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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31. 01:49

[포켓몬/쥰히카] 낡은 편지 글/포켓몬2015. 1. 31. 01:49



하얀 눈이 까만 밤하늘을 비집고 내려왔다. 히카리는 입김을 불어 보았다. 그러나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갈색 부츠를 신고, 조금씩 눈이 쌓이기 시작한 거리를 밟아 내려갔다. 짧은 치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다리가 시리지는 않았다. 눈은 곧 쌓일 것 같았다. 아니, 금방 전부 녹아버릴 지도 모른다. 날씨라는 것은 원체 변덕스러우니 말이다.

먼발치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실루엣이었지만, 걸음을 더할수록 그 윤곽이 또렷해졌다. 노란 머리에 까만 머플러를 두른 사내였다. 히카리는 조금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검정이라니,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그것은 스물 두 번째 첫 만남이었다. 익숙하기도, 생경하기도 한 광경.

히카리와 쥰은 어느새 마주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안녕.”

안녕.”

그리고는 한참이 말이 없었다. 서로를 멀뚱하니 보다가,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가, 머리를 긁적이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수도 있겠다. 먼저 말을 건넨 건 쥰이었다.

잘 지냈어?”

뻔하디 뻔한 첫인사. 히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예전에는 둘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말들이 쏟아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다. 남녀 사이라는 게, 인간 관계라는 것이 십년 동안 한결 같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은 스물 두 번째 첫 만남이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고 두 사람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거리감도 늘어갔다. 만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으로 줄다가 마침내 일 년에 한두 번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올해의 첫 만남이었다.

쥰은 머플러를 고쳐 매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질색했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다.

그 머플러, 웃겨.”

느닷없이 히카리가 한 마디를 던졌다. 쥰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히카리가 이렇게 작았던가? 그게 아니라 쥰이 자란 것이다. 유년 시절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했지만,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그 편차가 커지기 시작했다. 쥰은 말 그대로 나무에 물 주듯이 쑥쑥 자라났고, 반면 히카리는 매년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지금은 15cm도 더 차이 날 것이다. 히카리는 한 해 사이 몸이 조금 더 마르고 머리가 자란 것 같았다. 그리고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안녕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데.

검은색이라니, 웃겨.”

언제까지 초록색을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넌 초록색이 어울려.”

일 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머플러 색에 대한 토론이라니. 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서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아, 그런데 그 말이 뭐였더라.

그러는 너야말로 칙칙하네.”

쥰은 히카리의 옷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회색 코트에 갈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안에 입고 있는 원피스마저 까만색이라, 어떤 색감도 느끼기 어려웠다.

어린 아이 같은 색은 이제 입을 수 없잖아.”

그녀는 어릴 적, 분홍색 원피스와 새빨간 코트를 즐겨 입곤 했다. 그리고 하얀 비니를 눌러쓰고, 분홍색 장화로 신오우 이 곳 저 곳을 누볐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 일이던가. 쥰은 지나간 세월을 헤아리기도 벅찼다. 그런데 그 세월이 히카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만큼, 긴 것인지는 의문이 솟았다.

분홍은 이제 싫은 거야?”

싫다기 보담도, 입으면 부끄러워지는 그런 나이가 된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초록색 머플러는 부끄럽거든, 이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해 걷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렇게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발이 닿는 곳까지 걸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다지 날도 춥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까페 같은 곳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아있느니, 나란히 서서 걷는 게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

, 대학교에서 이것 저것, 배우는 중이지.”

히카리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오우가 아닌 칸토에서 말이다. 그녀는 고고학을 전공해 대학원까지 진학할 계획이었다. 미래에는 고고학자나, 혹은 고고학 교수가 될지도 모른다.

배틀은 이제 안 해?”

. 하지 않아. 포켓몬들하고는 놀지만.”

