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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각성


꿈을 꾸었다. 세실리아와 손을 잡고 숲을 거닐었다. 그녀의 손은 햇살을 머금은 솜털처럼 보드랍고 따사로웠다. 전에 없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나를 이끌었다. 세실리아의 하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커다란 불카모스가 춤을 추었다. 넘실넘실 바다를 유영하듯, 하늘하늘 구름 속을 헤치듯 춤을 추었다. 그 때마다 청명한 홍색 불꽃이 불카모스의 주위에서 반짝거렸다. 나와 세실리아는 웃으며 함께 불꽃춤을 보았다. 

 아아, 그건 분명 꿈이었다. 세실리아는 내 손을 잡아준 적 없고, 나를 보며 웃어준 적도 없다. 우리는 분명 둘 뿐인 친구였음에도. 나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아준 적이 없고, 세실리아를 보며 웃어준 적도 없다. 그녀는 나의 하나 뿐인 친구였음에도.

 그렇게 스스로 깨달아버린 나는, 부서진 꿈속에서 헐떡이며 깨어났다.


소녀가 성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결국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칠현인은 소녀가 사천왕을 이기고 챔피언의 방까지 올 수 없을 거라며 코웃음을 쳤었다. 자만심이 화를 부른 셈이다. N님이 아무리 우겼어도, 개치스님의 선에서 처리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철두철미한 개치스님마저도 소녀를 왕을 위한 시나리오의 일개 조연 정도로만 여겼다. 하나 지방의 마지막 희망으로 보이던 소녀가 N님 앞에서 처참히 무너진다, 그런 결말로 이야기를 꾸며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때론 야망에 눈이 뒤집혀 현실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확실하게 소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씨가 숲 전체를 활활 태워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소녀와 세실리아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리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휘청 복도를 걸었다. 방에 가서 몸이라도 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야….”

 다정하고 온화한 음색. 로트님이었다. 

“어디 아픈 게냐?”

“아닙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나는 그를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소녀와 N님의 이야기가 끝난다면, 플라즈마단도 어떤 식이든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 미래에도 내가 과연 로트님과 함께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주름진 눈으로 가년스런 딸을 달래듯 나를 보아도….

“저번부터 그렇고,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걱정 되는 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N님은 잘 해내실 테니까.”

“네에….”

“어떻게 되든 말이다…. 네가 있으면 잘 될 것 같구나. 여태껏 그래왔듯이 말이야….”

 그리 말하며 그는 내 손을 부여잡았다. 잔잔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대신 나도 모르게 낯선 단어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잘 된다는 게 어떤 거죠?”

 그것은 얼어붙은 세상처럼 날이 선 차가움.

“포켓몬의 해방이 잘 되는 일인 건가요?”

“미아야. 무슨 말을….”

“플라즈마단이 바라는 선의 세계라는 것이,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과 포켓몬을 떼어놓는 건가요? 그렇게 해놓고, 이 성을 지을 때처럼 계속 포켓몬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게 올바른 미래인 건가요?”

 로트님의 온화한 얼굴이 경직되어 간다. 

“정말 레지람이 N님을 영웅이라서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레지람은 한 번 하나를 멸망시켰는데 두 번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아요. 어쩌면 그 하얀 용은 파멸의 파트너로 N을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N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르지 않기로 했다. 단 한 번도 N을 세계를 구원할 선지자라고 여긴 적이 없다. 

“N의 마음에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죠? N의 마음이 해방되지 않았는데 그가 어찌 해방을 논할 수 있죠? 전부 거짓투성이야, 전부.”

 힘겹게 로트님의 손을 뿌리쳤다. 로트님은 경악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품에서 자란 것이 무리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돌연변이 새끼라는 것을. 개치스의 얄팍한 술수도 파악하지 못하는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그의 주름이 한층 깊어지고, 시선은 어지럽게 흩어진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에 후회는 없었다. 로트님을 실망시켰어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은 예전보다 더 명확한 박자로 울리고 있었다. 

 결국 로트님은 나에게 당분간 근신 처분을 내렸다. 나는 독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소녀와 N의 이야기가 끝난다면, 플라즈마단도 어떤 식이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세실리아도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맞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예전의 나인채로 머물 수 없었다. 해방도 꿈도 이상도 그 무엇도 없는 이곳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로 머물 수 없었다. 쿵쿵, 심장이 세찬 말발굽 소리처럼 전신을 울렸다.


