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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온 X 트레이너- Love Portion

 

자아, 모르모트 군.”

 

허스키하고 나긋한 특유의 목소리. 그 호칭으로 불리는 건 꽤나 오랜만이라, 트레이너는 두 눈을 깜빡이며 타키온을 본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정체 물병의 핑크색 물약.

 

근일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 본, 신약이라네. 어때, 친히 실험체가 되어주지 않겠나?”

 

긴 소매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 “후후하고 낮게 웃는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지만, 어쩐지 트레이너는 이 마저도 제법 귀엽다고 여겼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그런데 우마무스메를 위한 약이라면, 인간인 내가 먹으면 실험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아니. 이건 우마무스메를 위한 약물이 아니라네. 으음, 적확한 설명을 하자면, 자네가 먹어야지만 정밀한 분석을 할 수 있겠지.”

 

 타키온은 빙글빙글 삼각 플라스크를 돌린다. 안광이 없는 눈동자가 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자네, 그 때 내가 말했던 실험을 기억하는가?”

실험? 무슨 실험?”

 

사실, 타키온이 행한 실험은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이 많아 그녀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트레이너는 알지 못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감정에 대한 실험 말일세.”

아아, 맞아! 그렇지. 그런 실험을 한다고 그 날 잔뜩 데이트를 했었지. 엄청 재밌고 좋았고, 타키온이 귀여웠지.”

“…….”

 

스스럼 없는 트레이너의 표현에, 타키온이 말을 잇지 못한다. 어쩐지 귓볼이 새빨갛다. 분명 그 때만 해도 눈치 없는 대답만 하면서 분위기도 잡을 줄 모르는 녀석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능글능글, 빨간불도 없이 저렇게 훅 들어오곤 한다. 흐음-. 한 번 헛기침을 하고, 타키온이 입을 열었다.

 

기억 난다니 다행이군. 이 신약은 그 실험의 연장이라네. 그러니 인간인 자네가 시음한다면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나? , 모르모트군.”

 

타키온이 액체를 트레이너 눈앞에 들이민다. 이러니 어쩐지 시야가 온통 핑크빛이다.

 

마셔보게. 큭큭.”

으음….”

 

 몇 년전이었다면, 타키온의 기세에 밀려 단숨에 들이켰겠지만, 지금의 트레이너는 어째….

 

그래서 이게 무슨 약이라고?”

 

 어째 순순하지가 않다.

 

그 때 실험의 연장이라고, 주구장창 몇 분 동안 읊어주지 않았던가? 모르모트군. 자네의 우수함은 어디로 갔나? , 어서….”

그 말은 그러니까, 이걸 마시면 어떤 [감정]이 생긴다는 거지?”

 

 그리고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큭큭. 그래. 모르모트 노릇도 수 년을 하다 보니, 척하면 척이로군.”

타키온--. 설명이 부족해. 그래서 어떤 [감정]이 생기는 건데? 설마 타키온을 싫어하게 되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러면 무척이나 곤란하다구.”

곤란하다? 곤란하다라….”

 

 게다가 거절의 의사도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곤란한 건 타키온 쪽이다. 왜 몇 년 전처럼 휘둘려주지 않는 것인지. 긴 소매로 다시 입가를 가린다.

 

당연히 곤란하지! 타키온은 내 최고의 우마무스메니까, 타키온을 미워하게 된다거나 그런 건정말 끔찍한 걸.”

자네 답지 않게 맹랑한 발언이었다만. 애석하게도 그런 효과는 없다네. 애초에, [혐오][증오]의 감정은 그다지 관심 연구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그럼? 그럼 어떤 건데?”

 

 하아. 타키온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쩐지 불편한 표정으로 설명을 잇는다.

 

기억을 한다면서, 왜 중요한 부분은 두어번 설명하게 만드는 겐가. 그때도 말했다시피, 열정이나 정열에서 발생하는 힘이다. 박수 소리에 무거워진 두 다리가 나아가고, 응원하는 목소리에 또 한 걸음 더 디딜 수 있게 되는 불가사의한 동력원 말일세.”

