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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8. 00:53

[쥰히카(용식빛나)] Unrelished 글/포켓몬2018. 6. 8. 00:53

쥰히카_Unrelished

 

아마도 너는 봄하늘 아래 피어나는 무구한 꽃을 사랑했던 것 같다. 고작 추측인 까닭은, 너를 알고 지낸 십 년이 넘는 세월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고사리 만한 손으로 흙장난을 하던 시절부터 옆에 있었지만. 네가 노란색 가방을 매고 신오우를 횡단하며 신화와 전설의 모험과 맞닥뜨렸을 때도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 다음에도, 그로부터 많은 해가 지난 다음에도, 나는 줄곧 네 가장 친근한 벗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던 너를 기억하기에, 추측할 뿐이다.

 

그래도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날이면, 창가에 앉아 고즈넉하게 밖을 바라보며 코코아로 몸을 데우곤 했으니까. 평소보다 가라앉은 머리카락에 조금 담담해 보이는 눈동자. 말없이 살며시 턱을 괴고 있으면 맞은 편에 내가 앉곤 했다. 앉아도 괜찮냐고, 그런 상투적인 예의가 없어도, 너는 언제나 그 자리를 허락해 줬다. 그 사실이 늘 기뻤지만 나 역시 말은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왜냐면 너는 빗물이 흐르는 날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어린애 다운 미숙한 추측으로,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너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악하게도, 수 년 전까지 내가 너의 가장 훌륭한 이해자라고 자부했다. 나름 탄탄한 근거들도 있었다. 왜냐면 나는 네 고향친구이자, 소꿉친구이자, 라이벌 트레이너이자, 제일 오래 알고 지낸 벗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연과 호승지심과 세월이라는 낡고 허튼 무언가가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준다고 믿었다. 여행으로 너를 이끈 건 막무가내인 나였기에, 어쩌면 나는 너에게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너의 운명을 결정 지은 건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섣부른 망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너는 훨씬 전부터, 스스로를 빛으로 채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바보같던 나는 깨달음이 늘 한 걸음 늦었다.

 

열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수없이 많은 낯선 존재들에게 너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처음은 분명, 첫번째 포켓몬이었던 팽도리. 그 녀석은 너의 가장 아이 답고 순수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네 허리춤을 채운 다른 포켓몬들은 점점 더 많은 애정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모험길에서 만나게 된 별 같은 인연들. 나나카마도 박사님, 스모모나 아카네들, , 시로나, 또는 고요우 같은 사천왕들. 그들은 만나자마자, 네 천진한 매력에 흠뻑 빠져버려 금세 친구가 되기로 맹세하였으며 또. 나로서는 선사할 수 없는, 숨막히고 치열한 배틀의 스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건 말 그대로 별과 같은 경지라, 조금 기대를 받은 신인 트레이너따위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아카기와 같은 긴가단은 다른 의미로 네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생애 첫 분노와 적개심은 늘 차분했던 네 머리를 불 같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긴가단과 관련된 사건들은 늘 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든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차오를 수 있게, 넌 강해져야만 했다. 때로는 이기지 못한 울분을 못 참고 얼굴이 새빨개지고, 때로는 지키지 못한 슬픔에 젖어 눈물을 마구 쏟아내면서- 강해져야, 이길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간 강렬한 기억들은 전부,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자. 전부, 내가 짓게 할 수 없었던 표정들.

 

그리고 너는 신오우 가장 꼭대기에 올라 누구보다 빛나는 첫번째가 되었다. 최연소 챔피언, 신오우의 영웅, 전설을 다루는 수호자-. 무엇이든 너를 칭하는 멋진 수식어였고, 무엇이든 네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다만 나만이.