 소녀가 성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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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5. 세실리아


며칠 지나지 않아 소녀가 다크 스톤을 입수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침내 소녀가 챔피언 로드로 향하게 되자, 성은 상당히 분주해졌다. 다크 트리니티에게 다크 스톤을 빼앗도록 시키면 될 것을, 굳이 N님은 소녀와 일대일로 결판을 짓기를 원했다. 어줍은 정의심과 비껴간 올곧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어차피 N님은 내세우기 좋은 깃발일 뿐, 플라즈마단의 열쇠는 개치스님이 쥐고 있었다. N님을 키운 것도, 해방이라는 환상을 덧씌운 것도, 플라즈마단을 조직한 것도 개치스님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를 거둬준 로트님은 휘장만 찬란한 플라즈마단의 썩어 문드러진 속살을 모르는 천진한 사람이라는 것도…플라즈마단에서 오랜 기간 있었던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참 밖을 떠돌던 세실리아가 돌연 성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깜깜한 그늘이 깔린 방 안에서 그녀는 단복을 벗고 말끔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낯빛은 어두웠지만 몸새가 정갈했다.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미련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새하얀 시트 위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앉은 그녀는 감감한 그늘 속에서도 찬연했다. 

 또렷한 눈망울의 그녀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 날에 대해 이야기 해줄게.”


 나에게는 전해야겠다고, 그렇게 덧붙이며 세실리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꽤나 먼 옛날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어둔 밤, 나는 숲으로 도망쳤어.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였지.

 나는 미아처럼 고아였어. 다른 점이라면, 나는 고아원에서 자라지 않고 먼 친척의 손에서 자랐다는 거야.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가까운 친척도 이웃도 남아있질 않았는데…그러다 어찌어찌 연락이 닿은 먼 친척이 있는 빌리지 브릿지로 가게 된 거지. 

 먼 친척은 악기를 만드는 것이 업이었던 중년 사내였어. 서글서글한 외모에 아담한 체격을 가진 그는 어릴 적 포켓몬을 데리고 여행도 했더래. 그는 외모만치나 마음도 너그러워, 그다지 연락도 없었던 먼 친척의 아이를 맡아서 키울 결심을 세운 거야. 나를 업어온 그는 작업장에서 한나절 내내 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어,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었지. 때때로 유년시절의 경험을 살려 어린 조카에게 포켓몬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어. 그밖에 수많은 맛난 음식과 재미난 장난감들, 즐거운 악기들을 그는 내게 선물했단다. 

 그가 건네준 것 중에 내 마음에 유독 들었던 것은 작은 하늘색 하모니카였어. 앙증맞은 꼬지보리가 새겨진 하모니카는 내 작은 입술이 닿으면 잘랑잘랑 살가운 울음을 냈지. 나는 사내에게서 배운 곡조를 하모니카로 읊으며, 가느다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춤을 추곤 했더랬지. 그러면 사내는 방글방글 함박웃음을 흘리며 쿵닥쿵닥 손발로 박수를 쳐줬어.

 비록 일찍 부모를 여의였지만 난 행복했어. 행복이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내게로 돌아온 것 같았달까. 사내는 자신이 가진 감성과 지식을 전부, 내게 내어주었어. 마치 제 딸인 것 마냥, 어르고 아끼기를 마다하질 않았지. 나도 그를 아비처럼 따랐고. 그 옆에서 언젠가 크면 구름시티로 가서 춤과 노래를 배워보고 싶다는 꿈도 키웠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전부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데 인간의 생이란 예기치 못한 파도에 송두리째 뒤집히곤 하잖니?

 어느 밤, 그가 술에 잔뜩 절어 귀가했어. 거실에서 악보를 읽고 있던 난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대번 알았지. …평소의 사람 좋은 웃음기는 사라지고, 썩은 생선처럼 눈빛이 흐릿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내가 몸을 움츠리자,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내 어깨를 왁살스레 잡아챘어. 그리고, 그리고는… 눈이 뒤집힌 황소처럼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 머리, 팔, 어깨, 다리…. 우악스런 손길이 점점 내 몸을 감치자, 난 새된 비명을 지르며 책으로 그의 머리를 세게 쳤고…그가 잠시 머리를 붙잡고 멈춰선 사이, 재빨리 몸을 굽히고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어. 날 찾는 사내의 목소리가 천둥번개처럼 쩌렁쩌렁 뒤를 쫓아왔어. 그럴수록 맨발로 마구 달음박질쳤어.

