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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30. 13:27

[레알세/월로윤슬] 파란 글/포켓몬2023. 1. 30. 13:27

 

 

 

 

 

 파란 (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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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슬픔 속에 잠긴 그대여.

 

#

 

언제부터인가 나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사실, ‘언제라는 말부터 불완전하다. 태생부터 완벽을 몰랐다. 더구나 다정하고 솔직한 당신 옆에 설 때면, 불온함이 가시질 않았다. 더러 누군가가 보기에, 당신은 심성이 제멋대로인 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누구나 알게 된다, 그 곁에 몇 분이라도 머물러 보면.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올곧으며, 수더분한 언행은 슬픔을 위장하기 위함이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된다. 모르더라도 알아야 한다. 슬픔 속에 머무는 그림자는 영영 깨닫지 못할, 밤하늘 너머에서 쏟아지는 별무더기의 바람들. 영원히 그런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살고 싶었다. 은하 보다 빛나는 존재에 눈이 멀어 세상을 되짚지 못하는 채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푸른 심해를 유영하는 거대한 그림자는 햇살을 받으러 나올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저 한 길만 향해 묵묵히 노를 젓는다. 다음에 만나면, 못했던 그 말을 해야지. 마음 한 구석에 내동댕이 쳐진 묵은 결심은 해가 지나도 썩지 않고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리고만 있을까? 아무도 나에게, 기다리라 한 적 없고 인내하라 한 일이 없다. 파도를 헤치는 새까만 그림자는 햇살이 비치는 풍광을 몰랐다. 수많은 물고기 떼와 해초, 해류를 타고 흘러오는 낯선 이의 속삭임만 들릴 뿐이었다.

 

나를 기다려 줬으면 했다.

어디에 있어도 슬픔에 젖지 않도록 나를 기다려 줬으면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줄 거라고 믿었다.

 

 

##

 

그리고 거짓말처럼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 소녀는 죽었어요.”

 

반 년 만에 찾은 축복마을에서 들은 첫마디. 더이상 은행상회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월로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녹색 모자를 억지로 짓이겨 눌렀다.

 

죽었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이야기네요. 후우그 어린 아이가, 그런 고생을 했는데 너무나 허무하게….”

 

월로는 축복마을에 오랜만에 들러, 그 사이 새로 상긴 가게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고르다 주인장에게 물었다. 반 년 전 히스이를 구한 소녀는 여전히 은하단에 있느냐고. 그러자 돌아온 답이었다.

 

벼랑에서 떨어졌어요. 워글을 부릴 수 있다 들었는데, 왜 타지 않았는지….”

“…….”

그 아이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뤘죠. 이방인이지만, 히스이의 은인이니까. 그 쪽도 아이에게 빚이 있는 건가요?”

 

히스의 모두가 소녀에게 빚을 진 이였다. 월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농장 너머 언덕 위에 무덤이 있어요. 술이라도…. 아니, 아이니까, 꽃이라도바치면 기뻐하겠죠.”

 

그리고 주인장은 먼 곳을 응시한다. 술을 모르는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소녀. 시작은 이방인이었지만, 결국엔 누구보다 히스이에서 덕을 많이 쌓고, 천진하고 용감한 성품 덕에 소중한 인연을 쌓아 올린 아이.

 

월로는 두통이 이는 걸 느꼈다. 값은…. 그 사이에 히스이 물가가 조금 올랐다. 가게가 한 두 군데 더 생겼다. 사진관에는 월로와 토게피가 아닌 처음 보는 금강단원과 독케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가게를 나설 때, 주인장이 조금 서글픈 눈으로 재차 성묘를 당부했다.

 

#

 

언덕 위에는 정말로 무덤이 있었다. 회색 돌을 정갈하게 깎은 작은 비석에 소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몇 년도에 태어나고, 몇 년도에 사망했는지. 그렇지만 사실 그녀는 그 날짜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난 날짜 만이 정확했다. 조촐한 들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월로는 무표정하게, 꽃가게에서 사 온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는다. 소녀가 묻혀 있다기엔, 터가 너무 좁은 것 같다. 물론 소녀는 월로 보다 한참은 자그마했지만. 또래 중에서도 몸집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조그마한 땅에 들어가기엔, 그녀가 좀 더….

 

당신이 왜 여기에?”

