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

« 2025/1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

 

바람이 부는 방향에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애가 걸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벅차 보였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그 애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머리칼은 한층 색이 옅어지고 가늘어져 있었다.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 된다고 했다. 그건 그가 그 애에게 안 된다고 말한 몇 안 되는 사건이었다. 머리를 자르면, 그 애는 단발인 모습으로 그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하얀 눈의 벌판 위에 떨어진 색을 잃은 이파리처럼, 희멀건 머리카락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하얀 벌판 위를 걸을 때마다, 이파리를 볼 때마다, 그 애의 머리카락을 생각할 것이다. 또한 머리를 자르고 싶어, 라고 말하던 맥없는 목소리. 그리고 단발로 자르자 숱이 없어 더욱 메말라 보이던 뒤통수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기에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애는 별다른 투정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머리를 자르고 싶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애는 그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매일 만나면서도, 특별한 추억은 심어주지 않으려했다. 매일 같은 복장에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비슷한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꺼내서 풀어놓았다. 다른 옷을 입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날 하루는 즐거울 것이다. 그 애 자신도 즐거울 것이다. 다만 어느새 홀로 남겨져, 특별했던 하루하루를 되새겨야하는 그만이 괴로울 것이다. 따라서 그 애는 자신이 양보하기로 했다.

사랑은 계속 될 테지만,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애는 느리게 굴러가는 시침처럼 하루를 보냈다. 정해진 시각에 굼뜬 동작으로 나타났다. 첫인사는 늘 같았다. 하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그저 말일 뿐인 대사들로 시간을 채웠다. 그러면 그는 다름없이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가 하는 말은 응, 그래, 알았어, 하는 대답들뿐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달변가였다. 하지만 그 애 앞에선 달변가일 이유가 없었다. 굳이 꿀을 바른 문장들로 현혹시키지 않아도, 어린 새는 둥지 안에 앉았다. 그는 그럴 듯한 말들을 꾸며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그저 응, 그래, 알았어, 하는 대답만 할 뿐인데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 애가 좋았다. 늘 웃는 그 애가 좋았다. 그 미소가 천천히 색이 바래고 시들어가도 그대로 좋았다.

모든 것이 특별하지만, 사랑은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애는 오지 않았다.

처음, 시계를 확인했다. 오래된 손목시계라 약이 다 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머니에 든 그 애의 포켓치가 같은 시간을 가리켰다. 불안감이 어둔 장막처럼 들이닥쳤다. 새빨간 포켓치는 선명하고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했다. 포켓치를 준 것은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그 애가 말했었다. 그동안 그 애는 포켓치를 4번이나 바꿨고, 그에게 주는 포켓치는 한 달도 쓰지 않은 것이므로, 결국은 새 것을 사는 것과 다름없다며 우겼다. 이런 여아용 포켓치를 살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그 애는 볼을 부풀렸다. 그럼 길에서 주운 거라고 생각해. 길에서 주운 다음 주머니에 넣은 것을 자꾸만 깜빡해서, 계속 들고 다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것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나눈 대화는 또 하나의 판화로, 무한히 재생되는 영상으로 그의 가슴 속 갤러리에 걸렸다.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 했다.

다음, 그는 약속 장소 앞을 서성였다. 늘 그 애가 빈약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어 올라왔던 언덕. 그 언덕의 꼭대기까지 마중을 나갔다.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서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말라붙은 두 눈이 떨렸다. 시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는 일은 그만두고 달렸다.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들렀던 가게, 함께 지나왔던 거리를 헤맸다. 어디에도 그 애는 없었다.

