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아카히카(태홍빛나)] 우주적 모멘텀 글/포켓몬2017. 8. 4. 18:21
항상 중2력을 아카히카로 뽐냈더니 가끔은 발랄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본 이야기...
우주적 모멘텀 (momentum)
아카히카(태홍빛나)
1.
"아, 정말 짜증나!"
테이블 위의 디저트를 우걱우걱 먹어치우며 히카리가 말했다. 귀여운 두 볼은 마치 포핀을 욕심껏 먹은 파치리스처럼 빵빵해져 있었다.
"내가 응, 이정도 노력했으면 말야, 이제 자기 쪽에서 좀, 일케, 뭔가 해봐야하는 거 아냐?"
"야. 일단 삼키고 말하지 그래?"
분노에 차 음식을 해치우는 히카리를 보며 쥰이 한심한 얼굴을 했다. 그의 소꿉친구는 어릴 적부터 겉모습과 달리 마이페이스에 약간 극성맞은 구석도 있긴 했지만, 요즘은 유독 심했다. 그리고 쥰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카기 망할 놈!"
"그래 그래."
문제는 아카기였다. 5년 전 신오우를 소란과 절망의 도가니로 밀어넣었던 긴가단의 보스, 그 아키기였다. 그리고 히카리는 그 악명 높은 긴가단의 야망을 저지하고 신오우를 지킨 어린 영웅이자 최연소 챔피언이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 어떤 일도 옅어지기 마련인지. 지난 5년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신오우는 제자리로 겨우 돌아온 듯 했고, 긴가단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지는 듯 했다. 쥰도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히카리가 아카기와 재회하고, 만남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쥰은 들릴듯 말듯 한숨을 쉬었다. 분명 5년 전만 해도, 쥰이 더 막무가내여서 히카리가 휘둘렸던 것 같은데. 아마 여행도 쥰이 호수에 가자고 야단을 떨어서 시작된 거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는 히카리가 더 야단이다.
"흥. 내가 먼저 연락하나 봐라."
히카리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야무지게 잘랐다. 세상 떠나가라 난리를 부리지만, 별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원인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아카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엄동설한에 얇고 귀여운 원피스를 입고 거리에 서 있었는데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열불이 난 히카리는 아카기에게 뭐라뭐라 따졌지만 그는 딱히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아카기는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입고 있던 감색 코트를 벗어 걸쳐주는 법도 모르는 남자였다.
결국 히카리는 콧물을 훌쩍이며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감기에는 안 걸려서 다행이네."
"그게 뭔가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럴 때 확 열감기가 나서, 침대에서 골골대고 있어야 아카기가 죄책감이라도 느낄텐데!"
이제는 자신의 건강한 신체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소꿉친구인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인데, 남들보다 눈치가 열 배는 떨어지는 아카기가 비위를 맞추기는 어려울 테지. 쥰은 입으로는 히카리를 위로하면서 머리로는 아카기를 동정했다.
"내가 신오우에서 제일 귀엽고 잘 나가는데, 아카기가 그걸 몰라요."
"............."
"뭐야. 왜 긍정을 안 해?"
"아, 네, 그렇습죠."
"후우. 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쨍- 히카리가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내려놓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게 문제 아닐까?"
"뭐가?"
"너는 잘 나가는데 아카기는 아니잖아."
"으음?"
그녀는 못 알아듣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각해 봐. 아카기는 신오우를 멸망시키려고 한 악당 보스고, 너는 그를 무찌른 영웅이라고. 애초에 둘이 만난다는 거 자체가..."
"자체가 뭐?"
히카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쥰이 말투를 가다듬는다.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거지. 아카기한테는. 뭐, 일반 사람들은 아카기가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그 긴가단 보스]일 거라는 생각은 안할테고, 눈에 띄는 직업만 갖지 않으면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을 테지만... 너랑 만난다면..."
"요지는. 내가 아카기한테 부담스러운 여자라는 거?"
쨍- 다시 한번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정말이지. 왜 아카기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예민해지는 거야? 못살겠네.'
불만은 속으로만 품기로 하고. 쥰은 자기도 성질대로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꾹꾹 눌러담았다.
