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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31. 01:49

[포켓몬/쥰히카] 낡은 편지 글/포켓몬2015. 1. 31. 01:49



하얀 눈이 까만 밤하늘을 비집고 내려왔다. 히카리는 입김을 불어 보았다. 그러나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갈색 부츠를 신고, 조금씩 눈이 쌓이기 시작한 거리를 밟아 내려갔다. 짧은 치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다리가 시리지는 않았다. 눈은 곧 쌓일 것 같았다. 아니, 금방 전부 녹아버릴 지도 모른다. 날씨라는 것은 원체 변덕스러우니 말이다.

먼발치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실루엣이었지만, 걸음을 더할수록 그 윤곽이 또렷해졌다. 노란 머리에 까만 머플러를 두른 사내였다. 히카리는 조금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검정이라니,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그것은 스물 두 번째 첫 만남이었다. 익숙하기도, 생경하기도 한 광경.

히카리와 쥰은 어느새 마주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안녕.”

안녕.”

그리고는 한참이 말이 없었다. 서로를 멀뚱하니 보다가,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가, 머리를 긁적이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수도 있겠다. 먼저 말을 건넨 건 쥰이었다.

잘 지냈어?”

뻔하디 뻔한 첫인사. 히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예전에는 둘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말들이 쏟아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다. 남녀 사이라는 게, 인간 관계라는 것이 십년 동안 한결 같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은 스물 두 번째 첫 만남이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고 두 사람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거리감도 늘어갔다. 만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으로 줄다가 마침내 일 년에 한두 번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올해의 첫 만남이었다.

쥰은 머플러를 고쳐 매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질색했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다.

그 머플러, 웃겨.”

느닷없이 히카리가 한 마디를 던졌다. 쥰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히카리가 이렇게 작았던가? 그게 아니라 쥰이 자란 것이다. 유년 시절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했지만,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그 편차가 커지기 시작했다. 쥰은 말 그대로 나무에 물 주듯이 쑥쑥 자라났고, 반면 히카리는 매년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지금은 15cm도 더 차이 날 것이다. 히카리는 한 해 사이 몸이 조금 더 마르고 머리가 자란 것 같았다. 그리고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안녕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데.

검은색이라니, 웃겨.”

언제까지 초록색을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넌 초록색이 어울려.”

일 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머플러 색에 대한 토론이라니. 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서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아, 그런데 그 말이 뭐였더라.

그러는 너야말로 칙칙하네.”

쥰은 히카리의 옷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회색 코트에 갈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안에 입고 있는 원피스마저 까만색이라, 어떤 색감도 느끼기 어려웠다.

어린 아이 같은 색은 이제 입을 수 없잖아.”

그녀는 어릴 적, 분홍색 원피스와 새빨간 코트를 즐겨 입곤 했다. 그리고 하얀 비니를 눌러쓰고, 분홍색 장화로 신오우 이 곳 저 곳을 누볐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 일이던가. 쥰은 지나간 세월을 헤아리기도 벅찼다. 그런데 그 세월이 히카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만큼, 긴 것인지는 의문이 솟았다.

분홍은 이제 싫은 거야?”

싫다기 보담도, 입으면 부끄러워지는 그런 나이가 된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초록색 머플러는 부끄럽거든, 이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해 걷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렇게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발이 닿는 곳까지 걸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다지 날도 춥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까페 같은 곳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아있느니, 나란히 서서 걷는 게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

, 대학교에서 이것 저것, 배우는 중이지.”

히카리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오우가 아닌 칸토에서 말이다. 그녀는 고고학을 전공해 대학원까지 진학할 계획이었다. 미래에는 고고학자나, 혹은 고고학 교수가 될지도 모른다.

배틀은 이제 안 해?”

. 하지 않아. 포켓몬들하고는 놀지만.”

그 말에 쥰은 한숨을 작게 쉬었다. 배틀을 하지 않는다고? 히카리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오우의 짐을 재패하고 챔피언을 무너뜨릴 만큼 배틀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긴가단을 괴멸시키고, 아카기의 야심을 막은 것도 그녀의 배틀 실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배틀은 하지 않는다, 쥰은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쥰은 아직도 하지, 배틀?”

으응. 다음 달에 사천왕 승급 시험을 치를 거야.”

반면 쥰은 여전히 트레이너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올린 결과, 그는 엘리트 트레이너가 되었고-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천왕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입지를 굳힌 것이다.

히카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쥰은 분명 잘될거야.”

고마워.”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코우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시로나 씨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쥰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편지였다.