그 말에 쥰은 한숨을 작게 쉬었다. 배틀을 하지 않는다고? 히카리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오우의 짐을 재패하고 챔피언을 무너뜨릴 만큼 배틀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긴가단을 괴멸시키고, 아카기의 야심을 막은 것도 그녀의 배틀 실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배틀은 하지 않는다, 쥰은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쥰은 아직도 하지, 배틀?”

으응. 다음 달에 사천왕 승급 시험을 치를 거야.”

반면 쥰은 여전히 트레이너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올린 결과, 그는 엘리트 트레이너가 되었고-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천왕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입지를 굳힌 것이다.

히카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쥰은 분명 잘될거야.”

고마워.”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코우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시로나 씨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쥰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편지였다.

이거.”

이게 뭔데?”

쥰은 편지를 히카리에게 건네주었다. 히카리는 편지의 겉면을 살펴보았지만, 아무 표시도 없었다.

너한테 썼던 편지야. 부치진 못했지만.”

?”

“예전, 너한테 편지를 썼었어.”

히카리가 봉투를 열려고 하자, 쥰이 막는다.

지금 읽지 말아줘. 나중에, 나중에 읽어.”

히카리는 묵묵히 편지 봉투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년 사이에 편지 종이가 이렇게 낡을 수 있는 건가. 종이가 낡은 것은 꼬깃꼬깃한 탓이었다. 아마 수십 번도 더 편지지를 넣었다가 꺼냈다가를 반복했을 것이다. 히카리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반듯하게 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럼 갈게.”

벌써?”

두 사람이 만난 지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내년에 또 볼 수 있겠지.”

으응. 그럴 거야. 아마도.”

어째서 더 빨리 볼 수는 없는 거야? 더 자주 만나면 안 되는 걸까? 둘 중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녕.”

안녕.”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쥰이 떠났다. 어느새 눈이 어느 정도 쌓여서, 그가 떠난 자리에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히카리는 쥰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자리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고 섰다. 그리고 낡은 편지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에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늘상과 같은 말이었다. 히카리와 쥰이 유년시절 곧잘 떠들곤 하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히카리에게는 그다지 소소한 내용으로 와 닿지 않았다. 쥰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지 너무나도 오래됐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진로가 바뀐 탓일까? 아니, 골은 그 전부터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무언가 말이다. 그런 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어쩌면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방금 쥰이 떠나기 전. 가지 않고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어, 라고 히카리가 말했더라면 될 일이다. 혹은 자주 연락하자, 라고 쥰이 말을 남기기만 했더라도.

편지지에는 안녕, 히카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 말에 왜 이리도 생소할까? 쥰이 소리를 내어 히카리를 이름을 부른 것은 굉장히 오랜 옛날처럼 느껴졌다. 쥰은 편지지에 유독 그 글자를 꾹꾹 눌러 썼더랬다. 안녕, 히카리. 히카리, 히카리라며.

히카리는 편지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쥰이 떠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칸토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느새 눈이 수북하게 쌓여, 누구의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2014.9.20

2015. 2. 1차 수정

음..진단메이커를 돌려서 나온 걸로 쓴 건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네요.(;)





:
Posted by 새벽(dawn)
2015. 1. 31. 01:45

[포켓몬/시로히카] 쉬는 시간 글/포켓몬2015. 1. 31. 01:45

2012.6.10

시로히카 학교 AU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히카리는 교무실로 향했다. 품 안에는 교과서와 자습서를 들려 있었다.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창가와 벽을 낀 외진 자리. 그곳이 역사 담당 시로나의 자리였다. 히카리는 조심스럽게 선생님을 불렀다. 그러자 시로나는 바로 그녀를 알아보고는 옆으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저, 선생님. 질문이 있어서요.."

"그래그래. 히카리는 언제나 열심이구나."

 

선생님의 칭찬에 머쓱한지, 히카리는 대답도 않고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이 책 저 책의 페이지를 넘겨가다, 어떤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히카리는 이 부분의 교과서 설명과 자습서의 설명이 조금 괴리감이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시로나는 말없이 책을 응시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모의고사나 내신과는 일체 관계 없는 부분이었다. 시로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으응. 그래 이건 말이지.."