“……그렇다면, 역시 나를 실험대상으로 쓰는 건 의미가 없겠는걸? 왜냐하면….”

 

 타키온은 침을 꼴딱 삼켰다. 또 무슨 맹랑한 발언을 하려고?

 

왜냐하면 난 이미 타키온에게 홀딱 빠져서 매일매일 정열이 넘치는 상태라, 더이상 상승할 힘이 없는걸?”

“………….”

 

 말을 잃었다. 대체, 대체 이 녀석은….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아- 타키온이 보고싶어! 라고 생각해서 엄청 일찍 학원으로 나왔거든. 아침에 빈 교실에서 연습 일정도 순식간에 다 써내려 갔어. 그리고 타키온을 만났는데, 오랜만에 가운을 입고 실험도구를 만지는 걸 보니 또 그게 너무 귀여워서…. 타키온이 부탁한다면 신약은 하루에 수십 번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

그치만 그렇게 먹어도 타키온의 연구에 도움이 안된다면, 나는 트레이너로서 실격이잖아? 타키온은 최고의 우마무스메인데, 트레이너인 내가 도움이 안 된다면 큰일이잖아? 그것만큼 또 속상한 일은 없다구. 저기, 타키온….”

“……….”

타키온, 듣고 있어?”

 

 물론 듣고 있다.

 

얼굴이 왜 그렇게 새빨개졌어? 혹시 열이 나는 건 아니지? 몸이 안 좋아? 연습 일정을 수정할까?”

“……모르모트 군….”

 

재잘재잘 잘도 떠들더니, 타키온의 부름에 강아지처럼 바로 자리에 앉는다.

 

! 타키온.”

자네는정말이지 흥미로운 실험체로군. 우수하다고 해야할지, .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해야 할지, 정의 내리기가 어렵군.”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 모르모트군….”

 

 트레이너를 부르는 타키온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리고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다. 약은 아직 테스트도 못해봤는데, 벌써 효과가 나타난 것 같다.

 

신약은 됐네. 자네 성향은 호오(好惡)가 보여 실험체로 쓰려고 했는데…. 무용한 생각이었던 듯 하네.”

~ 내가 타키온을 많이 좋아하긴 하지.”

 

 3자가 들으면 난해하기 그지 없는 타키온의 언사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제멋대로 대답해버리는 트레이너가 싫지는 않다. 그렇지만 굉장히 낯간지럽다.

 

“……실험은 중단일세. 오늘은 자네가 아침부터 심혈을 기울여 짜 온 일정대로 연습을 하도록 하지.”

와아! 고마워.”

자네는 말일세….”

 

타키온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말한다. 어쩐지 체념한 말투다.

 

최악의 모르모트일세.”

그렇구나….”

 

악담을 듣고도, 트레이너는 해실해실 웃음을 흘린다.

 

최악이라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가?”

. 그렇게 감정이 가득 담긴 표현을 타키온에게 들으니, 타키온 실험은 이미 성공한 거 같아서.”

“……하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타키온의 손을 잡는다. 예상치 못했는지 타키온의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펴진다.

 

“……일일이 나열하면 입만 아프겠네. 일단 가지.”

!”

 

 이렇게 되면 이제 누가 모르모트인 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실험은 실패다. 타키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따뜻한 온기가 스며드는 트레이너의 손을 힘껏 잡았다.