이거.”

이게 뭔데?”

쥰은 편지를 히카리에게 건네주었다. 히카리는 편지의 겉면을 살펴보았지만, 아무 표시도 없었다.

너한테 썼던 편지야. 부치진 못했지만.”

?”

“예전, 너한테 편지를 썼었어.”

히카리가 봉투를 열려고 하자, 쥰이 막는다.

지금 읽지 말아줘. 나중에, 나중에 읽어.”

히카리는 묵묵히 편지 봉투를 바라보았다. 고작 몇 년 사이에 편지 종이가 이렇게 낡을 수 있는 건가. 종이가 낡은 것은 꼬깃꼬깃한 탓이었다. 아마 수십 번도 더 편지지를 넣었다가 꺼냈다가를 반복했을 것이다. 히카리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반듯하게 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럼 갈게.”

벌써?”

두 사람이 만난 지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내년에 또 볼 수 있겠지.”

으응. 그럴 거야. 아마도.”

어째서 더 빨리 볼 수는 없는 거야? 더 자주 만나면 안 되는 걸까? 둘 중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녕.”

안녕.”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쥰이 떠났다. 어느새 눈이 어느 정도 쌓여서, 그가 떠난 자리에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히카리는 쥰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자리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고 섰다. 그리고 낡은 편지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에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늘상과 같은 말이었다. 히카리와 쥰이 유년시절 곧잘 떠들곤 하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히카리에게는 그다지 소소한 내용으로 와 닿지 않았다. 쥰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지 너무나도 오래됐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진로가 바뀐 탓일까? 아니, 골은 그 전부터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무언가 말이다. 그런 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어쩌면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방금 쥰이 떠나기 전. 가지 않고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어, 라고 히카리가 말했더라면 될 일이다. 혹은 자주 연락하자, 라고 쥰이 말을 남기기만 했더라도.

편지지에는 안녕, 히카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 말에 왜 이리도 생소할까? 쥰이 소리를 내어 히카리를 이름을 부른 것은 굉장히 오랜 옛날처럼 느껴졌다. 쥰은 편지지에 유독 그 글자를 꾹꾹 눌러 썼더랬다. 안녕, 히카리. 히카리, 히카리라며.

히카리는 편지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쥰이 떠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칸토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느새 눈이 수북하게 쌓여, 누구의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2014.9.20

2015. 2. 1차 수정

음..진단메이커를 돌려서 나온 걸로 쓴 건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네요.(;)





:
Posted by 새벽(dawn)
2015. 1. 31. 01:45

[포켓몬/시로히카] 쉬는 시간 글/포켓몬2015. 1. 31. 01:45

2012.6.10

시로히카 학교 AU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히카리는 교무실로 향했다. 품 안에는 교과서와 자습서를 들려 있었다.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창가와 벽을 낀 외진 자리. 그곳이 역사 담당 시로나의 자리였다. 히카리는 조심스럽게 선생님을 불렀다. 그러자 시로나는 바로 그녀를 알아보고는 옆으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저, 선생님. 질문이 있어서요.."

"그래그래. 히카리는 언제나 열심이구나."

 

선생님의 칭찬에 머쓱한지, 히카리는 대답도 않고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이 책 저 책의 페이지를 넘겨가다, 어떤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히카리는 이 부분의 교과서 설명과 자습서의 설명이 조금 괴리감이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시로나는 말없이 책을 응시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모의고사나 내신과는 일체 관계 없는 부분이었다. 시로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으응. 그래 이건 말이지.."

 

시로나는 상당히 능력있는 역사 선생님이었다. 대학교 시절에도 성적이 우수해 조기졸업을 하고, 어린 나이에 역사나 교육 관련 서적들의 집필에 여러번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교과서의 아무리 소소한 내용일지라도, 학생들에게 자세하고 깊게 설명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한 히카리는 답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소녀의 시선은, 물 흐르듯 자신의 지식을 토해내는 선생님의 모습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투, 입술 모양, 움직이는 손 끝, 부드러운 금색 머리칼, 그녀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소녀를 사로잡았다. 히카리는 우등생이었다. 공부는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들고 그 중에서도 역사 과목은 항상 거의 만점을 받다시피 했다. 히카리는 수업에 열중하는 눈빛만으로도,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선생님들에게 품게 해 주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리고 난해한 문제도 스스로 풀어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배우는 유형이어서, 선생님들에게 질문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게다가 시로나는 언제나 수업이 끝나기 5분 전 쯤, 질문할 시간을 주곤 했다. 하지만 히카리는 그 시간을 이용하지 않고, 언제나 쉬는 시간에 쪼르르 달려와서는 시로나의 책상에 서있곤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미미한 문제들,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들을 잔뜩 껴안고서.

