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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중2력을 아카히카로 뽐냈더니 가끔은 발랄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본 이야기...

 

 

 

우주적 모멘텀 (momentum)

아카히카(태홍빛나)

1.

 

"아, 정말 짜증나!"

 

테이블 위의 디저트를 우걱우걱 먹어치우며 히카리가 말했다. 귀여운 두 볼은 마치 포핀을 욕심껏 먹은 파치리스처럼 빵빵해져 있었다.

 

"내가 응, 이정도 노력했으면 말야, 이제 자기 쪽에서 좀, 일케, 뭔가 해봐야하는 거 아냐?"

"야. 일단 삼키고 말하지 그래?"

 

분노에 차 음식을 해치우는 히카리를 보며 쥰이 한심한 얼굴을 했다. 그의 소꿉친구는 어릴 적부터 겉모습과 달리 마이페이스에 약간 극성맞은 구석도 있긴 했지만, 요즘은 유독 심했다. 그리고 쥰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카기 망할 놈!"

"그래 그래."

 

문제는 아카기였다. 5년 전 신오우를 소란과 절망의 도가니로 밀어넣었던 긴가단의 보스, 그 아키기였다. 그리고 히카리는 그 악명 높은 긴가단의 야망을 저지하고 신오우를 지킨 어린 영웅이자 최연소 챔피언이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 어떤 일도 옅어지기 마련인지. 지난 5년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신오우는 제자리로 겨우 돌아온 듯 했고, 긴가단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지는 듯 했다. 쥰도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히카리가 아카기와 재회하고, 만남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쥰은 들릴듯 말듯 한숨을 쉬었다. 분명 5년 전만 해도, 쥰이 더 막무가내여서 히카리가 휘둘렸던 것 같은데. 아마 여행도 쥰이 호수에 가자고 야단을 떨어서 시작된 거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는 히카리가 더 야단이다. 

 

"흥. 내가 먼저 연락하나 봐라."

 

히카리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야무지게 잘랐다. 세상 떠나가라 난리를 부리지만, 별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원인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아카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엄동설한에 얇고 귀여운 원피스를 입고 거리에 서 있었는데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열불이 난 히카리는 아카기에게 뭐라뭐라 따졌지만 그는 딱히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아카기는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입고 있던 감색 코트를 벗어 걸쳐주는 법도 모르는 남자였다.

결국 히카리는 콧물을 훌쩍이며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감기에는 안 걸려서 다행이네."

"그게 뭔가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럴 때 확 열감기가 나서, 침대에서 골골대고 있어야 아카기가 죄책감이라도 느낄텐데!"

 

이제는 자신의 건강한 신체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소꿉친구인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인데, 남들보다 눈치가 열 배는 떨어지는 아카기가 비위를 맞추기는 어려울 테지. 쥰은 입으로는 히카리를 위로하면서 머리로는 아카기를 동정했다.

 

"내가 신오우에서 제일 귀엽고 잘 나가는데, 아카기가 그걸 몰라요."

"............."

"뭐야. 왜 긍정을 안 해?"

"아, 네, 그렇습죠."

"후우. 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쨍- 히카리가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내려놓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게 문제 아닐까?"

"뭐가?"

"너는 잘 나가는데 아카기는 아니잖아."

"으음?"

 

그녀는 못 알아듣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각해 봐. 아카기는 신오우를 멸망시키려고 한 악당 보스고, 너는 그를 무찌른 영웅이라고. 애초에 둘이 만난다는 거 자체가..."

"자체가 뭐?"

 

히카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쥰이 말투를 가다듬는다.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거지. 아카기한테는. 뭐, 일반 사람들은 아카기가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그 긴가단 보스]일 거라는 생각은 안할테고, 눈에 띄는 직업만 갖지 않으면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을 테지만... 너랑 만난다면..."

"요지는. 내가 아카기한테 부담스러운 여자라는 거?"

 

쨍- 다시 한번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정말이지. 왜 아카기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예민해지는 거야? 못살겠네.'

 

불만은 속으로만 품기로 하고. 쥰은 자기도 성질대로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꾹꾹 눌러담았다.

 

"내 얘기는, 그럴 수도 있다고. 너야 아카기를 좋아하지만. 아카기는 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나저나 대체 아카기가 좋은 이유가 뭐야? 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히카리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러고보니, 아카기는, 얘기해준 적 없어. 날 좋아한다고."

"그래?"

 

그건 좀 의외였다. 아카기라는 인물이, 마음에도 없는 사람하고 관계를 맺을 건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그만큼 진실성은 있었다. 5년 전부터 히카리를 대하는 눈빛과 태도만 봐도....

 

"호, 혹시. 안 좋아하는데 내가 보채니까 만나주는 건가? 거절하면 왠지 내가 배틀로 뭉개버릴 거 같으니까, 무서워서 만나는 거야?"

"그럴수도..."

 

이번엔 마음의 소리를 참지 못하고 무심결에 내뱉어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의외로 히카리는 태클 걸지 않았다. 자기 생각에 골몰한 탓이었다.

 

"큭. 안되겠어. 이번엔 절대 내가 먼저 연락 안하려고 했는데!"

"연락 하려고?"

"그럼 어떡해? 갑자기 엄청 불안해졌는데. 확인해 볼래."

"배틀로 때려 죽이진 않을테니, 본심을 말하라고?"

"응. 확인해야겠어."

 

순식간에 옷을 챙겨입고 가게를 나선다. 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 히카리는 빙그르르 돌더니 쥰에게 한마디 던진다.

 

"아참. 그리고 너는 이 일 끝나고 좀 보자. 아주 생각나는대로 잘 말하더라?"

"헉."

 

자기 생각에 골몰해서 그런 게 아니라, 중요한 일부터 해치우려는 심산이었다.

 

 

2.

 

봉신유적은 언제나 인적이 드물었다. 5년전, 신오우의 전설이 긴가단 사태와 연관이 있다는 설이 매스컴을 통해 떠돌면서 한동안 관광객이 붐빈 적은 있었다. 유행도 잠시였다. 낡은 냄새가 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평화에 물들어 긴가단도 잊어가는 것처럼, 전설은 또다시 퇴색되어 갔다. 덕분에 아카기는 유적에 개의치 않고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예스럽고 어느새 탁해진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것이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알았기에, 유적에 들릴 적마다 기꺼웠다.

 오늘도 아카기는 홀로 봉신 유적에 들렀다. 늘 입던 감색 코트와 까만 구두. 키는 크지만 어쩐지 인상이 희미해 사람들은 그를 굳이 쳐다보지 않고 지나쳤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깊게 눌러쓴 모자 밑에 흐르는 새까만 눈동자가 매서워 눈길을 피하곤 했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 건 오직 한 사람. 굳이 그를 찾아와서 눈을 마주치고자 하는 존재도, 오직 한 사람. 하얀 비니를 쓴 작고 발랄한 소녀였다. 

 

"아카기!"

 

히카리였다. 익숙한 외침에 아카기는 뒤를 돌아봤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다. 어린애처럼.

 

"또 여기 와 있네! 나보다 여기가 더 좋아?"

"......오랜만이군."

"딴 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하라고!"

 

대뜸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역시나 유치한 질문이다. 아카기는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려다, 그것마저 귀찮아졌다.

 

"무슨 대답?"

"방금 한 질문!"

"네가 하도 볼 때마다 질문을 많이 해서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다."

"아씨, 지금 얘기했잖아. 방금 한 질문! 내가 좋냐고!"

 

엊그제 분명 다퉜었다. 싸움의 이유는 전적으로 아카기의 책임이었다. 다른 일에 골몰하느라 히카리와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연락두절까지 됐었다. 뒤늦게 떠올리고 약속장소로 달려갔지만, 어쩐지 헐레벌떡 뛰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잔뜩 혼났다. 변명을 해야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더 혼났다. 분명 나이는 자신이 한참 많은데. 화술도 논리도 자신이 훨씬 뛰어날텐데. 왜인지 반박할 수가 없어 그냥 고개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대구도 없이 서 있기만 하냐고 또 혼났다. 그렇게 잔뜩 뿔이 난 히카리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날씨에 비해 너무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자신의 코트를 벗어주고 싶었는데. 그마저 타이밍을 놓쳤다. 아카기는 그런 남자였다.


"뭔 바보같은 질문을..."

 

맞춰주고 싶어도 그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다. 이런 사소한 다툼은 그만두고 좀더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은데. 히카리는 그럴 짬을 주질 않는다.

눈을 마주치자, 히카리는 전혀 다른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화를 내더니. 어느새 울 것 같은 얼굴.

 

'아니, 울고 있잖아.'

 

아카기는 그대로 돌덩이가 되고 말았다. 그의 이지적인 두뇌 속에는 물음표가 수천 수만 개 떠올라 마구 뛰어다녔다. 왜지? 어째서?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카리는 세상 잃은 사람처럼 뚝뚝 눈물을 흘렸다.

 

"내가 좋은 게 아니구나..."

"아니...."

"흑, 내가 좋은 게 아닌데... 억지로 만나준 거구나...내가 무서워서..."

"............"

 

이제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이벤트에서 결정장애. 아카기는 그런 남자였다.