 

시로나는 상당히 능력있는 역사 선생님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도 성적이 우수해 조기졸업을 하고, 어린 나이에 역사나 교육 관련 서적들의 집필에 여러번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교과서의 아무리 소소한 내용일지라도, 학생들에게 자세하고 깊게 설명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한 히카리는 답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소녀의 시선은, 물 흐르듯 자신의 지식을 토해내는 선생님의 모습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투, 입술 모양, 움직이는 손 끝, 부드러운 금색 머리칼, 그녀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소녀를 사로잡았다. 히카리는 우등생이었다. 공부는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들고 그 중에서도 역사 과목은 항상 거의 만점을 받다시피 했다. 히카리는 수업에 열중하는 눈빛만으로도,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선생님들에게 품게 해 주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리고 난해한 문제도 스스로 풀어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배우는 유형이어서, 선생님들에게 질문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게다가 시로나는 언제나 수업이 끝나기 5분 전 쯤, 질문할 시간을 주곤 했다. 하지만 히카리는 그 시간을 이용하지 않고, 언제나 쉬는 시간에 쪼르르 달려와서는 시로나의 책상에 서있곤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미미한 문제들,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들을 잔뜩 껴안고서.

 

"-라는 거란다. 이해했니, 히카리?"

 

시로나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히카리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소녀는 네, 네 하며 대답하기는 했다. 그러나 선생님한테 푹 빠져있던 탓에 말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 가 볼게요 선생님, 이라는 말도 못하고 히카리는 멋쩍게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쉬는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선생님과 같이 있고 싶었다. 선생님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히카리는 머쓱해져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사실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소녀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동경? 존경? 공경? 혹은... 어린 히카리는 그 이상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느끼는 그런 보통의 느낌이 아니란 것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멀뚱히 서 있는 제자를 보고, 시로나는 또 한번 웃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왜 여기에 계속 서 있는지도 모르겠지.' 나이차가 심하게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로나는 어른이었다. 질문거리를 만들어서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에게 찾아 오고, 정답은 귀 기울여 듣지도 않는다. 한참을 자신을 붉어진 얼굴로 빤히 쳐다보더니, 가야할 때가 되니 아쉬워서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런 아이의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히카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로나는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곧 있으면 수업 시작할테니 같이 교실로 가볼까. 나는 다음 수업이 9반이니까 너희반은 가는 길이거든."

"앗, 네.. 네 선생님!"

 

 그 말에 금새 얼굴이 밝아져서는. 제자는 선생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아아, 내 제자는 참 순진하기도 하구나. 그러면 다 알 수 밖에 없잖아.

 

:
Posted by 새벽(dawn)

제목이 아니라..정말로 이런 꿈을 꿨습니다.

날짜는 2012.10.31



 

리본 5개를 다 모으고, 그랜드 페스티벌 무대에 섰을 때, 히카리는 모든 것이 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초보 트레이너에 불과했지만- 이젠 아니다. 일류 코디네이터를 꿈꾸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 그 중에서  리본 5개를 모아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사람들은 고작 몇백명. 그 안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무리없이 리본을 따 낸 것처럼 그랜드 페스티벌도 순조롭게 이겨나가, 어쩌면 우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선 심사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진.