이윽고, 지친 발걸음은 낯선 집 앞에 닿았다. 후타바 타운의 녹색 지붕 집. 2층은 그 애의 방이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알고 있었다. 2층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는 돈카로스의 도움을 빌려 2층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방에는 흔적 하나 없었다. 그 애가 옷장을 열어보고, 게임을 하다 끄고, 침대에서 뒤척이다 일어난 흔적도 없었다. 그의 까칠하고 커다란 손이 떨렸다. 1층의 불도 꺼져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말 저녁이라 가족과 함께 외출이라도 한 걸지도 모른다. 병원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애는 그에게 말없이 떠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그 애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 떠올랐다. 돈카로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입술이 떨렸다. 온 공기에 습기가 들어차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젖었으며 돈카로스의 날개도 젖었다. 비 오는 날에는 비행 포켓몬은 쓰지 않는 게 좋아, 날개가 무거워지니까. 그 애가 말했었다. 물 타입도 겸하고 있음 관계없겠지만, 네 돈카로스는 아니잖아, 그러니 비 오는 날에는 쉬게 해 주는 게 좋아. 그 애가 돈카로스의 새까만 날개깃을 새하얀 손으로 쓰다듬었다.

굵은 빗속을 돈카로스가 날았다. 온 몸으로 거센 물줄기를 맞으며 그도 날았다. 비가 내리는 곳에 태양빛은 없다. 태양이 없으므로, 세상은 그림자로 차게 될 것이다.

 



1차 수정 완료.




:
Posted by 새벽(dawn)

[아카히카] 해와 달이 없는 세계에서

 

1)

 

그 애는 병이 있었다. 그러나 자주 그 사실을 잊곤 했다. 아픈 내색 하나 없었다. 그 애는 늘 그의 곁에서, 아침을 깨우는 새처럼 재잘거리곤 했다. 쉼 없이 살가운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다.

절대 그 애는 자신의 병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은 영원한 10살을 살 거라고 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은 영원한 10살이지만, 그는 꾸역꾸역 나이를 먹을 테니 영영 우리들은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고. 흘리듯 말했기에 우스갯소리처럼 들렸다. 허나 아니었다. 영원한 10살이 아니어도,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림자가 겹쳐지면 안 되는 사이었다. 다른 하늘에서 다른 땅을 밝고 다른 곳을 향해 걸어야했다. 아니면 한 사람이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은 뒷걸음질 쳐야했다. 잠시나마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 애가 영원한 10살이기 때문이다.

그 애는 더 이상 그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소꿉친구를 대하듯 편하게 불렀다. 호칭과 말투가 바뀐 것은 언제인지 모른다. 나이가 들자 엄마어머니라고 부르게 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다만 그런 일의 반대였을 따름이다. 외려 연상인 그가 더 깍듯하게 그 애를 대하게 되었다. 존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낮췄다. 오래 모신 주인을 대하듯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애는 모양새가 우습다며 답지 않게 헤프게 웃었다.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웃었다. 그는 그 헤픈 웃음이 좋아 계속 우습게 굴었다. 매일 똑같은 어설픈 놀음에 한결 같은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 장난과 같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모든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했다.

어째서 여행을 시작했느냐고 그가 물었다. 진지한 물음에도 그 애는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이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그에게 뒤집혔을 거라고 내뱉었다. 시치미를 뗄 때 그 애는 먼지가 쌓인 악기처럼 바람이 막힌 목소리를 냈다. 바른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이 있다. 그렇다면 여행은 고사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옳다. 그런데 왜 험하고 고된 모험을 시작했냐고 되물었다. 까칠하고 커다란 손 위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손이 겹쳐졌다. 그 애가 읊조렸다.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는 없으니 전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는 것으로 끝맺자고.

그리고 그 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끝맺는다는 단어를 발음하는 그 애의 입술이 미웠다.

그는 그 애의 남은 날을 알고 있다.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라면 언제 끝나도 무익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하더라도 그 애만은 아니다. 그 애는 세상의 유일한 색이며 향이다. 만남이 조금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그의 일생은 송두리째 바뀌었을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을 멀리 두게 한 세월의 차이와 운명의 머뭇거림을 한탄했다. 해도 달도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헤맸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기엔 27년은 너무 길었다.

 

밤마다 그 애가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빌었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고 궂은 일을 해도 그는 건강했다. 신체가 깎이거나 부스러지는 일 하나 없었다. 두 눈만이 휘휘하게 말라붙어 갔다. 그는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그 애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생각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몸집이 큰 해골 같은 사내를 그 애는 뭐라고 여길까. 사람이 아닌 유령으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애는 부정이란 것을 모르기에 무엇이든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인다. 아니다. 처음에는 그를 부정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부정하지 않는 것일까. 졸음이 오지 않았다. 답 없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쇠사슬처럼 몸을 칭칭 감았다. 오늘도 잠이 들지 못할 것이다. 잠을 자지 않고 하루를 벌 수 있다면, 평생 잠들지 않고 싶다.