 

"무슨 이상한 상상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아니다."

"우우, 그럼 좋아하는 거 맞아?"

"그..."

"거 봐 대답 못하잖아! 우으...."

 

눈물샘 탱크의 수도꼭지라도 열어둔 건지 펑펑 잘도 운다. 아카기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히카리가 선물해준, 촌스러운 흔들풍손 문양이 있는 손수건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긴가단의 전 보스가 쩔쩔매고 있다. 한 때 세상을 점령하고 신세계를 탄생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남자가, 눈물 닦아줄 타이밍을 못잡고 벌벌 떨고 있다.

히카리는 너무 울어서 눈앞이 안 보이는 상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이렇게 만나지 않는다."

"......"

"그러니까, 널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말구, 확실하게 말해줘."

"그러니까, 나는 널...."


수초의 정적이 흘렀다. 일초, 이초, 삼초. 그 정적이 마치 무한의 시간 같았다. 땀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혔다. 이렇게 중요한 말을,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해야한단 말인가? 아카기의 두뇌 속에서 수많은 논리와 감정들이 얼키고 설켰다. 그래도 결국 감정의 손을 들어줘야겠지. 그는 십 초의 침묵 뒤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이번엔 죽음과도 같은 조용함이었다. 맺힌 땀이 목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도무지 그녀의 반응을 종잡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다."

"얼만큼?"

"....."


두 번째 난제가 찾아왔다. 이토록 난해한 질문을 또 받은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아카기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어휘를 동원했다.


"우주...만큼."

"우왓."


방금 전까지 눈물을 쏟아내던 히카리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우주? 정말로? 아카기가 갖고 싶었던 세계만큼?"

"그런 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좋아한다."

"우와아!!!?"


이윽고 입을 헤 벌리고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아이 마냥 들떠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진담을 말해버렸군.'


반면 아카기는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창피해서 머리 끝까지 달아오를 것 같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정말이지?"

"정말이다."

"날 그만큼이나 좋아했단 말야?! 헤헤헷. 어쩌면 아카기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들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순간 자신도 낯간지러워진 것이다. 

언제나 "응" "아니" 혹은 "그래" 정도 밖에 말하지 않았던 남자가.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빨간 끈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행복하고

부끄러웠다. 히카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사스럽네."

"........."


네가 부추켰잖아. 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사실, 그런 제멋대로인 점 마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전해야 할 진심이었다. 

아카기는 답지않게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이걸 받아라."

"응?"


아카기의 말에 히카리가 손가락 사이를 살짝 벌려 그를 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워 심장에 안 좋았다. 중증인가? 아카기는 지금의 기막힌 상황 탓이려니 하고 콩닥대는 심장을 자제시키려 노력했다.


"그, 네가 나에게 손수건을 선물해준 ...답례다."

"어? 아카기가 나한테 주는 거라고??"


히카리는 전광석화처럼 아카기의 선물을 낚아채 포장지를 뜯었다. 세련되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신형 포켓치가 들어있었다.


"와아! 새로 나온 포켓치네! 그것도 분홍색!"

"너는... 분홍색이니까."


분홍색이 잘 어울리니까,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전한 문장을 말하기엔 낯간지러움이 폭발할 거 같아 대충 줄여버렸다.


"고마워! 아카기, 정말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구나."

"..응.."

"그런데 나는 아카기가 안좋아하는데 날 억지로 만난다고 생각해서. 오해해서 미안해. 막 화낸 것도 미안해."

"...사실 그 때 늦은 것도, 예약한 네 포켓치를 받으러 가느라 늦은 거였다."

"어. 정말?"


포켓치는 신오우에서 인기 만점인 상품이다. 그러니 신형이 나오면 늘 예약폭주에, 출시 당일엔 상점에 줄이 늘어선다. 

아카기는 여성용 분홍색 포켓치를 사기 위해 1시간이나 줄을 서 있었다. 예전 긴가단 단원들이 보면 경악해 까무러칠 광경이었다.


"아카기 것두 샀어?"

"? 아니, 내 건 안 샀다만.."

"왜애! 샀으면 커플 포켓치일텐데."


아카기는 차마 예산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말은 못했다.


"뭐. 됐어. 아카기 건 또 내가 사줄게! 난 챔피언이라 돈이 많거든."

"그래.."


어느새 히카리는 아카기 옆에 꼬옥 붙어 있었다. 자석도 아니고... 그래도 아카기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무슨 사단이 날지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흐흥. 결국 내가 아카기에게 화 낼 건덕지는 사실 하나도 없었단 거네. 아카기도 날 무지무지 좋아하니깐!"

"....그..래."

"그럼 주말에 잇슈라도 놀러갈까? 나 라이문 시티에서 관람차 타고 싶어!"

"그래."


혹시 이러다가 히카리의 예스 머신으로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도 상관없었기에 아카기는 계속 "그래"라고 답했다. 표현의 강도가 다를 뿐이지 정말 아카기가 마음이 클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화해하고, 유적을 나섰다.



3.


"쥰은 입버릇을 좀 고쳐야겠어."

"헉!"


히카리가 재앙을 예언한 이후로, 쥰은 외진 장소만 골라 다니며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감이 좋은 히카리는 쥰을 금세 찾아내고 말았다. 쥰은 떨었다. 구구를 만난 캐터피처럼 떨었다.


"네가 응, 이상한 소리를 해가지고, 내가 아카기를 오해했잖아! 아카기는 나를 사실 엄청엄청 좋아하는 거였는데."

"그, 그래? 잘됐네!"


겁나는 얼굴을 인간이 시전하면 이런 느낌일까. 히카리의 매서운 눈과 마주치자 쥰은 절로 주눅이 들었다. 배틀하고 이탈하고 싶었지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 잘 됐으니까 봐준다."

"??????"
"잘됐으니까 이번만은 넘어가지."


의외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히카리는 쿨하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배틀이던 육탄전이든 쥰을 때려눕혔을 텐데..? 쥰은 어리둥절 두 눈만 소처럼 꿈뻑였다.


"후후.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덕분에, 아카기한테서 엄청 로맨틱한 말을 들었지 뭐야... 흐흥, 나를 우주만큼 좋아한다나?"

"으엑."

"더 하면 정말 가만 안 둘거다?"

"미안."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다시 말해주지. 아카기가 나를 우주만큼 좋아한대! 내가 얼마나 날 좋아하냐구 물었더니, 날 우주만큼 좋아한대! 아마도 우주만큼 나를 좋아하나보지?"

"똑같은 얘기 세 번 했거든?"

"헤헤. 그리고 날 위해서 한정판 신형 포켓치를 미리 예약까지 해서. 1시간 줄까지 서서 기다렸다지 뭐야? 나랑 약속도 그래서 늦은 거더라구.. 정말, 하하, 후후, 아카기는 귀여운 면이 있어."


어디가?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맞을 거 같아서 쥰은 잠자코 있었다.


"여튼. 덕분에 우리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돈독해졌어. 결과적으론 잘했어!"
"...그래."

"상으로 배틀 해줄까?"

"아니, 됐어."


어차피 질테니까. 히카리를 이겨서 챔피언이 되겠다는 꿈은 이미 5년 전에 접었다. 실력과 재능의 갭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쥰은 아버지를 이어 배틀 프론티어의 브레인이 되기 위해 수행 중이었다.


"그래? 너랑 배틀 안 한지 오래됐는데. 뭐, 됐어! 그럼 난 갈게."

"응. 제발 좀 가라."


그 말에 히카리는 쥰에게 꿀밤을 쥐어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해맑은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정말 유난이지? 저 커플. 쥰은 어서 코우키나 시로나 씨나, 다른 이에게 전화해 이 꼴나사운 커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
Posted by 새벽(dawn)
2016. 11. 20. 15:26

[포켓몬/아카히카(태홍빛나)] Unreachable 글/포켓몬2016. 11. 20. 15:26

아카히카() 위한 소재키워드 : 달콤한 와인 한잔 / 나른한 오후 / 허무함

 

[포켓몬/아카히카] Unreachable


스물일곱. 히카리는 그의 나이가 되면 이해할 있을 알았다. 서른에 가까운 한창 때의 나이. 제법 나름의 가치관과 사고가 뚜렷하게 자리 잡았을 나이. 나이가 되면 이해할 같았다.

 

어른이 되면 같았는데. 전혀, 수가 없네.”

 

새빨간 레드와인을 모금 축이며 히카리가 중얼거렸다. 열살 때건 스물 일곱일 때건 여전히 없는 사람이다. 아카기라는 이름의, 과거 신오우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긴가단의 보스 말이다. 열살 , 신오우 리그를 제패하고 긴가단을 물리친 어마어마한 전적을 가진 히카리다. 그로부터 벌써 17년이나 흘렀다. 신오우를 구한 작은 영웅도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와인을 마시고 시가를 피워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외모만이 어린 시절 정갈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만, 속은 조금 찌들은 어른이 관계로. 그녀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홀로 세상을 한탄하기도 했다.

 

이제 나도 당신 나이인데 말이야. 도무지- 아무 것도 이해가 안돼. 대체 그런 걸까?”