 

"-라는 거란다. 이해했니, 히카리?"

 

시로나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히카리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소녀는 네, 네 하며 대답하기는 했다. 그러나 선생님한테 푹 빠져있던 탓에 말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 가 볼게요 선생님, 이라는 말도 못하고 히카리는 멋쩍게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쉬는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선생님과 같이 있고 싶었다. 선생님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히카리는 머쓱해져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사실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소녀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동경? 존경? 공경? 혹은... 어린 히카리는 그 이상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느끼는 그런 보통의 느낌이 아니란 것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멀뚱히 서 있는 제자를 보고, 시로나는 또 한번 웃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왜 여기에 계속 서 있는지도 모르겠지.' 나이차가 심하게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로나는 어른이었다. 질문거리를 만들어서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에게 찾아 오고, 정답은 귀 기울여 듣지도 않는다. 한참을 자신을 붉어진 얼굴로 빤히 쳐다보더니, 가야할 때가 되니 아쉬워서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런 아이의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히카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로나는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곧 있으면 수업 시작할테니 같이 교실로 가볼까. 나는 다음 수업이 9반이니까 너희반은 가는 길이거든."

"앗, 네.. 네 선생님!"

 

 그 말에 금새 얼굴이 밝아져서는. 제자는 선생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아아, 내 제자는 참 순진하기도 하구나. 그러면 다 알 수 밖에 없잖아.

 

:
Posted by 새벽(dawn)

제목이 아니라..정말로 이런 꿈을 꿨습니다.

날짜는 2012.10.31



 

리본 5개를 다 모으고, 그랜드 페스티벌 무대에 섰을 때, 히카리는 모든 것이 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초보 트레이너에 불과했지만- 이젠 아니다. 일류 코디네이터를 꿈꾸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 그 중에서  리본 5개를 모아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사람들은 고작 몇백명. 그 안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무리없이 리본을 따 낸 것처럼 그랜드 페스티벌도 순조롭게 이겨나가, 어쩌면 우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선 심사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진.

 

대기실에서부터 미친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랜드 페스티벌은 일개 마을이나 도시에서 열리는 콘테스트의 예선과는 차원이 달랐다. 톱 코디네이터와 코디네이터 협회의 엘리트들이 심사석에 앉아 있고, 수천의 관중이 자신의 연기를 지켜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감춰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기차게 흘러내렸고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됐다. 거울 속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을 추스르는 데 시간을 쏟은 탓일까- 히카리는 정작 자신이 쥐고 있는 몬스터볼은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테이지에 올라가고 나서야, 자신이 다른 몬스터볼을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블 퍼포먼스에 원래 쓰려고 했던 포켓몬은 폿차마와 미미롭. 하지만 자신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성질이 전혀 다른 크로뱃과 마네네였다. 히카리는 식겁했다.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실수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깨닫자 손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극도로 당황한 탓에, 연기 시작의 신호가 울려도 목석처럼 서 있을 뿐, 몬스터볼을 던지지 못했다. 수천 관중의 눈들이 둥둥 떠다니며 자신을 차갑게 내려보는 것 같았다. 정작 자신의 두눈은 어디에 둘 지를 모른채, 그녀는 눈을 꾹 감고 무작정 볼을 던졌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크로뱃과 마네네로는 단 한번도 연기를 맞춰본 적 없었다. 순간의 기지로 위기를 돌파할 만큼의 정신적 여력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몇가지 기술을 외쳤던 것 같지만 사실 무얼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크로뱃과 마네네는 역시 자신들의 예상치 못한 등장과 트레이너의 당황에 어쩔 줄 몰라했다. 힘없는 기술들이 볼품없게 스테이지 위를 떠돌았고, 소녀 코디네이터는 자신의 몸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타임 오프. 그리고 싸늘한 정적. 관중들은 박수하나 보내지 않았다. 심사석에서도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 심사평을 해 주시죠.. 어색하게 사회자가 말을 했다. 그러자 가운데에 앉아있는 현직 코디네이터가 무덤덤하게, 하지만 매섭게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지금 여기에 뭐하자고 올라온 거죠?]

 

히카리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연한 탈락에 망연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생각하기도 버거웠다.

