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아카히카(태홍빛나)] 해와 달이 없는 세계에서 (2) 글/포켓몬2015. 3. 9. 02:50
2)
바람이 부는 방향에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애가 걸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벅차 보였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그 애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머리칼은 한층 색이 옅어지고 가늘어져 있었다.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 된다고 했다. 그건 그가 그 애에게 ‘안 된다’고 말한 몇 안 되는 사건이었다. 머리를 자르면, 그 애는 단발인 모습으로 그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하얀 눈의 벌판 위에 떨어진 색을 잃은 이파리처럼, 희멀건 머리카락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하얀 벌판 위를 걸을 때마다, 이파리를 볼 때마다, 그 애의 머리카락을 생각할 것이다. 또한 머리를 자르고 싶어, 라고 말하던 맥없는 목소리. 그리고 단발로 자르자 숱이 없어 더욱 메말라 보이던 뒤통수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기에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애는 별다른 투정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머리를 자르고 싶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애는 그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매일 만나면서도, 특별한 추억은 심어주지 않으려했다. 매일 같은 복장에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비슷한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꺼내서 풀어놓았다. 다른 옷을 입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날 하루는 즐거울 것이다. 그 애 자신도 즐거울 것이다. 다만 어느새 홀로 남겨져, 특별했던 하루하루를 되새겨야하는 그만이 괴로울 것이다. 따라서 그 애는 자신이 양보하기로 했다.
사랑은 계속 될 테지만,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애는 느리게 굴러가는 시침처럼 하루를 보냈다. 정해진 시각에 굼뜬 동작으로 나타났다. 첫인사는 늘 같았다. 하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그저 말일 뿐인 대사들로 시간을 채웠다. 그러면 그는 다름없이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가 하는 말은 응, 그래, 알았어, 하는 대답들뿐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달변가였다. 하지만 그 애 앞에선 달변가일 이유가 없었다. 굳이 꿀을 바른 문장들로 현혹시키지 않아도, 어린 새는 둥지 안에 앉았다. 그는 그럴 듯한 말들을 꾸며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그저 응, 그래, 알았어, 하는 대답만 할 뿐인데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 애가 좋았다. 늘 웃는 그 애가 좋았다. 그 미소가 천천히 색이 바래고 시들어가도 그대로 좋았다.
모든 것이 특별하지만, 사랑은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애는 오지 않았다.
처음, 시계를 확인했다. 오래된 손목시계라 약이 다 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머니에 든 그 애의 포켓치가 같은 시간을 가리켰다. 불안감이 어둔 장막처럼 들이닥쳤다. 새빨간 포켓치는 선명하고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했다. 포켓치를 준 것은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그 애가 말했었다. 그동안 그 애는 포켓치를 4번이나 바꿨고, 그에게 주는 포켓치는 한 달도 쓰지 않은 것이므로, 결국은 새 것을 사는 것과 다름없다며 우겼다. 이런 여아용 포켓치를 살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그 애는 볼을 부풀렸다. 그럼 길에서 주운 거라고 생각해. 길에서 주운 다음 주머니에 넣은 것을 자꾸만 깜빡해서, 계속 들고 다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것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나눈 대화는 또 하나의 판화로, 무한히 재생되는 영상으로 그의 가슴 속 갤러리에 걸렸다.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 했다.
다음, 그는 약속 장소 앞을 서성였다. 늘 그 애가 빈약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어 올라왔던 언덕. 그 언덕의 꼭대기까지 마중을 나갔다.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서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말라붙은 두 눈이 떨렸다. 시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는 일은 그만두고 달렸다.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들렀던 가게, 함께 지나왔던 거리를 헤맸다. 어디에도 그 애는 없었다.
이윽고, 지친 발걸음은 낯선 집 앞에 닿았다. 후타바 타운의 녹색 지붕 집. 2층은 그 애의 방이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알고 있었다. 2층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는 돈카로스의 도움을 빌려 2층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방에는 흔적 하나 없었다. 그 애가 옷장을 열어보고, 게임을 하다 끄고, 침대에서 뒤척이다 일어난 흔적도 없었다. 그의 까칠하고 커다란 손이 떨렸다. 1층의 불도 꺼져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말 저녁이라 가족과 함께 외출이라도 한 걸지도 모른다. 병원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애는 그에게 말없이 떠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그 애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 떠올랐다. 돈카로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입술이 떨렸다. 온 공기에 습기가 들어차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젖었으며 돈카로스의 날개도 젖었다. 비 오는 날에는 비행 포켓몬은 쓰지 않는 게 좋아, 날개가 무거워지니까. 그 애가 말했었다. 물 타입도 겸하고 있음 관계없겠지만, 네 돈카로스는 아니잖아, 그러니 비 오는 날에는 쉬게 해 주는 게 좋아. 그 애가 돈카로스의 새까만 날개깃을 새하얀 손으로 쓰다듬었다.
굵은 빗속을 돈카로스가 날았다. 온 몸으로 거센 물줄기를 맞으며 그도 날았다. 비가 내리는 곳에 태양빛은 없다. 태양이 없으므로, 세상은 그림자로 차게 될 것이다.
1차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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