 

나른한 오후였다. 햇살이 네모난 사이로 쏟아지는 밝은 . 나옹마는 그르릉 소리를 내며 따뜻한 햇살 밑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와 대비되는 광경으로, 창가의 테이블에서 트레이너는 한껏 술에 취해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내뱉고 있었다.

 

도대체가 말이지. 감정이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니 뭐라니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나 잔뜩 늘어놓고. 웃긴 그런 소리에 혹해서 긴가단 애들이 모여 들었단 말이지? , 그거야 당신이 말재간이 워낙 좋았고 사람을 끄는 능력도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야? 세상에서 감정이 없어져야 하는 건데, 대체 그랬는데?”

 

와인을 벌써 병이나 비웠다. 사실 히카리는 술이 약했다. 달콤한 와인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지는데 오늘은 유독 무리를 했지 싶다. 희멀건 대낮부터 술을 들이키는 이유는, 그래, 오늘은 있었다. 잔뜩 있었다. 오늘은 사람의 기일이었다.

 

내가 기껏 막았는데 말이지. 정말 열심히 했는데 말이지. 고작 열살엄청 어렸는데도 정말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지? 그래서 신오우도 구하고 긴가단은 해체되고 같았는데 말이지…”

 

오늘따라 술맛이 좋지 않았다. 술이 약한데도 와인을 즐겨하는 특유의 달콤쌉싸름한 풍미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텁텁하고 쓰기만 했다. 억지로 먹는 기름을 속에 들이붓는 느낌마저 들었다. 오늘이 사람의 기일인 탓일까? 자신 말고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익숙해진 허무함은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만 갔다.

 

당신이 반전 세계로 가버렸을 때만 해도, 나한테 기라티나가 있으니까- 언제든 다시 데려올 있다고 생각해서그래서 바로 찾으러 건데. 내가 그랬을까, 어려서 상황 판단이 됐던 걸까? 후후, 나는 어릴 때부터 제법 똑부러진 아이었는데. 정말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네. 마지막 한마디를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어라, 눈물은 이제 마른 아니었나? 아직도 울어줄 사람이 있다니 받았네, 아카기.

 

아직도 주장은 이거야. 나는 잘못한 없어, 이상한 당신이야. 원하는 세계가 있었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버린 거야? 마음 같은 필요 없다고 당신이잖아. 그런데 외롭기라도 했던 거야? 쓸쓸하고, 허무하고, 고독했던 거야? 대체 , 대체 언제부터.”

 

어차피 지난 일이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히카리는 이지적인 아카기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적이지만, 누군가를 손쉽게 설득하고 통솔하며 스스로의 논리에 한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는 어른에게 자석처럼 끌렸더랬다. 그래서 때로는 신오우를 누비며 그를 찾아다닐 때에도, 그를 막기 위해서인지 혹은 만나기 위해서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열살인 히카리에게 아카기는 그릇되었지만 너무나 높고 아름다운, 모순된 이상이었다.

 그토록 동경했음에도, 히카리는 아카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의 출생지, 나이, 그리고 긴가단 보스로서의 전적 정도를 외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의 사상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올곧음과 따뜻한 사랑 속에서 자라난 히카리에게 아카기의 비뚤어지고 복잡한 사고방식은 어렵기 그지 없었다.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있다는 자신감이 히카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는데. 아카기는 다름 아닌 그런 감정 자체를 부인했다. 부인하는 것을 넘어, 영영 지워버리려 했다. 히카리는 그런 비틀어진 판단이 어른들의 소유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긴가단은 보스도 간부도 조무래기들도 전부 어른들이었으니까. 어른이 되면 그런 이야기가 어쩌면 이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녀는 고작 열살. 너무 어려서, 단지 바르고 틀린 것만 구분할 저에 깔린 많고 닳은 사연과 적의들을 읽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치부했었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당신을 이해할 있겠지.

 스무살이 되던 , 히카리는 적잖이 실망했다. 단지 나이가 스물이 넘었다고 해서 아카기와 같은 어른이 되는 아니었다. 히카리는 여전히 여리고, 감정적이었으며, 열살 때와 똑같이 아카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그와 같은 나이가 된다면 어떨까? 7년을 기다려야했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시간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 훌쩍 지나가버리곤 한다. 마침내 올해, 히카리는 커다란 실망감에 휩싸였다. 여전히 당신을 모르겠다. 여전히, 아마도 평생. 당신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켜켜이 쌓인 허무함이 수백 개의 돌덩이가 되어 어깨를 마구 짓눌렀다.

 

내가 당신 나이가 되어서 알게 , 그냥 하나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당신이 그랬던 , 어른이어서도 아니고 똑똑해서도 아냐.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당신은. 열살 때부터 나랑 만났을 때까지 줄곧 똑같은 사람이었던 거야. ”

 

그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 그런데 죽도록 알고 싶은 사람.

 

히카리는 아카기를 잃었던 밤을 기억한다.

 어느 , 반전세계에 가봤더니 그가 보이질 않았다. 새까만 밤과 촘촘한 별들 사이를 마구 뒤지며 그를 찾았다. 그리고 무거운 벽과 돌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숨을 죽이고 누워있는 그를 발견했다. 히카리가 때의 일이다. 아카기가 스물 일곱일 적의 일이다. 히카리는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마구 마구 눈물을 쏟았다. 때문이야? 때문인거야? 앳된 목소리가 설움과 죄책감에 복받쳐 제대로 흘러나오지도 못했다. 혹한 속에 있기라도 하듯, 작은 손을 덜덜 떨며 커다란 아카기의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싸늘한 얼굴의 아카기는 언제나처럼, 답이 없었다. 그게 싫었다. 전부 싫었다. 나쁜 아이가 같았다. 아니, 나쁜 아이가 것보다 되돌릴 없다는 더욱 싫었다. 히카리의 가슴에 새까만 구멍 하나가 뚫렸다. 십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고 바람만 숭숭 지나다니는 구멍이었다. 어른이 되면 구멍을 채워줄 다른 이를 만날 있을 알았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구멍은 같은 구멍인 채로 17년이 지났다. 몸만 자랐지 마음은 그대로였다. 구멍이 뚫린 그대로. 숨이 없는 그의 손을 힘껏 붙잡은 채로.

 

마지막 잔을 비우자 외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히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밖을 보았다. 찬란한 햇살이 비추는 한가한 오후이다. 아카기는 이런 알았을까? 아카기도 따스한 빛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으면 마음이 아늑해 지곤 했을까?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리가, 방도가 있나.

 

아아, 내가. 당신을 조금 일찍 만났다면. 시간이…”

 

시간이.

 

시간이 겹쳐졌다면. 우리의 시간이 …. 조금 겹쳐졌다면.”

 

그랬다면, 아니 그래도.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나는 ,”

 

나는 당신을 만났던 걸까?

 

17번째 그의 기일에 홀로 울며 술을 마셨다. 여전히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 . 그저 자책만 넘쳐났다. 18번째에도, 19번째에도, 계속 그럴 거라면. 나는 당신을 만났던 걸까? 히카리는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17 때처럼, 열살의 어린아이처럼. 울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알면서도. 그렇게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사람도, 세상도,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무엇도 변하지 않는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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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히카 <소원>


아카기는 생애 처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반전세계의 그림자 신에게 한 번. 숲의 사당에 사는 시간의 요정에게 한 번.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늘 한 곳이었다. 다만 가슴이 더디고 발걸음이 느렸을 뿐.


그래도 그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남은 생은 재와 같이 바스러져도 좋았다.


1.


반전세계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드디어 낙원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더랬다. 반골 포켓몬이 세운 나라는 끝도 시작도 없었다. 숨을 멈춰도 생이 끊이지 않았고, 눈을 감지 않아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신체는 지치거나 병든 기색 없이 그곳에 들어선 처음 순간과 늘 같았다. 표본 속의 곤충처럼 완벽한 보존. 그것이 지난 27년간, 아카기가 바라던 절대에 가까운 오롯함이었다.


낭랑한 음색이 어둔 세계의 고요를 꺼트리기 전까진.


안녕.”


거대한 기라티나의 등 위에서 한 소녀가 발랄하게 뛰어내린다. 이 세계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의 방문이었다. 아카기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주시했다. 그 사이 반 뼘 정도 자란 것 같다.


여기 있는 거, 재미있어?”


올적마다 히카리는 입버릇처럼 물었다. 아카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평생 여기 있을 거야?”


가까이 다가오자 짙푸른 머리칼이 어깨에 스쳤다. 심장에, 전기가 튀었다. 아카기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숨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이군. 여기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평생이란 단어는 묘사에 적절하지 못하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선 시간의 흐름이 없으니 언제라는 말도-.”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얼굴을 들자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친다. 미세한 진동도 없는 시선. 먼저 얼굴을 돌리게 되는 건 또 아카기였다.


어째서?”


어째서냐면. 나는 이제 당신이 그만하고, 바깥으로 나왔으면 하니까. 지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든 좌절에 죽치고 있는 거든, 이런 무의미한 외톨이 놀음은 관뒀으면 해. 보는 사람이 지겹고 속상하거든.”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부끄러워서도, 좌절해서도 아니다.”


뭐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만하고 현실로 나와. 여긴 당신의 세계가 아니니까.”


