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아카히카(아카히카)] 새로운 시작을 할 거야, 하지만.. 글/포켓몬2015. 1. 31. 01:23
2014.9.3
진단메이커: 아카히카로 "새로운 시작을 할거야 하지만 거기에 너는 없어." 우울한 분위기로 연성↓
연락을 받고 히카리는 조금 들떠있었다. 그쪽에서 그녀를 먼저 호출한 것은 처음이었다. 재빠르게 머리를 곱게 빗고, 새하얀 블라우스에 단정하게 가디건을 걸친 뒤 전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보았다. 이내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그녀는 집을 나섰다.
오늘 히카리는 상당히 붕 떠 있었다. 아침부터 그가 전화를 걸어 낮은 목소리로 “히카리”라고 자신을 부르는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한손에 든 연분홍색 토드백을 리드미컬하게 흔들며 그녀는 약속한 까페로 들어섰다.
처음에 히카리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항상 가장 어둔 자리, 보통 사방이 벽이나 화분으로 둘러싸인 자리에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 있곤 했다. 음지가 마치 자신의 태생적인 영역인 마냥, 자신 없이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곤 했다. 그래서 까페에 들어섰을 때에도 히카리는 자동적으로 구석자리부터 눈여겨보았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약속한 장소가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데, 가게 중앙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아카기였다.
히카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훑어봤다. 그는 까페 정중앙에 앉아있었다. 가장 둥글고 매끈한 원목 탁자에, 유영하듯 몸을 의자에 늘어뜨리고 자연스레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얼떨떨해진 히카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그를 보았다. 단 한 번도 아카기는 히카리를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아카기가 맞았다.
히카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새하얀 조명이 쏟아지는 까페 정중앙 자리가 불편했다. 아카기와는 늘 남들이 보지 않으며 머리가 맞닿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서, 별 거 아닌 신변잡기들을 비밀 얘기하듯 쏟아내곤 했다. 그런 밀애와 같은 사랑 방식이 그들에게는 알맞았다. 그랬다고 히카리는 줄곧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여유로운 얼굴로 커피 잔을 쥐고 있는 아카기를 보며 마뜩치 않은 것도 감내하기로 했다. 그녀는 그 순간부터 불안함을 감지한 것인지도 모른다.
히카리는 아카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몇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만나왔던 그인데도, 처음 보는 사내인양 어색하고 두려웠다. 그의 새하얀 와이셔츠가 조명에 눈이 부신 탓일 수도, 아니면 반듯하게 다린 옷깃이 그녀를 찌를 듯이 날이 선 탓일 수도 있다. 아니면 더 이상 그녀에게로 다가오지 않고 의자에 깊숙이 기댄 그의 커다란 상체 탓일 수도 있다. 히카리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어쩐지 예전보다 눈망울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춥지 않아?”
그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 히카리는 그제야 자신이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겨울이 완전히 가시질 않아 아직 날이 쌀쌀하고 바람이 찼다. 그러나 몸매를 두툼하고 밉게 보이게 만드는 따뜻한 옷들을 옷장에서 치워내고 산뜻한 복장을 골라 입으니 저절로 얇은 옷차림이 되었다. 아키기의 물음을 귀로 들은 이후에야 그녀는 어깨가 조금 시리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입으로는 “괜찮아.”라고 짧게 답했다. 춥다고 물었지만 그는 차가워진 그녀의 어깨나 다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대답 대신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할 말이란 게 뭐야…?”
집에서 나와 까페로 오면서, 히카리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교제해온 남녀가 최종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그런 결말이 ‘어쩌면’ 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아카기의 야망을 저지한 건 다름 아닌 히카리였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려던 아카기를 구한 것도 히카리였다. 히카리는 아카기에게 마지막을 주었지만 동시에 시작을 선물한 셈이었다. 그 뒤 두 사람은 수 년 동안 가족보다도 친우보다도 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윽고, 엉키고 허물어진 인연에 다리를 놓아 건너갈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고 여기게 되었다. 적어도 히카리는 그랬다. 그리고 함께한 세월이 그 다리를 튼튼하게 다져줬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그가 손 안에 작은 보석 상자라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고.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발견한 다음부터 그의 손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은 비어있었다. 가방도 없었으며 주머니가 볼록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아카기의 전신은 자유롭게 비어있었다.
