비밀번호까지. 생의 모든 느낌과 자잘한 것들을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10번째 박스에서 포켓몬을 꺼냈다. 평범한 빨간색 몬스터볼 안에는 한때 염원했던 전설이 잠들어 있었다. 전원을 끄고 센터를 나섰다.

 

 

기라티나는 볼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천공과 대지를 가르는 고함이었지만, 그는 그저 어미를 찾는 어린아이의 울음처럼 들렸다. 기라티나는 그를 알아봤다. 커다란 발을 힘껏 구르자 차가운 모래와 식은 빗방울이 튀어올랐다. 이미 온몸이 젖어버렸기에 개의치 않았다. 어마무시한 소음을 듣고 성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모두 그 애에게 빚을 졌거나 빛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빚쟁이들은 더 큰 빚쟁이를 보자 얼굴을 붉히며 큰소리를 냈다. 소꿉친구는 달려와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허나 그보다 더 빠르게 그는 기라티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 해.

어둠이 하늘을 덮고 그림자가 먹구름을 감춘다. 어둠이 또 어둠을 덮고 그림자가 또 그림자를 덮었다.

기라티나가 펼친 그림자는 밤보다 깊고 새벽보다 고요했다. 그는 그 안에 있었다. 다른 이들은 없었다. 오직 그 만이 작은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눈을 감았다. 어둠은 고요하니, 고즈넉한 그 애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림자는 검어서, 추억 외에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엉망이 된 얼굴 위로 다시 무언가 흘러내렸다. 장례식의 사람들이 주위에서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아는 유일한, 그의 소원을 이루는 방법이었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길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결심을 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다짐했을 것이다. 사실- 영원이란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헛된 시작과 찰나의 끝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까마득한 예전부터 계획해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애는 병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일분 일초라도 잊을 수가 없었다. 늘 곁에서, 아침을 깨우는 새처럼 그 애가 재잘거려도 쉼없이 살가운 이야기를 쏟아내도 잊을 수 없었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는 없었다. 아무리 같은 일상을 반복해도, 조그만 몸짓이 숨소리 하나가 그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심장은 쉴 틈이 없었다, 늘 뛰어야했다. 머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러졌다. 27년이라는 거뭇하게 굳어진 삶은 단 하나의 소원만을 향해 구물구물 기어갔다.

 

그림자가 그의 숨소리를 지웠다. 기라티나는 우우 낮게 울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아무도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카기라는 존재는 이제 없다. 그는 스스로 해와 달이 없는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영원을 누리기 위해. 영원 속에서 끝없이 태양이 있던 시절을 반추하기 위해. 어둠이 잠식한 반전에 몸을 맡겼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추억이라는 감옥이었다.

평온한 어둠 속에서 두 눈을 감는다. 떠오르는 것은 단 한 존재. 헤픈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말소리와 숨소리는 곡조가 되어 몸을 둥실 띄웠다. 멀리서 작은 인영이 보이자 그제야 그는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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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