그럼 누구의 세계인데?”


“- 기라티나.”


너무나도 명료한 해답이라 아카기는 더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이상향이라 믿고 있는 이곳은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저, 그는 반전세계에 하등의 영향도 주지 못하는 미세한 이물질일 뿐. 이 검은 낙원의 주인은 기라티나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리고 기라티나는 나의 포켓몬이지. 그러니 내가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하지 않겠어?”


몇 년 새 제법 말이 늘었다. 처음 만났을 적만 해도, 아카기의 말에 더듬더듬 자기 생각을 제대로 정리도 못하던 꼬마였는데.


나가면 무엇이 있는데?”


당신이 망치지 못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신오우가 있어.”


그곳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무엇을? 하고 되물으려다 침을 삼켰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아카기는 움직일 줄 모르는 돌덩이처럼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듣기에는 쉬운 말이지만. 나의 현재 조건에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미래로군. 거절하겠다.”


- 정말 답답하네. 뭐 이렇게 앞뒤가 꽉꽉 막혀있어? 있잖아. 바깥세상은 꽤나 달라졌어. 이제 갤럭시단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고, 27살 갤럭시단 보스인 아카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지. 당신이 신오우 어디에서 새롭게 시작하더라도, 그다지 걸릴 건 없다는 이야기야.”


나는 지은 죄가 두려워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곳이 내가 꿈꾸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답이 마뜩치 않았는지, 히카리는 제자리에서 뜻 없이 빙글 돌았다.


거짓말이지, 그거. 이런 삭막한 곳이 꿈인 사람은 없어.”


비뚤어진 공간에서 홀로 바로 선 소녀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바보인 거겠지. 당신. 진짜 바람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혼잣말인지, 넋두리인지. 아니면 예언인지. 히카리는 시선 끝에 박힌 별을 어루만지듯 손을 뻗는다. 그 가녀린 손끝에 제가 닿은 것 마냥, 아카기는 어깨를 움찔한다.


오늘은 이만 갈게. 더 이상 설득도 안 될 거 같고. 다음번에는 우리.”


제대로 마주보며 이야기 해보자. 기라티나가 불러낸 어둠과 함께 흐려진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감쳤다. 다시 온다고. 그 때 너는 또 얼마나 자랐을까. 얼마나 더 당당해지고, 아름다워졌을까.


그 때까지만 해도 아카기는 믿고 있었다. 아니,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듯 내뱉은 한 마디가 언약이었다고-.

다음번에는이라는 말은 마치 마법처럼 그녀를 되돌려 줄 거라고.




2.


히카리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반전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다.



3.


아카기는 본디 사념으로 이루어진 생명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그것을 말로 서술하고, 다른 이를 설득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반전세계에는 그 외에 다른 존재는 없었다. 이따금 발을 디디는 작은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히카리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대상이었다. 말을 주고, 받고, 정리한 생각을 내뱉고, 주워 담고, 조그만 얼굴 속에서 표정 변화를 읽어내고. 아카기는 그녀가 상당히 감정이 풍부하단 사실에 새삼 놀랐었다. 말투는 경력 30년은 족히 되는 베테랑 트레이너마냥 이지적이지만, 표정은 앳된 나이를 속이지 못하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곤 했다. 히카리가 떠나고 나면 아카기는 아이의 다채롭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아카기는 본디 사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억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선명해졌다. 만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처럼. 그런 지경에 다다르자 그는 다시 그 이미지를 뇌리에 새기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이 사념의 전부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반전세계에서는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아카기는 사실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거라 다독이며 그 자리를 지켰다. 전에 없던 기대감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허투루 아무 말이나 하는 아이가 아니니까. 어쩌면 챔피언 일이 바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다음번에히카리가 방문한다면, 그녀의 말을 조금 들어주도록 하자. 마지막에 흘렸던 조그마한 진심에 답해주도록 하자. 이윽고 작은 눈 같던 희망은 불어났다. 기다림이 일상이 되고, 일상은 희망으로 찼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하루가 영원히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아카기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수많은 시간이 흘렀을 테다. 뚜렷한 세월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런 것 같다. 눈치를 챈 아카기는 뒤늦게 불안한 얼굴을 했다.


어째서 히카리가 돌아오지 않는 걸까?


무한한 별이 박힌 밤하늘 같은 반전세계를 응시했다. 이 세계의 주인, 기라티나의 주인은 다름 아닌 히카리다. 그녀는 원할 때면 언제든지 반전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는. 아카기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혹은. 그저 오고 싶지 않아서.


건조한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그가 울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더 매서운 눈동자로 빛이 잠긴 하늘을 바라봤다. 그 끝에서 익숙한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뱀과 같은 몸으로 반전세계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이야기 속 포켓몬-.


아카기는 큰 소리로 그 포켓몬을 불렀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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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6. 1. 31. 10:47

[포켓몬/휴우메이] 무제 글/포켓몬2016. 1. 31. 10:47

정확히는 휴우->메이.



*******

 

나 그 사람에게 새하얀 방을 선물하고 싶어.”

 

느닷없는 이야기에 휴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퉁명스런 대답에도 메이는 활짝 웃는다.

 

그 사람의 방에 가봤거든. 그래서.” “그래서?” 취조하듯 휴우가 되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처음부터 다시 꾸밀 수 있는, 하얀 방을 주고 싶어.”

 

휴우는 시를 읊듯 뜬구름 같은 소리만 하게 된 메이가 싫었다. 개나리색 바지 끝을 살짝 붙잡고 손을 떨며 얘기하는, 메이가 싫었다. ‘그 사람이라고 칭하는 N이라는 작자를 만나고 나서- 그의 이웃친구는 변했다. 그 전에는 한 톨의 망설임도 모르는 아이였다. 무엇을 입에 담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허리는 곧게 피고, 주저함이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왜 그가 가장 아끼던 모습은 사라지고 낯선 표현만 내뱉는 걸까. 꼭 꿈속에서 말을 거는 것처럼.

 

예전에 그 사람이 지냈던 방- 보자마자, 뭐랄지. 안타까움이 턱 밑까지 차오르더라. 제자리에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어. 우리가 흔하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물의 제자리 말이야. 그 사람은 줄곧 세계를 그렇게 보아왔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가슴이 답답해서. 엷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니까 괜스레 더 울컥해버린 거야.”

 

왜 나한테 그렇게 세세하게 설명하는 거야? 휴우는 말을 자르고 묻고 싶었다. 허나 은하수처럼 오색영롱한 눈동자를 보자니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면 늘 그런 표정이었다. 구름 너머 사는 요정님이라도 만났는지 색색의 설렘이 묻은 얼굴. 휴우가 제일 싫어하는, 메이의 얼굴.

 

그래서 생각했어. 그 사람한테 하얀 방을 선물해주면 좋겠다-라고.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알려주는 거야. 하늘은 천장, 풀밭은 바닥에. 창가에 원목 책상을 놓고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한 구석에는 말끔하게 시트를 씌워놓은 알맞은 크기의 침대를 두고. 옷걸이에 가지런하게 옷가지를 정리하기도 하고. 낮은 의자 위에 동그란 방석을 올리고. 때론 앉았다가, 일어났다. 창을 열어 환기도 시키고, 주말에는 먼지도 털고. -모든 사이클이 평범하게, 제자리에 있는 곳. 그런 방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 휴우는 어떻게 생각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물어온다. 휴우는 한 손으로 입을 감싸고 간신히 답했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난 그 N이라는 사람 알지도 못하니까.”

 

무뚝뚝하네. 정말, 내가 원하는 조언은 그런 게 아니라니까. 같은 남자로서 여자애한테 그런 선물을 받으면, 어떨까하고 물어보는 거야.”

 

이런 메이는 유독 위화감이 든다. 다른 사람을 향한 온전한 희열과 기대로 가득 찬 메이. 휴우는 저도 모르게 목이 멨다. 왜 이런 하찮은 일에 절망해야 하는 걸까. 눈이 따갑고 시렸다. 메이의 사소한 언행에 반응하는 몸뚱이가 진절머리 났다.

 

난 모르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 두 눈을 차마 뜨지 못하고 말했다.

 

뭐야, 왜 그런 심한 이야기를 해? 나는 휴우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어차피 두 사람의 일인데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해? 네가 알아서 해. 넌 언제나 네가 알아서 잘 해왔잖아.”

 

그게 무엇이든. 언제나 홀로 잘 해내왔잖아. 내가 없이도.

 

메이의 분홍색 운동화가 주춤 뒤로 물러선다.

 

오늘 휴우는 유독 쌀쌀맞네.”

 

마치 언제나의 휴우는 다정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정말 얼간이 같은 질문이다. 휴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시야가 다시 메이로 가득 찬다.

 

네가 그러고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야. 어디 나사 빠진 것처럼, 헐렁헐렁. 정신도 못 차리고 바보처럼-.”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심보가 못되진 거네. 휴우. 지금 말은 좀 심했어.”

 

심한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휴우는 영원히 꺼내지도 못할 말을 꿀꺽 삼켰다.

 

됐어. 나 이제 휴우한테 이런 거 안 물어볼 거니까. 알아서, 잘 해볼게. 휴우도 알아서 잘 하든 말든-. 알아서 해.”