"내 얘기는, 그럴 수도 있다고. 너야 아카기를 좋아하지만. 아카기는 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나저나 대체 아카기가 좋은 이유가 뭐야? 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히카리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러고보니, 아카기는, 얘기해준 적 없어. 날 좋아한다고."
"그래?"
그건 좀 의외였다. 아카기라는 인물이, 마음에도 없는 사람하고 관계를 맺을 건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그만큼 진실성은 있었다. 5년 전부터 히카리를 대하는 눈빛과 태도만 봐도....
"호, 혹시. 안 좋아하는데 내가 보채니까 만나주는 건가? 거절하면 왠지 내가 배틀로 뭉개버릴 거 같으니까, 무서워서 만나는 거야?"
"그럴수도..."
이번엔 마음의 소리를 참지 못하고 무심결에 내뱉어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의외로 히카리는 태클 걸지 않았다. 자기 생각에 골몰한 탓이었다.
"큭. 안되겠어. 이번엔 절대 내가 먼저 연락 안하려고 했는데!"
"연락 하려고?"
"그럼 어떡해? 갑자기 엄청 불안해졌는데. 확인해 볼래."
"배틀로 때려 죽이진 않을테니, 본심을 말하라고?"
"응. 확인해야겠어."
순식간에 옷을 챙겨입고 가게를 나선다. 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 히카리는 빙그르르 돌더니 쥰에게 한마디 던진다.
"아참. 그리고 너는 이 일 끝나고 좀 보자. 아주 생각나는대로 잘 말하더라?"
"헉."
자기 생각에 골몰해서 그런 게 아니라, 중요한 일부터 해치우려는 심산이었다.
2.
봉신유적은 언제나 인적이 드물었다. 5년전, 신오우의 전설이 긴가단 사태와 연관이 있다는 설이 매스컴을 통해 떠돌면서 한동안 관광객이 붐빈 적은 있었다. 유행도 잠시였다. 낡은 냄새가 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평화에 물들어 긴가단도 잊어가는 것처럼, 전설은 또다시 퇴색되어 갔다. 덕분에 아카기는 유적에 개의치 않고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예스럽고 어느새 탁해진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것이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알았기에, 유적에 들릴 적마다 기꺼웠다.
오늘도 아카기는 홀로 봉신 유적에 들렀다. 늘 입던 감색 코트와 까만 구두. 키는 크지만 어쩐지 인상이 희미해 사람들은 그를 굳이 쳐다보지 않고 지나쳤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깊게 눌러쓴 모자 밑에 흐르는 새까만 눈동자가 매서워 눈길을 피하곤 했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 건 오직 한 사람. 굳이 그를 찾아와서 눈을 마주치고자 하는 존재도, 오직 한 사람. 하얀 비니를 쓴 작고 발랄한 소녀였다.
"아카기!"
히카리였다. 익숙한 외침에 아카기는 뒤를 돌아봤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다. 어린애처럼.
"또 여기 와 있네! 나보다 여기가 더 좋아?"
"......오랜만이군."
"딴 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하라고!"
대뜸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역시나 유치한 질문이다. 아카기는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려다, 그것마저 귀찮아졌다.
"무슨 대답?"
"방금 한 질문!"
"네가 하도 볼 때마다 질문을 많이 해서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다."
"아씨, 지금 얘기했잖아. 방금 한 질문! 내가 좋냐고!"
엊그제 분명 다퉜었다. 싸움의 이유는 전적으로 아카기의 책임이었다. 다른 일에 골몰하느라 히카리와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연락두절까지 됐었다. 뒤늦게 떠올리고 약속장소로 달려갔지만, 어쩐지 헐레벌떡 뛰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잔뜩 혼났다. 변명을 해야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더 혼났다. 분명 나이는 자신이 한참 많은데. 화술도 논리도 자신이 훨씬 뛰어날텐데. 왜인지 반박할 수가 없어 그냥 고개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대구도 없이 서 있기만 하냐고 또 혼났다. 그렇게 잔뜩 뿔이 난 히카리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날씨에 비해 너무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자신의 코트를 벗어주고 싶었는데. 그마저 타이밍을 놓쳤다. 아카기는 그런 남자였다.
"뭔 바보같은 질문을..."
맞춰주고 싶어도 그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다. 이런 사소한 다툼은 그만두고 좀더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은데. 히카리는 그럴 짬을 주질 않는다.
