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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사는 소녀 (1)

노조마키

 

다시 만난 노조미는 여전히 가을날 하늘처럼 밝고 아리따웠다. 마키는 남몰래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 환자들이 어여쁘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갈고 닦여진 미소였다. 노조미는 반사작용처럼 따라웃었다. 그 표정이 수년 전과 같이 티가 없어서, 마키는 어쩐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안그래도 마키짱을 만나러갈까 했데이."

 

사투리는 완전히 입에 붙었는지, 예전보다 더욱 감칠맛이 났다.

 

"3년 만인가."

"정확히는 2년 반이래이."

 

벌써 그렇게 됐나. 마키는 새삼스레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봤다. 마키는 스물 다섯, 노조미는 스물일곱. 이제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였고, 어른이라기엔 조금 애매한 나이었다. 그래도 스쿨아이돌을 하던 시절에 비하면 탈피를 한 것처럼 여물어버린 인생이었지만.

 

"2년 반 동안이나 연락 한 번 안하다가, 이제와서 날 찾다니. 마키짱 너무하네."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먼저 메일 한번 보낸 적 없으면서."

"나도 나름 바빴구, 그래도 일년에 한두번 있는 뮤즈 모임만은 꼬박꼬박 나갔데이! 거기 마저 안 나온 마키짱 잘못이지."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나도 바빴거든?"

 

교류가 없었던 세월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노조미와 마키는 여고생처럼 시시콜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마키짱, 레지던트라 했나?"

"그렇지. 이제 겨우..란 느낌? 그래도 아직 가야할 길이 멀어."

"그래도 거의 다 왔네! 마키짱 대견하대이-"

"우왓. 나는 강아지가 아니거든? 그, 그리고 이 나이 되어서 머리 쓰다듬는 거, 좀 창피하지 않아?"

"나는 상관없는데, 마키짱은 여직도 부끄럼을 많이 타네."

 

그리고 노조미는 입가에 손을 대고 키득키득 거렸다. 정말, 사람이 변함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마키는 작게 웅얼거렸다.

 

"노조미는 아직도 그 일 하는 거야?"

"응! 그래도 나름 입지를 굳혀가고 있대이. 여전히 신출내기지만-."

 

노조미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란, 고교시절의 그녀와 닮기도 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직업이었다.

영화연출가. 노조미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오토노키자카를 졸업하고, 노조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영화 제작사에 말단으로 발을 들여, 바닥부터 구르기 시작했다.

노조미가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던가? 마키는 그런 기억은 없었다. 노조미와 절친했던 에리나 니코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그들에게 넌지시 물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우문이었다. 모두에게, 노조미는 점과 약간의 오컬트, 그리고 뮤즈를 사랑하던 소녀로 기억되고 있었다.

결국 마키는 노조미에게 직접 물어봤었다. 어째서 그 직업을 선택한 거냐고. 노조미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런 얼굴로, "그냥 해보고 싶었어"라고 답했다.

자신이 갈 길을 그렇게 손쉬운 이유로 결정하다니, 마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키는 어릴 적부터 잘 짜여지고 닦여진- 마치 일류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와 같은 진로를 밟고 있었으니까. 전채요리 다음에는 메인 메뉴, 그런 식으로, 오토노키자카 다음에는 의대 진학, 그런 식으로. 이미 치밀하게 정해져 있던 것이다. '그냥 해보고 싶었어'라는 터무니 없는 발상은 뮤즈 활동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재밌어? 영화 일은."

"그게 내 생각보다- 무시무시하게 힘들고, 어마어마하게 재밌데이! 참, 그 말 했었나? 내가 처음 제작사에 지원했을 때 면접을 봤는데 말이제-."

"했어, 그거."

"아. 그래? 벌써 오래 전 일이니께... 여튼, 그 때 면접관 분이 '왜 영화를 만들고 싶나요?'하고 물어봐서, '그냥 재밌어 보여서요'라고 했더니 무지 혼났다는 거 아이가. 뭐, 실제로 당시에 나는 영화엔 일자무식이었으니."

"어차피 얘기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본거야."

"후후. 그래도 어찌저찌 포장을 잘 해서 취직은 됐다는 거지. 스쿨아이돌로서 정점에 섰던 녀석이, 아무 발판도 없는 영화계에 발을 들이민 게 흥미로웠던가 보제. 아, 마키짱. 그 후로 벌써 7년이야! 7년이 지났어. 나도 이제 제법 뼈가 굵었단 말이지."