 

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돌아선다. 터벅터벅 박자에 안 맞게 걸어가는 폼이 제법 화가 난 모양이다.

 

젠장,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이상하다. 분명 하나만 봐도 열을 알았는데. 휴우와 메이는. 성격이나 외모는 정반대였어도 누구보다 가까웠다. 친구인지, 동료인지, 그저 이웃사촌인지는 그 관계를 명명하기 어려웠지만. 걷는 모양새만 봐도 서로의 기분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휴우는 메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처음 보는 표정, 몸짓, 말투. 온갖 낯선 징후들을 흘려대니 정답이 뭐라고 찍을 수도 없었다. 그냥 메이가 N이라는 남자를 만난 이후로 바보 멍청이가 되어버린 거라고. 뭐 하나 똑바로 설명도 못하는 얼간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길 위의 돌멩이를 있는 힘껏 짓밟는다. 하얀 방을 주고 싶다고. 메이는 휴우에게 생일마다 꼬박꼬박 선물을 주곤 했다. 그렇지만. 너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라며 볼을 붉히며 말한 적은 없었다. 바보 같은 메이. 하얀 방을 주고 싶다느니, 시답지 않은 일에 열을 내고 다니고. 휴우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래도 속은 시원해지지 않는다. 휴우의 방은 그렇게 자주 와봤으면서도, 한마디라도 덜어준 적 없으면서.

 

 

어쩌면 정말 멍청해진 건 휴우인지도 몰랐다. 메이가 토라져 돌아선 그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으니. 후회할 거라면 왜 뾰족한 말들만 골라서 내뱉은 걸까. 휴우는 삐죽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일 아침에 사과하러 가야겠다. 젠장. 자조와 짜증이 뒤섞여 속에서 펄펄 들끓었다. 그러면서도 내일 메이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휴우가 알던 익숙한 메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저도 모르게 그런 바람이, 먹먹한 가슴에 담겼다.

 



(참고) 휴우메이()를 위한 소재키워드 절망 하얀 방 영원히


(bw2를 플레이한 지 오래되어서.. 메이가 N의 방에 갈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긴 하는데 ㅠ 설정붕괴여도 그냥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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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아카히카- 불빛



찰나를 반짝였던 감정은 그저 묻어두기로 했다. 어둠을 떠도는 반딧불이도 계절이 바뀌면 제 풀에 지쳐 숨이 다하니. 그와 별반 다르지도 않다. 특별한 순간을 정하는 건 자신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건 감정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감정. 모이를 받은 새가 부리나케 바닥에 부리를 박는 것처럼. 어미의 젖을 보고 삼삼오오 달려드는 새끼들처럼. 감정은 한순간을 지배하는 본능이다. 그 밖에는 어떤 사건도 아니다.

찰나를 반짝였던 불빛은 눈을 감고 지나치기로 했다. 사소한 일상에 의미가 없다면 일생 모든 일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실상, 삶이란 늘 그러했다. 옷깃이 스치는 인연이나 평생을 부대끼고 살아온 인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둘을 분간하는 건 손바닥을 뒤집듯 쉬웠다. 아니, 손바닥을 뒤집듯 두 가지 인연이 뒤바뀌곤 했다. 어머니는 타인이 되고, 이웃은 먼 과거의 사람이 되고, 유년을 함께한 포켓몬은 낡아빠진 묘비가 되었다. 그러니 타인이 심장의 전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특별하지 못하다.

또다시 손바닥을 뒤집듯,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 버릴 테니.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소녀가 물었다.

생각. 생각은 사념이다. 현상을 뇌에서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라, 한다면 그만큼 복잡하고도 쉬운 일은 없다. 나에게 있어 소녀는 소녀다. 히카리라는 이름에 길고 찬란한 머리칼을 가진 아이. 나이도 성별도 조건도 나와는 정반대이지만, 내 앞길을 가로막는 숙적이자 희대의 라이벌.

답이 늦어지자 소녀는 재차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 날 보면 어떤 느낌이야?”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애매하고 모호한 이야기. 존재조차 증명할 수 없는 감정에 답하는 것. 고개를 젓자 소녀는 내 옷깃을 슬그머니 붙잡는다.

 

피하지 말고. , 말해줘. 부탁이니까.”

 

절벽에 선 듯 머리가 아찔하다. 겨우 이마를 짚고 더듬더듬 말했다.

 

“-너는 후타바타운에서 온 어린 트레이너고.”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점잖은 타박. 바닥과 하늘을 메우는 목소리. 전신에서 힘이 빠진다. 분명, 잊기로 했다.

 

그럼 나부터 말할까. 나는 마지막으로 듣고 싶었어-. 우리가 끝을 향해 가기 전에. 뭔지 알고 싶었어. 나와 당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있잖아, 나는.”

 

침을 삼킨다. 작은 목에 습기가 베여 있다. 눈을 감고 싶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정말 이상했어.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봤거든. 메마르고, 비어있고, 그러면서 말은 청산유수. 그래서 궁금해졌나봐. 당신이 누구인지. 결국, 긴가단의 보스란 걸 알았을 때엔 세상을 저주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눈을 감았다. 소녀는 계속 내 옷깃을 쥐고 있다.

 

왜 세상을 저주하고 싶었을까? 그것도 이상하지. -그치만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어. 난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길 바랐던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난 세계에서 가장 나쁘고 몹쓸 인간이 되었다. 그녀의 말은 주박이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실은 좋은 사람이었음그랬던 거지. 그래, 난 여기까지 할게. 이번엔 당신이 말해줘-.”

 

무엇을? 이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소녀는 도망갈 겨를도 주지 않았다.

소녀 대신 먼 하늘을 응시했다.

 

불빛이반짝였다.”

 

텁텁한 목소리가 속에서 뒤끓듯 올라왔다.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인지, 소녀의 몸이 점점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천관산에서. 봉신의 유적에서. 그리고 너를 만날 때마다. 불빛이 있었다. 그건. 찰나를 반짝이는 불빛이다. 이제 내가 믿지 않는, 세상을 현혹시키는 불빛이지.”

 

그 빛은 여름밤의 불꽃놀이처럼 찬연하다. 샛노랗고 새파랗고 새빨간, 형형색색의 불꽃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봄날의 꽃밭처럼, 여름날의 구름처럼, 가을날의 단풍처럼 불빛들이 파란을 일으키고. 그 옆에는 겨울처럼 새하얀 소녀가 서 있다. 소리가 없는 적막이다. 하지만 늘 같은 소녀가 서 있다. 말없이, 미소만으로 빛과 어우러지는 소녀가 서 있다.

 

이제, 믿지 않는다니.”

 

스륵, 소녀의 손길이 멀어졌다. 내려다보니 망연하게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그럼 옛날엔 믿었다는 거네. 그런데 왜 지금은 아닌 걸까. 나는, 믿고 있는데. 믿고 싶어서,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

 

이윽고 투명한 눈물이 하나, . 소녀의 눈꺼풀 끝에서 떨어지기 시작한다. 눈가는 더욱 충혈되고 볼을 새빨갛다.

 

더 말해줘. 부탁이니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내 손은 단단하고 무거워, 내밀 수가 없다. 누구에게도 허락된 적이 없다.

찰나를 장식하는 불빛은 그저 하룻밤의 일이다.

 

잘못 말했군. 난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다.”

 

거짓말이다.

 

한 번도 그런 것들을 믿어본 적이 없다.”

 

거듭 강조한다. 그럴수록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차라리 내가 색을 모르는 인간이었더라면. 어떤 동물처럼 평생 흑백의 세계만을 시야에 담고 살 수 있었다면. 거짓을 말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을 테다.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내 앞에서, 눈물로 흥건히 젖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았을 테다.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네-.”

 

그것이 소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남겨준, 무거운 한마디였다.

이제 나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인간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은 주박이기에. 풀리지 않는 주술이기에.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어투, 모든 것이 잔잔히 나를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이 소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등을 지고 머플러를 고쳐 맸다. 흘러내린 모자도 모양이 망가진 치맛자락도 가다듬었다. 이윽고 언제 울었냐는 듯-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그게 답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하나도 남지 않았겠네.”

 

음색은 명랑하지만, 내용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당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난 나의 세계를 지켜야하니까. 그저 그 일 밖에는, 할 수가 없겠네…….”

 

구름 위에 뜬 것처럼 소녀는 발걸음을 옮긴다. 결국 무엇 하나 뚜렷하게 말해준 것이 없다. 그녀는 늘 그랬다. 나에 대해 명명할 때엔 한없이 직선적이고 무겁다가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빙빙 에둘러 말하기가 일쑤였다. 그 점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말해주지 않는 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서글펐다라는 감정을 내가 제대로 느낄 수 인간이라면, 그건 분명 서글픔이었다.

 

그녀는 내 서글픔과 작은 불빛들을 모두 안고 떠났다. 다음번에 만날 땐-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네, 하고. 또다시 두루뭉술한 단어만 남기고.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떠났다.

 

그렇게 차라리 영영 떠난 것이면 좋을 텐데.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오직 둘 만인 오롯한 다툼에 발을 들이기 위해. 오직 둘 뿐인 외로운 싸움을 끝내기 위해.