 

다만 나만이 너와 흙장난을 하던 시절에- 너의 손을 억지로 이끌어 예지호수로 데려갔던 시절에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번쩍이는 빛을 타고 너는 사라졌고, 나는 도태됐다. 그렇기에 이제는 추측 밖에 남지 않았다. 너에 대한 추측. 분명 수 년 전에는 자신감에 가득 찬 확신이었을 그 수많은 가설들. 모두 불확실한 맹점이 되어 공허한 머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추측 밖에 할 수 없게 된 날부터, 나는 결코 즐거울 수 없었다. 네가 봄꽃을 좋아하는 걸 아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꽃다발을 선심 쓰듯 선물하곤 했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네 맞은 편에 앉을 수 있게 된 이들도 무수히 많았다. 더이상은 특권은 없었고, 특등석도 사라졌다. 이제 나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네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미리 연락해 두지 않으면, 먼저 허락을 받아두지 않으면. 네 곁에는 늘 다른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자연스레 너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

 

그저 내가 첫 번째였을 뿐이다. 누구나 너를 만나면 맑게 개인 하늘을 보고 경탄하듯, 사랑에 빠지게 될 텐데. 다만 내가 그 아름다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첫번째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아아, 그제야 깨닫고 나면. 나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으면서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는 것이다. 마치 불경죄를 지은 신도처럼. 조용히 지옥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어째서 삶은 이토록 부지불식간에, 모든 행복을 상실할 수 있는지.

 

 


:
Posted by 새벽(dawn)
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노도 글/포켓몬2018. 6. 6. 17:25

아카히카(태홍빛나)_노도

 

수만 별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도 입에 담지 못한다. 진실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돌이켜왔던 나락의 파도가 궤를 달리해 무엇을 덮칠 지 모르는 탓이다. 기실 그다지 대단한 일도 아니다. 볼품없는 하나의 사항이다. 그것이 신오우 역사를 꿰뚫는 분수령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라도 조소를 터뜨릴 것이다. 그만큼 원인의 본질은 하찮기 그지 없었다. 깨달은 아카기조차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어느새 손목시계의 시침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숨겨진 세레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이 몇 번째인가, 세기를 그만둔 적은 없다. 아카기는 수에 밝았기에, 정확히 인지하고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횟수가, 터무니 없이 많아진 지금을 경험한 횟수, 스스로도 내세울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침이 정확하게 북쪽을 가리켰다. 동그란 모자를 쓴 아담한 그림자가 그의 발 밑으로 깔렸다. 수없이 겪어온 광경이지만, 어쩐지 가슴의 고동은 반복할수록 거세지는 것 같았다. 이제 앙증맞은 분홍색 부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하얀 비니를 쓰고 하얀 목도리를 두른, 새빨간 코트의 소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단의 적을 마주쳐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길을 잘못 든 소꿉친구를 만난 마냥 걱정스런 얼굴의- 양가적인 표정의 소녀가.

 

그리고 그는 웃었다. 각인된 기억은 미래 예지와 다름 없다. 그래서 좋았다. 되돌림을 멈출 수 없었다.

 

“…안녕?”

 

어제 싸우고 헤어진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어색한 머뭇거림. 열살도 넘게 차이 나는 적의 보스에게, 그런 말투를 구사하는 순진하고 겁 없는 소녀. 소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새하얀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아카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이 좋았다. 그녀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증거였으니까.

 

당신을 막으러 왔어. 예상했겠지만.”

 

그래.”

 

놀라지 않네? 정말 알고 있던 사람처럼. 아님, 감정이 없어서 그런 건지….”

 

이미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그럼, 배틀 해 줄래?”

 

그녀는 정말, 소꿉친구에게 마실 가듯 자연스레 배틀을 청했다. 처음에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연민하고 있다는 걸. 연민. 그토록 깊고 측은한 감정을 고작 10살 짜리 소녀가 그에게 품고 있다는 걸.

 

배틀은 수십 회를 상연한 연극처럼, 자연스레 같은 순서로 반복된다. 그는 이번에도, 구태여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첫 번째와 똑같은 명령을 내린다. 왜냐면, 그런 개입 한두 가지로 미래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그는 이 사실을 이미 몇 회차 전에 증명했다), 또 미래의 변화는 그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악의 보스에게 승리할 것이다. 신오우 역사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쓰러진 악의 보스는? 승리한 소녀는?

 

답하자면.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그녀는 신오우의 평화를 수호하고자 하였으나, 그렇다고 한 불쌍한 청년의 삶에서 눈을 돌릴 만큼 매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천진한 10살의 소녀가 품은 연민의 감정이란, 스스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의 대상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신오우에서 가장 끔찍한 인간을 혐오하는 대신 동정하는 사람. 그가 얼마나 크고 따뜻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품어졌는지. 무한한 포용을 느낄 적마다 그는 생을 느꼈다. 살아있음에 감복했다.