 

*****


그 애는 낮에 찾아왔다. 항상 같은 옷차림이었다. 분홍색 머리핀. 빨간 코트. 하얀 니삭스. 분홍색 부츠. 코트 아래의 다리가 예전에 비해 비쩍 말라있었다. 그러나 여전한 미소로 다가왔다. 안녕. 소소하지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도 안녕.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온다. 그는 그 애의 하루 속에 오직 자신만이 있기를 바랐다. 그의 하루 속에 온전히 그 애만이 있는 것과 같이.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 애가 먼저 운을 뗐다. 추워. 속뜻을 금세 알아챘다. 모든 신경은 작은 아이에게 곤두서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끌어안았다. 품속으로 들어왔다. 작고 마른 몸이 어린 새처럼 둥지를 찾는다. 그 애의 허름하고 메마른 둥지는 온 노력을 기울여, 껴안았다. 따뜻해. 어린 새가 말했다. 거짓인 걸 알았다. 둥지는 겉부터 속까지 차고 무뎠다. 난로처럼 주위를 덥히는 것은 바로 어린 새였다. 둥지는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 재미난 농담이라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그 애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은 나이가 되고 싶어. 그의 동공이 커졌다. 스물일곱의 나와 네가 만났으면 좋겠어.

스물일곱의 나와 네가 만났으면 좋겠어. 스물일곱의 나는 어른일 거야. 놀라운 일도 기적 같은 일도 없는, 어른일 거야. 스물일곱의 나는 시로나씨처럼 길고 멋스러운 코트를 입고 있을 거야. 그 때쯤 되면 나도 검은색이 잘 어울릴지도 몰라. 아니면 칼로스의 챔피언처럼 새하얀 정장을 입을 수도 있지. 어쨌든 더는 이런 옷은 안 입을 테니. 그리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할 거야. 구름시티 같은 향수도 뿌릴 거야. 그리고, 그리고. 스물일곱인 내가, 열 살인 너와 만났으면 좋겠어.

그 애는 그를 보지 않았다. 먼 하늘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알아볼 거니까. 스물일곱의 나는 어른이니, 뭐든 지금의 나보다는 나을 테지. 그리고 너는 아무 것도 모르던 열 살이니, 지금보다 나을 테고. 우리한테는 그게 더 좋았을 걸. 그게 더 좋았을 텐데. 그럼 내가 너를.

그는 그 애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말이 멈춘 사이 까무룩 잠이 든 것이다. 잠이 든 안색이 창백했다. 둥지는 어린 새를 상냥한 손길로 뉘였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스물일곱이 되어도 그 애는 빨간 코트가 어울릴 것이다. 높은 굽의 신발을 신지 않아도 눈에 띌 것이다. 짙은 화장이나 향수로 꾸미지 않아도 그저 미소 짓는 것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애가 스물일곱이건, 그가 열 살이건, 혹은 다른 나이의 다른 사람이건, 그는 그 애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붙잡았을 것이다. 물체의 형태에 따라 그림자가 바뀌듯 애정의 형상만이 달라졌을 것이다. 태양이 비추니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태양은 변하지 않으므로. 늘 같은 자리 같은 밝기로 빛나야하기 때문이다.

 


1차 수정 완료.