 

이제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는 나는. 그래, 그곳으로 갈 것이다. 내가 눈을 감고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후회와 자조로 돌아오는 장소. 소리 없는 바람마저 멈춘 창기둥 아래로. 찬연한 불빛이 잠긴 그 두 눈동자가, 그저 나만을 바라봐주는 그곳으로.

이제 그 곳 외에는 달리 갈 곳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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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3)

 

꺼먼 먹구름 사이로 빗줄기가 치덕치덕 떨어졌다. 돈카로스는 삐걱이는 날개로 하늘을 날았다. 온갖 먼지와 빗방울이 안구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빗물인지 다른 것일지 모를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굴을 덮는다. 이윽고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는 구도자처럼 고개를 떨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약한 목소리로 간원한다. 그의 어린 새, 작은 생명체, 유일한 색과 향... 무너진다면 사라질 것들을 위해 기도한다. 

 

예상했던 장소에 그는 내렸다. 젖은 땅을 밟자 돈카로스는 느닷없이 끅끅 한숨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말없이 검은 새의 깃을 털어주었다. 

쇠사슬을 몇 겹이나 휘감은듯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그 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애는 모든 것을 그에게 터놓았다. 탄생, 시작, 우정, 소망, 꿈, 추억... 삶의 온갖 미신과 덩어리를 동화책 읽듯 읊어주곤 했다.  그렇기에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있었어도,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그는 삐걱이는 다리로 대지를 걸었다.

 

성당의 종소리가 적막처럼 울렸다. 단지 움직이는 종이 희멀건 눈동자 위에 둥둥 떠오를 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했다. 그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달달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비스듬히 열린 성당 문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색을 잃은 두 눈 위에 떠오른 것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

뒷모습의 사람들이 길고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란히 앉아있다. 그 애에게 포켓몬을 선물했던, 중년의 박사가 느릿하게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슬픔의 언사를 중얼거린다. 뒷모습의 어깨들이 여린 물결처럼 흔들린다. 중년의 박사는 손을 내려놓으며 위로의 표현을 건넨다. 그 애의 소꿉친구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앞좌석에 앉아있던 그 애의 어머니가 제자리에서 주춤거린다. 금발의 챔피언이 고개를 돌린다. 그 애의 어머니는 입술을 쥐어뜯으며 헛구역질하듯 오열한다. 박사의 조수가 눈시울을 붉힌다. 그 애의 어머니는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애먼 가슴만 퍽퍽 쳐댔다. 박사는 떠나간 영혼의 생을 읊조린다. 그 안의 모두가 그 애에게 빚을 졌거나 빛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성당 밖에 있는 그도 그 애에게 빚을 지고 빛을 받은 사람이었다. 문고리에 걸쳐둔 손이 빗물에 주욱 미끄러졌다. 소원은 늘 먹먹한 하늘에 가려 한 줌의 햇살도 받지 못한다. 애원의 씨앗은 눅눅한 땅 속에 묻혀, 썩지도 틔우지도 못한채 영원히 그대로일 것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관이, 그 애를 담기엔 너무 크고 장엄해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어머니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성당 내의 어수선한 소란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가려졌다.

포켓몬센터의 문을 열었다. 직원이 수건을 가져다 준다고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자신의 것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는, 그 애의 박스를 열어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애가 바보처럼 모든 걸 터놓았기 때문이다. 태어나던 날 아침의 바람과 햇살, 처음 모험 떠나던 날의 설렘과 두려움, 소꿉친구와의 첫배틀부터 마지막 배틀, 포켓몬을 위해 포핀을 만드는 법과 함께 노니던 날들, 명예의 전당의 고요함과 웅장함, 그를 처음 만나던 때의 두근거림.. 그리고 박스의 비밀번호까지. 생의 모든 느낌과 자잘한 것들을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10번째 박스에서 포켓몬을 꺼냈다. 평범한 빨간색 몬스터볼 안에는 한때 염원했던 전설이 잠들어 있었다. 전원을 끄고 센터를 나섰다.

 

 

기라티나는 볼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천공과 대지를 가르는 고함이었지만, 그는 그저 어미를 찾는 어린아이의 울음처럼 들렸다. 기라티나는 그를 알아봤다. 커다란 발을 힘껏 구르자 차가운 모래와 식은 빗방울이 튀어올랐다. 이미 온몸이 젖어버렸기에 개의치 않았다. 어마무시한 소음을 듣고 성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모두 그 애에게 빚을 졌거나 빛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빚쟁이들은 더 큰 빚쟁이를 보자 얼굴을 붉히며 큰소리를 냈다. 소꿉친구는 달려와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허나 그보다 더 빠르게 그는 기라티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 해.

어둠이 하늘을 덮고 그림자가 먹구름을 감춘다. 어둠이 또 어둠을 덮고 그림자가 또 그림자를 덮었다.

기라티나가 펼친 그림자는 밤보다 깊고 새벽보다 고요했다. 그는 그 안에 있었다. 다른 이들은 없었다. 오직 그 만이 작은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눈을 감았다. 어둠은 고요하니, 고즈넉한 그 애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림자는 검어서, 추억 외에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엉망이 된 얼굴 위로 다시 무언가 흘러내렸다. 장례식의 사람들이 주위에서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아는 유일한, 그의 소원을 이루는 방법이었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길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결심을 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다짐했을 것이다. 사실- 영원이란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헛된 시작과 찰나의 끝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까마득한 예전부터 계획해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애는 병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일분 일초라도 잊을 수가 없었다. 늘 곁에서, 아침을 깨우는 새처럼 그 애가 재잘거려도 쉼없이 살가운 이야기를 쏟아내도 잊을 수 없었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는 없었다. 아무리 같은 일상을 반복해도, 조그만 몸짓이 숨소리 하나가 그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심장은 쉴 틈이 없었다, 늘 뛰어야했다. 머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러졌다. 27년이라는 거뭇하게 굳어진 삶은 단 하나의 소원만을 향해 구물구물 기어갔다.

 

그림자가 그의 숨소리를 지웠다. 기라티나는 우우 낮게 울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아무도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카기라는 존재는 이제 없다. 그는 스스로 해와 달이 없는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영원을 누리기 위해. 영원 속에서 끝없이 태양이 있던 시절을 반추하기 위해. 어둠이 잠식한 반전에 몸을 맡겼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추억이라는 감옥이었다.

평온한 어둠 속에서 두 눈을 감는다. 떠오르는 것은 단 한 존재. 헤픈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말소리와 숨소리는 곡조가 되어 몸을 둥실 띄웠다. 멀리서 작은 인영이 보이자 그제야 그는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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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015. 3. 22. 00:11

[포켓몬/히카리+엠페르트] 화관 글/포켓몬2015. 3. 22. 00:11

2015.3.22 포켓몬 전력 참여


비석처럼 피어난 꽃을 꺾었다.

그라데시아는 까다롭다. 토양, , 햇빛이 완벽한 조건일 때만 꽃망울을 터뜨린다. 앞마당에 그라데시아의 모종을 심고 퍽 애지중지 길렀다. 뙤약볕에 시들까, 폭우에 꺾일까 노심초사하기 일쑤였다. 포켓몬들 중에서도 엠페르트는 유독 그라데시아를 좋아했다. 그 애는 팽도리였을 때부터 꽃만 보면 좋아라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라데시아를 함부로 밟지 말라고, 엠페르트에게 호통을 치고는 했다. 꽃을 해치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 그러면 엠페르트는 구석에 앉아 망연히 하늘만 보았다. 꽃은 다시 심으면 된다는 걸 몰랐다. 널 위해서라면, 전부 꺾어 가슴에 달아줄 수도 있었는데.

분홍색 꽃잎 위로 투명한 이슬이 굴렀다. 그라데시아는 간신히 꽃을 피우자마자 줄기가 잘려 나갔다. 나는 꽃받침을 다듬고, 얇은 줄로 꽃들을 이어 끼웠다. 어린 아이의 손발을 만지듯 살살, 조심스런 손놀림으로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그라데시아 화관을 완성했다.

화관을 들고 집을 나섰다. 포켓몬들과 함께였다. 코우키와 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참석하고 싶단 의사를 밝혔었다. 옆에서 위로해주고 싶다했다. 나는 거절했다. 장례식은 우리끼리 치르겠다고 전했다. 여기서 우리끼리란 나와 포켓몬들을 말한다. 관을 든 눈설왕이 내 앞에서 걸어 나갔다. 날쌩마, 로토무, 찌르호크, 에테보스가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그것이 우리들의 대형이었다.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난 뒤, 이렇게 하기로 우리들은정했었다. 약속이었다. 언젠가 또 오늘과 같은 날이 오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가는 길을 위로해 주자는 맹세였다.

행렬은 진실호수로 향했다. 어느새 나타난 엠라이트가 구슬픈 새처럼 울었다. 그라데시아와 같은 색의 엠라이트는 내가 첫 번째로 본 신비한 포켓몬이었다. 그것이 시발점으로, 나는 소설 속 모험가처럼 신오우를 누볐다. 문헌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전설의 포켓몬을 만나고, 아무도 간 적이 없는 반전세계를 다녀왔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길고 험난한 여정을 이겨냈어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관장하는 포켓몬들도 내 소원은 이루어줄 수가 없다. 한 번 숨이 달아난 생명은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신도 바꾸지 못하는 운명의 법칙이다. 그 법칙이 나에게서 엠페르트를 데려갔다.