 

그래, 이런 볼품 없는 한 가지 사항이 모든 일의 사단이었다.

 

아카기는 웃었다. 소녀는 왜 웃는 거야? 하고 울상이 되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수록, 소녀는 슬퍼졌으나. 그녀를 이해하게 될 수록, 그는 기뻐진다는 사실을. 소녀는 너무 어려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아마 어른이 되어도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신오우를 구했구나, 축하한다. 몇 회 전부터, 그가 이 연극에 추가한 새로운 대사였다. 진심으로 패배에 승복하는지, 혹은 소녀의 승리를 비꼬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말투. 그는 이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겉보기에는 둘 중 하나인 것 같았지만, 사실 어느 것도 답이 아니었다. 아카기는 진심이었다. 마음으로, 그녀의 과거와 미래에 온누리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었다. 그녀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그 축복을 빌어주는 이가 자격이 없다 해도-. 최소한 그는, 이 연극을 주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웃지 않는구나. 승리가 기쁘지 않은 거냐?”

 

승리한 소녀는 웃지 않는다. 압승을 거두어도, 혹은 벼랑 끝에 몰렸다 승리를 거머쥐어도. 소녀는 이날 이후로 웃지 않는다. 연극을 아무리 되풀이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자 그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 난제였다.

 

그래서 물었다. – 그동안의 상연에는 없었던, 애드리브 대사.

소녀는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로 되묻는다.

 

그러는 당신은, 어째서 웃는 거야? 지고 말았는데….”

 

답하지 않았다. 배우의 목표는 승패가 아니다. 연극을 성황리에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니, 주연으로 무대 위에 서는 것이다. 소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 굳이 입에 담지도 않았다.

 

오늘 이후로는 영영 행복해지지 못할 사람처럼….”

 

그 말은 마치, 소녀가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 같았다.

연극의 주인공인지도 깨닫지 못한 여배우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본에 없는 대사를 중얼거렸다.

 

“…마치 오늘을 기다린 사람처럼….”

“….”

 

소녀는 웃지 않는다. 이 날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웃지를 않는다.

주위 사람들은 저주라고 했다. 아카기라는 저주가 들러 붙어, 활기차고 어여쁜 소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버린 거라고 했다. 미신 따위는 신봉하지 않았건만, 아카기는 쉽게 수긍해버리고 말았다. 실상, 그는 저주나 다름 없었다. 어리고 상냥한 소녀에게 들러붙어, 행복을 갉아먹고 사는 벌레.

 

그는 분명 노력했다. 찬란한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정말 그답지 않은 많은 시도를 했다. 전부 소용이 없었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하찮아서, 그녀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그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녀 곁에서 살아 숨쉬는 저주가 떨어져 나가면 된다. 아카기가 그녀를 떠나면 된다.

 

그러나 소녀라는 존재에서 멀어져 버리면, 그는 살아있음을 감지할 수 없었으므로. 정말로 세상을 미워할 뿐인 악한 주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기생하기로 했다.

소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하기 전으로. 소녀가 웃지 않게 된 시간- 그 전으로.

처음 만났던 그 날로. 그녀가 조금 아카기를 미워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수천 번 수 만번을 되돌리든-. 말라비틀어진 시간의 틈새에서 기생하기로 결심했다.

 

아카기는 흉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소녀가 한 말은, 예정된 마지막 대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연극은 끝을 고하고 있었다. 소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질 때. 그도 사라진다. 아니, 돌아간다. 그리고 재상연이다.

 

그는 허리춤에 숨겨둔 몬스터볼을 건드렸다. 세레비는 싫다고 했다. 작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더는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트레이너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세레비에게 고하는 한 줄의 명령과 함께- 연극은 막을 내렸다.

눈물을 떨어뜨릴 듯 아슬아슬한 빛의 동그란 눈동자가 필름처럼 동공에 찍히고,

 

늘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다음 회차도 즐기시길.

 

연극의 주관이자 주연의 공허한 외침이 텅 빈 객석에 울려 퍼졌다.

 


:
Posted by 새벽(dawn)
2017. 12. 4. 22:54

[썬문/구즈미월] 에나코코아 dream 글/포켓몬2017. 12. 4. 22:54

구즈미월_에나코코아, dream.

 


좋아하는 것은 에나코코아.”