 

 

:
Posted by 새벽(dawn)


1.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하지만 너무 얕게 묻어서 금방 드러나곤 한다. 무심히 길을 걸을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하늘을 보며 서 있을 때, 조금만 발을 굴러도 흙 속에서 튀어나오고 만다. 그 때마다 나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흙을 도로 덮었다. 깊숙이 묻지 않은 까닭은 그럴 수 없었던 탓이다. 나는 유약하다. 한 번의 버림에 모든 것을 잃을 정도로 유약하다. 이런 나를 지탱해주는 건 첫사랑이 바로 발밑에 있다는 안도감뿐이다. 
 체육관을 떠났다.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다. 문하생들은 토끼눈을 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미 계획한 일이었다. 포켓몬이 아팠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포켓몬들이 어느새 병을 앓고 있었다. 포켓몬 의사는 무리한 배틀에 피로가 축적된 탓이라고 했다. 과한 연습과 배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던 휴식 시간. 근근이 버텨오다 마침내 그들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적신호를 킨 것이다. 의사의 진단을 듣고 나서야 나는 포켓몬들을 살펴보았다. 아쿠스타의 표피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누오의 피부는 까칠했고, 골덕의 손발톱은 망가져 있었으며, 라프라스는 뿔과 귀가 상해있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구보다 물 포켓몬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악덕 고용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쓸었다. 포켓몬들은 저들이 미안하다는 듯 낑낑 울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날, 나는 그날 바로 결심했다.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체육관을 떠났다.
  짐의 간판을 떼던 날을 기억한다. 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부임할 때는 제법 호기로웠던 모양이지만, 해가 지날수록 낯간지러워진 문구다. 그만큼 정이 많이 들기도 했다. 잡지에서 소개될 때도, TV에서 인터뷰를 나왔을 때도, 우연히 나를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도…말괄량이 인어공주, 카스미. 하고 그 말부터 나왔으니까. 오래된 간판은 내 손으로 내렸다. 문하생과 주민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퇴야. 자신에게 벌을 주듯 말했다. 난 이제 은퇴야, 모두 잘 있어요. 그건 벌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루네시티로 향했다. 호우엔은 바다가 넓고 공기가 청정하다. 그 중에서도 바다로 둘러싸인 루네시티는 물타입 포켓몬에게 안성맞춤이다. 알고 지내던, 같은 물타입을 다루는 미쿠리씨의 소개로 새로운 섬에 정착할 수 있었다. 미쿠리씨는 내가 낯선 호우엔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사실 모두가 걱정했다. 에리카는 자신의 가까이에 와서 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벌이었다. 그러니, 좀 더 먼 곳으로 가야했다. 벌의 의미도 모르는 남자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했다. 
 그래서 루네를 택했다. 해변에 차오르는 푸른 물살에 살이 닿았을 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토록 낯선 땅과 바다, 그 안에 나만이 덩그러니 존재한다. 이제는 좀 더 깊게 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순간을, 지하 깊숙이 던져 넣을 것이다.
 상냥한 주민들은 이방인을 반겨주었다. 미쿠리가 미리 언질을 준 것인지, 주민들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짐리더였다는 것, 머나먼 칸토에서 왔다는 것, 물타입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며 열거하는 정보들은, 현재의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는 이제 짐리더도 아니며, 칸토에 살지도 않고, 더 이상 배틀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완성해 주었던 모든 미사여구들이  분히 사라져갔다. 내가 걸어온 길은 해변가였다. 모래알 위의 잔상은 찰나의 파도에도 지워진다. 내가 소유했다고 믿었던 것들도… 해변의 발자국처럼 무연한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새 침대 위에 누웠다. 세제 냄새가 싸하게 코를 자극했다. 바로 천장을 응시한다. 천장은 하얗다. 네가 있던 산도 그랬다. 새하얀 눈이 끊임없이 허공을 메웠다. 너는 늘 그 산에 있었지만, 난 단 한 번도 너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네가 없을 때만 내가 산을 올랐기 때문이다. 어둑한 환상에 다리가 시려왔다. 
 첫사랑의 순간은 땅에 묻었다. 이제 더 깊숙이 묻을 것이다. 아니면 곧 닥칠 장마에 전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차고 시린 물살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눈꺼풀 사이로 쓴 잠이 가라앉았다.


2. 