결국 "자신의 실책이다. 해이한 정신상태 때문이다. 나사가 하나 쯤 빠졌었나 보다."라고 결론 내렸지만-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변명도 할 수 없는 범위의 실수. 초보 트레이너라도 몬스터볼을 잘못 고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도대체 자신 안에 무엇이 일어나서 이런 한심한 일을 저지른 걸까?

자책을 머금은 한숨과 함께, 대회장을 등지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후타바 타운으로 들어설 때 쯤에야 그녀의 몽롱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작은 마을의 한적한 풍경을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은 그런 큰 무대에 설 그릇이 아니었단 것을.

 

집에 가자 어머니는 말없이 딸을 맞아주었다. 다정하게 등을 몇 번 두드려주고는, "괜찮다."고 다독였다. 하지만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익숙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 앉아, 그녀는 스스로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했다고 해서 일류 코디네이터가 될 거라는 것은 단순한 오산이었다.

매년 그랜드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수백명의 선수들 중에 이름을 알릴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내는 사람들은 고작 서너명.

때로는 우승, 준우승을 해도 그 이후 행보에 따라 콘테스트 계에서 이름이 묻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엄청난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톱 코디네이터가 되어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라는 꿈은 작은 마을의 소녀에게 있어선 과분했던 야망이었다. 어릴 적부터 훈련과 레슨을 받으며 자란 엘리트들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무대에 오른다는 것만으로 벌벌 떨 정도로 긴장하는 시골 소녀에게 어울리는 일일까.

히카리는 따뜻한 솜이불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10살 짜리 시골 마을 소녀가 여행을 떠난 지 몇개월 만에 리본을 다 모으고 그랜드 페스티벌을 제패한다.

그래, 자신이 그런 전설이 될 리는 없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건 이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 작은 세상에서 포켓몬이랑 오손도손, 평범하게 사는 게 어울린다. 일류 트레이너, 톱 코디네이터는 먼 세상이 일이 되고.. 언젠가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작고 귀엽지만 별 개성은 없는 아이를 키우며 소박하게 살지도 모른다. 그래,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미래이자 현실. 포켓몬과 함께한 여행도 한 때 품었던 포부도 어린 날의 치기이자 한 순간의 소망으로 전락해버리는,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
Posted by 새벽(dawn)
2015. 1. 31. 01:42

[포켓몬/시로히카] Happy New Year! 글/포켓몬2015. 1. 31. 01:42

2012.12.26


"시로나씨. 왜 그렇게 죽상이에요?"

 

12월 29일. 하얀 눈이 내리는 저녁. 시로나와 히카리는 따뜻한 방에서 추운 창가를 등지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일년의 마지막 날. 히카리가 직접 만든 만찬에, 보기만 해도 달콤한 티라미슈 케이크까지- 평소의 시로나라면 입꼬리가 귀끝에 걸릴 정도로 기뻐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투정 부리는 어린 아이처럼 밥상머리에서 수저만 산만하게 식탁에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그치만. 오늘, 거의 다 가 버렸잖아."

 

시로나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오후 11시30분. 새해가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네요. 정말 한 해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문제야!"

 

히카리의 말에 대뜸 시로나가 소리쳤다. 뜬금없는 시로나의 화제 전환에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히카리는 별로 놀란 기색 없이 멀뚱 시로나를 응시했다. 시로나는 찰랑거리는 금발을 한손으로 넘기며 열변을 토했다.

 

"이거 봐. 또 눈 깜짝할 새에 한 해가 가버렸다고! 정말이지 요새는 세월이 어떻게 가는 지 모르겠다니까? 이렇게 한살, 두살 쉼없이 먹다 보면.."

 

'곧 있으면 서른이겠지'라는 말은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아아, 시로나, 분명 그녀도 한 때는 불타는 10대였다- 히카리를 처음 만날 적만 해도 분명히 십대였다. (좀 애매하긴 하지만..) 하지만 챔피언으로서의 직무 수행에 사랑스러운 소녀와의 연애사업이 더해져서 그런지, 정말이지 시간은 말 그대로 총알처럼 지나가 버렸다. 야속한 세월같으니!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요즘은 왠지 피부도 퍼석한 거 같고... 눈가랑 입가에 주름도 생기는 거 같고.."
"무슨 소리에요, 시로나 씨. 제가 보기엔 몇 년 전이랑 전혀 다를 게 없는 걸요!"
"그럼 내가 몇 년전에는 늙어보였단 얘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고, 시로나는 식탁 위에 엎드렸다. 엉엉, 울어버리고 싶어. 히카리보다 훨씬 연상인데도 이럴 때보면 시로나가 더 어린애 같다. 히카리는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시로나의 등을 다독였다. 그러자 시로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댔다.