눈을 마주치자, 히카리는 전혀 다른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화를 내더니. 어느새 울 것 같은 얼굴.
'아니, 울고 있잖아.'
아카기는 그대로 돌덩이가 되고 말았다. 그의 이지적인 두뇌 속에는 물음표가 수천 수만 개 떠올라 마구 뛰어다녔다. 왜지? 어째서?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카리는 세상 잃은 사람처럼 뚝뚝 눈물을 흘렸다.
"내가 좋은 게 아니구나..."
"아니...."
"흑, 내가 좋은 게 아닌데... 억지로 만나준 거구나...내가 무서워서..."
"............"
이제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이벤트에서 결정장애. 아카기는 그런 남자였다.
"무슨 이상한 상상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아니다."
"우우, 그럼 좋아하는 거 맞아?"
"그..."
"거 봐 대답 못하잖아! 우으...."
눈물샘 탱크의 수도꼭지라도 열어둔 건지 펑펑 잘도 운다. 아카기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히카리가 선물해준, 촌스러운 흔들풍손 문양이 있는 손수건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긴가단의 전 보스가 쩔쩔매고 있다. 한 때 세상을 점령하고 신세계를 탄생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남자가, 눈물 닦아줄 타이밍을 못잡고 벌벌 떨고 있다.
히카리는 너무 울어서 눈앞이 안 보이는 상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이렇게 만나지 않는다."
"......"
"그러니까, 널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말구, 확실하게 말해줘."
"그러니까, 나는 널...."
수초의 정적이 흘렀다. 일초, 이초, 삼초. 그 정적이 마치 무한의 시간 같았다. 땀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혔다. 이렇게 중요한 말을,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해야한단 말인가? 아카기의 두뇌 속에서 수많은 논리와 감정들이 얼키고 설켰다. 그래도 결국 감정의 손을 들어줘야겠지. 그는 십 초의 침묵 뒤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이번엔 죽음과도 같은 조용함이었다. 맺힌 땀이 목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도무지 그녀의 반응을 종잡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다."
"얼만큼?"
"....."
두 번째 난제가 찾아왔다. 이토록 난해한 질문을 또 받은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아카기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어휘를 동원했다.
"우주...만큼."
"우왓."
방금 전까지 눈물을 쏟아내던 히카리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우주? 정말로? 아카기가 갖고 싶었던 세계만큼?"
"그런 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좋아한다."
"우와아!!!?"
이윽고 입을 헤 벌리고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아이 마냥 들떠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진담을 말해버렸군.'
반면 아카기는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창피해서 머리 끝까지 달아오를 것 같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정말이지?"
"정말이다."
"날 그만큼이나 좋아했단 말야?! 헤헤헷. 어쩌면 아카기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들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순간 자신도 낯간지러워진 것이다.
언제나 "응" "아니" 혹은 "그래" 정도 밖에 말하지 않았던 남자가.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빨간 끈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행복하고
부끄러웠다. 히카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사스럽네."
"........."
네가 부추켰잖아. 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사실, 그런 제멋대로인 점 마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전해야 할 진심이었다.
아카기는 답지않게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이걸 받아라."
"응?"
아카기의 말에 히카리가 손가락 사이를 살짝 벌려 그를 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워 심장에 안 좋았다. 중증인가? 아카기는 지금의 기막힌 상황 탓이려니 하고 콩닥대는 심장을 자제시키려 노력했다.
"그, 네가 나에게 손수건을 선물해준 ...답례다."
"어? 아카기가 나한테 주는 거라고??"
히카리는 전광석화처럼 아카기의 선물을 낚아채 포장지를 뜯었다. 세련되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신형 포켓치가 들어있었다.
"와아! 새로 나온 포켓치네! 그것도 분홍색!"
"너는... 분홍색이니까."
분홍색이 잘 어울리니까,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전한 문장을 말하기엔 낯간지러움이 폭발할 거 같아 대충 줄여버렸다.
"고마워! 아카기, 정말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구나."
"..응.."
"그런데 나는 아카기가 안좋아하는데 날 억지로 만난다고 생각해서. 오해해서 미안해. 막 화낸 것도 미안해."
"...사실 그 때 늦은 것도, 예약한 네 포켓치를 받으러 가느라 늦은 거였다."