“아아, 졌잖아.”
 소년은 검은 머리를 벅벅 긁는다. 고개를 세우고 한마디를 던져준다.
“당연하지. 불타입인 파이리로 물타입 짐리더인 나에게 도전하다니, 언어도단이야.”
“하아-역시 기합만으로는 안 되는 거였나.” 
 짧은 투덜거림. 
 소년은 신참 트레이너였다. 불과 일주일 전에 포켓몬을 받고 고향을 떠나 모험길에 올랐다. 불과 일주일 만에, 타케시에게서 뱃지를 얻고 달맞이 동굴을 건너온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는 신참이었다. 배틀을 시작한지, 포켓몬을 다룬지 불과 일주일이다. 재능이 여물기에는 한창 모자란 시간이었다. 
“기합으로 상성을 이겼단 이야긴 들어본 적 없는 걸. 후우, 배틀 상식도 없구나.”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배틀을 시작했을 무렵, 천재라고 불리던 시절. 내가 차세대 챔피언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나조차도, 기초지식도 없어 시행착오를 겪기 일쑤였다.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재능에 덧씌웠던가. 소년을 보니 절로 옛시절이 떠올랐다. 선배로서, 짐리더로서, 제대로 조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짐에 도전할 거면, 풀이나 전기타입 포켓몬을 데려오는 게 좋아.”
“그렇구나.”
“뭐, 데려온다고 해도-레벨 차이가 심해서 이기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파이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할 테니까.”
 듣는 태도가 엉망이었다. 다른 곳을 보는 채로, 대충 고개만 끄덕인다. 어린 여자애가 짐리더라서 무시하는 건 아닐까. 그리 생각되니 화가 갑자기 솟았다.
“너 말인데, 짐리더가 하는 말이라면 좀 더 제대로 듣는 편이….”
“파이리가 아니라 리자드면 괜찮을까?”
“뭐?”
“리자드가 되면 훨씬 세지잖아. 그러면 너에게 이길 수 있을까.”
 어이가 없어 숨이 턱 막혔다. 
“잠깐. 내가 한 얘기는 들은 거니? 불타입은 상성이 나빠서 안 된대두.”
“다 들었어. 풀이나 전기 타입이어도 레벨 차가 심하면 소용도 없다며. 그러면 새로운 포켓몬을 잡는 것보단, 파이리를 강하게 만드는 게 낫겠네.”
“뭐….”
“나는 파이리가 좋으니까.”
 그리고 소년은 유유히 짐을 나섰다. 내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파이리가 좋으니, 파이리로 이기겠다. 파이리는 아마 그의 첫 번째 포켓몬인 것 같았다. 첫 번째 아이에게 유독 정이 많이 가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건 좋다. 그래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분을 식혔다. 저런 태도라면, 다시 도전해도 분명 내가 이길 것이다. 나는 재능을 과신해 오만해진 트레이너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 녀석들은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혀 싹이 잘리고 만다. 안타깝지만, 그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빤히 보였다. 


타케시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 어절부터 그 소년의 이야기를 한다. 
“그 녀석, 카스미네 체육관에 왔었지?”
“응. 어제 왔다 갔어.”
“그래, 범상치 않은 아이야. 재능이 있더군.”
 눈살을 찌푸렸다. 
“배틀은 내가 이겼어.”
“네게 이기기엔 아직 조금 모자랄 테지. 그런데 그 녀석, 하루하루 엄청나게 발전하더군. 무서울 정도로.”
 그런 말투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모험을 시작한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된 트레이너에게 저런 대우는 과하다. 
“재능은 둘째고…태도가 영 아니던 걸. 내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안 들어.”
“하하, 네 이야기뿐만이 아니야. 원래 그런 식이라고.”
“그럼 웃을 일이 아니잖니.”
“재밌는 건, 사실은 전부 듣고 있다는 거지. 이야기를 제대로 걸러서 듣고 자양분으로 삼는다…그리고 성장한다, 그게 녀석의 방식인 거 같더군.”
 하나도 재미없었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이야기가 전부 그 아이에 대한 것들뿐이다. 입을 삐죽 내밀자, 타케시는 그제야 말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다시 올 거라며, 그 때를 기대해보라고 덧붙였다.
 대답 대신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거뭇거뭇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오늘은 도전자고 뭐고 없을 성 싶었다. 게다가 비가 내린다면, 파이리를 바깥에서 훈련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운이고 환경이고 그 애한테 따라주는 게 없었다. 내가 그리 말하자, 타케시는 빙긋 웃었다. 그러지 말고 기다려 봐, 넌 판단이 늘 빠르더군…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지. 
 먹구름 사이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2.