 

"..히카리는 점점 더 예뻐지는데.."
"무슨 말이에요, 대체."

 

그렇게 예쁜 얼굴로 다그쳐봤자 소용이 없어, 히카리. 시로나는 마음속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그렇다. 확실히 히카리는 해가 갈수록 예뻐지고 있었다. 아니, 물론 원래도 예뻤지만. 요지는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다는 것이다. 그녀는 시로나와 처음 만났던 10살 무렵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랑스러움을 자랑했다. 동그란 눈에 백옥 같은 피부, 길고 빨간 머플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탈 적에는 길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더랜다. 원판 불변의 법칙을 넘어선 원판 랭업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히카리는 성장할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던 것이다. 키도 한뼘 두뼘 자라고, 팔다리도 길어졌다. 동글동글했던 얼굴에는 윤곽이 더해져 청순함을 자아냈다. 플러스 청남색 긴 생머리에 다정한 미소까지- 과장이 아니라 정말 신오우에서 손꼽는 미인이 된 것이다. (물론 신오우에서 손꼽는 포켓몬 트레이너이기도 하다) 길거리를 다니면 사인을 부탁 받기도 하고, 공식석상에 나타날 때면 플랜카드를 들고 나타나는 팬 무리들도 있으니, 그야말로 신오우의 아이돌이라 할 수 있겠다.

 

"난..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네. 너에 비하면."
"시로나씨가 진짜로 주름이 자글자글 생긴대도 난 상관없어요. 시로나씨는 시로나씨인걸요."

히카리의 말에 시로나는 벌떡 일어났다.

"저, 정말..?"
"물론이죠."

 

그녀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모른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는 언제나 올곧다. 시로나는 가슴 한켠에서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시로나씨는요, 언제나 저에겐 빛같은 사람이었어요."
"치, 거짓말."
"아니에요! 시로나씨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예뻐서 반짝반짝 눈이 부셨단 말에요."

 

듣는 시로나가 남사스러운 발언이었다. 이 아이는 어쩜 이리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는 거지...라고 시로나는 생각했다.

 

"시로나씨는 예쁘기도 했지만, 음, 그 뭐랄까.. 분위기가 있었어요."
"분위기?"
"시로나씨만의 분위기요.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맞아요, 시로나씨의 밀로틱처럼. 겉보기엔 정말 유연하고 예쁘지만 배틀 하면 엄청 강하잖아요."
"음.. 뭔지 잘 모르겠어."
"여튼 그런 게 있어요. 저는 한눈에 딱 알아봤어요. 시로나씨가 굉장히 멋진 사람이라는 걸."

 

시로나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녀의 불만스럽던 심정은 열심히 설명하는 히카리의 모습을 보며 누그러진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이런 저런 손짓까지 해가며 자신을 위해 말하는 히카리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 그럼 히카리는 날 보고 첫눈에 반한 거구나."
"네?!"
"그렇잖니. 네가 지금 말하는 건."

 

급작스런 말에 히카리는 진땀을 흘렸다. 자신은 그저 기운이 없는 시로나에게 뭔가 좋은 말을 해주려던 것이었는데... 스스로 내뱉은 말을 되짚어보니 어째 그런 구석도 좀 있지 싶다. 아차, 하고 느끼는 순간 히카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헤헤, 얼굴 빨개졌다."
"아..아니에요.."
"아니긴- 귀여워 죽겠네!"

 

하며 히카리를 힘껏 부둥켜 안았다. 히카리는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시로나의 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 진짜 늙어서 할머니가 되더라도 넌 못 놔줘. 네가 먼저 나한테 반한 거니까, 뒷말하기 없기야."
"무..무슨 소리에요 시로나씨... 그리고 숨 막혀요.."

 

시로나는 힐끔 시계를 다시 보았다. 11시 58분. 티비에서는 아마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겠지. 그럼 난 그 때까지 히카리를 꼭 안고 있어야겠다- 시로나는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해졌다.

 

"해피 뉴이어, 히카리짱."
"... 시로나씨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부끄러운 듯 히카리가 말했다. 그래, 한두살 더 먹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귀여운 그녀가 곁에 있는데. 
시로나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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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3


진단메이커: 아카히카로 "새로운 시작을 할거야 하지만 거기에 너는 없어." 우울한 분위기로 연성↓






연락을 받고 히카리는 조금 들떠있었다그쪽에서 그녀를 먼저 호출한 것은 처음이었다재빠르게 머리를 곱게 빗고새하얀 블라우스에 단정하게 가디건을 걸친 뒤 전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보았다이내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그녀는 집을 나섰다.


