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즈미월_에나코코아, dream.
“좋아하는 것은 에나코코아.”
“풉!”
미월의 말에 구즈마는 반사적으로 마시던 물을 뿜었다. 미월은 으엑, 지저분해,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구즈마는 되려 역정을 냈다.
“너, 꼬맹이, 뭘 그렇게 자꾸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 나는 스컬단 비밀암호를 외운 거 뿐인데? 전부 구즈마님이 좋아하는
거잖아. 집단구타, 갑주무사, 그리고...”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나지막이 읊는다.
“에나코코아!”
“어이, 놀리는 건 그만 둬.”
물잔을 든 구즈마의 투박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미월이 예고없이 들이닥치기 전에, 구즈마는 방에서 에나코코아를 먹을지
그냥 물이나 마실지 고민하고 있었다. 목이 텁텁해서 물을 고른 게 다행이지, 에나코코아를 마시고 있었으면 장난질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왜 이게 놀리는 거야? 구즈마는 에나코코아가 부끄러워? 그건 모든 에나코코아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에나코코아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듯 말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건 엄연히
스컬단의 암호라고! 이걸 대지 않으면 네 방까지 못 들어 온단 말이야!”
“시끄러워! 암호가 바뀐 지가 언젠데. 그리고 네 얼굴만 보면 조무래기 녀석들이
겁먹고 도망가서 제멋대로 아지트 안을 돌아다니는 거 아냐!”
구즈마의 고함에 미월은 거짓울음을 짓는 꼬지지처럼 몸을 움츠린다.
“뭐-야-. 구즈마 무서워, 그렇게
소리나 지르고!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시커먼
스컬단 남자애들한테나 인기 있고-.”
“네가 뭔 상관인데. 어서 썩 안 나가냐?”
“뭐. 내가 나가면 에나코코아 마시려고?”
“조용히 안해?”
“흐응-. 구즈마는 심술쟁이. 연약한 소녀에게 허구한날 소리만 지르고….”
그래봤자, 무서워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누가 연약한 소녀냐? 혼자서 포 마을에 들어와 아지트에 있는
스컬단 녀석들을 다 무찌르고, 그 다음엔 릴리에와 별구름을 구한다고 에테르 재단에 쳐들어가 루자미네를
무력화하고, 울트라비스트와 싸우고 다음에는 알로라의 첫번째 챔피언 자리까지 거머쥔 미월이다. 그 누구도 연약하다고 칭하지 않을 테고, 외려 마주치면 벌벌 떨기까지
한다. 미월이 들어오자 꽁지가 빠져라 내뺀 스컬단 조무래기 녀석들을 봐라.
“나, 구즈마 위해서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 사왔는데.”
“음?”
어느새 미월은 크로스 백에서 부시럭 거리며 작은 박스를 하나 꺼내 놨다. 며칠 전에 새로 출시된 에나코코아였다. 상자 겉면에는 뉴 블랜드- 더 감미롭고 달콤한-이라는 수식어를 귀여운 에나비가 웃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새로 나온 건데. 더 달고 맛있다는데. 관심 없니?”
“하! 내가, 그, 무슨.”
“구즈마 얼굴 다 팔려서
싸네 마트 가서 이런 거 사 오지도 못하잖아~. 그렇다고 다른 애들에게 시키긴 좀 그렇고.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사왔는데. 갖고 싶지 않아?”
구즈마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
가지고 있던 에나코코아는 통이 비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라니? 구즈마의 간식 거리를 쌓아두는 찬장을 채우는 심부름꾼이 있긴 있었다. 물론
스컬단의 조무래기였고. 하지만 그 녀석은 아지트에 위험 상황을 알리는 손짓을 자신을 멋지다고 칭찬해주는
제스쳐라고 착각하는 멍청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뉴
에디션이니 뉴 블랜드니 하는 걸 센스 있게 사오는 재주는 없었을 테다.
“사왔다면, 받아주도록 하지.”
“으음~? 그건 불합격 멘트인데?”
“하아?”
미월은 두 손으로 엑스 자를 표시하며 악동처럼 웃었다. 아, 나왔다. 한참 구즈마를
골릴 때 미월의 표정.
“구즈마는 말이야, 무슨 츤데레 악당도 아니고, 그런 쓸모 없는 허세는 필요가 없단
말이지. 여자애들이 원하는 건, 그거야. 솔직하고 담백하면서 다정한 남자아이!”