새 침대에서 케케묵은 환상을 보았다. 납덩이를 끌어안고 물속에 잠기듯 기분이 무겁다. 오래된 시절의 꿈은 좋지 않다. 꿈의 가지 끝에 설핏 걸렸던 그 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심한 눈동자. 꾹 다문 입. 까칠한 눈썹. 살짝 그을린 피부. 아주 오래 전, 그는 그런 얼굴일 때가 있었다. 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TV를 키자 예쁘장한 앵커가 어린 트레이너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어린 트레이너가 얼마나 강했던 건지, 앵커가 칭찬일색이다. 까무잡잡한 소년은 부끄러운지 낯을 붉힌다. 아이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여겼다. 지금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의 재능은 그럴 듯하지만, 우수하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재능을 남들보다 일찍 꽃피우는 타입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속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얀 모자를 쓴 저 아이가, 미래의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재능을 일찍 꽃피우는 것이 아닌, 남들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재능을 발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TV를 끄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하드에서 발견한 무려 2015년도에 써둔 레카스 중편소설의 앞부분입니다. 행사에 내기 위해 썼던 것 같은데, 뒷부분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까워서 일단 올려보는 글.

:
Posted by 새벽(dawn)
2021. 1. 13. 21:47

[쥰히카/용식빛나] 라벤더 글/포켓몬2021. 1. 13. 21:47

 

<라벤더 (Lavender)>

 

그치만 난 사랑이 뭔지 몰라.

옅은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남청색 머리칼, 손목 위 시계를 바라보는 동그랗고 투명한 눈동자. 상냥한 어조에 웃을 때마다 볼에 떠오르는 홍조. 어릴 적부터 봐왔기에,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펭도리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하게 웃는 얼굴도. 새벽부터 일어나 정원의 꽃에 물을 주는 모습도. 멀리서 나를 부를 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버릇도. 늘 지켜본 모습, 변하지 않는 일상.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주위 또래들이 떠들기 시작한 첫사랑 이야기 따위는 관심 없었다.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고 사귀는 일에 일말의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가끔 코우키가 나와 히카리의 사이에 대해 의문점을 표해도, 딱 잘라 말했다. 우린 소꿉친구야. 그 녀석이랑 나는 평생 친구라고.

 같은 말을 히카리 앞에서 한 날, 그 애는 멋쩍게 웃었다. 뭐야. 우린 친구야. 평생 친구지? 하고 되물으면, 그 애는 대답은 않고 뒷짐만 졌다. 불만이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 히카리의 나쁜 버릇이었다. 거듭 채근해도 커다란 두 눈만 깜빡 거릴 뿐이었다. 그러면서 죽어도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이름도 모를 놈팽이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대화로부터 몇 주 뒤였다. 히카리의 첫 남자친구라는 놈은, 짐리더도 사천왕도 아닌 정말 평범한 녀석이었다. 엘리트 트레이너 딱지를 달고 있긴 했지만, 글쎄. 실력이 특출 난 편은 아니었다. 히카리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키만 멀대처럼 크고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멍청한 인상이었다. 이래저래 뜯어봐도 히카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축복해 주었다. 다들 눈이 삔 게 분명하다.

 

 히카리와 단 둘이 되었을 때 그 애가 연애질을 시작하고는 도무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난 물었다. 왜 그런 녀석이랑 사귀는 거야? 시간이 아깝지 않아? 나라면 덜 떨어진 놈과 만날 시간에, 차라리 배틀 하며 실력이나 쌓겠어. 그러자 히카리가 저번처럼 볼을 긁으며 멋쩍게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날 좋아해주니까….