오늘 히카리는 상당히 붕 떠 있었다아침부터 그가 전화를 걸어 낮은 목소리로 히카리라고 자신을 부르는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한손에 든 연분홍색 토드백을 리드미컬하게 흔들며 그녀는 약속한 까페로 들어섰다.


처음에 히카리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는 항상 가장 어둔 자리보통 사방이 벽이나 화분으로 둘러싸인 자리에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 있곤 했다음지가 마치 자신의 태생적인 영역인 마냥자신 없이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곤 했다그래서 까페에 들어섰을 때에도 히카리는 자동적으로 구석자리부터 눈여겨보았다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았다약속한 장소가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데가게 중앙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손을 들어보였다아카기였다.


히카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훑어봤다그는 까페 정중앙에 앉아있었다가장 둥글고 매끈한 원목 탁자에유영하듯 몸을 의자에 늘어뜨리고 자연스레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얼떨떨해진 히카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그를 보았다단 한 번도 아카기는 히카리를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아카기가 맞았다.


히카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새하얀 조명이 쏟아지는 까페 정중앙 자리가 불편했다아카기와는 늘 남들이 보지 않으며 머리가 맞닿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서별 거 아닌 신변잡기들을 비밀 얘기하듯 쏟아내곤 했다그런 밀애와 같은 사랑 방식이 그들에게는 알맞았다그랬다고 히카리는 줄곧 여기고 있었다그러나 여유로운 얼굴로 커피 잔을 쥐고 있는 아카기를 보며 마뜩치 않은 것도 감내하기로 했다그녀는 그 순간부터 불안함을 감지한 것인지도 모른다.


히카리는 아카기가 낯설게 느껴졌다몇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만나왔던 그인데도처음 보는 사내인양 어색하고 두려웠다그의 새하얀 와이셔츠가 조명에 눈이 부신 탓일 수도아니면 반듯하게 다린 옷깃이 그녀를 찌를 듯이 날이 선 탓일 수도 있다아니면 더 이상 그녀에게로 다가오지 않고 의자에 깊숙이 기댄 그의 커다란 상체 탓일 수도 있다히카리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어쩐지 예전보다 눈망울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쳤다그러나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춥지 않아?”


그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히카리는 그제야 자신이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겨울이 완전히 가시질 않아 아직 날이 쌀쌀하고 바람이 찼다그러나 몸매를 두툼하고 밉게 보이게 만드는 따뜻한 옷들을 옷장에서 치워내고 산뜻한 복장을 골라 입으니 저절로 얇은 옷차림이 되었다아키기의 물음을 귀로 들은 이후에야 그녀는 어깨가 조금 시리다는 걸 느꼈다그러나 입으로는 괜찮아.”라고 짧게 답했다춥다고 물었지만 그는 차가워진 그녀의 어깨나 다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대답 대신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할 말이란 게 뭐야?”


집에서 나와 까페로 오면서히카리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오랜 세월 교제해온 남녀가 최종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그런 결말이 어쩌면’ 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다아카기의 야망을 저지한 건 다름 아닌 히카리였지만나락으로 떨어지려던 아카기를 구한 것도 히카리였다히카리는 아카기에게 마지막을 주었지만 동시에 시작을 선물한 셈이었다그 뒤 두 사람은 수 년 동안 가족보다도 친우보다도 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이윽고엉키고 허물어진 인연에 다리를 놓아 건너갈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고 여기게 되었다적어도 히카리는 그랬다그리고 함께한 세월이 그 다리를 튼튼하게 다져줬다고 믿었다그래서 그녀는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그가 손 안에 작은 보석 상자라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고.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그를 발견한 다음부터 그의 손 안을 살펴보았다그러나 그의 두 손은 비어있었다가방도 없었으며 주머니가 볼록하지도 않았다그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아카기의 전신은 자유롭게 비어있었다.



아카기가 말을 시작했다그의 목소리는 떨림 없는 유연한 선율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할 거다.”


그런 그의 앞에서 히카리는 좋은생각이네.”하고 띄엄띄엄맥없는 박자가 실린 몇 마디만 내뱉었다.


어디에서든 상관은 없다잇슈든호우엔이든칸토든아니면 칼로스도 괜찮겠지이 곳 신오우만 아니라면 어디든 괜찮다.”