 얼마나 내달렸을까, 난 이름 모를 풀숲에 다다랐지. 헉헉 차오르는 숨을 여미지도 못하고 근처 나무에 아무렇게나 기댔는데, 어느새 발밑까지 거무죽죽한 어둠이 깔려있었어. 종알종알 귀뚤뚜기만이 시끄럽게 울어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어. 연못에서 잉어킹이 뻐끔하고 입술을 벌리고 튀어 오르자, 그제야 정신이 난 거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고…. 이제는 더 이상 마음도 몸도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러자 투명한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어. 이젠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이 없다…. 세상은 여리고 어린 소녀에게 잔혹하고 무자비해. 다정함을 주고 또 버림을 주다니. 난 고작 열 살이었는걸. 시야를 가린 촉촉한 눈물을 닦아내자 까무룩한 어둠 밖에 보이질 않고, 속은 더 아득하고 처연해, 끝도 없고 색도 없는 구멍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짙은 검정뿐인 시야에,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스며들었어.

 눈물을 흘린 탓에 헛것을 본 걸까? 그런데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새하얗고 새빨간 빛이 어른거리는 거야. 헛것이 아니었던 거지. 

 그것은 포켓몬이었어. 부슬부슬 하얀 털과 불꽃너울 같은 주홍색 날개를 두른 포켓몬. 검은 얼굴 한가운데 박힌 날이 선 눈은 전기돌처럼 시퍼렇게 빛이 났지만, 어쩐지 상냥한 눈빛을 가진 포켓몬. 난 처음 보는 포켓몬이었어. 이렇게 크고 화려한 포켓몬은 본 적이 없었거든. 더군다나 선녀처럼 하늘거리는 빛을 감고 있다니…. 그 포켓몬은 예전에 너에게 말했던, 그래. 불카모스였어.

 포켓몬은 춤을 추기 시작했어. 먹색으로 물든 밤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몸이 달처럼 떠올라 작은 별빛을 이끌었고. 깃털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다가 불새처럼 강직하게 날아올랐지. 그러다 이내 빙그르르, 나긋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촛불처럼 타오르는 날개를 펄럭였어. 불카모스의 보드라운 몸짓은 내 눈앞에서, 그러니까 나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어.

 호젓한 하늘 아래 일렁이는 춤에 넋을 잃고 말았어. 이토록 아름다운 춤사위라니, TV의 포켓몬 뮤지컬에서도 본 바가 없었으니까. 내 두 눈의 눈물은 어느새 마르고, 초롱초롱한 별빛이 박혀 있었지. 그래. 그 춤을 볼 때만큼은 내 본래의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무구하고 티 없는 그것들을….

 바스락. 하고 등 뒤에서 나무가 밟히는 소리가 났어.

 포켓몬은 춤을 멈추고, 난 뒤를 돌아보았어. 그 자리에는 초목과 같이 소년이 서 있었단다. 무던해 보이지만 경직된 얼굴의 소년…. 그는 하얀 몸을 이끌고 사뿐히 걸어오며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넸어. 

 그 모습을 시야에 담고, 그 목소리를 두 귀로 확인하자 내 심장이 거인에게 밟힌 듯 쿵쿵 내려앉았어. 큼지막한 발자국이 가슴에 찍히고 멍이 들고, 멍이 든 자리에는 미열이 나고 투닥대는 화음이 울렸고….

 응, 그래. 이건 내가 N님을 만난 날의 이야기야.


****


이야기를 마치고 세실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가 겪었던 일들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가 묻지 못해 알지 못했던, 묵혀두었던 그녀의 설움과 맞닥뜨리자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그녀에게 섭섭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세실리아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이젠 그 먼 친척의 소재조차 모른다고. 중요한 것은 현재라고….

“그래도 나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소녀의 얼굴을 보고 온 날, 계단 위에서 눈물을 쏟던 세실리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성으로 돌아오고, 오래된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고, 응어리진 것을 모두 풀어내면…그녀는 평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세실리아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덤덤했다.

