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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아니라..정말로 이런 꿈을 꿨습니다.

날짜는 2012.10.31



 

리본 5개를 다 모으고, 그랜드 페스티벌 무대에 섰을 때, 히카리는 모든 것이 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초보 트레이너에 불과했지만- 이젠 아니다. 일류 코디네이터를 꿈꾸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 그 중에서  리본 5개를 모아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사람들은 고작 몇백명. 그 안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무리없이 리본을 따 낸 것처럼 그랜드 페스티벌도 순조롭게 이겨나가, 어쩌면 우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선 심사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진.

 

대기실에서부터 미친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랜드 페스티벌은 일개 마을이나 도시에서 열리는 콘테스트의 예선과는 차원이 달랐다. 톱 코디네이터와 코디네이터 협회의 엘리트들이 심사석에 앉아 있고, 수천의 관중이 자신의 연기를 지켜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감춰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기차게 흘러내렸고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됐다. 거울 속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을 추스르는 데 시간을 쏟은 탓일까- 히카리는 정작 자신이 쥐고 있는 몬스터볼은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테이지에 올라가고 나서야, 자신이 다른 몬스터볼을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블 퍼포먼스에 원래 쓰려고 했던 포켓몬은 폿차마와 미미롭. 하지만 자신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성질이 전혀 다른 크로뱃과 마네네였다. 히카리는 식겁했다.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실수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깨닫자 손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극도로 당황한 탓에, 연기 시작의 신호가 울려도 목석처럼 서 있을 뿐, 몬스터볼을 던지지 못했다. 수천 관중의 눈들이 둥둥 떠다니며 자신을 차갑게 내려보는 것 같았다. 정작 자신의 두눈은 어디에 둘 지를 모른채, 그녀는 눈을 꾹 감고 무작정 볼을 던졌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크로뱃과 마네네로는 단 한번도 연기를 맞춰본 적 없었다. 순간의 기지로 위기를 돌파할 만큼의 정신적 여력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몇가지 기술을 외쳤던 것 같지만 사실 무얼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크로뱃과 마네네는 역시 자신들의 예상치 못한 등장과 트레이너의 당황에 어쩔 줄 몰라했다. 힘없는 기술들이 볼품없게 스테이지 위를 떠돌았고, 소녀 코디네이터는 자신의 몸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타임 오프. 그리고 싸늘한 정적. 관중들은 박수하나 보내지 않았다. 심사석에서도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 심사평을 해 주시죠.. 어색하게 사회자가 말을 했다. 그러자 가운데에 앉아있는 현직 코디네이터가 무덤덤하게, 하지만 매섭게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지금 여기에 뭐하자고 올라온 거죠?]

 

히카리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연한 탈락에 망연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생각하기도 버거웠다.

결국 "자신의 실책이다. 해이한 정신상태 때문이다. 나사가 하나 쯤 빠졌었나 보다."라고 결론 내렸지만-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변명도 할 수 없는 범위의 실수. 초보 트레이너라도 몬스터볼을 잘못 고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도대체 자신 안에 무엇이 일어나서 이런 한심한 일을 저지른 걸까?

자책을 머금은 한숨과 함께, 대회장을 등지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후타바 타운으로 들어설 때 쯤에야 그녀의 몽롱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작은 마을의 한적한 풍경을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은 그런 큰 무대에 설 그릇이 아니었단 것을.

 

집에 가자 어머니는 말없이 딸을 맞아주었다. 다정하게 등을 몇 번 두드려주고는, "괜찮다."고 다독였다. 하지만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익숙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 앉아, 그녀는 스스로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했다고 해서 일류 코디네이터가 될 거라는 것은 단순한 오산이었다.

매년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수백명의 선수들 중에 이름을 알릴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내는 사람들은 고작 서너명.

때로는 우승, 준우승을 해도 그 이후 행보에 따라 콘테스트 계에서 이름이 묻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엄청난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톱 코디네이터가 되어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라는 꿈은 작은 마을의 소녀에게 있어선 과분했던 야망이었다. 어릴 적부터 훈련과 레슨을 받으며 자란 엘리트들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무대에 오른다는 것만으로 벌벌 떨 정도로 긴장하는 시골 소녀에게 어울리는 일일까.

히카리는 따뜻한 솜이불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10살 짜리 시골 마을 소녀가 여행을 떠난 지 몇개월 만에 리본을 다 모으고 그랜드 페스티벌을 제패한다.

그래, 자신이 그런 전설이 될 리는 없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건 이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 작은 세상에서 포켓몬이랑 오손도손, 평범하게 사는 게 어울린다. 일류 트레이너, 톱 코디네이터는 먼 세상이 일이 되고.. 언젠가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작고 귀엽지만 별 개성은 없는 아이를 키우며 소박하게 살지도 모른다. 그래,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미래이자 현실. 포켓몬과 함께한 여행도 한 때 품었던 포부도 어린 날의 치기이자 한 순간의 소망으로 전락해버리는,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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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