그 아이와 처음 만난 장소에 관을 내려놓았다. 밤처럼 검은 관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의 내 첫포켓몬에게, 분홍색 화관을 씌워주었다. 그라데시아 꽃은 생생하고 예뻤다. 모두들 우는 것 같았다.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다만 나만이 울지 않았다. 운다는 건 모독 같았다. 이제 엠페르트와 배틀을 함께 할 수 없고, 콘테스트도 나가지 못하고, 배틀 멤버의 첫 번째 주자는 다른 포켓몬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다고 잊는 건 아니다. 엠페르트와 진실호수에서 처음 만나고, 배틀하고, 진화하고, 배지를 얻고, 갤럭시단을 무찌르고, 전설의 포켓몬과 대면하고, 챔피언 로드를 올라가고, 사천왕을 이기고, 마침내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던 모든 순간을 잊는 건 아니다. 생애와 같았던 순간들을 눈물로 흘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운다는 건 모독 같았다. 나는 슬픔도 고독도 세월에 쓸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시작과 끝을 간직할 것이다. 그렇기에 운다는 것은.

한 줌의 추억이 관 뚜껑과 함께 닫혔다. 그라데시아 꽃잎 하나가 빠져나와 초록 풀밭에 앉아 있었다. 너를 잊지 않고, 살아갈 거야. 마지막 그 말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포켓몬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제 너를 처음 보았던 순간은 점점 희미해지겠지. 그리고 이제 너를 떠올리려 할 참이면, 처음 만났을 때 그 여린 얼굴이 아닌관 뚜껑 아래 그림자가 진 창백한 얼굴만 생각이 나겠지. 배틀을 할 때도, 콘테스트에 나갈 때도, 어디에도 너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순간 나는 너를.

간신히 꽃잎을 주워 손안에 쥐었다. 축축한 손아귀 사이로 보드라운 잎새가 빠져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엠라이트의 울음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그 소리는 마치 뱃사공의 노래처럼, 호수 위로 여울져 떠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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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2)

 

바람이 부는 방향에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애가 걸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벅차 보였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그 애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머리칼은 한층 색이 옅어지고 가늘어져 있었다.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 된다고 했다. 그건 그가 그 애에게 안 된다고 말한 몇 안 되는 사건이었다. 머리를 자르면, 그 애는 단발인 모습으로 그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하얀 눈의 벌판 위에 떨어진 색을 잃은 이파리처럼, 희멀건 머리카락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하얀 벌판 위를 걸을 때마다, 이파리를 볼 때마다, 그 애의 머리카락을 생각할 것이다. 또한 머리를 자르고 싶어, 라고 말하던 맥없는 목소리. 그리고 단발로 자르자 숱이 없어 더욱 메말라 보이던 뒤통수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기에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애는 별다른 투정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머리를 자르고 싶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애는 그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매일 만나면서도, 특별한 추억은 심어주지 않으려했다. 매일 같은 복장에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비슷한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꺼내서 풀어놓았다. 다른 옷을 입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날 하루는 즐거울 것이다. 그 애 자신도 즐거울 것이다. 다만 어느새 홀로 남겨져, 특별했던 하루하루를 되새겨야하는 그만이 괴로울 것이다. 따라서 그 애는 자신이 양보하기로 했다.

사랑은 계속 될 테지만,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애는 느리게 굴러가는 시침처럼 하루를 보냈다. 정해진 시각에 굼뜬 동작으로 나타났다. 첫인사는 늘 같았다. 하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그저 말일 뿐인 대사들로 시간을 채웠다. 그러면 그는 다름없이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가 하는 말은 응, 그래, 알았어, 하는 대답들뿐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달변가였다. 하지만 그 애 앞에선 달변가일 이유가 없었다. 굳이 꿀을 바른 문장들로 현혹시키지 않아도, 어린 새는 둥지 안에 앉았다. 그는 그럴 듯한 말들을 꾸며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그저 응, 그래, 알았어, 하는 대답만 할 뿐인데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 애가 좋았다. 늘 웃는 그 애가 좋았다. 그 미소가 천천히 색이 바래고 시들어가도 그대로 좋았다.

모든 것이 특별하지만, 사랑은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애는 오지 않았다.

처음, 시계를 확인했다. 오래된 손목시계라 약이 다 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머니에 든 그 애의 포켓치가 같은 시간을 가리켰다. 불안감이 어둔 장막처럼 들이닥쳤다. 새빨간 포켓치는 선명하고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했다. 포켓치를 준 것은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그 애가 말했었다. 그동안 그 애는 포켓치를 4번이나 바꿨고, 그에게 주는 포켓치는 한 달도 쓰지 않은 것이므로, 결국은 새 것을 사는 것과 다름없다며 우겼다. 이런 여아용 포켓치를 살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그 애는 볼을 부풀렸다. 그럼 길에서 주운 거라고 생각해. 길에서 주운 다음 주머니에 넣은 것을 자꾸만 깜빡해서, 계속 들고 다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것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나눈 대화는 또 하나의 판화로, 무한히 재생되는 영상으로 그의 가슴 속 갤러리에 걸렸다.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 했다.

다음, 그는 약속 장소 앞을 서성였다. 늘 그 애가 빈약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어 올라왔던 언덕. 그 언덕의 꼭대기까지 마중을 나갔다.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서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말라붙은 두 눈이 떨렸다. 시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는 일은 그만두고 달렸다.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들렀던 가게, 함께 지나왔던 거리를 헤맸다. 어디에도 그 애는 없었다.

이윽고, 지친 발걸음은 낯선 집 앞에 닿았다. 후타바 타운의 녹색 지붕 집. 2층은 그 애의 방이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알고 있었다. 2층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는 돈카로스의 도움을 빌려 2층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방에는 흔적 하나 없었다. 그 애가 옷장을 열어보고, 게임을 하다 끄고, 침대에서 뒤척이다 일어난 흔적도 없었다. 그의 까칠하고 커다란 손이 떨렸다. 1층의 불도 꺼져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말 저녁이라 가족과 함께 외출이라도 한 걸지도 모른다. 병원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애는 그에게 말없이 떠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그 애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 떠올랐다. 돈카로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입술이 떨렸다. 온 공기에 습기가 들어차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젖었으며 돈카로스의 날개도 젖었다. 비 오는 날에는 비행 포켓몬은 쓰지 않는 게 좋아, 날개가 무거워지니까. 그 애가 말했었다. 물 타입도 겸하고 있음 관계없겠지만, 네 돈카로스는 아니잖아, 그러니 비 오는 날에는 쉬게 해 주는 게 좋아. 그 애가 돈카로스의 새까만 날개깃을 새하얀 손으로 쓰다듬었다.

굵은 빗속을 돈카로스가 날았다. 온 몸으로 거센 물줄기를 맞으며 그도 날았다. 비가 내리는 곳에 태양빛은 없다. 태양이 없으므로, 세상은 그림자로 차게 될 것이다.

 



1차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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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아카히카] 해와 달이 없는 세계에서

 

1)

 

그 애는 병이 있었다. 그러나 자주 그 사실을 잊곤 했다. 아픈 내색 하나 없었다. 그 애는 늘 그의 곁에서, 아침을 깨우는 새처럼 재잘거리곤 했다. 쉼 없이 살가운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다.

절대 그 애는 자신의 병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은 영원한 10살을 살 거라고 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은 영원한 10살이지만, 그는 꾸역꾸역 나이를 먹을 테니 영영 우리들은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고. 흘리듯 말했기에 우스갯소리처럼 들렸다. 허나 아니었다. 영원한 10살이 아니어도,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림자가 겹쳐지면 안 되는 사이었다. 다른 하늘에서 다른 땅을 밝고 다른 곳을 향해 걸어야했다. 아니면 한 사람이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은 뒷걸음질 쳐야했다. 잠시나마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 애가 영원한 10살이기 때문이다.

그 애는 더 이상 그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소꿉친구를 대하듯 편하게 불렀다. 호칭과 말투가 바뀐 것은 언제인지 모른다. 나이가 들자 엄마어머니라고 부르게 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다만 그런 일의 반대였을 따름이다. 외려 연상인 그가 더 깍듯하게 그 애를 대하게 되었다. 존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낮췄다. 오래 모신 주인을 대하듯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애는 모양새가 우습다며 답지 않게 헤프게 웃었다.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웃었다. 그는 그 헤픈 웃음이 좋아 계속 우습게 굴었다. 매일 똑같은 어설픈 놀음에 한결 같은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 장난과 같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모든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했다.

어째서 여행을 시작했느냐고 그가 물었다. 진지한 물음에도 그 애는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이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그에게 뒤집혔을 거라고 내뱉었다. 시치미를 뗄 때 그 애는 먼지가 쌓인 악기처럼 바람이 막힌 목소리를 냈다. 바른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이 있다. 그렇다면 여행은 고사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옳다. 그런데 왜 험하고 고된 모험을 시작했냐고 되물었다. 까칠하고 커다란 손 위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손이 겹쳐졌다. 그 애가 읊조렸다.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는 없으니 전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는 것으로 끝맺자고.