아카기가 말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림 없는 유연한 선율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할 거다.”
그런 그의 앞에서 히카리는 “좋은, 생각이네.”하고 띄엄띄엄, 맥없는 박자가 실린 몇 마디만 내뱉었다.
“어디에서든 상관은 없다. 잇슈든, 호우엔이든, 칸토든…. 아니면 칼로스도 괜찮겠지. 이 곳 신오우만 아니라면 어디든 괜찮다.”
그의 전신은 오랜 세월 꽃을 피우지 못하다가 이른 봄에 마침내 어린 싹을 틔워낸 거목처럼 단단하고 움츠러들지 않았다. 반면 히카리는 한철이 지나면 시드는 꽃 마냥 고개를 숙이고 그를 바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건데…?”하고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만 입가에서 아른거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대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는 택시기사가 될 수도 있고, 작은 마을에서 포켓몬과 지내는 키우미집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배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선원이 될 수도 있겠지. 긴가단과 전설의 포켓몬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내는 파도와 같이 거침이 없었다. 히카리는 쭈뼛 어깨를 움츠리다가 말했다. “나는 좋아….”라고. “어디를 가건, 무슨 일을 하건…아카기와 갈 수 있다면.”하고 주눅이 든 목소리로 용기를 쥐어짜 말했다.
아카기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넘치는 두 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 두 눈을 보자마자 히카리는 비어있던 그의 두 손을 생각했다. 나무처럼 건조하고 메마르지만 커다란 두 손.
“새로운 시작을 할 거다. 하지만…거기에 너는 없어.”
그는 그런 두 손으로 히카리를 잡아주지 않았다. 외로운 처지를 한탄하고, 세월을 사념할 때마다 소녀는 사내의 두 손을 곱게 따뜻하게 감싸주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손을 잡아준 적이 없었다. 마지막까지도 잡아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누구와도 닿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는 두 손을 고이 탁자 아래 모아 쥐고 있다.
“네가 없어야만 내가 시작할 수 있다. 히카리.”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히카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째서 자신을 부른 이 목소리가,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님을 진작 알지 못했을까. 눈물은 메마른 대지를 적시려는 듯 우수수 흘러내렸다. 그러나 어느 땅에도 어느 나무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나는” 히카리가 무어라 말을 하려했다. “나는….”
“나는 과거를 떨쳐내고 새로운 시작을 할 것이다. 그동안 함께 해 준 것에 고맙다는 인사는 않을 테니 울지 마라. 과거를 떨쳐내야 시작할 수 있어. 너는 그 과거의 일부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설명도 구태여 필요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카리는 탁자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울고 있었다. 탁자가 너무 매끄럽고 둥글어서 온 몸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카기는 개의치 않고 뒤돌아나갔다. 히카리의 입가에서 무언가 말이 자꾸 맴돌았다. “나는”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했다. “나는….”
“그럼 이만 가보겠다.”
아카기는 자리를 떴다. 미련 없는 발자국 소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선명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는 마지막 말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줄 것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카리는 주고 싶은 게 있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늘 그의 곁에서 말하고 웃고 떠들었던 그녀를 과거라고 칭하는 사내에게 그 말을 들려줄 수가 없었다.
물을 잔뜩 먹어 무겁고 축축해진 스펀지처럼, 히카리는 온 몸을 지탱하기 버거웠다. 아니, 사실 이미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하게, 또박또박 말했다.그와 함께 가고 싶다고, 어디로든 가고 싶다고…. 이미 말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떠났다. 히카리는 이제 더 이상 ‘어쩌면’이라는 말도, ‘히카리’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바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 자국이 남은 커피 잔에서 따뜻한 김이 짙은 커피향과 함께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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