“복잡하네.”
“구즈마처럼 막-소리 지르고. 거칠게 행동하고. 또
틱틱 거리면서 솔직하지 못한 남자는 인기가 없다 이거야. 알겠어?”
“…내가 왜 인기가 있어져야
하지?”
근본적인 반문에 미월도 살짝 당황한 모양이다.
어라, 예상치 못한 전개였나.
“그야 구즈마도 언젠가
여, 여자애를 좋아하고 사귀고 결혼해야 하니까! 그건 인간의
섭리니까 구즈마도 그렇게 되어야하지 않겠어? 설마 비혼주의자는 아니지?”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모르지만…. 뭐,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한 여자랑 사는 거
아냐. 그럼 그 여자만 나를 좋아하면 되지 왜 많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하지?”
“어? 그 그건….”
글쎄, 장난꾸러기인 미월도 여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턱에 손을 갖다대고 나름 골몰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잔뜩 깜빡이며 애써 답을 내본다.
“그 여자애한테, 인기 있어지는 법이지.”
“말이 달라졌는데?”
“어쨌거나 대체적으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가 되면, 장래 구즈마의 아…아내가
될 여자애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어? 일반론이야, 일반론!”
“그래서. 그게 지금 네가 나를 괴롭히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어쩐지 구즈마의
시선은 미월이 들고 있는 신상 에나코코아에 꽂혀있다. 그걸 미월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자애가 뭔가를 선물하면, 아까처럼 ‘흥 받아주도록 하지’ 이런 게 아니라-. 좀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고마워. 너의 마음 잘 받을게’하고 스위트한 미소를 날려 준다던지 하는게
낫단 말이야.”
“너 미쳤냐?”
“왜애!”
“스위트한 미소라니 내가
가능할 거 같냐?”
미월은 잔뜩 볼을 부풀리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가능해! 인간은 뭐든 가능해! 내가 챔피언이 된 거 보단 쉬울 거야!”
“하아? 너 정말 말도 안 되는…됐어. 그건
필요 없다.”
“엣.”
의외로 구즈마는 너무나 순순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상 에나코코아를 포기선언했다.
“됐어. 그렇게까지 먹고 싶지는 않다. 네 말도 안되는 투정을 받아주면서까지
내가 왜….”
“왜냐니, 인기가 있어지려면….”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됐어. 장난 치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뭐야. 갑자기 진지해져선. 구즈마 백수라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정곡을 찌르지 말아줬으면 한다. 구즈마는
뒤를 돌아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리 조무래기가 바보들이라도 새로운 걸 사오는 것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미월의 갖은 떼와 투정을 받아주는 것보단, 그게 수월하겠지.
“쳇, 됐어. 기왕 사 온 거니 그냥 두고 갈래. 구즈마는 에나코코아를 엄-청-좋아하니까. 내가 엄-청-선심 써서
두고 가는 거야.”
“뭐냐, 그 건방진 태도.”
“구즈마 흉내거든. 구즈마는 만날 그러니까~.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엄청 선심 쓴다는
듯이.”
“왜 네가 삐지냐?”
“흐응. 나 안 삐졌거든. 흠. 이제
갈 건데. 나, 갈 건데….”
간다 간다 말만 하고 미월이는 좀체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구즈마는 다시 뒤를 돌아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냐. 지금 나가서 리자몽 탔으면 벌써 너네 집까지 갔겠다.”
“으음. 그래서 갈 거라고. 근데 너무 잠깐 있다 가는 거 같지 않니?”
예전 같으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했겠지만.
구즈마도 몇 달을 미월을 상대하다보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이건 삐졌으니 달래달라는
신호다. 그냥 보
내지 말고, 더 놀아달라는 얘기다.
“…그럼 네가 사 온
에나코코아라도 마시고 가던지.”
“오오! 방금 그건 합격!”
“…하?”
언제 삐죽거렸냐는 듯 미월은 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방금 그 권유, 완전 좋았어. 그래, 여자애를
이렇게 그냥 보내면 안 되는 거야. 알겠니?”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데나 앉아라. 뜨거운 물 가져올
테니.”
뭐가 좋은지, 미월은 어느새 방긋방긋
미소를 흘리며 먼지 투성이 소파에 털썩 앉는다. 소녀의 변덕이란 종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구즈마는 낡은 전기 주전자(근처 마을에서 주워온 것이다)에 물을 담아 끓였다. 티 스푼을 꺼내 두 잔의 에나코코아를 탔다. 하얀 잔을 미월에게 건네며, 구즈마가 퉁명스레 군다.