그리고 그 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끝맺는다는 단어를 발음하는 그 애의 입술이 미웠다.

그는 그 애의 남은 날을 알고 있다.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라면 언제 끝나도 무익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하더라도 그 애만은 아니다. 그 애는 세상의 유일한 색이며 향이다. 만남이 조금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그의 일생은 송두리째 바뀌었을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을 멀리 두게 한 세월의 차이와 운명의 머뭇거림을 한탄했다. 해도 달도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헤맸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기엔 27년은 너무 길었다.

 

밤마다 그 애가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빌었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고 궂은 일을 해도 그는 건강했다. 신체가 깎이거나 부스러지는 일 하나 없었다. 두 눈만이 휘휘하게 말라붙어 갔다. 그는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그 애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생각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몸집이 큰 해골 같은 사내를 그 애는 뭐라고 여길까. 사람이 아닌 유령으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애는 부정이란 것을 모르기에 무엇이든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인다. 아니다. 처음에는 그를 부정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부정하지 않는 것일까. 졸음이 오지 않았다. 답 없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쇠사슬처럼 몸을 칭칭 감았다. 오늘도 잠이 들지 못할 것이다. 잠을 자지 않고 하루를 벌 수 있다면, 평생 잠들지 않고 싶다.

 

*****


그 애는 낮에 찾아왔다. 항상 같은 옷차림이었다. 분홍색 머리핀. 빨간 코트. 하얀 니삭스. 분홍색 부츠. 코트 아래의 다리가 예전에 비해 비쩍 말라있었다. 그러나 여전한 미소로 다가왔다. 안녕. 소소하지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도 안녕.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온다. 그는 그 애의 하루 속에 오직 자신만이 있기를 바랐다. 그의 하루 속에 온전히 그 애만이 있는 것과 같이.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 애가 먼저 운을 뗐다. 추워. 속뜻을 금세 알아챘다. 모든 신경은 작은 아이에게 곤두서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끌어안았다. 품속으로 들어왔다. 작고 마른 몸이 어린 새처럼 둥지를 찾는다. 그 애의 허름하고 메마른 둥지는 온 노력을 기울여, 껴안았다. 따뜻해. 어린 새가 말했다. 거짓인 걸 알았다. 둥지는 겉부터 속까지 차고 무뎠다. 난로처럼 주위를 덥히는 것은 바로 어린 새였다. 둥지는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 재미난 농담이라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그 애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은 나이가 되고 싶어. 그의 동공이 커졌다. 스물일곱의 나와 네가 만났으면 좋겠어.

스물일곱의 나와 네가 만났으면 좋겠어. 스물일곱의 나는 어른일 거야. 놀라운 일도 기적 같은 일도 없는, 어른일 거야. 스물일곱의 나는 시로나씨처럼 길고 멋스러운 코트를 입고 있을 거야. 그 때쯤 되면 나도 검은색이 잘 어울릴지도 몰라. 아니면 칼로스의 챔피언처럼 새하얀 정장을 입을 수도 있지. 어쨌든 더는 이런 옷은 안 입을 테니. 그리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할 거야. 구름시티 같은 향수도 뿌릴 거야. 그리고, 그리고. 스물일곱인 내가, 열 살인 너와 만났으면 좋겠어.

그 애는 그를 보지 않았다. 먼 하늘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알아볼 거니까. 스물일곱의 나는 어른이니, 뭐든 지금의 나보다는 나을 테지. 그리고 너는 아무 것도 모르던 열 살이니, 지금보다 나을 테고. 우리한테는 그게 더 좋았을 걸. 그게 더 좋았을 텐데. 그럼 내가 너를.

그는 그 애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말이 멈춘 사이 까무룩 잠이 든 것이다. 잠이 든 안색이 창백했다. 둥지는 어린 새를 상냥한 손길로 뉘였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스물일곱이 되어도 그 애는 빨간 코트가 어울릴 것이다. 높은 굽의 신발을 신지 않아도 눈에 띌 것이다. 짙은 화장이나 향수로 꾸미지 않아도 그저 미소 짓는 것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애가 스물일곱이건, 그가 열 살이건, 혹은 다른 나이의 다른 사람이건, 그는 그 애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붙잡았을 것이다. 물체의 형태에 따라 그림자가 바뀌듯 애정의 형상만이 달라졌을 것이다. 태양이 비추니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태양은 변하지 않으므로. 늘 같은 자리 같은 밝기로 빛나야하기 때문이다.

 


1차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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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그는 어릴 적 머리가 좋은 소년이었다. 동네에 또래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또래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기계를 만지며 놀았다. 불확실하고 애매한 인간보다 기계는 훨씬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보기에 인간만큼 불완전한 존재는 없었다. 일률적인 체제를 고수하는가 싶으면서도 일탈을 원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들은 같은 대화, 같은 행동에 대해서도, 그 때 그 때 다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는 유년 시절 겪었던 몇 가지 세세한 일들을 기억한다. “같이 놀자고 말한 또래에게 싫어.”라고 답하자 일그러지던 아이의 표정,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하는 선생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몰라 가만있자 선생이 작게 내뿜던 한숨, 무표정하게 다친 포켓몬을 바라보자 아이답지 않은 그 얼굴을 썩 집어치우라고 날아오던 동네 아저씨의 고함.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일에 그는 전혀 익숙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소년은 사람들 사이에 머물 곳을 찾지 못했고, 어느덧 노력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소년의 마음엔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인간을 이토록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인간들에 비해 이지적이라 믿었던 자신조차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열이 끓어오르고 때로는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며 벌벌 떨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때로는 냉철한 그도 자신조차 예측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그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고, 그는 숱한 서적을 탐독하고 인간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연구 끝에, 그것이 감정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세상이 불완전한 것은 감정 때문이다. 어린 그는 이 감정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흔들리고 인간이 모순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포켓몬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추구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포켓몬을 이용해 야욕을 채우려는 인간들도, 이런 인간들을 내버려두는 세상도.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진리를 깨닫자 그의 목적이 단숨에 정해졌다. 망설일 틈도 없이 결정된 한없이 논리적인 결정이었다.

감정 때문에 세상이 이렇다면, 감정이 없는 세상을 만들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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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로운 바람은 그가 자라고 청년이 되면서 차근차근 진행시켜나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수완을 동원해 긴가단이라는 조직을 만들 수 있었고,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키기 위한 절차도 완비할 수 있었다.

 

소녀를 만나기 전까진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소녀를 보면 말을 잃곤 했다. 처음 보았을 때에도 그랬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말재간이 좋은 그지만 그녀 앞에선 어떤 말을 할지 잘 떠올리지 못했다. 청남색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쓸어내리며, 낯선 이에게도 방긋 웃는 작은 소녀 앞에 서면- 그는 방 안에서 홀로 기계를 만지던 유년으로 돌아간 듯 했다. 소녀의 미소는 어린 시절 그가 곧잘 상상했던, 그가 방 안에서 외로이 기계와 놀거나 책을 뒤적일 때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 앞에 나타나주기를 바랐던, 작은 천사의 미소와 닮아 있었던 것이다.

소녀를 볼 때마다 그는 그런 유년의 환상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야말로 그가 혐오하는 감정의 결정체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억누르려 해도 소녀를 만나면 또다시 그렇게 되곤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란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야 알았다.

어린 소녀. 깊은 바다와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화사한 빛깔의 원피스. 새하얀 비니와 개나리색의 머리핀. 자신의 포켓몬을 어루만지며 밝게 웃는 모습. 낯선 이에게도 다정하게 구는 모습.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포켓몬을 좋아한다.’ ‘포켓몬을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한다.’ ‘포켓몬과 함께 사는 세상이, 지금이 너무 좋다....’는 말들.

그녀의 이름은 히카리(). 긴가단의 두목, 천재였던 소년은 작은 빛과 같은 소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마 소녀는 모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 않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속으로만 애를 끓었을 뿐.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녀를 동경도 하였다가, 사랑을 하였다가, 어루만지고 싶다가, 이런 감정을 내어준 그녀가 밉다가, 증오스럽다가, 사라져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가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자신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싶은 모습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적막한 바람이 흐르는 창기둥 아래서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용히 당당하게 걸어오는 소녀를 보며, 그는 잠깐 소녀를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하는 답지 않은 사념에 빠져버리기도 했다. 결국 어릴 적 그의 망상 속 작은 천사는, 빛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의 앞을 막아서러 온 셈이다.

인생에 걸쳐 설계해 온 목표가 무너질 수 있는 극한 상황에서, 그는 심장이 흔들렸다. 두려움에 의한 떨림도, 곧 완성될 세계에 대한 기대감도 아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런 것들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자신에게 빛이 찾아와 준 것에 대한 기쁨으로 인한 두근거림이었다. 비록 이런 방식이긴 했지만, 결국 소녀는 그의 인생에 찾아왔고, 심장을 두드렸으며, 그리고 문을 열어주었다. 어린 소년이 꿈꾸던 상상 속의 천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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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