 

대기실에서부터 미친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랜드 페스티벌은 일개 마을이나 도시에서 열리는 콘테스트의 예선과는 차원이 달랐다. 톱 코디네이터와 코디네이터 협회의 엘리트들이 심사석에 앉아 있고, 수천의 관중이 자신의 연기를 지켜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감춰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기차게 흘러내렸고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됐다. 거울 속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을 추스르는 데 시간을 쏟은 탓일까- 히카리는 정작 자신이 쥐고 있는 몬스터볼은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테이지에 올라가고 나서야, 자신이 다른 몬스터볼을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블 퍼포먼스에 원래 쓰려고 했던 포켓몬은 폿차마와 미미롭. 하지만 자신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성질이 전혀 다른 크로뱃과 마네네였다. 히카리는 식겁했다.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실수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깨닫자 손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극도로 당황한 탓에, 연기 시작의 신호가 울려도 목석처럼 서 있을 뿐, 몬스터볼을 던지지 못했다. 수천 관중의 눈들이 둥둥 떠다니며 자신을 차갑게 내려보는 것 같았다. 정작 자신의 두눈은 어디에 둘 지를 모른채, 그녀는 눈을 꾹 감고 무작정 볼을 던졌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크로뱃과 마네네로는 단 한번도 연기를 맞춰본 적 없었다. 순간의 기지로 위기를 돌파할 만큼의 정신적 여력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몇가지 기술을 외쳤던 것 같지만 사실 무얼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크로뱃과 마네네는 역시 자신들의 예상치 못한 등장과 트레이너의 당황에 어쩔 줄 몰라했다. 힘없는 기술들이 볼품없게 스테이지 위를 떠돌았고, 소녀 코디네이터는 자신의 몸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타임 오프. 그리고 싸늘한 정적. 관중들은 박수하나 보내지 않았다. 심사석에서도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 심사평을 해 주시죠.. 어색하게 사회자가 말을 했다. 그러자 가운데에 앉아있는 현직 코디네이터가 무덤덤하게, 하지만 매섭게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지금 여기에 뭐하자고 올라온 거죠?]

 

히카리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연한 탈락에 망연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생각하기도 버거웠다.

결국 "자신의 실책이다. 해이한 정신상태 때문이다. 나사가 하나 쯤 빠졌었나 보다."라고 결론 내렸지만-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변명도 할 수 없는 범위의 실수. 초보 트레이너라도 몬스터볼을 잘못 고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도대체 자신 안에 무엇이 일어나서 이런 한심한 일을 저지른 걸까?

자책을 머금은 한숨과 함께, 대회장을 등지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후타바 타운으로 들어설 때 쯤에야 그녀의 몽롱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작은 마을의 한적한 풍경을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은 그런 큰 무대에 설 그릇이 아니었단 것을.

 

집에 가자 어머니는 말없이 딸을 맞아주었다. 다정하게 등을 몇 번 두드려주고는, "괜찮다."고 다독였다. 하지만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익숙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 앉아, 그녀는 스스로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했다고 해서 일류 코디네이터가 될 거라는 것은 단순한 오산이었다.

매년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수백명의 선수들 중에 이름을 알릴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내는 사람들은 고작 서너명.

때로는 우승, 준우승을 해도 그 이후 행보에 따라 콘테스트 계에서 이름이 묻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엄청난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톱 코디네이터가 되어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라는 꿈은 작은 마을의 소녀에게 있어선 과분했던 야망이었다. 어릴 적부터 훈련과 레슨을 받으며 자란 엘리트들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무대에 오른다는 것만으로 벌벌 떨 정도로 긴장하는 시골 소녀에게 어울리는 일일까.

히카리는 따뜻한 솜이불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10살 짜리 시골 마을 소녀가 여행을 떠난 지 몇개월 만에 리본을 다 모으고 그랜드 페스티벌을 제패한다.

그래, 자신이 그런 전설이 될 리는 없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건 이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 작은 세상에서 포켓몬이랑 오손도손, 평범하게 사는 게 어울린다. 일류 트레이너, 톱 코디네이터는 먼 세상이 일이 되고.. 언젠가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작고 귀엽지만 별 개성은 없는 아이를 키우며 소박하게 살지도 모른다. 그래,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미래이자 현실. 포켓몬과 함께한 여행도 한 때 품었던 포부도 어린 날의 치기이자 한 순간의 소망으로 전락해버리는,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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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