“나아졌다라…. 그저 인정했을 뿐이야. N님에게 해방이 온다면…그걸 누군가 줄 수만 있다면. 그 주체가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그걸로, 괜찮은 거야?”

 나는 그녀가 나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녀가 나아지기 위해서 아직 남은 것들이 많았다. 

“으응.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아. 고마워, 미아.”

 세실리아는 창 너머의 머나먼 하늘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는 N님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 날의 꿈결 같던 불꽃춤을 떠올리는 걸까. 

 어느새 하늘에서 푸른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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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4. 영웅의 그림자


두 영웅이 있었다. 

 두 영웅은 같은 시각,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두 영웅은 위대한 드래곤 포켓몬과 힘을 합쳐 하나를 건국했다. 

 하나에서 둘로 나뉜 형제의 몸처럼, 두 사람의 의견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형은 진실을 원했고 동생은 이상을 쫒았다. 형제의 마음이 갈라지듯 드래곤 포켓몬도 몸을 둘로 나누었다. 

 진실을 찾아 새로운 선의 세계로 이끄는 하얀 용과 이상을 찾아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이끄는 검은 용. 

 두 마리의 용은 각각 형과 동생의 편이 되어 전쟁을 시작했다. 하얀 용이 내뿜는 거친 화염의 불길이 산천초목을 불태웠다. 검은 용이 내리친 푸른 번개의 칼날이 창천과 대지를 갈랐다. 

 두 형제가 세운 나라가 두 형제로 인해 멸해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화해를 청하려 했다. 그러나 형제의 아들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온 누리는 격정과 불안에 휘말렸다….

 결국 두 드래곤 포켓몬은 번개와 불꽃으로 하나를 순식간에 멸망시키고 사라졌다.


하나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 이야기다. 한낱 구닥다리 옛말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라이트 스톤과 다크 스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우리- 플라즈마단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모두들 진실을 추구하고 선의 세계를 이룩할 하얀 용이야말로 N님에게 어울린다고 믿고 있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전설이 진짜라면, 전설 속 포켓몬은 이미 한 번 세상을 쇠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존재다. 그런 존재가 두 번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 두 마리의 용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어지럽고 타락한 지금의 세계를 본다면…. 그렇다면 같은 결정을 내릴 지도 모른다. 이토록 추하고 더러워진 세상이라면 차라리 부수는 게 낫다고, 그렇게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


용나선탑에 투박한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N님은 연녹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겉모습은 마치 새와 같이 부드럽고 유연한, 하얀 용. 레지라무는 N님 앞에 나긋하게 고개를 숙였다. 용은 마치 왕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처럼 경건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얀 용은 N님을 자신의 영웅으로 택했다.

 세실리아는 내 생각만큼 들떠있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하듯 서 있었으나, 입가에는 약간의 웃음기도 없었다.

 귓가에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워커가 땅에 부딪히는 익숙한 소리. 나는 시선을 돌렸다.

 소녀가 차오르는 숨을 겨우 참아내고 N님의 앞에 서 있었다. 세실리아의 얼굴이 돌연 사색이 되었다. 반면 N님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 그의 눈에 도대체 무엇이 보였기에, 저 소녀가 얼마나 특별하기에, 그렇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약속을 건네는 것일까.

 자신이 한발 늦은 것을 깨달은 소녀는 이를 악 물고 외쳤다. 그녀가 꿈꾸는 이상을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분명 행복할 거라고.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새로운 희망은 찾아올 거라고. 그렇기에 그를 막아낼 것이라고. 

 그리고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소녀를 바로 보지 않고 등을 졌다. 소녀는 목소리마저 세실리아와 비슷했지만 소녀의 언동은 세실리아와 닮은 바가 하나도 없었다. 소녀의 얼굴은 세실리아와 빼다 박았지만, N님은 세실리아가 아닌 소녀만을 눈과 귀에 담았다.

 하얀 용이 푸르르 새빨간 화염을 뱉었다. N님은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소녀는 담담하게 그의 뒷모습을 구시했다. 그녀의 눈에서 타오르는 결의는 사뭇 무겁고 단연했다. 그리고 나는 세실리아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오래된 전설처럼 퇴색한 계단…. 세실리아의 몸은 마른 솜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솜을 이고 걷는 나귀처럼 묵묵히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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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