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2

« 2025/2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2015. 1. 31. 01:49

[포켓몬/쥰히카] 낡은 편지 글/포켓몬2015. 1. 31. 01:49



하얀 눈이 까만 밤하늘을 비집고 내려왔다. 히카리는 입김을 불어 보았다. 그러나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갈색 부츠를 신고, 조금씩 눈이 쌓이기 시작한 거리를 밟아 내려갔다. 짧은 치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다리가 시리지는 않았다. 눈은 곧 쌓일 것 같았다. 아니, 금방 전부 녹아버릴 지도 모른다. 날씨라는 것은 원체 변덕스러우니 말이다.

먼발치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실루엣이었지만, 걸음을 더할수록 그 윤곽이 또렷해졌다. 노란 머리에 까만 머플러를 두른 사내였다. 히카리는 조금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검정이라니,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그것은 스물 두 번째 첫 만남이었다. 익숙하기도, 생경하기도 한 광경.

히카리와 쥰은 어느새 마주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안녕.”

안녕.”

그리고는 한참이 말이 없었다. 서로를 멀뚱하니 보다가,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가, 머리를 긁적이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수도 있겠다. 먼저 말을 건넨 건 쥰이었다.

잘 지냈어?”

뻔하디 뻔한 첫인사. 히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예전에는 둘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말들이 쏟아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다. 남녀 사이라는 게, 인간 관계라는 것이 십년 동안 한결 같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은 스물 두 번째 첫 만남이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고 두 사람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거리감도 늘어갔다. 만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으로 줄다가 마침내 일 년에 한두 번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올해의 첫 만남이었다.

쥰은 머플러를 고쳐 매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질색했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다.

그 머플러, 웃겨.”

느닷없이 히카리가 한 마디를 던졌다. 쥰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히카리가 이렇게 작았던가? 그게 아니라 쥰이 자란 것이다. 유년 시절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했지만,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그 편차가 커지기 시작했다. 쥰은 말 그대로 나무에 물 주듯이 쑥쑥 자라났고, 반면 히카리는 매년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지금은 15cm도 더 차이 날 것이다. 히카리는 한 해 사이 몸이 조금 더 마르고 머리가 자란 것 같았다. 그리고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안녕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데.

검은색이라니, 웃겨.”

언제까지 초록색을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넌 초록색이 어울려.”

일 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머플러 색에 대한 토론이라니. 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서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아, 그런데 그 말이 뭐였더라.

그러는 너야말로 칙칙하네.”

쥰은 히카리의 옷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회색 코트에 갈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안에 입고 있는 원피스마저 까만색이라, 어떤 색감도 느끼기 어려웠다.

어린 아이 같은 색은 이제 입을 수 없잖아.”

그녀는 어릴 적, 분홍색 원피스와 새빨간 코트를 즐겨 입곤 했다. 그리고 하얀 비니를 눌러쓰고, 분홍색 장화로 신오우 이 곳 저 곳을 누볐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 일이던가. 쥰은 지나간 세월을 헤아리기도 벅찼다. 그런데 그 세월이 히카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만큼, 긴 것인지는 의문이 솟았다.

분홍은 이제 싫은 거야?”

싫다기 보담도, 입으면 부끄러워지는 그런 나이가 된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초록색 머플러는 부끄럽거든, 이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해 걷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렇게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발이 닿는 곳까지 걸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다지 날도 춥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까페 같은 곳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아있느니, 나란히 서서 걷는 게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

, 대학교에서 이것 저것, 배우는 중이지.”

히카리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오우가 아닌 칸토에서 말이다. 그녀는 고고학을 전공해 대학원까지 진학할 계획이었다. 미래에는 고고학자나, 혹은 고고학 교수가 될지도 모른다.

배틀은 이제 안 해?”

. 하지 않아. 포켓몬들하고는 놀지만.”

그 말에 쥰은 한숨을 작게 쉬었다. 배틀을 하지 않는다고? 히카리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오우의 짐을 재패하고 챔피언을 무너뜨릴 만큼 배틀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긴가단을 괴멸시키고, 아카기의 야심을 막은 것도 그녀의 배틀 실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배틀은 하지 않는다, 쥰은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쥰은 아직도 하지, 배틀?”

으응. 다음 달에 사천왕 승급 시험을 치를 거야.”

반면 쥰은 여전히 트레이너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올린 결과, 그는 엘리트 트레이너가 되었고-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천왕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입지를 굳힌 것이다.

히카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쥰은 분명 잘될거야.”

고마워.”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코우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시로나 씨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쥰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편지였다.

이거.”

이게 뭔데?”

쥰은 편지를 히카리에게 건네주었다. 히카리는 편지의 겉면을 살펴보았지만, 아무 표시도 없었다.

너한테 썼던 편지야. 부치진 못했지만.”

?”

“예전, 너한테 편지를 썼었어.”

히카리가 봉투를 열려고 하자, 쥰이 막는다.

지금 읽지 말아줘. 나중에, 나중에 읽어.”

히카리는 묵묵히 편지 봉투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년 사이에 편지 종이가 이렇게 낡을 수 있는 건가. 종이가 낡은 것은 꼬깃꼬깃한 탓이었다. 아마 수십 번도 더 편지지를 넣었다가 꺼냈다가를 반복했을 것이다. 히카리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반듯하게 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럼 갈게.”

벌써?”

두 사람이 만난 지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내년에 또 볼 수 있겠지.”

으응. 그럴 거야. 아마도.”

어째서 더 빨리 볼 수는 없는 거야? 더 자주 만나면 안 되는 걸까? 둘 중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녕.”

안녕.”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쥰이 떠났다. 어느새 눈이 어느 정도 쌓여서, 그가 떠난 자리에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히카리는 쥰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자리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고 섰다. 그리고 낡은 편지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에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늘상과 같은 말이었다. 히카리와 쥰이 유년시절 곧잘 떠들곤 하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히카리에게는 그다지 소소한 내용으로 와 닿지 않았다. 쥰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지 너무나도 오래됐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진로가 바뀐 탓일까? 아니, 골은 그 전부터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무언가 말이다. 그런 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어쩌면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방금 쥰이 떠나기 전. 가지 않고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어, 라고 히카리가 말했더라면 될 일이다. 혹은 자주 연락하자, 라고 쥰이 말을 남기기만 했더라도.

편지지에는 안녕, 히카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 말에 왜 이리도 생소할까? 쥰이 소리를 내어 히카리를 이름을 부른 것은 굉장히 오랜 옛날처럼 느껴졌다. 쥰은 편지지에 유독 그 글자를 꾹꾹 눌러 썼더랬다. 안녕, 히카리. 히카리, 히카리라며.

히카리는 편지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쥰이 떠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칸토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느새 눈이 수북하게 쌓여, 누구의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2014.9.20

2015. 2. 1차 수정

음..진단메이커를 돌려서 나온 걸로 쓴 건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네요.(;)





:
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