:
Posted by 새벽(dawn)



그는 어릴 적 머리가 좋은 소년이었다. 동네에 또래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또래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기계를 만지며 놀았다. 불확실하고 애매한 인간보다 기계는 훨씬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보기에 인간만큼 불완전한 존재는 없었다. 일률적인 체제를 고수하는가 싶으면서도 일탈을 원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들은 같은 대화, 같은 행동에 대해서도, 그 때 그 때 다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는 유년 시절 겪었던 몇 가지 세세한 일들을 기억한다. “같이 놀자고 말한 또래에게 싫어.”라고 답하자 일그러지던 아이의 표정,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하는 선생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몰라 가만있자 선생이 작게 내뿜던 한숨, 무표정하게 다친 포켓몬을 바라보자 아이답지 않은 그 얼굴을 썩 집어치우라고 날아오던 동네 아저씨의 고함.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일에 그는 전혀 익숙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소년은 사람들 사이에 머물 곳을 찾지 못했고, 어느덧 노력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소년의 마음엔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인간을 이토록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인간들에 비해 이지적이라 믿었던 자신조차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열이 끓어오르고 때로는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며 벌벌 떨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때로는 냉철한 그도 자신조차 예측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그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고, 그는 숱한 서적을 탐독하고 인간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연구 끝에, 그것이 감정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세상이 불완전한 것은 감정 때문이다. 어린 그는 이 감정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흔들리고 인간이 모순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포켓몬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추구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포켓몬을 이용해 야욕을 채우려는 인간들도, 이런 인간들을 내버려두는 세상도.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진리를 깨닫자 그의 목적이 단숨에 정해졌다. 망설일 틈도 없이 결정된 한없이 논리적인 결정이었다.

감정 때문에 세상이 이렇다면, 감정이 없는 세상을 만들면 될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의 새로운 바람은 그가 자라고 청년이 되면서 차근차근 진행시켜나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수완을 동원해 긴가단이라는 조직을 만들 수 있었고,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키기 위한 절차도 완비할 수 있었다.

 

소녀를 만나기 전까진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소녀를 보면 말을 잃곤 했다. 처음 보았을 때에도 그랬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말재간이 좋은 그지만 그녀 앞에선 어떤 말을 할지 잘 떠올리지 못했다. 청남색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쓸어내리며, 낯선 이에게도 방긋 웃는 작은 소녀 앞에 서면- 그는 방 안에서 홀로 기계를 만지던 유년으로 돌아간 듯 했다. 소녀의 미소는 어린 시절 그가 곧잘 상상했던, 그가 방 안에서 외로이 기계와 놀거나 책을 뒤적일 때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 앞에 나타나주기를 바랐던, 작은 천사의 미소와 닮아 있었던 것이다.

소녀를 볼 때마다 그는 그런 유년의 환상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야말로 그가 혐오하는 감정의 결정체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억누르려 해도 소녀를 만나면 또다시 그렇게 되곤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란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야 알았다.

어린 소녀. 깊은 바다와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화사한 빛깔의 원피스. 새하얀 비니와 개나리색의 머리핀. 자신의 포켓몬을 어루만지며 밝게 웃는 모습. 낯선 이에게도 다정하게 구는 모습.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포켓몬을 좋아한다.’ ‘포켓몬을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한다.’ ‘포켓몬과 함께 사는 세상이, 지금이 너무 좋다....’는 말들.

그녀의 이름은 히카리(). 긴가단의 두목, 천재였던 소년은 작은 빛과 같은 소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마 소녀는 모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 않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속으로만 애를 끓었을 뿐.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녀를 동경도 하였다가, 사랑을 하였다가, 어루만지고 싶다가, 이런 감정을 내어준 그녀가 밉다가, 증오스럽다가, 사라져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가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자신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싶은 모습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적막한 바람이 흐르는 창기둥 아래서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용히 당당하게 걸어오는 소녀를 보며, 그는 잠깐 소녀를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하는 답지 않은 사념에 빠져버리기도 했다. 결국 어릴 적 그의 망상 속 작은 천사는, 빛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의 앞을 막아서러 온 셈이다.

인생에 걸쳐 설계해 온 목표가 무너질 수 있는 극한 상황에서, 그는 심장이 흔들렸다. 두려움에 의한 떨림도, 곧 완성될 세계에 대한 기대감도 아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런 것들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자신에게 빛이 찾아와 준 것에 대한 기쁨으로 인한 두근거림이었다. 비록 이런 방식이긴 했지만, 결국 소녀는 그의 인생에 찾아왔고, 심장을 두드렸으며, 그리고 문을 열어주었다. 어린 소년이 꿈꾸던 상상 속의 천사처럼.

 

 

:
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