!”


 미월의 말에 구즈마는 반사적으로 마시던 물을 뿜었다. 미월은 으엑, 지저분해,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구즈마는 되려 역정을 냈다.


, 꼬맹이, 뭘 그렇게 자꾸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 나는 스컬단 비밀암호를 외운 거 뿐인데? 전부 구즈마님이 좋아하는 거잖아. 집단구타, 갑주무사, 그리고...”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나지막이 읊는다.


에나코코아!”


어이, 놀리는 건 그만 둬.”


 물잔을 든 구즈마의 투박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미월이 예고없이 들이닥치기 전에, 구즈마는 방에서 에나코코아를 먹을지 그냥 물이나 마실지 고민하고 있었다. 목이 텁텁해서 물을 고른 게 다행이지, 에나코코아를 마시고 있었으면 장난질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왜 이게 놀리는 거야? 구즈마는 에나코코아가 부끄러워? 그건 모든 에나코코아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에나코코아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 말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건 엄연히 스컬단의 암호라고! 이걸 대지 않으면 네 방까지 못 들어 온단 말이야!”


시끄러워! 암호가 바뀐 지가 언젠데. 그리고 네 얼굴만 보면 조무래기 녀석들이 겁먹고 도망가서 제멋대로 아지트 안을 돌아다니는 거 아냐!”


 구즈마의 고함에 미월은 거짓울음을 짓는 꼬지지처럼 몸을 움츠린다.


--. 구즈마 무서워, 그렇게 소리나 지르고!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시커먼 스컬단 남자애들한테나 인기 있고-.”


네가 뭔 상관인데. 어서 썩 안 나가냐?”


. 내가 나가면 에나코코아 마시려고?”


조용히 안해?”


흐응-. 구즈마는 심술쟁이. 연약한 소녀에게 허구한날 소리만 지르고….”


 그래봤자, 무서워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누가 연약한 소녀냐? 혼자서 포 마을에 들어와 아지트에 있는 스컬단 녀석들을 다 무찌르고, 그 다음엔 릴리에와 별구름을 구한다고 에테르 재단에 쳐들어가 루자미네를 무력화하고, 울트라비스트와 싸우고 다음에는 알로라의 첫번째 챔피언 자리까지 거머쥔 미월이다. 그 누구도 연약하다고 칭하지 않을 테고, 외려 마주치면 벌벌 떨기까지 한다. 미월이 들어오자 꽁지가 빠져라 내뺀 스컬단 조무래기 녀석들을 봐라.


, 구즈마 위해서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 사왔는데.”


?”


 어느새 미월은 크로스 백에서 부시럭 거리며 작은 박스를 하나 꺼내 놨다. 며칠 전에 새로 출시된 에나코코아였다. 상자 겉면에는 뉴 블랜드- 더 감미롭고 달콤한-이라는 수식어를 귀여운 에나비가 웃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새로 나온 건데. 더 달고 맛있다는데. 관심 없니?”


! 내가, , 무슨.”


구즈마 얼굴 다 팔려서 싸네 마트 가서 이런 거 사 오지도 못하잖아~. 그렇다고 다른 애들에게 시키긴 좀 그렇고.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사왔는데. 갖고 싶지 않아?”


 구즈마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 가지고 있던 에나코코아는 통이 비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라니? 구즈마의 간식 거리를 쌓아두는 찬장을 채우는 심부름꾼이 있긴 있었다. 물론 스컬단의 조무래기였고. 하지만 그 녀석은 아지트에 위험 상황을 알리는 손짓을 자신을 멋지다고 칭찬해주는 제스쳐라고 착각하는 멍청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뉴 에디션이니 뉴 블랜드니 하는 걸 센스 있게 사오는 재주는 없었을 테다.


사왔다면, 받아주도록 하지.”


으음~? 그건 불합격 멘트인데?”


하아?”


 미월은 두 손으로 엑스 자를 표시하며 악동처럼 웃었다. , 나왔다. 한참 구즈마를 골릴 때 미월의 표정.


구즈마는 말이야, 무슨 츤데레 악당도 아니고, 그런 쓸모 없는 허세는 필요가 없단 말이지. 여자애들이 원하는 건, 그거야. 솔직하고 담백하면서 다정한 남자아이!”


복잡하네.”