"그래, 그래."

"이제 내 이름으로 영화도 만든데이."

 

그 말에 마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노조미가 감독이란 얘기야?"

"그렇게 말하니 거창해보이긴 하는데. 후후, 엄청 쬐끄만 독립영화래이."

"그래도 엄청나잖아! 스물아홉에 감독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영화에 문외한인 마키라지만, 서른도 되기 전에 감독 타이틀을 거머쥔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지는 실감하고 있다.

혹시 노조미는 천재가 아닐까? 뮤즈 때도, 제일 마지막에 멤버로 합류했는데도 훌륭한 춤과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번엔 전혀 연고도 배경지식도 없던 영화계에서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머쥐려하고 있다. 이쯤되면 예술 쪽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별로, 그렇게 감탄할 정도는 아니래이. 20대 감독들은 종종 있고, 나보다 더 어릴 때 작품을 만든 사람들도 많으니까. 음, 오히려 9년 만에 첫 작품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좀 늦은 편일지도 모르제."

"하지만 노조미는 영화를 전혀 몰랐잖아. 그 전까지는 전혀 다른 일을 했었고."

"그러게, 그냥 속편하게 아이돌이나 계속 할 걸 그랬나? 마키짱이랑 같이."

 

농담처럼 던진 소리였지만 마키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속이 쓰리고 불편했다.

아이돌을 계속하지 그랬어, 라는 이야기는 부모님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에게 숱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마키는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외로움과 후회감에 마음이 따가웠다.

 

"세상에 어떤 일이 속이 편하겠느냐만은. 뭘하든 고통스럽고 즐거울 뿐이지."

"....인생 다 산 할아버지 같아."

"마키짱보다, 2년이나 더 살았다구?"

"인생 선배 노릇이라면, 사양할게."

 

녹음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니시키노 병원이 보였다. 노조미와는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 만났기에, 곧 들어가봐야했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연락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노조미는 노조미다. 뮤즈의 모두들 전부 어린애 같아서, 다들 십년 전보다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노조미는 유독 철부지 같았다.

2년 반 만인데도, 여실히 아이 같고 조금은 바보 같아서- 그럼에도 꾸준히 자신의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어서. 마키는 안심했다.

 

"나 이제 들어가봐야 돼."

"으응. 다음 번에 또 보자."

"노조미도 잘 지내."

"마키짱도. 내가 조만간 연락할게."

 

노조미와 마키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해후의 인사를 나눴다.

마키는 노조미를 만나고 안심했다.

지난 2년 반, 머뭇거림과 부끄러움에 연락도 하지 못하고 모임에도 나가지 못했던 건 노조미에게는 비밀로 하자.

2년 반 만에, 겨우 용기가 나서 먼저 메일을 보냈다는 것도 노조미에게는 비밀로 하자.

그동안 소홀했던 만큼. 아니, 두려웠던 만큼. 노조미에게 다가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하자.

그런 연유로, 마키는 안심했다. 하지만 너무 안심하고 말았다.

감정은 늘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어도, 인생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려주지 않는데 말이다.

 

 

 

 

노조미는 일주일 뒤 마키를 찾아왔다.

 

"안녕, 마키짱."

 

태연하게 하얀 침대 위에 앉아 흰 가운을 입은 마키를 응시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마키짱을 만날 일이 있을 거 같다고 하지 않았었나?"

 

여느 때처럼 장난기가 잔뜩 묻어있는 얼굴.

허나 마키는 우스갯소리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게 이런 얘기였어?"

 

영화를 만든다고.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영화를 만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고 있어야 할 노조미가, 어째서 니시키노 병원의 병실에 있는지.

새하얗고 볼품없는 십자가 무늬가 새겨진 환자복을 입고 있는지.

마키의 뇌는 인지한 현실의 풍경을 따라갈 수 없었다.

 

"뭐, 현실은 가끔 영화보다 더 영화 같기도 하니까."

 

마치 스크린 속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듯, 노조미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기에.

마키는 자신이 지금 노조미가 만든 허무맹랑한 영화 속의 배역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착각했다.

그녀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차가운 병동의 바닥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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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