 

익숙한 목소리가 뒷머리를 잡는다. 동그란 눈을 잔뜩 흘겨 뜨고 있는 소년이 어느새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분명, 소녀와 같은 은하단원이었다.

 

“…제가 여기에 오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온화하게 반겨주는 기색이 아니기에, 월로도 날 선 말투로 받아 친다. 소년은 화가 잔뜩 오른 얼굴이다.

 

아주 많죠.”

 

그는 품 안에 토란떡과 노란 국화를 한아름 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소녀와 소년과 박사가 노을이 지는 날 다 같이 토란떡을 먹으며 잔뜩 웃거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걸 자주 봤었다. 저녁마다 은행상회에 앉아있으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었다.

 

“…죽은 지도 몰랐던 주제에.”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소년은 터벅터벅 걸어와 무덤 앞에 토란떡과 노란 국화를 흐트러지지 않게 올려 놓는다. 그리고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인상을 쓴다.

 

그거 알아요? 그 애는….”

“…….”

개나리색을 좋아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그 애의 머리핀도 개나리색이었다. 하얀 국화 한송이가 노란 국화 한다발에 밀려 잔디 위로 떨어졌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군요, 당신은.”

저는….”

말하지 마시죠. 정말 화를 낼 거 같으니까.”

 

그리고 소년은 소녀의 무덤 앞에서, 한참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기도하는 손에 얼굴이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흐느끼는 것 같았다. 월로는 덩그러니 서서 그저 지켜봤다. 그는 기도를 올릴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월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지난 반 년간, 때때로 소녀를 떠올렸으나 축복마을에 돌아간 적도 편지를 부친 적도 없었다.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백은이나 은행상회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 소식 정도는 묻는 게 나았을까? 그치만 월로는 그들과도 그 정도로 막역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마을에 잠시 들러, 멀리서 안부라도 확인 했어야 했을까. 그치만 월로는 단 한 번도 소녀의 안녕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녀는 아르세우스에게 인정 받을 정도로 포켓몬과 친숙했고, 포켓몬 술사보다 포켓몬을 더 잘 다뤘고, 결국 그를 이겨냈고, 아르세우스가 부탁한대로 히스이의 모든 땅을 밟고 모든 포켓몬과 만났기에…. 어쩌면 월로는 그녀가 수 개월이고 수 년이고 그를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나 웃고 있었고, 상냥하고 용기가 넘쳤으며, 그 숱한 사건이 있음에도 월로를 힐난하지 않았기에….

 

그러면, 그러면…. ! 소년이 두 손을 강하게 맞부딪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대로 떠나려는 소년에게 월로가 말을 건넨다.

 

“…그녀가 남긴 말은?”

…….”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있을 리가 없잖아요. 즉사였다고요.”

장례는….”

잘 치뤘어요. 금경님이 상주였고, 우리 전부 다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잔뜩 와서많이들 슬퍼했어요.”

 

우리안에 월로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가 없어도, 소녀는 편안히 이승을 떠났을 것이다. 월로는 목까지 채운 녹색 외투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은하단 건물 안에, 그 애의 사진을 걸어 뒀어요. 그 애는 히스이의 영웅이니까. 걔처럼 뛰어난 은하단원은 앞으로도 없겠죠. 십 년 뒤에도 이십 년 뒤에도, 모든 은하단원들이 그 애를 기억할 거에요.”

 

기도를 올렸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눈물 자국이 선연하다.

 

그런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 애는 이제….”

 

소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월로는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개나리색…. 그래, 당신은 개나리색을 좋아했구나. 사진도 은하단에 남아 있었구나. 그 밖에는 어떤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더이상 알 방도가 없었다.

 

 

 

 

#

 

은하단 건물에 숨어든 건 그날 밤의 일이다. 물론 계획된 침입은 아니었다. 월로는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 플레이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본질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아르세우스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역할이 다해서 신의 버림을 받았나? 혹은 그녀가 임무를 완수해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었나? 월로는 정답을 알고 싶었다.

 

경비는 의외로 허술했다. 은하단의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건지, 손쉽게 창문의 걸쇠를 따고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소녀의 사진은 박사가 머물던 방에 걸려 있었다. 언제적 찍은 건지, 태연하게 마그케인을 끌어 안고 웃고 있었다.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천연한 미소였다. 월로는 고개를 돌렸다.

