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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히카] 해와 달이 없는 세계에서

 

1)

 

그 애는 병이 있었다. 그러나 자주 그 사실을 잊곤 했다. 아픈 내색 하나 없었다. 그 애는 늘 그의 곁에서, 아침을 깨우는 새처럼 재잘거리곤 했다. 쉼 없이 살가운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다.

절대 그 애는 자신의 병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다. 자신은 영원한 10살을 살 거라고 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은 영원한 10살이지만, 그는 꾸역꾸역 나이를 먹을 테니 영영 우리들은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고. 흘리듯 말했기에 우스갯소리처럼 들렸다. 허나 아니었다. 영원한 10살이 아니어도,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림자가 겹쳐지면 안 되는 사이었다. 다른 하늘에서 다른 땅을 밝고 다른 곳을 향해 걸어야했다. 아니면 한 사람이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은 뒷걸음질 쳐야했다. 잠시나마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 애가 영원한 10살이기 때문이다.

그 애는 더 이상 그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소꿉친구를 대하듯 편하게 불렀다. 호칭과 말투가 바뀐 것은 언제인지 모른다. 나이가 들자 엄마어머니라고 부르게 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다만 그런 일의 반대였을 따름이다. 외려 연상인 그가 더 깍듯하게 그 애를 대하게 되었다. 존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낮췄다. 오래 모신 주인을 대하듯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애는 모양새가 우습다며 답지 않게 헤프게 웃었다.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웃었다. 그는 그 헤픈 웃음이 좋아 계속 우습게 굴었다. 매일 똑같은 어설픈 놀음에 한결 같은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 장난과 같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모든 순간은 영원이 되어야했다.

어째서 여행을 시작했느냐고 그가 물었다. 진지한 물음에도 그 애는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이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그에게 뒤집혔을 거라고 내뱉었다. 시치미를 뗄 때 그 애는 먼지가 쌓인 악기처럼 바람이 막힌 목소리를 냈다. 바른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이 있다. 그렇다면 여행은 고사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옳다. 그런데 왜 험하고 고된 모험을 시작했냐고 되물었다. 까칠하고 커다란 손 위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손이 겹쳐졌다. 그 애가 읊조렸다.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는 없으니 전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는 것으로 끝맺자고.

그리고 그 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끝맺는다는 단어를 발음하는 그 애의 입술이 미웠다.

그는 그 애의 남은 날을 알고 있다.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라면 언제 끝나도 무익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하더라도 그 애만은 아니다. 그 애는 세상의 유일한 색이며 향이다. 만남이 조금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그의 일생은 송두리째 바뀌었을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을 멀리 두게 한 세월의 차이와 운명의 머뭇거림을 한탄했다. 해도 달도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헤맸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기엔 27년은 너무 길었다.

 

밤마다 그 애가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빌었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고 궂은 일을 해도 그는 건강했다. 신체가 깎이거나 부스러지는 일 하나 없었다. 두 눈만이 휘휘하게 말라붙어 갔다. 그는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그 애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생각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몸집이 큰 해골 같은 사내를 그 애는 뭐라고 여길까. 사람이 아닌 유령으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애는 부정이란 것을 모르기에 무엇이든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인다. 아니다. 처음에는 그를 부정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부정하지 않는 것일까. 졸음이 오지 않았다. 답 없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쇠사슬처럼 몸을 칭칭 감았다. 오늘도 잠이 들지 못할 것이다. 잠을 자지 않고 하루를 벌 수 있다면, 평생 잠들지 않고 싶다.

 

*****


그 애는 낮에 찾아왔다. 항상 같은 옷차림이었다. 분홍색 머리핀. 빨간 코트. 하얀 니삭스. 분홍색 부츠. 코트 아래의 다리가 예전에 비해 비쩍 말라있었다. 그러나 여전한 미소로 다가왔다. 안녕. 소소하지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도 안녕.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온다. 그는 그 애의 하루 속에 오직 자신만이 있기를 바랐다. 그의 하루 속에 온전히 그 애만이 있는 것과 같이.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 애가 먼저 운을 뗐다. 추워. 속뜻을 금세 알아챘다. 모든 신경은 작은 아이에게 곤두서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끌어안았다. 품속으로 들어왔다. 작고 마른 몸이 어린 새처럼 둥지를 찾는다. 그 애의 허름하고 메마른 둥지는 온 노력을 기울여, 껴안았다. 따뜻해. 어린 새가 말했다. 거짓인 걸 알았다. 둥지는 겉부터 속까지 차고 무뎠다. 난로처럼 주위를 덥히는 것은 바로 어린 새였다. 둥지는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 재미난 농담이라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그 애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은 나이가 되고 싶어. 그의 동공이 커졌다. 스물일곱의 나와 네가 만났으면 좋겠어.

스물일곱의 나와 네가 만났으면 좋겠어. 스물일곱의 나는 어른일 거야. 놀라운 일도 기적 같은 일도 없는, 어른일 거야. 스물일곱의 나는 시로나씨처럼 길고 멋스러운 코트를 입고 있을 거야. 그 때쯤 되면 나도 검은색이 잘 어울릴지도 몰라. 아니면 칼로스의 챔피언처럼 새하얀 정장을 입을 수도 있지. 어쨌든 더는 이런 옷은 안 입을 테니. 그리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할 거야. 구름시티 같은 향수도 뿌릴 거야. 그리고, 그리고. 스물일곱인 내가, 열 살인 너와 만났으면 좋겠어.

그 애는 그를 보지 않았다. 먼 하늘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알아볼 거니까. 스물일곱의 나는 어른이니, 뭐든 지금의 나보다는 나을 테지. 그리고 너는 아무 것도 모르던 열 살이니, 지금보다 나을 테고. 우리한테는 그게 더 좋았을 걸. 그게 더 좋았을 텐데. 그럼 내가 너를.

그는 그 애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말이 멈춘 사이 까무룩 잠이 든 것이다. 잠이 든 안색이 창백했다. 둥지는 어린 새를 상냥한 손길로 뉘였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스물일곱이 되어도 그 애는 빨간 코트가 어울릴 것이다. 높은 굽의 신발을 신지 않아도 눈에 띌 것이다. 짙은 화장이나 향수로 꾸미지 않아도 그저 미소 짓는 것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애가 스물일곱이건, 그가 열 살이건, 혹은 다른 나이의 다른 사람이건, 그는 그 애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붙잡았을 것이다. 물체의 형태에 따라 그림자가 바뀌듯 애정의 형상만이 달라졌을 것이다. 태양이 비추니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태양은 변하지 않으므로. 늘 같은 자리 같은 밝기로 빛나야하기 때문이다.

 


1차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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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