 대답을 듣자마자 열불이 났다.

 

-? 그럼 넌 널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은 거야?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그 사람은 굉장히 다정해.

-그러면 너는, 널 좋아해주고 다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런 단순한 사항으로 결정해버려도 되는 건가?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항상 서로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히카리는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그 자식을 고른 걸까?

 

-그럼 너는 그냥 예쁨 받는 게 좋은 거네.

-맞아.

-실망이야. 네가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

-그치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망설이다, 이내 히카리가 조금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그치만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는 걸. 나를 정말로 소중하게,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네가 그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걸. 쥰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잖아.

 

거기서 왜 내 얘기가 나오는 거야? 어쩐지 히카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쥰은 언제나 제멋대로에, 나를 남자애처럼 대하듯 거칠게 다루고, 막 아무 소리나 하고...

-그건 우리가 친구니까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해주는 그 사람이 좋아. 쥰은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겠지만.

 

더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면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히카리는 그 이후로 더이상, 비슷한 화제를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그 녀석과 영화를 보러 가고, 놀이동산에 가고, 까페에 가고, 심지어 배틀 연구도 그 녀석이랑 했다. 나와 만날 일은 점점 적어졌다.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왜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을까?  

 히카리는 항상 여자애였다. 거울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옷을 고르느라 제 시간에 나오지를 못했을 때도. 새로 산 비니를 쓰고 해맑게 어울리냐고 물어오던 날도. 새빨간 머플러를 고쳐 매며 이거, 쥰이랑 같은 거야하고 말할 적에도. 여자애였다. 한여름 원피스를 입을 때 보이는 새하얀 어깨도. 나보다 몇 치수는 작은 분홍색 부츠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도. 히카리는 언제나 여자애였다. 다만 새삼스레 사랑스럽다고 여긴 적 없을 뿐. 왜냐면 아주 오래 전부터 히카리는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평생 같은 모습일 테니까. 사랑스럽다는 느낌마저 낯간지럽다. 우리는 정원에 피어난 라벤더를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꽃이 필 적 마다 향기롭다고 감탄하지 않는다. 굳이 입으로 꺼내 부산 떨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색다를 건 없었다. 네가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네가 후타바타운의 평범한 여자아이든, 신오우의 마스터이든. 우리가 함께 예지호수에 있었단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네가 긴가단에게 패해도, 신오우를 구한 영웅이 되어도. 너와 같이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는 추억이 더 소중했다. 그렇지만 네가 다른 누구의 여자가 되는 건, 혹은 되지 않는 건. 그로 인해 더이상 예전의 모습들을 만날 수 없다면. 전부 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애의 말이 맞다. 난 사랑이 뭔지 모른다. 어째서 그 애를 상냥하게 대해줘야 하는 모른다. 아니, 어떻게 상냥하게 다뤄야할 지 모른다. 영화관에 같이 가고 함께 포켓몬을 돌보는게 왜 특별한데이트가 되는지 납득 가지 않는다. 그런 건 히카리와 어린 시절부터 늘 같이 해오던 일상이다. 그렇지만 히카리는 특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똑같이 특별하다고 여겨줄 사람을 찾은 것이다. 라벤더를 볼 때마다 사랑스럽게 잎새를 만지고 향기롭다고 감탄해 줄 사람을 선택했다. 그것이 그 애의 선택이라면, 나는 아무런 변명도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슬퍼? 어느 날 코우키가 물었다. 슬플 리가 없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히카리와 나는 줄곧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애가 이라고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러니까 슬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외로워? 라고 묻는다면. 분명 고독해졌다. 계절이 지나 라벤더 꽃이 피어도, 더이상 가까이서 볼 수 없으니까. 분명 꽃이 피든, 피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을 텐데. 후회 돼? 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치만,

 

 나는 사랑이 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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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