그의 전신은 오랜 세월 꽃을 피우지 못하다가 이른 봄에 마침내 어린 싹을 틔워낸 거목처럼 단단하고 움츠러들지 않았다반면 히카리는 한철이 지나면 시드는 꽃 마냥 고개를 숙이고 그를 바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건데?”하고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만 입가에서 아른거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대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는 택시기사가 될 수도 있고작은 마을에서 포켓몬과 지내는 키우미집 주인이 될 수도 있고배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선원이 될 수도 있겠지긴가단과 전설의 포켓몬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내는 파도와 같이 거침이 없었다히카리는 쭈뼛 어깨를 움츠리다가 말했다. “나는 좋아.”라고. “어디를 가건무슨 일을 하건아카기와 갈 수 있다면.”하고 주눅이 든 목소리로 용기를 쥐어짜 말했다.

아카기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생기가 넘치는 두 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그 두 눈을 보자마자 히카리는 비어있던 그의 두 손을 생각했다나무처럼 건조하고 메마르지만 커다란 두 손.


새로운 시작을 할 거다하지만거기에 너는 없어.”


그는 그런 두 손으로 히카리를 잡아주지 않았다외로운 처지를 한탄하고세월을 사념할 때마다 소녀는 사내의 두 손을 곱게 따뜻하게 감싸주곤 했다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단 한 번도 손을 잡아준 적이 없었다마지막까지도 잡아주지 않는다처음부터 그 누구와도 닿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그는 두 손을 고이 탁자 아래 모아 쥐고 있다.


네가 없어야만 내가 시작할 수 있다히카리.”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히카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어째서 자신을 부른 이 목소리가자신을 찾는 것이 아님을 진작 알지 못했을까눈물은 메마른 대지를 적시려는 듯 우수수 흘러내렸다그러나 어느 땅에도 어느 나무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나는” 히카리가 무어라 말을 하려했다. “나는.”


나는 과거를 떨쳐내고 새로운 시작을 할 것이다그동안 함께 해 준 것에 고맙다는 인사는 않을 테니 울지 마라과거를 떨쳐내야 시작할 수 있어너는 그 과거의 일부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설명도 구태여 필요 않다는 듯자리에서 일어났다히카리는 탁자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울고 있었다탁자가 너무 매끄럽고 둥글어서 온 몸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그러나 아카기는 개의치 않고 뒤돌아나갔다히카리의 입가에서 무언가 말이 자꾸 맴돌았다. “나는”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했다. “나는.”


그럼 이만 가보겠다.”


아카기는 자리를 떴다미련 없는 발자국 소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선명하게 귓가에 울렸다그는 마지막 말은 들어주지 않았다그녀에게 줄 것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하지만 히카리는 주고 싶은 게 있었다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그러나 늘 그의 곁에서 말하고 웃고 떠들었던 그녀를 과거라고 칭하는 사내에게 그 말을 들려줄 수가 없었다.

물을 잔뜩 먹어 무겁고 축축해진 스펀지처럼히카리는 온 몸을 지탱하기 버거웠다아니사실 이미 말했다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하게또박또박 말했다.그와 함께 가고 싶다고어디로든 가고 싶다고이미 말했다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떠났다히카리는 이제 더 이상 어쩌면이라는 말도, ‘히카리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바랄 수가 없었다그의 입술 자국이 남은 커피 잔에서 따뜻한 김이 짙은 커피향과 함께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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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






있잖아, 난 네가 좋아.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내 눈앞에 나타난 그 사람. 부드러운 연녹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를 들려줄래?]

 

 

그렇게 말하는, 네 목소리가 좋았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관람차에서 내리고 난 뒤부터 그렇다. 고소공포증따위는 없는데. 놀이동산에서 제일 아찔한 롤러코스터도 아무렇지 않게 타는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고작 관람차를 탄 건데도 머리가 아프다. 

 

천천히 도는 관람차.

 

함께 관람차를 타자고 했을 때, 무척이나 기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였기에 더욱 많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들려줘. 터무니없는 첫만남이었다. 더군다나, 애석하게도 그건 자신이 아닌 포켓몬에 대한 관심이었다.

조금쯤은, 나에게도 관심이 생긴 걸까. 포켓몬이 아닌 자신을 봐줬으면 했다. 그의 앞에 서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재로서, 그 안에 각인되고 싶었다.