"어. 정말?"
포켓치는 신오우에서 인기 만점인 상품이다. 그러니 신형이 나오면 늘 예약폭주에, 출시 당일엔 상점에 줄이 늘어선다.
아카기는 여성용 분홍색 포켓치를 사기 위해 1시간이나 줄을 서 있었다. 예전 긴가단 단원들이 보면 경악해 까무러칠 광경이었다.
"아카기 것두 샀어?"
"? 아니, 내 건 안 샀다만.."
"왜애! 샀으면 커플 포켓치일텐데."
아카기는 차마 예산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말은 못했다.
"뭐. 됐어. 아카기 건 또 내가 사줄게! 난 챔피언이라 돈이 많거든."
"그래.."
어느새 히카리는 아카기 옆에 꼬옥 붙어 있었다. 자석도 아니고... 그래도 아카기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무슨 사단이 날지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흐흥. 결국 내가 아카기에게 화 낼 건덕지는 사실 하나도 없었단 거네. 아카기도 날 무지무지 좋아하니깐!"
"....그..래."
"그럼 주말에 잇슈라도 놀러갈까? 나 라이문 시티에서 관람차 타고 싶어!"
"그래."
혹시 이러다가 히카리의 예스 머신으로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도 상관없었기에 아카기는 계속 "그래"라고 답했다. 표현의 강도가 다를 뿐이지 정말 아카기가 마음이 클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화해하고, 유적을 나섰다.
3.
"쥰은 입버릇을 좀 고쳐야겠어."
"헉!"
히카리가 재앙을 예언한 이후로, 쥰은 외진 장소만 골라 다니며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감이 좋은 히카리는 쥰을 금세 찾아내고 말았다. 쥰은 떨었다. 구구를 만난 캐터피처럼 떨었다.
"네가 응, 이상한 소리를 해가지고, 내가 아카기를 오해했잖아! 아카기는 나를 사실 엄청엄청 좋아하는 거였는데."
"그, 그래? 잘됐네!"
겁나는 얼굴을 인간이 시전하면 이런 느낌일까. 히카리의 매서운 눈과 마주치자 쥰은 절로 주눅이 들었다. 배틀하고 이탈하고 싶었지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 잘 됐으니까 봐준다."
"??????"
"잘됐으니까 이번만은 넘어가지."
의외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히카리는 쿨하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배틀이던 육탄전이든 쥰을 때려눕혔을 텐데..? 쥰은 어리둥절 두 눈만 소처럼 꿈뻑였다.
"후후.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덕분에, 아카기한테서 엄청 로맨틱한 말을 들었지 뭐야... 흐흥, 나를 우주만큼 좋아한다나?"
"으엑."
"더 하면 정말 가만 안 둘거다?"
"미안."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다시 말해주지. 아카기가 나를 우주만큼 좋아한대! 내가 얼마나 날 좋아하냐구 물었더니, 날 우주만큼 좋아한대! 아마도 우주만큼 나를 좋아하나보지?"
"똑같은 얘기 세 번 했거든?"
"헤헤. 그리고 날 위해서 한정판 신형 포켓치를 미리 예약까지 해서. 1시간 줄까지 서서 기다렸다지 뭐야? 나랑 약속도 그래서 늦은 거더라구.. 정말, 하하, 후후, 아카기는 귀여운 면이 있어."
어디가?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맞을 거 같아서 쥰은 잠자코 있었다.
"여튼. 덕분에 우리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돈독해졌어. 결과적으론 잘했어!"
"...그래."
"상으로 배틀 해줄까?"
"아니, 됐어."
어차피 질테니까. 히카리를 이겨서 챔피언이 되겠다는 꿈은 이미 5년 전에 접었다. 실력과 재능의 갭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쥰은 아버지를 이어 배틀 프론티어의 브레인이 되기 위해 수행 중이었다.
"그래? 너랑 배틀 안 한지 오래됐는데. 뭐, 됐어! 그럼 난 갈게."
"응. 제발 좀 가라."
그 말에 히카리는 쥰에게 꿀밤을 쥐어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해맑은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정말 유난이지? 저 커플. 쥰은 어서 코우키나 시로나 씨나, 다른 이에게 전화해 이 꼴나사운 커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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