 

월로는 플레이트의 중요성을 상기하며, 조사대 대장의 책상을 뒤졌다. 책상 서랍 하나에만 열쇠 구멍이 달려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구비해 온 철사를 이용해 서랍을 열었다. 어린 시절 이곳 저곳을 구르며 배운 기술이 쓸모는 제법 있었다. 서랍 안에는, 놀랍지도 않게, 플레이트가 차곡이 쌓여 있었다. 마치 읽지 않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둔 것처럼. 너무 손쉽고 빠르게 월로는 플레이트 전부 차지할 수 있었다. 기쁨의 미소는 흐르지 않았다.

 

 

#

천관산에 올랐다. 며칠 만인 것 같기도 하고, 몇 백 년 만의 등산인 것 같기도 했다. 플레이트는 제법 무게가 나갔지만, 월로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았다. 월로는 새삼 그 많은 짐을 지고 산을 타고 하늘을 날았던 소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은 체구에 제법 완력이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대담하고 용감했다. 그녀는 모험가나 영웅이 지녀야 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자질을 전부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문득 은하단 소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 애는 이제….

 

정상에 도착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월로는 서랍에서 꺼낸 모습 그대로, 플레이트를 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정적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아르세우스. 속으로 불렀다. 숱한 세월 동안, 아무리 마음 속으로 되뇌어도 답이 없던 창조주가 반응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벌떡 솟대처럼 일어났다.

 

아르세우스.”

 

목소리가 작다. 더 크게- 고함을 지른다.

 

아르세우스!”

 

메아리가 친다. 땅바닥에 부딪힌 그의 외침이 되돌아 온다. 떠도는 목소리와 함께, 잠잠한 천관산 너머 우물진 그림자가 찬찬히 지하에서 떠오른다. 거대한 고래 같던 그림자가 모이고 흩어지며, 오밀조밀한 동그라미가 퍼졌다 다가오기를 반복한다. 가까워질수록 월로는 알 수 있었다. 비록 검은 그늘에 불과하지만, 아르세우스의 형체라는 것을.

 

아르세우스! 어째서…. 어째서.”

 

그림자가 이내 월로의 발 밑까지 가까워졌다. 그는 세차게 숨을 참았다 뱉는다.

 

어째서 그녀가 죽은 겁니까? 그녀는 당신의 사도가 아니었습니까?”

 

감감한 그림자가 잠잠히 떠돈다. 이윽고 익숙하지만 무거운 음성이 그의 머리를 관통하듯 두들긴다.

 

[너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녀가 없는 세상이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그러고보니, 이 천관산 꼭대기에서 그녀와 마지막 결전을 펼칠 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소녀는 없다고…. 월로는 까마득해졌다. 사실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 소원을 빌었다고? 자신이?

 

내 소원은더이상 그런 게 아니야….”

 

고개를 떨구고, 낯빛에 절망이 감돈다. 갑자기 믿을 수 없어졌다. 아르세우스도, 자신도. 도대체 어떤 낙원을 소망하고, 어떤 기도를 이뤄줬다는 말인가? 아르세우스는 단 한 번도 월로에게 응답한 적이 없는데.

 

이윽고 검은 그림자가 담담히 덧붙인다. 방금 전은 질 나쁜 농이었다는 듯이.

 

[다시 말하지. 이건 오만한 인간에 대한 벌이다. 선한 영웅을 배척하였으니 히스이의 인간들은 그녀를 잃는 벌을 받아야 한다. 너 또한 악한 마음을 품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월로는 신의 사고 방식 따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영웅인 그녀는, 벌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찬란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소녀가 아닌가. 월로는 반문했다. 신은 가볍게 응수한다.

 

[그 아이에겐 벌이 아니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으니.]

 

“…원래의, 세상.”

 

맞다. 월로는 떠올랐다. 본래 그녀는 히스이 출신이 아니다. 어느 날 시공의 균열에서 떨어진 이방인이다. 제법 친밀해진 다음,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자신은 히스이보다 훨씬 발달했고, 포켓몬과 사람이 친구처럼 지내며, 그렇지만 여전히 천관산이 하늘 높이 솟은 곳에서 왔다고…. 분명, 그 지방 이름이.