“먹어라. 네가 사왔으니.”
“뭐, 말투는 별로지만. 권하는 건 합격이니까 됐어~.”
라고 제멋대로 또 평가를 내리곤 뜨거운 에나코코아를 후루룩 잘도 마신다. 구즈마도 한 모금 마셨다.
“음! 달고 맛있어.”
“…….”
“구즈마도 그렇지?”
“…어어.”
확실히 예전 에나코코아보다 훨씬 달작지근하고 깊은 풍미가 있었다. 미월이 하는 짓이지만 오늘은 제법 괜찮은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아아, 역시 모든 해봐야 안다니깐. 안 그래, 구즈마?”
“뭐. 음식도 먹어봐야 아는 거지.”
“사람도 그래~. 사람도 다 겪어봐야 그때야 아는 거거든.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이
가진 가치나 깊이를 알 수 없어.”
“갑자기 무슨 할애비
같은 소리냐?”
“구즈마는 미월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뜬금없이 또 무슨 소리냐며 정색하려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걸 감지했다. 미월은 때때로 도를 터득한 현자처럼 어렵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툭툭 내뱉곤
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이 나이에는 분명 더 걸맞을 텐데.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녀의 내면을 너무 어른스럽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구즈마는 어른을 싫어했기에, 이미 미월이의 마음이 어른이 되어버렸다면 조금 슬플지도 모른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그거나 마셔.”
“미월이는 구즈마에 대해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그건 아마…구즈마가 스컬단의 보스라는 거, 섬 순례나 다른 일에서 실패한 아이들을
모아서 도피처를 만들
어주고 있다는 거…그리고 구즈마도 그랬다는 것 정도 일까나….”
‘구즈마도 그랬다’는 말은. 구즈마도, 실패했었단 이야기다. 그렇게
포켓몬 배틀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는데도 섬의 캡틴이 되지 못했단 사실을 일컫는 거다. 구즈마는 소리를
또 버럭 질러야 했을까?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
말을 하는 미월이 유독 얌전하고 차분했던 탓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만이, 구즈마를 알게 해주는 걸까?”
“….”
“왜냐면 봐봐. 나도 사람들이 아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되게 어마어마한 영웅에
천재 같잖아. 그런데 그게 나에 대해 정말 아는 사실이냐구.”
“너, 철학자가 되고 싶은 거냐?”
“아아니. 나는 그냥…그런 겉으로 보였던 성공이나 실패 말구, 이렇게 구즈마가 에나코코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구즈마에 대해 더
많이 알려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야.”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미월은 굳이 새로 나온 에나코코아를 사들고 구즈마가 있는
아지트까지 찾아온 걸까. 구즈마는 뜨거운 김이 나오는 에나코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긴. 챔피언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보단, 사람 괴롭히길 좋아하는 치졸한
꼬맹이라는 게 더 너를 설명해줄지도 모르겠군.”
“말이 심하네!”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라. 그리고 반성해라.”
“난 별로…그런 게, 아닌데.”
방금 전까지 진중한 말들을 쏟아 내놓고, 또
입술을 삐죽거린다. 구즈마가 보기에도, 미월은 여자애의 일반론을
얘기하기엔 변덕이 심하다.
“난 그냥 구즈마를 더
알고 싶을 뿐이야. 구즈마가 뭘 좋아하고, 구즈마가 좋아하는
에나코코아가 어떤 맛인지 궁금할 뿐이라고.”
어쩐지 가슴을 쥐어짜내서 말하는 듯, 미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구즈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청한 소리를 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헤에? 정말 그걸 묻는 거야? 구즈마는 바보네!”
잔뜩 힌트를 줘도 못 맞추네! 불합격이야. –라며 또 핀잔을 준다.
“그건 간단한 거라고! 구즈마가 미월이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미월이가 구즈마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중요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도.”
“…미래를 어디까지 설계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너 왜 자꾸 스스로 미월이 미월이 부르냐? 설마
귀엽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아 정말! 눈치도 없고! 그거나 마셔!”
그리곤
미월은 홍당무처럼 물든 얼굴을 휙 돌렸다. 구즈마는 역시, 종잡을
수 없는 꼬맹이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홀짝였다.
옆에
앉은 사람의 온기 덕인지, 평소보다 따뜻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