구즈마처럼 막-소리 지르고. 거칠게 행동하고. 또 틱틱 거리면서 솔직하지 못한 남자는 인기가 없다 이거야. 알겠어?”


“…내가 왜 인기가 있어져야 하지?”


 근본적인 반문에 미월도 살짝 당황한 모양이다. 어라, 예상치 못한 전개였나.


그야 구즈마도 언젠가 여, 여자애를 좋아하고 사귀고 결혼해야 하니까! 그건 인간의 섭리니까 구즈마도 그렇게 되어야하지 않겠어? 설마 비혼주의자는 아니지?”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모르지만…. ,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한 여자랑 사는 거 아냐. 그럼 그 여자만 나를 좋아하면 되지 왜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하지?”


? 그 그건….”


 글쎄, 장난꾸러기인 미월도 여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턱에 손을 갖다대고 나름 골몰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잔뜩 깜빡이며 애써 답을 내본다.


그 여자애한테, 인기 있어지는 법이지.”


말이 달라졌는데?”


어쨌거나 대체적으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가 되면, 장래 구즈마의 아아내가 될 여자애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어? 일반론이야, 일반론!”


그래서. 그게 지금 네가 나를 괴롭히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어쩐지 구즈마의 시선은 미월이 들고 있는 신상 에나코코아에 꽂혀있다. 그걸 미월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자애가 뭔가를 선물하면, 아까처럼 흥 받아주도록 하지이런 게 아니라-. 좀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고마워. 너의 마음 잘 받을게하고 스위트한 미소를 날려 준다던지 하는게 낫단 말이야.”


너 미쳤냐?”


왜애!”


스위트한 미소라니 내가 가능할 거 같냐?”


 미월은 잔뜩 볼을 부풀리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가능해! 인간은 뭐든 가능해! 내가 챔피언이 된 거 보단 쉬울 거야!”


하아? 너 정말 말도 안 되는됐어. 그건 필요 없다.”


.”


 의외로 구즈마는 너무나 순순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상 에나코코아를 포기선언했다.


됐어. 그렇게까지 먹고 싶지는 않다. 네 말도 안되는 투정을 받아주면서까지 내가 왜….”


왜냐니, 인기가 있어지려면….”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됐어. 장난 치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뭐야. 갑자기 진지해져선. 구즈마 백수라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정곡을 찌르지 말아줬으면 한다. 구즈마는 뒤를 돌아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리 조무래기가 바보들이라도 새로운 걸 사오는 것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미월의 갖은 떼와 투정을 받아주는 것보단, 그게 수월하겠지.


, 됐어. 기왕 사 온 거니 그냥 두고 갈래. 구즈마는 에나코코아를 엄--좋아하니까. 내가 엄--선심 써서 두고 가는 거야.”


뭐냐, 그 건방진 태도.”


구즈마 흉내거든. 구즈마는 만날 그러니까~.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엄청 선심 쓴다는 듯이.”


왜 네가 삐지냐?”


흐응. 나 안 삐졌거든. . 이제 갈 건데. , 갈 건데….”


 간다 간다 말만 하고 미월이는 좀체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구즈마는 다시 뒤를 돌아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냐. 지금 나가서 리자몽 탔으면 벌써 너네 집까지 갔겠다.”


으음. 그래서 갈 거라고. 근데 너무 잠깐 있다 가는 거 같지 않니?”


 예전 같으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했겠지만. 구즈마도 몇 달을 미월을 상대하다보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이건 삐졌으니 달래달라는 신호다. 그냥 보

내지 말고, 더 놀아달라는 얘기다.


“…그럼 네가 사 온 에나코코아라도 마시고 가던지.”


오오! 방금 그건 합격!”


“…?”


 언제 삐죽거렸냐는 듯 미월은 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방금 그 권유, 완전 좋았어. 그래, 여자애를 이렇게 그냥 보내면 안 되는 거야. 알겠니?”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데나 앉아라. 뜨거운 물 가져올 테니.”


 뭐가 좋은지, 미월은 어느새 방긋방긋 미소를 흘리며 먼지 투성이 소파에 털썩 앉는다. 소녀의 변덕이란 종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구즈마는 낡은 전기 주전자(근처 마을에서 주워온 것이다)에 물을 담아 끓였다. 티 스푼을 꺼내 두 잔의 에나코코아를 탔다. 하얀 잔을 미월에게 건네며, 구즈마가 퉁명스레 군다.