 

자신의 고향과 같은 이름인 신오…. 히스이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신의 이름. 어째서 이런 간단한 사실도 잊고 마는 걸까? 삽시간에 월로는 아주 먼 세월이 지나면, 그녀 마저도 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다면세월이 지나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 애는 널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걸 깨달아야 한다, 신오인.]

 

월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피가 고인다.

 

그렇다면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100년이 될 지 200년이 될 지 모르는 기다림을 겪겠다고? 그건 아집이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신오인. 너를 애정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삶에 더는 허물이 없어야 한다. 그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것이고, 너는 그 안에 존재하지 못한다.]

 

가장 위대한 신이 고한다. 영원한 이별만이 있을 거라고. 두 번 다시 상냥한 만남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월로는 믿지 않는다. 본디 그는 불경한 신자였기에.

 

---기다릴 수 있어. 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까.

 

 

 

 

#

그림자로 현현한 아르세우스는 더이상 대꾸 없이, 점점이 사라졌다. 어느새 저녁 노을이 아득한 환상처럼 내려 앉았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월로는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던 플레이트를,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 가방에 넣었다.

 

플레이트 사이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편지 봉투였다.

원령플레이트 바닥에 붙어 있었던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월로의 동공이 커진다. 작고 오밀조밀한 글씨.

 

윤슬이 월로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새하얀 편지봉투를 열었다. 한 장 짜리 편지지에 짧은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 언젠가 이 플레이트가 당신에게로 돌아간다면, 그 땐 당신을 막을 수 없겠네요. 어쩌면 저는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걸 원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한번쯤 당신이,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으니까.

 

정말이지 간결한 편지였다. 언젠가? ‘언제라는 말부터 불완전하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고작 플레이트 몇 개를 모으는 일이, 내 많은 생의 전부였지만. 그건 사실 보잘 것 없는 목적이었다. 긴 세월 플레이트를 찾아 헤맸었어도, 모든 일이 끝난 후 가벼이 내 손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라. 목적과 결과는 순식간에 뒤바뀌고 만다. 왜냐면 나는 태생부터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에게 빚을 달아 놓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소원이라는 말부터가 불완전하다. 나는 고작 몇 달 전의 비원도 금새 까먹고 말았다. 처음부터 잘못된 소원을 빌었으니, 그 따위 소망이 이루어진다 하여 행복해질 리 없었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알았어야 한다. 그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어째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의 마음은 모르는가?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말은….

 

월로는 편지를 짓이기듯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천관산을 내려왔다. 어쩐지 내리막길이 오르막길보다 괴롭고 길게 느껴졌다. 하산 도중에 끊임없이, 은하단 건물로 돌아가서 그 사진을 다시 보고 싶어 졌다. 그러나 이내 보고싶지 않아졌다. 그런 건 찰나의 기억일 뿐이다. 사진 속 포켓몬이, 그녀의 품 안에 쏙 들어가는마그케인이던 시절은 불과 몇 주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녀는 언제나 열다섯이다. 월로는 자신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셈을 한 지도 오래얼마나 더 많은 셈을 해야 열다섯이 넘은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월로는 축복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외곽의 산길로 접어 들었다. 정처 없는 발걸음이었다.

 

#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난생처음으로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단 한번도 당신은 뒤쳐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길을 잃은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지도도 전부 잃어버려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걸지도 몰라.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않는게 아니라 찾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방법을 모르는 것으로 해 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구름은 여행을 떠나듯 멀리 흘러갔다.

 

어디선가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못 다한 말을 해야지. 언제나 당신을 만나러 갈 때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말이야. 사실 나는 줄곧, 당신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했을 때에도. 마른 모래가 바람에 날려 희뿌연 먼지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때에도. 고동 속에 파란이 불었어. 가슴에 파문이 일었어. 심지에 불이 켜지지 못한 결심은 냉동된 채로 심장 어딘가에 잠겨져 있어. 그래도. 당신을 다시 만나면못다한 말을 해야지.

 

먼 하늘에 그리움이 고여 짙고 파란 웅덩이로 변했다.

 

더는 당신은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뱉어 버리면

인연은 여행을 떠나듯 파란 속으로 흘러 사라졌다.

 

 

 

---안녕, 슬픔 속에 잠긴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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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벽(dawn)