 

 

조급하게 떨리는 심장을 안고, 소녀는 관람차에 올라탔다. 휘청대지 말라고 잡아주는 손길이 부끄러웠다. 그는 소녀가 아는 남자 아이의 범주- 그녀의 소꿉친구라던가 짐리더들이라던가- 와 전혀 다른 생물 같았다. 그처럼 하얗고 가녀린 손은 난생 처음 봤다. 게다가 막상 손이 맞닿으니 그의 손은 소녀의 작은 손보다 훨씬 컸다.

 

손을 잠깐 잡았을 뿐인데도 긴장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가까이 앉은 건 처음이다. 눈앞의 그는 아름답다. 눈처럼 하얀 얼굴과 반듯한 눈, 코, 입. 그리고 그 위로 살랑대는 연녹색 머리카락. 자신도 똑같이 포니테일을 하고 있지만 그 쪽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자신의 머리는 푸석푸석하고 색깔도 칙칙한데- 그는 머릿결도 좋고 색도 풀빛 같아 예뻐 보였다.

 

잘 만들어진 인형 같은 사내를 멍하니 응시하면서도 소녀의 심장은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자신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길 바랐다. 이번에는 포켓몬이 아니라… 소녀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해주길 바랐다. 소녀가 보던 영화에서는 관람차라는 건 으레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진솔한 대화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곤 했었다.

 

소녀는 작은 두 손을 꼭 쥐었다. 좁은 공간에 그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떨려왔다.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라는 라이몬시티의 관람차였지만 그녀는 바깥을 바라 볼 겨를 따위 없었다.

 

 

눈앞의 그만으로도 시야는 가득 찼으니까.

 

 

 

 

 

 

 

 

 

-조심스레 청년이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고백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긴장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심장이 바스락댔다. 심장에서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도는 관람차.

 

그의 고백에 심장은 수줍은 두근거림을 멈추고 긴박하게 덜컹대기 시작했다. 소녀는 실제로 관람차가 흔들리는 줄 알았다. 관람차의 밑바닥이 꺼져서 아래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덤덤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눈물조차 고이지 않았다.

 

 

 

 

 

너와 함께라면 관람차를 타고 별까지도 갈 수 있겠어. 라는 실없는 농담까지 준비했다. 여자애로선 그다지 적당하지 않은 농일지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가 말해주지 않으면 자신이 말할 결심이었다. 그렇지만 관람차는 별을 향하지 못하고 그냥 땅으로 돌아왔다.

칙칙한 대지를 밟았다. 뒤돌아선 그의 등. 가늘지만 굵직한 결심이 담긴 그림자.

 

 

[나는 챔피언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막고 싶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는 소리쳤다. 차오르는 울음을 어떻게 눌러 담았는지는 모른다. 하고 싶었던 말 대신,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한다.

 

 

[그럼 나는 더 강해질 거야.]

 

 

네가 챔피언보다 강해진다면, 나는 너보다 강해질 거야. 그래서 널 막을 거야. 물기가 어린 눈으로 외쳤다. 그게 나의 결심이야! N. 널 막고 플라즈마단을 막겠어.

 

그러자 그는 엷게 웃었다. 그게 너의 결심이구나. 그럼 앞으로의 행방은 결정되었군. 마지막까지 다정한 말투. 아까 잡았던 하얀 손으로 안녕의 손짓을 한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마침내 소녀는 울음이 터졌다.

 

 

-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마냥 어린아이처럼 훌쩍대며 바닥에 눈물을 뿌린다. 그에게 던지고 싶었던 수많은 질타와 의문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 다정하게 하지 말지 그랬어. 소녀는 아까 잡았던 하얀 손을 생각했다. 예쁘고 하얀 손. 하지만 온기가 없는 손. 너무 차가워서 흠칫할 뻔한 건 그에게 비밀로 하기로 몰래 결정했었다.

 

천천히 도는 관람차.

 

 

소녀는 바랐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정체 불명의 청년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그도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드라마처럼 로맨틱하게 공중의 관람차에서….

 

하지만 그것이 앳된 소녀의 헛된 망상이라는 걸, 수초만에 깨달았다. 기대가 무너지자 악에 받쳐 자신이 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소녀는 알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야만 했다는 것도 알았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만 하는 말. 어떤 것은 토해내고 싶은데도 눌러담아야 하고 어떤 것은 하고 싶지 않은데 내뱉어야 한다.

 

 

 

있잖아, 나는 너와 함께라면 관람차를 타고 별까지도 갈 수 있겠어.

 


2012.8.6 작성
2015. 2. 약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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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