먹어라. 네가 사왔으니.”


, 말투는 별로지만. 권하는 건 합격이니까 됐어~.”


 라고 제멋대로 또 평가를 내리곤 뜨거운 에나코코아를 후루룩 잘도 마신다. 구즈마도 한 모금 마셨다.


! 달고 맛있어.”


“…….”


구즈마도 그렇지?”


“…어어.”


 확실히 예전 에나코코아보다 훨씬 달작지근하고 깊은 풍미가 있었다. 미월이 하는 짓이지만 오늘은 제법 괜찮은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아아, 역시 모든 해봐야 안다니깐. 안 그래, 구즈마?”


. 음식도 먹어봐야 아는 거지.”


사람도 그래~. 사람도 다 겪어봐야 그때야 아는 거거든.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이 가진 가치나 깊이를 알 수 없어.”


갑자기 무슨 할애비 같은 소리냐?”


구즈마는 미월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뜬금없이 또 무슨 소리냐며 정색하려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걸 감지했다. 미월은 때때로 도를 터득한 현자처럼 어렵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툭툭 내뱉곤 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이 나이에는 분명 더 걸맞을 텐데.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녀의 내면을 너무 어른스럽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구즈마는 어른을 싫어했기에, 이미 미월이의 마음이 어른이 되어버렸다면 조금 슬플지도 모른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그거나 마셔.”


미월이는 구즈마에 대해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그건 아마구즈마가 스컬단의 보스라는 거, 섬 순례나 다른 일에서 실패한 아이들을 모아서 도피처를 만들

어주고 있다는 거그리고 구즈마도 그랬다는 것 정도 일까나….”


 구즈마도 그랬다는 말은. 구즈마도, 실패했었단 이야기다. 그렇게 포켓몬 배틀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는데도 섬의 캡틴이 되지 못했단 사실을 일컫는 거다. 구즈마는 소리를 또 버럭 질러야 했을까?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 말을 하는 미월이 유독 얌전하고 차분했던 탓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만이, 구즈마를 알게 해주는 걸까?”

“….”


왜냐면 봐봐. 나도 사람들이 아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되게 어마어마한 영웅에 천재 같잖아. 그런데 그게 나에 대해 정말 아는 사실이냐구.”


, 철학자가 되고 싶은 거냐?”


아아니. 나는 그냥그런 겉으로 보였던 성공이나 실패 말구, 이렇게 구즈마가 에나코코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구즈마에 대해 더 많이 알려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야.”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미월은 굳이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를 사들고 구즈마가 있는 아지트까지 찾아온 걸까. 구즈마는 뜨거운 김이 나오는 에나코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긴. 챔피언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보단, 사람 괴롭히길 좋아하는 치졸한 꼬맹이라는 게 더 너를 설명해줄지도 모르겠군.”


말이 심하네!”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라. 그리고 반성해라.”


난 별로그런 게, 아닌데.”


 방금 전까지 진중한 말들을 쏟아 내놓고, 또 입술을 삐죽거린다. 구즈마가 보기에도, 미월은 여자애의 일반론을 얘기하기엔 변덕이 심하다.


난 그냥 구즈마를 더 알고 싶을 뿐이야. 구즈마가 뭘 좋아하고, 구즈마가 좋아하는 에나코코아가 어떤 맛인지 궁금할 뿐이라고.”


 어쩐지 가슴을 쥐어짜내서 말하는 듯, 미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구즈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청한 소리를 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헤에? 정말 그걸 묻는 거야? 구즈마는 바보네!”


 잔뜩 힌트를 줘도 못 맞추네! 불합격이야. –라며 또 핀잔을 준다.


그건 간단한 거라고! 구즈마가 미월이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미월이가 구즈마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중요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도.”


“…미래를 어디까지 설계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너 왜 자꾸 스스로 미월이 미월이 부르냐? 설마 귀엽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 정말! 눈치도 없고! 그거나 마셔!”



그리곤 미월은 홍당무처럼 물든 얼굴을 휙 돌렸다. 구즈마는 역시, 종잡을 수 없는 꼬맹이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홀짝였다


옆에 앉은 사람의 온기 덕인지, 평소보다 따뜻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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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